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성전사 >
수호자가 내 몸에 머문다고 했었지. 머물 수 있는 곳이 다섯 군데다. 즉, 다섯의 수호자를 부를 수 있다는 뜻이겠지? 좋다. 수호자가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일단 많으면 좋다. 하나하나가 오크 대전사급만 돼도 내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질 거다.
다섯의 오크 대전사가 항상 내 곁에 머물면서 날 지킨다니. 크... 엄청 든든하겠네.
어디로 할까. 음... 이거 중요한 건가? 중요하겠지. 어디에 머물든 상관없는 거라면 선택하라고 하지 않았을 거다. 전언은 쓸데없는 일은 시키지 않으니까. 이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안 알려주나?
기다려도 딱히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알려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대충 아무데나 하자. 무슨 기준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고르는 건 의미 없는 짓이다. 위부터 차례대로 하자.
머리로 선택하겠어.
-수호자가 머물 곳으로 머리를 지정합니다.
사용할 교단 기여 포인트의 양을 선택하십시오. 교단 기여 포인트의 사용은 최소 1, 최대 1,000,000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무조건 100만이다. 100만. 100만 포인트짜리 수호자 부르려고 이틀 동안 기다렸다. 이틀이 한 달 같더라.
-교단 기여 포인트 1,000,000을 차감합니다.
머무는 곳 머리, 교단 기여 포인트 1,000,000 소모. 부를 수 있는 수호자를 검색중입니다.
........ 오래 걸린다. 금방 끝날 줄 알고 기다렸는데 5분정도 지났는데도 대답이 없다. 수호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다가 부르면 바로 달려오는 게 아니었나? 오래 걸릴 거면 슬슬 배고픈데 나가서 맹연한테 아침 준비하라고 시킬까. 수호자 부른다고 했더니 혹시나 냄새 풍겨서 방해할까봐 식사 준비 나중에 한다고 하던데.
-검색 완료했습니다.
수호자가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수호자를 부릅니다.
맹연한테 밥 먹자고 하려는데 끝났다. 제안을 받아들여? 난 수호자가 비텔님의 곁에 썩을 만큼 많이 있고 그 중에서 하나 보내주는 거라 생각했는데 전언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뭔가 프리랜서를 고용하는 듯한 뉘앙스다.
내가 잡 생각하는 사이 내 바로 앞에 보라색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뭉쳐서 빠르게 회전하더니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아씨. 스탠드 넘어지고 나뭇잎 떨어지고 난리 났다. 어어. 모니터.
쿵.
빌어먹을. 모니터가 쓰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부서졌겠지? 이따 모니터 사러 가야겠네. 화분의 모래가 사방으로 날린다. 괜히 방에 화분 들여놨네. 먼지 흡수 잘한다고 해서 들여놨는데 방안에서 폭풍이 치니 먼지를 생산하고 있다. 맹연이 다 치워주겠지? 믿는다. 맹연.
신경 끄고 보라색 빛의 회오리에 집중했다.
쿠구구구구구구.
... 뭔가 회오리처럼 휘몰아치던 보라색 빛이 불안한 소리를 내며 뭉쳤다. 저러다가 갑자기 팍하고 터지는 건 아니겠지.
푸화화확!
터졌다. 강한 빛을 발하며 충격파를 사방에 뿌렸다.
와장창창! 쿵쿵! 뿌지직! 쿠당탕탕!
“.........”
울고 싶다.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던 큰 유리문에서 유리가 사라져서 뚫린 문이 되었고, 사방의 벽지가 할퀴기라도 한 것처럼 찢어졌고, 모니터, 키보드, 화분, 액자, 조명 모든 게 쓰러져서 깨지고 부서지고 난리 났다.
-밴시 퀸 오하넬 사도님의 부름에 응했습니다.
밴시 퀸이고 뭐고 방에 내가 아끼는 것들만 가져다 놨었는데... 눈물이 찔끔 나온 거 같다.
***
-죄송합니다. 제가 오자마자 사도님께 폐를 끼쳤군요.
“아닙니다. 방에서 당신을 부른 내가 잘못한 거죠.”
는 개뿔. 스킬 설명에 ‘주의. 사용 시 상당한 충격파 발생함.’이라고 적어놨어야지. 난 그냥 뿅하고 나타나는 건줄 알았잖아.
수호자를 부른 후유증으로 잠시 망연자실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밴시 퀸이시면 정확히 뭘 하실 수 있죠?”
밴시면... 게임에서 본 그 서양 처녀귀신 같은 거 아냐? 회색빛 반투명한 모습에 머리 산발하고 있는 못생긴 아줌마가 내가 알고 있는 밴시다. 밴시가 근처에 오면 한기가 느껴지고 자기는 마음대로 사람을 공격할 수 있지만 사람이 하는 공격은 전부 그대로 통과하는 그런 귀신.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밴시 퀸은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북유럽계 금발의 미녀다.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고, 작은 티아라를 쓰고 있다. 공중에 떠 있고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는 것만 빼면 딱 중세 유럽의 공주님이다.
저래서야 싸울 수 있겠어? 날 지켜주는 수호자를 불렀는데 겉모습만 보면 내가 지켜줘야 할 느낌이다.
-딱히 꼭 집어 말하기 힘드네요. 음... 전 사람을 잘 찾습니다. 그리고 어디든 갈 수 있지요.
좀 실망이다. 사람을 잘 찾고 어디든 갈 수 있다니. 난 날 지켜줄 수 있는 강한 자를 원했는데 말이다. 수호자라기에 날 지켜줄 수 있는 강자가 나올 줄...
-그리고 누구든 죽일 자신이 있습니다. 상대가 신이 아니라면요. 강력한 저주도 걸 수 있고... 아. 물론 비텔님의 사도이신 당신의 저주보다는 약하겠지만 저도 저주라면 나름 한답니다.
알았지. 암. 비텔님께서 보내주신 수호자인데 당연히 강자가 나올 거란 걸 알고 있었지.
그런데 신 빼고 누구든 죽일 수 있다니. 오크 대족장 같은 녀석들도 죽일 수 있을까?
“당신이 아는 세계에 오크도 있었나요?”
-물론입니다. 카록님의 아이들이죠.
카록을 언급하는 걸 보니 그락카르가 사는 세계의 오크가 맞나보다.
“오크 대족장도 죽일 수 있습니까?”
‘슈퍼맨이랑 배트맨이 싸우면 누가 이겨?’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질문 같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 내 수호자가 얼마나 강할지.
-후훗. 밴시에 대해서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네. 우리 세계엔 밴시가 없거든요. 밴시는 오하넬이 처음입니다.”
-신기한 세상이군요. 밴시가 없다니. 하긴 방의 구조나 가구,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이 제가 아는 세상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당신이 나타나면서 부순 방과 가구, 창문 말이지. 부수면 당연히 아는 것과 다른 모습이 되는 거야. 부수기 전의 원래 모습이었어도 당신이 살았을 그락카르의 세상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이겠지만.
-전 은밀한 암살자 밴시들의 여왕. 오하넬. 말씀드렸다시피 신이 아닌 이상 제가 죽이지 못할 상대는 없습니다.
자신이 넘친다. 오만일 수도 있는 모습이지만... 내게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런데 정말 오하넬이 대족장급 오크를 죽일 수 있을까?
***
끼익.
방문을 여는데 소리가 난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부드럽게 열리던 문인데.
“수고하셨습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문을 열자마자 맹연의 모습이 보였다.
“수고할게 뭐 있겠어.”
“... 우선 식사준비부터 하고 치우겠습니다.”
맹연이 문 너머로 보이는 내 방의 모습을 보고 잠깐의 침묵 후 이야기했다. 속으로 내 욕하고 있는 거 아냐? 내가 안했어. 오하넬이 했어.
“수호자가 나타날 때 충격파가 그렇게 클 줄 몰랐어. 그냥 모습만 보일 줄 알았는데.”
변명하며 생각해보니 맹연이 방에 없었던 게 다행이다. 보고 싶으면 들어오라고 했는데 맹연이 방해될 수도 있으니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좋은 선택이었다. 맹연.
난 그락카르에게서 물려받은 것도 있고 이번에 ‘이끄는 자’가 되면서 신체가 강해진 것도 있어서 날리는 유리파편과 흙, 모래 등에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맹연은 여기저기 많이 긁혔을 거다. 유리조각 잘못 맞으면 큰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고 말이야.
“치우지 말고 놔둬. 벽지도 다 찢어지고 유리도 다 깨져서 아예 싹 치우고 다시 해야 돼.”
업자 부르면 철거부터 설치까지 알아서 해줄 거다.
“공사 마무리 될 때까지 손님방에서 살지 뭐.”
집은 꽤 크다. 나와 맹연이 사용하는 방 말고도 손님방 하나가 더 있다. 구할 때 제대로 된 거 구하자는 생각에 꽤 크고 괜찮은 집을 구한 덕이다.
“그럼. 손님방에서 지내실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응. 부탁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안해서 ‘됐어. 내가 하면 돼.’라고 말했었는데 이젠 맹연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지금 맹연이 없어지면 사는 게 엄청 불편해질 거 같다.
“그런데 수호자님은...”
맹연이 방안을 살피며 물었다.
“나갔어. 세상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더라고.”
“세상을요?”
“응. 이 세상에 대해 잘 모르니까. 수호자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세상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고.”
당연한 말이다. 날 지키려면 날 죽이려는 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공격해올지에 대해 알아야겠지. 총이나 폭탄 같은 거에 대해 모르는 체로 날 지킬 순 없을 테니까. 그 외에도 알아야 할 것들이 많겠지.
‘말도 안 통할 텐데. 괜찮겠어요?’
‘괜찮습니다. 저는 신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까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는 없습니다.’
‘아. 바벨탑 이전의 세계.’
‘네. 그겁니다. 그럼 일주일만 기다려주십시오. 세상을 보고 오겠습니다.’
‘세상을 보는 데 일주일로 되겠어요?’
‘전 밴시 퀸이니까요. 밴시들의 특징 중 하나가 정보 습득이 빠르다는 겁니다.’
‘여긴 밴시가 없어서 사람들이 밴시를 보면...’
‘걱정하지마세요. 아무도 저를 보지 못할 겁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사라졌다. 정말 자신은 넘치는 거 같다. 일주일만에 세상을 보고 온다거나,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할 거라는 말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내뱉다니. 공주병 비슷한 건가. 자신을 너무 과신하는 것도 좋지 않은데 말이야.
그리고 일주일 후, 오하넬은 정말 돌아왔다.
“세상을 전부 보고 왔나요?”
-아뇨.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도님의 세상은 정말 넓더군요. 알면 알수록 그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인구가 그렇게 많다니... 이전에 갔던 세계의 10배는 되는 것 같습니다.
못 본걸 인정하네? 자신감 과잉처럼 보여서 인정 안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인구가 겨우 10배밖에 안 될까? 그락카르가 되어 그 세계를 보면 전쟁에 참여한 전력이 1만만 넘어도 엄청난 거던데 말이야. 그락카르의 세상은 과거 중세시대의 지구와 비슷한 상태 아닐까? 아냐. 더 할 수도 있다. 거긴 서로 다른 종족이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있으니까. 인구가 늘어날 틈이 없겠지.
-세상을 전부 보고 오려면 한 달은 필요할 것 같더군요.
“시간을 더 줄 수 있습니다.”
내가 한 달만 더 방에 박혀 있으면 되잖아. 좀이 쑤시긴 하지만, 김진서가 계약해달라는 거 아프다고 핑계대면서 안 가고 있지만 내 첫 수호자가 필요하다고 하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그만큼 내가 더 안전해질 테니까.
-괜찮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전부 본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사도님을 지키면서 천천히 알아도 됩니다.
“그렇군요. 잘 됐네요.”
김진서한테 계약 중개 해줄 수 있다고 말해도 되겠다. 교단을 위한 일을 진행하면서 쓰려고 비싼 값에 중개권리증을 샀는데 못해줘서 미안했는데 말이야.
-세상을 둘러본 후 한 가지 확신했습니다.
“뭔가요.”
-이 세계에서 사도님의 수호자로서 밴시만큼 어울리는 종족은 없습니다. 저를 첫 수호자로 삼으신 건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다른 수호자 종족은 이 세계에서 활동하기엔 좀... 외견상 문제가 있거든요.
얼마나 못 생겼기에 그러지. 그락카르보다 못생긴 건가. 그건 좀 문제지. 그놈은 정말 심각하게 못생겼으니까. 웃긴 건 그락카르는 지가 잘생겼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더 웃긴 건 다른 오크가 정말 그락카르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거고 말이다. 미의식이 결여된 종족 같으니.
여하튼 내가 선택한 건 아니고 골라준대로 받은 거지만, 잘 뽑았다니 다행이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
-김해역을 받아주소서.
-해역이가 10일 째 아무 것도 못 먹었습니다. 몸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해역이가 깨어나는 그날까지 함께 단식기도를 올리겠습니다.
벌써 10일째다. 10일 동안 한 결 같이 김해역을 위한 기도가 들려왔다. 분명 김해역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대충 기도로 들은 상황을 종합해보면 10일째 미동 없이 기도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게 자의적으로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타의에 의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 듯한데 아마 그 타의의 주인공은 비텔님이겠지.
비텔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씀 좀 해주시지. 엄청 궁금한데 말이야.
-성전사가 탄생했습니다.
비텔이 성전사에게 축복을 내리길 원합니다.
성전사를 찾아가십시오.
< 111 성전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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