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성전사 >
오. 뭔가 날 이동시켜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가? 자기처럼 다른 사람한테 안 보이게 만들어준다든가, 날 들고 하늘 높이 난다든가 하는 걸까.
-저희 밴시의 조상은 요정입니다. 덕분에 요정의 능력을 다는 아니어도 반 정도는 갖고 있지요.
뒷말을 기다렸다.
“....”
-....
뒷말이 없다.
“끝인가요?”
-요정에 대해서 모르시는군요?
“몰라요. 우리 세계에 없거든요. 요정은.”
요정이 가진 능력이 날 저 안으로 이동시켜줄 수 있는 것과 관련 있는 모양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오하넬의 세계에선 당연한 상식인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 세계는 아냐.
-아. 미안해요. 여긴 다른 세계였죠. 그걸 생각 못했네요.
미안할 것까지야.
-요정은 차원과 차원 사이를 마음껏 여행할 수 있어요. 그러다보니 차원의 틈을 이용하는 능력도 뛰어나서 위험할 때 차원의 틈에 숨을 수도 있습니다.
차원의 틈이란 건 방금 처음 들었지만 뭔지 대충 알겠다. 우리 세계와 그락카르 세계의 사이에 있는 공간 같은 거겠지. 거기엔 아무도 못 갈 테니 거기 숨는다면 술래잡기에선 무적이겠는데.
-우리 밴시도 그런 요정의 능력을 조금 물려받았어요. 차원을 여행하는 것까지는 무리지만 차원의 틈까지라면 잠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죠.
“그렇군요. 절 도와줄 수 있다는 게 저를 데리고 그 차원의 틈으로 가서...
말끝을 흐렸다. 이 뒤에 뭔가 하겠지만 난 모르니까. 오하넬을 보며 말을 이어달라는 몸짓을 보였다.
-차원의 틈에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과 연결된 곳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나오는 거죠.
“오. 그거 좋네요.”
이해됐다.
“다른 차원으로 가면 당연히 아무도 우릴 못 볼 거고, 우리는 마음 놓고 이동한 다음 목적지에서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면 되는 거군요.”
-네.
호오. 완벽한 방법이다. 그럼 이제 밤에 이동할 필요도 없겠는데? 어디 갈 일 있으면 오하넬에게 부탁하면 어디든 마음대로...
-다만 요정에 비해 능력이 불완전해요. 긴 거리를 이동하지 못하고, 차원의 틈에서 가해지는 충격을 막지도 못해요. 그래서 보통의 인간이라면 차원의 틈에 갈 수 없어요. 평범한 인간은 죽을 수도 있을 정도의 충격이거든요. 하지만 사도님이라면 괜찮으실 겁니다.
갈 수 없는 거군. 잠깐 들떴는데 바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누구 마음대로 난 괜찮다는 거죠. 나도 평범..은 아니지만 사람이거든요.
“위험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죠.”
-사도님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그냥 지역에 따라 몸이 3~10배정도 무거워지고, 곧바로 물이 얼 정도로 춥거나 물이 끓기 직전까지 뜨거운 지역이 있는 정도에요.
‘괜찮을 거예요.’라니. 가정이잖아. 가정. 그리고 말해주는 거 들어보니까 충분히 위험하거든! 뭐가 ‘인간은 죽을 수도 있을 정도의 충격’인거냐. 무조건 죽을 충격이구만.
“다른 방법을 찾아보죠. 중력 10배에 100도의 기온이라면 저도 위험할 겁니다.”
겪어보질 못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럴 거다. 난 딱히 익스트림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다.
-음...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오하넬이 모습을 감췄다가 바로 다시 나타났다.
-몸이 4배정도 무거워지고 물이 적당히 따뜻해질 정도로 더워요.
미지근한 것도 아니고 따뜻해지는 건가. 그러면 40도는 넘겠지. 대충 40~60도 정도 되려나? 오차범위가 넓긴 하지만 그 정도면... 견딜 수 있을 거 같기는 하다. 축복을 받아 몸이 강해질 때 외부만 강해지는 게 아니다. 내부 전체도 강해지며 기온의 변화에도 강해졌다.
-평범한 인간도 괜찮을 정도에요. 위험한 지역은 차원의 틈에도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만나야 할 인간을 찾아보고 여기서 그곳까지 차원의 틈의 환경을 살펴본 후 진행하는 거로 하죠.”
차원의 틈으로 이동할 수만 있다면 이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다.
-좋은 방법이에요.
“그런데 아까 요정에 비해 능력이 부족해서 보호하는 힘이 약하다고 하셨는데, 요정이라면 차원이 틈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저 같은 인간을 보호해줄 수 있나요?”
-네. 저는 그냥 영체화를 해서 틈의 환경을 무시하지만 요정은 영체화를 못하니까요. 그들의 몸은 연약하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능력이 발전했죠. 그리고 능력이 강한 요정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도 보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 요정... 아는 요정 하나 있으면 좋겠다. 차원의 틈으로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게 말이야. 차원의 틈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세상에 갈 수 없는 곳이 없게 되는 거잖아.
다음 수호자로 요정이 오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위험할 때 차원의 틈으로 숨으면 되니까. 그것 또한 ‘수호’잖아.
-누굴 만나실지 생김새를 묘사해주시겠습니까.
“생김새보다는...”
더 좋은 게 있지. 폰을 꺼내 동영상을 틀었다. 예전에 김해역이 유나에게 접근할 때 경찰에 제출할 증거용으로 찍었던 동영상이다. 김해역의 얼굴이 잘 나온 부분에서 멈춘 후 오하넬에게 보여줬다.
“이 자를 찾아주시면 됩니다.”
-편리한 물건이군요. 이 세계엔 신기한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더욱 세상을 알고 싶어요.
그락카르의 세상에 있다가 여기 오면 신세계긴 하겠지.
“돌아가서 인터넷이란 것의 사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곳에서 동영상을 보며 공부하실 수 있을 겁니다.”
글은 몰라도 영상에 나오는 말은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사도님께선 상냥하시군요.
내가 한 젠틀 하긴 하지만 뭘 겨우 이런 거 가지고 상냥하다는 말까지 하시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오하넬의 모습이 사라졌다. 교도소 안으로 들어갔겠지. 집에서 하는 짓 보면 벽이고 뭐고 다 뚫고 다니더라. 정말 든든하다. 물리학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투명화도할 수 있고, 차원의 틈으로 갈 수도 있다. 그락카르의 세계에 있는 신의 힘을 받은 능력자들이면 몰라도 우리 세계에서는.. 무적의 암살자네 정말.
누가 오하넬을 막을 수 있겠어. 총을 쏘든 미사일을 쏘든 소용이 없을 텐데 말이야. 비텔님의 힘을 받은 나나, 유나 혹은 앞으로 받게 될 신도들을 제외하면 대적할 방법이 없지 않을까.
그런데 나도 공격 못하는 거 아냐? ‘착취하는 손’ 같은 걸 쓰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비텔님의 힘인데 말이야. 음... 모르겠군. 그렇다고 오하넬한테 ‘당신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나 ‘내 공격이 당신한테 통하는지 맞아볼래요?’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혼자만 생각하자.
-다녀왔습니다.
“빠르시네요.”
잠깐 딴 생각했을 뿐인데 벌써 갔다 오다니.
-사도님께서 찾는 인간은 저쪽에 있는 건물에 있습니다. 꽤 넓고 침대가 많은 방인데 혼자 쓰고 있더군요.
침대가 많은 넓은 방. 교도소에 침대가 많은 넓은 방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 병실 정도 되려나. 기도하다가 쓰러졌다더니 거기에 옮겨둔 모양이다. 아직 말을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 어쩌지? 음... 가보면 알겠지.
-오는 길에 차원의 틈도 살펴봤는데 아까 확인했던 것과 비슷한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해볼만 하군.
해보자. 오하넬에게 시작하자고 이야기했다.
“흡!”
순간 주변의 모습이 확 바뀌며 뜨거운 공기가 훅하고 몸속으로 들어온다. 숨쉬기가 힘들다. 몸도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괜찮으십니까?
“후흡. 괜..찮습니다.”
사실 괜찮지 않다. 몸이 무거워진 건 버틸만 하지만 뜨거운 공기는 날 숨 막히게 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숨 막힌다. 죽을 거 같지는 않지만 상당히 답답하다.
-오래 있으면 곧 적응 되실 겁니다.
오래 있기 싫다. 조금이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쐬고 싶다.
“빨리 가죠. 앞장서 주세요.”
-네.
오하넬을 재촉했다. 오하넬이 가볍게 날아 앞장섰다. 부럽다. 나도 영체화인지 뭔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뜨거운 공기를 마실 필요도, 온몸이 짓눌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걸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비텔님을 알기 전의 나였다면 한 발자국 떼는 것도 힘들어했겠지.
차원의 틈은 아무 것도 없이 빨간 땅과 검은 하늘만이 존재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해나 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밝다. 주변이 아주 잘 보였다. 해나 달 없이 빛은 존재하는 공간이라니. 이상한 공간이다.
-여기가 사도님께서 찾으시는 인간이 누워있는 침대 바로 앞입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까요?
“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순간 주변 환경이 바뀌며 날 짓누르던 중력과 뜨거운 공기가 사라졌다.
“후읍.”
아. 공기가 맛있다. 온 몸이 상쾌해지는 느낌이네.
나타난 곳 바로 앞에 병원 침대가 있고 거기 누워있는 김해역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그가 성전사가 맞음을 알 수 있었다.
-비텔이 성전사의 죄를 용서합니다.
성전사가 다시 비텔의 소속이 됐습니다.
성전사의 머리에 손을 올리세요.
***
“후읍.”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김해역이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떠 가장 먼저 본 것은 두 명의 불청객이었다. 우선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백인 미녀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지금 시대에 저런 드레스를 입다니. 그것도 교도소에서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그녀가 공중에 떠 있다는 거였다.
김해역은 놀라지 않았다. 이정도로 놀라기엔 그가 꿈속에서 보낸 4~5년의 세월동안 겪은 일들이 너무 컸다. 꿈에서 깨어난 후 실제 시간이 10일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을 정도다.
고개를 돌려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는 남성을 봤다. 온몸에서 하얀 수증기가 일어나는 모습이 뭔가 신비로웠다. 여자와 남자 둘 다 평범하진 않은 듯 했다.
“또 꿈속에 들어온 건가.”
공중에 떠 있는 여자와 온 몸에서 수증기를 일으키는 남자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니. 현실이다. 김해역.”
남자, 한상이 대답했다. 현실이라는 대답을 들었지만 김해역은 믿지 않았다. 정확히 날짜를 세지는 않았지만 꿈속에서 4~5년간을 보낼 때도 진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생했지만 결국은 꿈이었다.
‘방을 보니 교도소가 맞는 거 같다. 내가 지냈던 꿈속의 세상과는 다르지만... 혹시 모르지. 현실을 배경으로 두 번째 꿈을 꾸는 건지도. 이게 꿈이라면 어떡하지? 먼저 공격해야 하나? 아니면 도망갈까?’
김해역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한상이 양손에 ‘착취하는 손’을 사용했다. 한상의 양손이 보라색 빛으로 물들었다.
-나를 의심하지 마라. 김해역. 나는 그분을 대신해 너희에게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
동시에 김해역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
“뭐지. .... 설마 교..주님?”
김해역은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바로 교주를 떠올렸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목소리다. 파문당했던 그날 들었던 교주의 목소리를 수백 수천 번을 되풀이해서 생각해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김해역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일으키다가 힘이 없어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워낙 오래 굶어서 몸에 힘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바로 몸을 일으켜 한상 앞에 무릎 꿇었다.
“이곳엔 어쩐 일로...”
-내가 너를 찾아온 것은 그분의 은총이 너에게 닿았기 때문이다. 비텔교 최초의 성전사 김해역.
“..... 네?”
김해역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었나하는 생각만 가득 찼다. 성전사라고? 성전사가 뭔지 안다. 꿈속에서 봤다. 하나같이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성전사들. 그런데 자신이 성전사라고?
-모든 신도는 들어라. 지금 이 순간 그분의 검 중 하나가 탄생한다.
한상은 아까부터 스킬 ‘비텔의 목소리’를 사용해 말하고 있었다. 한상에게 김해역의 머릿속에만 들리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머리를 들어 나를 봐라. 김해역. 그리고 그분의 축복을 받아들여라.
김해역이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에 아까보다 더욱 찬란하게 빛내며 다가오는 한상의 오른손이 보였다.
“영..광입니다.”
떨렸다. 이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인가. 한상의 손이 김해역의 머리에 닿았다. 한상의 손에서 시작된 보라색 빛이 김해역의 몸 전체를 덮었다. 그 순간,
-내 아이야.
비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축복을 받는 김해역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김해역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그분의 목소리다. 다른 죄수들에게서 말로만 들었던 그 목소리다. 환희가 찾아왔다. 황홀했다.
-너는 나의 아이들을 지키는 방패가 될지니.
“되겠습니다! 방패가 되어 비텔님의 아이들을 지키겠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 그들을 지키겠습니다!”
김해역이 감격에 가득 차 소리쳤다. 그는 몸 안 가득 느껴지는 충만한 힘에 취해 쉼없이 비텔을 찬양하는 말을 쏟아냈다.
-지금 이 순간. 비텔교 최초의 성전사가 탄생했다! 성전사의 이름은 김해역. 그가 너희를 지킬 것이다.
다시 한 마디 한 한상이 오하넬을 바라봤다. 오하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를 데리고 차원의 틈으로 사라졌다.
< 113 성전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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