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세계로 가는 비텔교 >
“엄청나군.”
저 머나먼 곳에서 빛나는 파란 빛의 기둥을 보며 그곳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힘에 감탄했다. 몇날 며칠을 달려가야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의 빛이지만 그 힘은 여기까지 전해졌다.
“몰란의 기둥이다.”
노르쓰 우르드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역시 노르쓰 우르드는 모르는 게 없다.
“몰란의 기둥?”
“인간의 신인 몰란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걸 좋아하지. 전장에서 싸우다가 동료를 구하기 위해 팔을 바친 자, 가족을 향하는 공격을 몸을 날려 대신 맞는 자. 몰란은 그런 자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지. 그 중에서도 몰란의 기둥은 최상급 축복이다.”
“최상급 축복이라... 그럼 인간 쪽에 강자가 탄생한 건가?”
“맞다. 기둥의 크기와 힘의 파장을 생각하면... 오르히 이상 가는 강자다. 오르히 이상의 강자가 뭔가를 희생해서 축복을 받은 모양이다.”
오르히 이상의 인간 강자라... 난 세상에서 대족장이 가장 강한 줄 알았는데 대족장보다 더 강한 자가 있단 말인가?
“크흐..”
싸워보고 싶다. 대족장보다 더 강하다는 자를 만나고 싶다.
“꿈도 꾸지마라. 넌 아직 무리다.”
노르쓰 우르드가 내 숨소리만 듣고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다른 오크가 그런 말을 했으면 당장 주먹으로 두들겼겠지만 노르쓰 우르드니 참았다. 그는 전사가 아니라 주술사니까. 우리와는 생각이 다르다.
“전사의 싸움은 해보기 전엔 모르는 법이다.”
“아니. 안다. 그락카르 네가 최근 강해지긴 했다.”
맞다. 난 강해졌다. 연이어 전투를 하다 보니 이젠 우리 부락에서 가장 덩치가 컸던 캅카스가 못지않은 덩치를 갖게 됐다. 이젠 불가사의한 힘을 최대로 발휘하지 않고도 캅카스가와의 결투를 이길 수 있다.
지금이라면 오르히와도 어느 정도는 싸워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안 된다.”
“크흐.. 그러니까 더욱 가고 싶어지는군.”
‘네가 진다.’라는 말을 듣고도 가만있을 오크 전사가 있을까? 바로 출발해야 겠...
“리자드맨 영역에 암컷과 아이들만 남겨놓고 가겠다는 말이냐?”
“... 아쉽군.”
족장으로서 자신의 부락에 들어온 암컷과 아이를 버리고 갈 수는 없다. 족장이 되기 전의 나였다면 지체하지 않고 달려갔을 텐데. 아쉽다.
“그런데 파란색이군. 저번에 싸웠던 인간도 파란빛을 냈었다.”
“몰란의 색이 파란색이니까. 몰란이 준 힘을 발휘할 때는 파란 빛을 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붉은색이지.”
그래서 축복을 받거나, 카록께 받은 능력을 사용할 때 붉은 빛을 냈던 거군. 크흐.. 그러면 내 피부가 붉은 것도 카록께서 주신 거겠군. 역시 난 선택받은 전사다. 그리고 보라색, 한상이란 인간이 믿는 신인 비텔의 색이 보라색이겠군.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부락의 일이나 생각하자.”
“이번에 부락에 온 형제들의 말에 의하면 200~300정도로 무리를 지은 리자드맨들이 우리 부락으로 오는 형제들을 공격한다고 한다. 숫자가 적은 형제의 무리는 이 리자드맨들에게 당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노르쓰 우르드가 다시 부락 회의로 주의를 돌리고, 캅카스가가 기다렸다는 듯 해결해야할 문제점을 말했다.
200~300의 무리라...
“그 정도는 대전사 형제들에게 맡기면 되겠군.”
우리 부락의 대전사 형제는 여섯. 족장급이 노르쓰 우르드를 포함해 넷이나 있는 거에 비해 적은 수긴 하지만 족장급이 너무 많은 거지 대전사가 적은 건 아니다. 그들이 형제들을 이끌고 나간다면 200~300정도로 무리지은 리자드맨과 괜찮은 전투를 할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고, 다음 문제는...”
부락이 커지니 해결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어째서 예전에 오르히가 직접 전투를 나가지 못하고 부락에서 회의만 했었는지 알겠다.
“북동쪽에서 발견된 리자드맨 부락이다. 발견한 형제의 말에 의하면 3,000정도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그건 내가 맡지.”
바로 이야기했다.
“나도 갈 거다. 매번 그락카르가 직접 나가다 보니 전투를 꽤 오랫동안 못했다.”
“나도다. 나도 싸우고 싶다.”
캅카스가와 미흐로크 둘 다 저번엔 양보해주더니 이번엔 양보가 없다. 그럼 이번엔 내가 양보를... 하긴 힘들겠군. 싸우고 싶다. 아직 난 오르히 정도의 대족장이 되지는 못한 거 같다. 형제들에게 전투의 기회를 양보하기보다는 내가 직접 싸우고 싶은 마음이 큰 걸 보면 말이다.
“그럼 형제들을 1,000만 데려가는 거로 하지. 너무 많이 데려가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하자.”
“그거 좋다.”
“후... 정말 어쩔 수 없군.”
노르쓰 우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다. 항상 족장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 가르쳐주니까. 그 덕분에 내가 어느 정도는 족장으로서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전투는, 싸움은 양보할 수 없다.
족장급이 되면 다른 형제들이 강해질 수 있도록 기회를 양보해야한다는 말도 들었지만... 난 아직 더 강해지고 싶다.
오르히보다 더, 그리고 오르히보다 더 강할 거라는 인간 강자보다도 더 강해지고 싶다. 더 강해지고, 강해져서 카록의 곁으로 가기 전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오크가 되고 싶다. 그러면 카록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설 수 있겠지.
“크흐..”
***
포란의 왕 솔렘니스가 수십 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을 하고 있을 때, 그 대군의 목적지인 북쪽 국경 너머 아주 먼 곳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북쪽 끝, 인간이나 오크나 리자드맨이나 드워프나 엘프나, 그 누구도 다다른 적 없는 깊숙한 그곳에 거의 폐허나 다름없는 거대한 성이 있었다. 그 성의 중심에 있는 대전, 그 대전 가장 상석에는 과거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화려했을, 하지만 지금은 낡고 먼지가 쌓여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수많은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왕좌에 해골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해골위에 쌓인 엄청난 양의 먼지가 해골 역시 이 성과 함께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때,
화확!
해골의 눈에서 보라색 빛이 강하게 빛나며 대전을 비췄다. 잠시 후 빛은 갈무리되어 해골에게 돌아왔고 눈만이 아닌 해골 전체를 감쌌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정수리부터 조금씩 살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근육, 핏줄, 살이 하나씩 생겨났다. 얼굴은 조금씩 사람의 형태를 갖춰갔고, 곧 완전한 사람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기괴한 것은 얼굴 아랫부분은 해골상태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번뜩.
해골, 아니 해골이었던 얼굴만 있는 남자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끄으... 고통스럽구나.”
목도 없고, 폐도 없건만 남자는 제대로 말을 내뱉었다.
“아프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뼈에 구멍이 뚫린 듯 시리고, 지금은 없는 내 살들이 천 조각으로 잘리는 것처럼 아프다.”
뼈밖에 없는 몸이건만 신경이 살아있는 것처럼 온 몸에서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찌 그분의 아픔에 비견할까!”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눈에 머물던 보라색 빛이 불꽃처럼 크게 타올랐다.
“기쁘다! 이 아픔이 기쁘다! 그분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남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하늘을 꿰뚫을 것 같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분의 힘이 내게 닿았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으나 머리 부분이나마 복원되며 깨어났다는 게 그 증거였다.
“내가 깨어났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세상의 모든 생명들아.”
남자는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대답은 행동으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모습을 보여라. 나의 머리, 나의 딸이여.”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스산한 여성의 곡소리와 함께 허공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귀족가의 여인인 듯 보였지만 그녀의 피부는 지나치게 창백했고, 몸은 허공에 떠 있었다.
“가거라. 가서 나의 군세를 이끌어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대답대신 곡소리를 하며 여성은 남쪽으로 날아갔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그대로 통과해서.
***
“긴급입니다!”
중국의 정보부인 국가안전부 통칭 MSS. 그들 또한 리우에 와 있었다. 국가안전부는 처음엔 한국 선수의 대활약에 대해 조사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과 달리 그냥 운동선수들일뿐 국가의 안보에 관련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미국이 정보부 한국 선수단의 기록 향상 이유에 대한 조사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면서 NSA, CIA 두 곳에서 상당히 비중이 높은 자들이 리우로 파견된 후 그 방침이 바뀌었다.
국가안전부는 미국의 움직임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고, 정보부의 주역들이 리우에 파견된 것을 보고 이유는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도 요원을 파견한 것이다.
이곳에 도착한 그들은 미국이 한국 선수단을 조사하고 있으며, 그 이유가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이 보여준 활약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도 관심 없었던 한국 선수단의 기록 향상 이유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미국 정보부가 오늘 아침까지 어떤 단서도 잡지 못했던 것처럼 중국의 국가안전부 역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었다.
“무슨 일이지?”
“벤센이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뭔가 단서를 잡았군.”
보고를 들은 파견된 국가안전부 요원들의 책임자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애초에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우리도 한국에 간다.”
모를 땐 따라가면 중간은 간다.
중국만이 아니었다. 영국의 비밀정보부 MI6, 일본의 내각정보조사실 CIRO, 프랑스의 대외안보총국 DGSE, 독일의 연방정보부 BND, 러시아 총정보국 GRU 등. 미국을 따라 리우에 들어와 있던 각국의 정보부들 대부분이 비슷한 판단을 내렸고, 비슷한 행동을 했다.
중국처럼 짐 전부 싸서 미국을 쫓아가는 곳이 있는가 하면, 미국이 찾은 게 뭔지 알기 위해 리우에도 어느 정도 남겨두고 한국으로 향하는 정보부들도 있었다.
여하튼 수많은 국가의 정보부가 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한국의 국가정보원, NIS의 요원 중 하나에게 감지되었다. 그 요원은 즉시 보고서를 작성해 상급자에게 보고했다.
“각국의 정보부가 한국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라고? 누가 보고서를 이따위로 작성하랬지? 같다? 같다? 나랑 장난쳐 지금? 누가 보고를 이따위 가정으로 하래. 확실하게 조사 안 해?”
“죄송합니다!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 관심을 보이고 있단 말이지. 어떻게 관심을 보이고 있지?”
“네. 인천공항에 파견 나가 있는 요원이 NSA와 CIRO의 요원을 봤다고 합니다.”
“겨우 두 군데잖아. 그런데 무슨 각국의 정보부야. 그거 외엔 본 거 없어?”
“그 말을 듣고 확인해봤는데 리우에서 각국 정보부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보고가 있었잖습니까.”
“그랬지.”
‘그랬지.’라고 맞장구쳐주긴 했지만 상급자의 자세는 삐뚤어졌다.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보고하던 요원이 조금 위축되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리우에 가득 차 있던 각국 요원들이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말투까지 삐딱했다. 보고하던 요원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목소리가 작아지고, 말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NSA와 CIRO 요원이 한국에 입국했으니까...”
“했으니까. 뭐. 말을 해.”
“다른 국가 요원들도 한국에 온 것은 아닐까 해서...”
“뭐 이 새꺄!? 아닐까 해서? 지금 확인한 것도 아니고 추측을 나한테 보고했단 말이야? 이딴 걸 나보고 부장님한테 보고하라고? 이 새끼가 나한테 억하심정 있냐? 나 부장님한테 깨지라고 이딴 보고 한 거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딱 그거구만! 그러니까 이따위로 보고하는 거 아냐!”
“아닙니다!”
“그래! 여기가 안이지 밖이냐! 너 죽어볼래 정말! 시원한 사무실에서 일하니까 정신이 빠졌지? 전국일주 해볼까?! 각 지역 안가 확인 작업 하게 해줘?!”
“아닙니다!”
“뭐가 자꾸 안이야! 그리고 NSA가 들어왔으면 우리한테 말하고 들어왔겠지! 왜 지들이 몰래 들어와! 그 요원 한국에 관광 온 건데 괜히 보고 한 거 아냐?”
“그.. 그게 인력을 지원주시면 확인을...”
“뭐 이 새꺄! 인력? 인력!! 여기가 인력 사무소냐! 이 새끼가 어디서 인력을 찾고 있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 죄송하면 다냐고!”
“아닙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욕먹던 요원은 겨우 팀장에게 풀려나서 휴게실로 가 담배를 피웠다.
“그러게 왜 그런 걸 보고 하고 그래. 가만있으면 중간은 가잖아.”
“시바...”
“지금 청와대 혼란스럽잖냐. 거기 지원하느라 팀장님도 댓글 뒤져보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가서 그런 보고를 하니까 욕먹지.”
“내가 다시는 그런 거 안 찾아본다.”
“그래. 잘 생각했어. 가서 카톡이나 뒤져봐.”
그렇게 외국 정보부들은 한국 정부 몰래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 95 세계로 가는 비텔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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