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대교주 >
NSA만이 아니었다. 각국 정보부가 한국에 파견했던 정예 요원 대부분은 NSA의 행동을 조사하다가 비텔교에 대해 알게 되었고, 당연한 수순으로 그들 또한 비텔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덕분에 처음엔 비텔을 받아들인 벤센의 요원들에게 농락당했지만 비텔을 받아들인 후에는 치열한 첩보전이 전개되더니 며칠 전 러시아 정보부가 벤센의 요원 중 하나인 중국계 미국인 얀타오를 잡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꾸준히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아직 NSA 요원이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엔 무너질 것이다.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고통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들었나?”
고문을 하던 러시아 요원이 비텔의 목소리를 듣고 무릎 꿇었다가 일어나며 얀타오에게 물었다. 그에 역시나 눈을 감고 비텔의 목소리 여운을 느끼고 있던 얀타오가 눈을 떴다.
“그분의 목소리라면... 들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우린 적이 아니군.”
원래 그의 인생관이라면 미국의 요원인 얀타오는 절대적인 악이었다. 그렇기에 차마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고문도 악인 얀타오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 요원의 인생관이 방금 바뀌었다.
40년 평생 충성해왔던 국가가 최우선이었지만 이제는 비텔이 최우선이었다. 물론 여전히 국가가 중요하긴 했다. 2순위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러시아 요원이 얀타오를 묶고 있던 수갑과 밧줄을 풀어주었다. 어차피 이제 얀타오에게서 더 알아낼 것은 없다. 그가 숨기고 있던 것이 무엇이든 그는 진리를 알았으니까. 비텔이 진정한 신이라는 진리를.
“다음에 만나면... 죽이진 않겠지만 어디 부러뜨릴지도 모른다. 형제.”
러시아 요원은 웃으며 얀타오를 형제라 불렀다. 그도 비텔을 받아 들인지 1주일이 넘었기에 교주인 한상의 설교를 들었다. 한상은 비텔교인들은 서로 가족이라고 강조했다. 비텔이라는 한 어머니를 둔 가족.
“다음 기회가 있을 것 같나. 다음엔 내가 잡았다가 풀어주지. ... 형제.”
얀타오 또한 웃으며 러시아 요원을 형제라 불렀다. 둘은 강하게 악수를 했다. 그리고 얀타오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향하며 그곳을 지키던 러시아 요원 몇을 만났지만 그 누구도 얀타오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요원에게 배웅까지 받은 얀타오는 밖으로 나오자 그를 반겨주는 밝은 햇살을 보았다.
“다시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무조건 죽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살았다. 비텔의 가호 덕에 말이다.
‘비텔님 덕분에 산 이 목숨. 비텔님을 위해 바친다.’
짧게 다짐한 얀타오는 복귀를 위해 NSA 한국 지부로 향했다.
***
데니스가 미친 듯이 전당을 뛰어다녔다. 그가 설치했던 도청장치를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미쳤구나. 감히 비텔님의 전당에 저딴 것들을 설치하다니.’
회수하러 다니면서도 수십, 수백 번을 자책했다. 그의 이상한 움직임은 비텔의 목소리를 들은 여운에서 깨어난 신도들의 눈에도 들어왔다. 그들이 왜 그러냐며 데니스를 말려봤지만 데니스는 말없이 뛰어다니며 도청장치를 회수했다.
도청장치가 너무 많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 그를 보면서 신도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어서 그렇다며 안타까워했다. 데니스의 이상한 행동은 곧 유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왜 그러시죠?”
유나가 다가와 데니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사람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던 데니스가 우뚝 멈췄다. 그가 유나를 바라봤다. 그렇지않아도 울상이었던 그가 유나를 보자 왈칵 눈물을 쏟았다.
“크흑흑! 죄송합니다! 사제님!”
데니스가 무릎 꿇고 울며 사죄했다. 유나는 데니스가 뭔가 할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사실 전 NSA라는 미국 정보기관의 요원입니다.”
데니스가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
내 몸에 비텔님께서 머물다가 떠나셨다. 눈을 감고 그 황홀함의 여운을 천천히 즐겼다. 그리고 그 여운이 한 톨도 남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을 때, 눈을 떴다.
날 지켜보고 있었는지 눈을 뜨자 바로 앞에서 맹연의 얼굴이 보였다. 예쁘긴 예쁘다.
“수고하셨습니다.”
“내가 한 건 없다. 전부 비텔님이 하셨지.”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다. 비텔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기는 하나, 혹시 다시 비텔님께 매료되어 제정신을 잃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의 나는...’
확실히 제정신이다. 비텔님을 위해 뭐든 해야겠다고 느끼긴 하지만 도리에서 벗어난 일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번에는 비텔님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다행이다.
“아닙니다. 비텔님을 대신해 한상님께서 하신 모든 것을 제가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세상 아무도 몰라도 저는 압니다.”
알긴 뭘 알아. 정말 비텔님께서 했다니까. 맹연이 나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힘을 쓰셨는데 허기지지는 않으신가요? 식사 준비를 할까요?”
“괜찮아. 온 몸에서 힘이 넘쳐.”
빈말이 아니라 정말 힘이 넘친다. 이건 마치 그락카르로서 느꼈던 축복의 느낌이다. 그락카르가 축복 받을 때는 크게 신체능력이 향상된다. 나도 향상되기는 하지만 아주 소량이지. 하지만 이번엔 그락카르가 강해졌을 때 못지않게 강해진 것이 느껴진다.
이게 시험을 통과한 대가인가?
집에서 키우는 관상용 식물 앞으로 갔다. 능력을 시험해봐야겠다. 난 축복을 받을 때마다 신체능력보다는 스킬 능력이 더 크게 향상됐었다. 덕분에 그락카르보다 스킬의 효율이 훨씬 좋았었지.
식물에 손을 뻗어 ‘착취하는 손’을 사용했다.
바사사사삭.
“대단하십니다. 역시 한상님.”
맹연이 감탄했다.
식물이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훨씬 강해졌다. 정말 그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말이다. 사람에게는 조심해서 써야겠다. 이전에도 몇 초 만에 전신의 힘을 싹 빼버릴 정도로 강했는데 지금이라면... 아차하면 목숨을 빼앗을 것 같다.
당분간은 힘을 조절하는 연습을 해야겠어.
-참회합니다. 그 동안 제가 비텔님에 대해 불경한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비록 제가 나라에 속한 사람이지만...
온갖 기도가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신도가 1만 명에 도달했을 때 기적을 행한 후에도 이랬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불경했는지에 대한 고해가 이어졌었다. 보통은 신부나 목사한테 가서 하는 일이지만 비텔교에는 아직 그런 직급이 없다. 사제인 유나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 한 명뿐이고, 아직 어리기도 해서 고해를 하진 않는다. 그리고 신과 다이렉트로 연결되니 고해가 필요 없기도 하다. 전부 기도로 하니까.
수 천, 수 만의 기도가 한 번에 들려왔다. 항상 신기했다. 어떻게 동시에 이렇게 많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데 내가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을까.
딱히 머리가 좋아진 건 아니다. 다른 쪽에선 여전히 인간 한상이다. 하지만 기도만은 완벽하게 전부 듣고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들었던 기도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고,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놈들도 있다. 이번의 기도에도 특이한 사람들이 있었다.
-저는 NSA 한국 지부의...
-비록 일본 정부의 지시이긴 했지만 비텔님을 조사...
자신을 정보부 요원이라고 밝히는 기도가 유난히 많았다. 그것도 대부분 외국인이다. 말은 한국말을 듣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건 방금 비텔님의 기적이 행해졌으니 그런 것일 테고 내용을 들어보면 외국인이 맞다.
혹시 지난 몇 주간 갑자기 각국의 외국인이 비텔교를 받아들였던 게 그건가?
생각해보니 그게 맞는 거 같다. 이상하긴 했다. 갑자기 10개가 넘는 나라에 동시에 비텔교가 전파될 리 없지.
나도 모르게 위기에 처했던 모양이다. 비텔교가 각국 정보부의 조사 대상이었는지는 정말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국 재계순위 100위에 겨우 들어가는 재벌가의 후계자 중 한 명이 노렸을 때도 수천 번 죽었던 나인데 각국 정보부의 표적이 되었더라면... 영원히 ‘오늘’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날 무섭게 하는 기도는 이거였다.
-교주님은 저 외의 누구도 정체를 알 수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제가 그분을 지키겠습니다.
저 말은 내가 누군지 알아냈다는 말이다. 유나와의 연락도 대포폰으로만 하고 조심한다고 노력했는데... 역시 나 같은 비전문가가 전문가들의 추적을 피하는 것은 무리였던 듯하다.
정체를 밝혀서 신도들의 보호를 받아?
아니다. 어차피 나중에 밝힐 정체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서는 것보다는 유나를 전면에 세우고 신비감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신도들이 내 말에 더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물론 비텔님의 목소리를 들은 신도들이라면 내 겉모습이 어떻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새로 들어오는 신도들이다.
아직 30살도 되지 않은 평범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교주라고 하면 아무래도 정서상 존경 받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한국만이 아니라 세상 전부가 그럴 것이다. 종교의 지도자가 20대의 젊은이라니. 그에 거부감을 느껴 비텔교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유나는 괜찮다. 유나 자신 위에 교주가 있음을 말하고 있으니까. 유나는 책임자가 아니다. 하지만 난 안 된다. 난 교주, 인간들의 세상에선 비텔교 최고 책임자다. 그런 나는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아직 부족하다. 적어도 비텔교 교주라는 직책이 없어도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간 후 내가 교주임을 밝혀야 한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나 혼자 이렇게 돌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위험했다니. 각국 정보부가 상대여서는 도저히 나 혼자 헤쳐 나갈 수 없지 않은가.
이번에 받은 축복으로 상당히 강해지긴 했지만... 부족하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날 지킬 힘이 필요하다.
-이끄는 자의 특권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염원이 이루어집니다.
스킬 ‘자유를 수호하는 자(1단계)’를 얻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든 비텔님께서는 내 고민에 대한 답을 내려주셨다. 감사합니다. 비텔님.
***
털썩. 털썩.
교도소의 죄수들이 전부 무릎 꿇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김해역은 그 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봤다가 곧 무릎을 꿇고 기도자세를 취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이미 30분 정도 전에 교주가 미리 예고한 걸 동료 죄수에게 들었다.
‘기적.’
예전에 봤다. 죄수들은 비텔님께서 능력을 주셨다고 기적이라고 했지만 그걸 체감할 수 없는 김해역이 보기엔 비텔에 대해 비판적이던 죄수들이 한 순간에 비텔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기적이었다.
비텔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대해 죄수들은 하나같이 살면서 겪었던 그 어떤 경험보다도 위대했다고 말했다. 김해역은 그것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신체능력 향상을 받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은혜로웠는데,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얼마나 대단할까. 김해역도 그 경험을 원했다. 옆에서 그것을 겪은 사람들이 있어 더욱 원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을 다시 받아들여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적이 행해지는 지금 이 순간, 김해역의 비텔에 대한 간절함이 극에 달했다.
‘비텔이시여. 저를 다시 받아주소서. 제 모든 것을 바치겠나이다. 제 인생, 제 마음, 제 목숨까지도.’
김해역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 순간,
김해역의 바로 옆에서 기적을 받아들이고 있는 죄수의 몸을 뒤덮고 있던 옅은 보라색 빛이 한줄기 뿌리를 뻗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교도소 안의 수많은 죄수의 몸에서 보라색 빛이 줄기를 뻗었다. 그리고 그 빛이 김해역에게 향했고, 그 작은 빛줄기들이 뭉쳐 김해역의 몸을 덮었다.
김해역 역시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옅지만 보라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107 대교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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