< 116 대족장이 된다는 건 >
부락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곧바로 부락에서 답하는 함성이 들려왔지만 소리가 작았다. 우리가 떠날 때 얼마 되지 않는 암컷과 아이, 장인만 남아있었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부락인지라 암컷과 아이, 장인의 숫자가 적다. 그러니 환영의 함성이 작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전투 나가 있는 동안 찾아온 형제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바로 부락을 떠나 전투를 하러 간 우리를 뒤쫓아 왔었기에 부락에 남아 있는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부락으로 복귀하는 동안에도 2,000에 가까운 형제가 새로 합류했을 정도다.
그들은 전투가 끝난 걸 알고 엄청나게 아쉬워했지. 당연히 아쉬워해야 한다. 이번 전투는 평생 한 번 할까 말까한 전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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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락카르의 무리
우두머리 : 그락카르
무리 구성원 : 17,641명
전투 기여 포인트 : 23,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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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현황판’을 사용했다. 새로운 글을 읽는 것은 무리지만 내 스킬에 쓰인 글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저 숫자는... 17,641이라는 뜻이군.
적다. 전사의 숫자만 3만이 넘어갔었는데 이젠 암컷과 장인 다 합쳐도 17,641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많은 형제가 죽었다.
하지만 개죽음은 아니었다. 충분히 가치 있는 죽음이었다. 살면서 겪은 그 어떤 전장보다도 규모가 크고 치열한 전장이었으니까. 거기서 내가 죽었다할지라도 기쁘게 죽었을 것이다. 예전에 죽음을 맞이하며 웃었던 캄스니처럼 말이다.
“많이 비었군.”
거의 3만을 수용하던 부락에 그 반밖에 남지 않으니 좀 비어있는 느낌이다. 출발하기 직전엔 꽉 찬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활기차다. 막 거대한 전투가 끝난 참이다. 전사 대부분이 보름 동안 나가 있어 사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굶주렸던 암컷과 아이들이 전사들이 가져온 리자드맨 시체로 포식할 것이다.
암컷에 굶주렸던 수컷들도 오랜만에 암컷과 함께 밤을 보낼 것이고, 적당히 가져온 리자드맨과 형제들의 장비들은 그것을 가공해야 하는 장인들을 바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부락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노르쓰 우르드와 족장급 형제 일곱을 내 천막으로 불렀다.
“1만의 전사를 이끌고 전투가 있었던 장소로 가 장비를 회수해야 한다. 누가 갈 건가.”
거대한 전투가 끝났다. 전투 준비를 할 때도 바빴지만 전투 준비가 끝나도 난 또 바쁘다. 일단 너무 많아서 남겨두고 온 무기를 회수하러 가야 한다. 일단 식량이 우선이라 놓고 왔지만 이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수만의 리자드맨과 오크의 장비가 그곳에 있다. 그걸 가져와 장인에게 맡기면 부락의 형제들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만의 형제가 움직이는 일이다. 당연히 무리를 이끄는 형제는 족장급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가겠다고 나서는 형제가 없었다.
당연하다. 왕복 2주 정도 걸리는 거리다.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물건 주우러 가는 건데 가고 싶어 할 리가 없다.
가만히 있던 노르쓰 우르드가 입을 열었다.
“누가 갈지 뽑기 전에 경고 해줄 것이 있다. 위험할 거다. 모두 봤듯이 그곳에는 거대한 리자드맨 부락이 들어서 있었다. 적어도 항상 2만 이상의 리자드맨이 살았겠지. 그만큼 풍족하고 살기 좋은 곳이란 뜻이고 주변의 리자드맨이 몰려들어 그곳을 차지할 거다. 장비를 회수하러 돌아갔을 때쯤에는 리자드맨의 수가 얼마나 될지 모른다. 1만보다 훨씬 많을지도... 그러니 신중이 생각하고 결정해라.”
“내가 가겠다.”
“아니. 내가 가겠다.”
“아까 내가 가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노르쓰 우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형제들이 서로 가겠다고 나섰다.
“크흐..”
역시 노르쓰 우르드다. 전사를 잘 알아. 방금 전 노르쓰 우르드가 한 말에 내가 가겠다고 나설 뻔 했다. 아쉽지만 그럴 순 없다. 난 여기 남아서 임시로 지어서 부실한 천막을 보수하거나 다시 만들어야하고, 전투 준비를 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암컷과 아이들의 구역도 정비해줘야 한다.
형제들이 마음 놓고 결투를 할 수 있도록 땅이 단단한 공터도 몇 개 만들어야 하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냥터를 찾아놔야 한다.
물론 전부 내가 직접 할 것은 아니다. 몇몇은 내가 하겠지만 대부분 다른 형제들을 움직여서 해야 하기에 부락의 우두머리인 나는 이곳에 남아있어야 한다. 아무래도 내 말을 가장 잘 들을 테니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몸이 근질근질하다. 거대한 전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투는 해도 해도 부족하다. 노르쓰 우르드의 말대로 그곳에 적이 있다면... 내가 가고 싶다. 다시 한 번 더 수만의 적에게 돌격하고 싶다.
그런데 부락의 정비를 위해 그렇게 하지 못하... 잠깐.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은 부락을 아예 새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작업들이다.
리자드맨들을 자극하기 위해 부락을 조금씩 계속 옮겼었으니까. 지금 이 부락도 전투를 시작하기 3일 전에 만들었던 곳이다. 그러니 차라리 새로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죽어라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머리를 굴린 것도 오랜만이다.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내가 전투에 참가할 방법이 있을 것 같으니 참자.
형제들이 서로 가겠다고 싸우는 동안 난 최대한 머리를 굴려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꽤 괜찮게 정리되었다. 꿈속에서 그 인간의 몸에 들어가 체험한 것이 꽤 도움 된 것 같다. 그 인간은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덕분에 나도 생각하는 것에 꽤 익숙해졌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이렇게 정리하지 못했을 거다. 중간에 머리 아파서 그만뒀겠지.
이제 내가 정리한 생각을 말할 차례다.
“그만해라.”
서로 가겠다고 아우성인 형제들을 멈추게 했다.
“그락카르. 내가 가야 한다. 이 부락에서 형제를 제외하면 내가 제일 강하지 않나.”
“바보 같은 소리군. 나와 싸워본 적 있나?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내 주먹에 맞아보면 그런 말 못하겠지.”
“그래. 지금 당장 결투를 벌여서 뽑으면 되겠군.”
“동의한다.”
역시 말로 그만두라고 한다고 그만둘 리 없지.
자기들끼리 말다툼을 벌이더니 결투로 결정하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예전에 나도 오르히 부락에서 전투를 나설 때 결투로 다른 형제들을 누르고 무리를 이끌 자격을 얻었었지.
족장급 형제들의 결투이니 재미있겠어. 붙여놓고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일단 지금은 못하게 해야겠다. 이미 결정한 상황을 말해주지 않고 무의미한 결투를 시키는 것은 그 형제의 명예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그래선 안 되지.
기세를 뿜어냈다. 순간 내 기운이 천막 안을 점거했다. 다들 강자인지라 내 기세를 느끼고 나에게 집중했다. 조용해졌군. 내 기세에 겁먹은 것은 아니다. 내가 덤비면 좋다고 같이 싸울 명예로운 전사들이니까. 그래도 순간적으로 내가 기세를 뿜어내니 무슨 일인가 싶어서 말을 멈추고 나에게 집중했을 것이다.
그 정도면 된다. 바로 입을 열었다.
“할 필요 없다. 무리를 이끄는 것은 나니까.”
“형제가?”
“형제는 남아서 해야 할 일이 많지 않나?”
“안 된다. 그락카르.”
족장급 형제들이 저마다 부정적인 말을 하고 노르쓰 우르드까지 나서서 안 된다고 말했다.
“형제가 가면 부락을 정착시키는 작업이 한 없이 느려진다. 이미 오면서 대족장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을 말해줬지 않나. 형제도 동의했던 거로 아는데.”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 그 말에 동의했고, 지금도 잊지 않고 머리에 새기고 있다.
“안다. 그걸 저버리겠다는 게 아니다. 생각해봐라.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부락을 새로 세우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그런데 그걸 꼭 여기에 해야 하나?”
“카락?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린 여기에 대해서 모른다. 내가 이곳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도 이곳이 수만의 형제, 자매들이 머무르기에 적당한 곳인지 살피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그렇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만의 형제가 머물 부락을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를 알고 있지 않나.”
“이미 알고 있다고?”
“우리가?”
다들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리자드맨의 부락, 우리가 이번에 싸운 전장 말이다. 노르쓰 우르드가 말했다시피 그곳은 2만 이상의 리자드맨이 살던 곳. 즉, 2만 이상의 리자드맨이 살 정도로 식량이 풍부하다는 말 아닌가. 그리고 이미 봤다시피 부락을 만들만한 꽤 넓은 지역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 주변엔 리자드맨 부락이 많지. 언제든 전투를 할 수 있다는 거다.”
내 말이 끝났음에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조용했다. 방금 내가 한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 내가 아는 그락카르가 맞는 거냐. 내가 아는 그락카르는 그런 생각을 못하는데.”
미흐로크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옆에서 캅카스가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 둘은 이따가 특별히 결투를 해줘야겠군. 특별한 결투니까 주먹에 특별히 힘을 더 줘서 때려야겠다.
“좋은 생각이다. 대단하다. 그락카르.”
전사인 형제들만 감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그 어떤 오크보다도 똑똑한 노르쓰 우르드도 감탄했다.
그가 놀라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다. 내가 그의 생각에 놀란 적은 많아도 내 생각에 놀라는 노르쓰 우르드를 본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말했다시피 그 주변은 리자드맨 부락이 몰려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
노르쓰 우르드가 다시 한 번 경고 했다. 하지만...
“카흐.. 그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카록께서도 기뻐하시겠지.”
“말 잘했다. 적에게 둘러싸여 끝없이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먼저 카록께 간 형제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죽음이다.”
“흥분된다. 어서 그곳으로 부락을 옮기자.”
그런 경고는 전사에게는 제발 가라는 부탁과 다름없다. 전투를 피하는 전사는 없으니까. 나도 노르쓰 우르드의 말을 들으니 더욱 잘 생각한 것 같아 뿌듯하다.
“모두 동의하는군. 그럼 결정됐다. 우리 부락은... 북쪽으로 간다.”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날 바로 부락민 모두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
“잘했다. 이올라. 나의 딸이여. 너라면 인간들에게 최대의 절망을 맛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북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성. 그곳에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이름을 잃은 ‘죽지 않는 자’라 불리는 존재가 있다. 그는 적어도 몇 달은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를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있었다.
“힘이... 힘이 돌아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세상에 그분의 아이는 나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터인데... 혹시 그분께서 날 불쌍히 여겨 자신을 희생하면서 힘을 보내주시는 건가?”
그는 저번에 회복되었던 얼굴 외에도 가슴 바로 아래와 오른팔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어머니. 혹시 그런 것이라면 그러지 마시옵소서. 당신의 아이는 견딜 수 있습니다. 부디 스스로를 아껴주십시오.”
간절히 빌어보았지만 그에게 조금씩 들어오는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어떻게 힘을 만들어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죽지 않는 자’가 ‘그 분’이라 부르는 자는 힘을 보내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분께서 멈추지 않으신다면,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죽지 않는 자’의 눈이 강하게 보라색 빛을 뿜어냈다.
“세상 모든 악신의 주구를 죽여 정화하고 자비로운 그분의 세상을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만들어 가는 것. 그를 위해 내가, 그리고 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했지 않았던가.”
‘죽지 않는 자’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오른손을 들었다.
“나와라. 나의 오른팔, 나의 친우여.”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아무 것도 없던 그의 앞에 2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전신에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었고, 왼손에 타워실드를 오른손에 그레이트소드를 들고 있었다.
몸 전부를 회색 갑옷으로 가리고 있기에 인간인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쿵.
그는 ‘죽지 않는 자’를 향해 무릎 꿇었다.
“이올라는 남서쪽으로 갔다. 넌 남동쪽으로 가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없애라. 그분의 세상을 위해서.”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대답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 성을 빠져나갔다. 그가 걸어 나가는 모습을 아련히 지켜보던 ‘죽지 않는 자’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저주받을 악신의 주구들이여.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날. 너희들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 116 대족장이 된다는 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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