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오크 vs 리자드맨 >
천막 밖으로 나와 보니 캅카스가와 미흐로크도 느꼈는지 북쪽을 보고 있었다.
“많다. 넓게 퍼져있다. 저 정도면... 1만. 혹은 그 이상이다.”
노르쓰 우르드가 말했다. 대단하군. 난 그저 많은 수의 강자가 있다는 정도밖에 모르겠다. 주술사가 되면 저런 것도 알 수 있는 건가?
“누군지는 알 수 있나?”
“모르겠다. 우리 오크의 전투감각은 상대의 강함을 본능적으로 느끼지. 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강함과 거리, 숫자 같은 제한된 정보를 알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그렇긴 하다. 그래서 내가 처음 미로크를 만났을 때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 못했던 거다.
“그리고 상대가 숨고 싶은 마음을 갖거나, 거리가 멀거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상대를 느끼는 거리가 멀거나 가까워진다. 본능적인 감각이기에 약간의 장난을 하면 쉽게 교란할 수도 있다. 집중해봐라. 기세가 느껴지는 거리가 평소보다 먼 것 같지 않나?”
노르쓰 우르드의 말에 집중해봤다. 잘은 모르겠다. 평소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신경 써본 적이 없다. 그래도 확실히 평소 느꼈던 것보다 더 멀리 있는 거 같기도 하다.
“보통 저 정도 거리에 있으면 느낄 수 없어야 한다. 그런데 우린 느끼고 있지. 왜 그런 거라 생각하나.”
“... 강자가 많이 모여 있어서?”
강한 기세가 느껴지는 걸 보면 강자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그것도 맞다. 강자라서 그렇지.”
역시 맞췄군. 난 역시 똑똑하...
“하지만 틀렸기도 하다. 강자라고 해서 무조건 멀리서 느끼는 건 아니다.”
“.....”
“두 가지다. 강자의 감정이 격해졌거나, 일부러 기세를 뿜어내거나.”
“그럼 지금 건...”
“일부러 뿜어내는 거다.”
“그럼 적이군.”
적이다. 형제들이 우리에게 일부러 기세를 뿜어낼 이유는 없다. 확인삼아 노르쓰 우르드를 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이 맞다는 거군.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바로 고함을 질렀다. 공터 주변에 있던 형제들이 내게 집중했다. 그리고 공터 밖에 있는 형제들도 내 고함을 듣고 달려올 것이다.
“적이 오고 있다! 위치는 북쪽! 암컷과 아이들은 남쪽으로 가고 전사들은 전투 준비를 해라!”
공터의 형제들이 흩어졌다. 곧 부락 전체에 이 소식이 알려질 것이다. 전투를 할 수 없는 암컷과 아이들은 적이 있는 방향 반대편인 부락 남쪽에 모일 것이다.
우리가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다시 원래 살던 천막으로 돌아가 살 것이고, 우리가 패배한다면 암컷들은 아이들을 안고 도망칠 것이다. 그리고 도망에 성공한 암컷들은 다른 부락에서 삶을 이어가겠지.
물론 그런 일은 없다. 무조건 이길 테니까.
“근데 웃긴 놈들이군. 왜 자신들이 왔음을 알려주는 거지? 몰래 기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텐데.”
“애초에 우리 오크에게 몰래 다가온다는 게 불가능하단 걸 아는 자들일 것이다.”
몰래 다가오는 게 불가능하다고? 난 인간들에게 기습을 여러 번 당해봤다. 드디어 아는 척 하는 주술사가 틀렸군.
“이번엔 네가 틀...”
“인간들은 우리의 본능에 감지되지 않을 거리에서 숨어 있다가 원거리 무기로 습격해오는 걸 즐기지. 하지만 인간이 아니면 우리에게 기습을 걸어오는 적은 없다.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거나 기습을 싫어하니까.”
“.....”
노르쓰 우르드가 잘못한 건 없는데 자꾸 싫어진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건 유인이다. 기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우릴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기세를 일부러 부풀려서 우리가 느끼기 쉽게 하는 거다. 리자드맨이 우리 오크에 대해 잘 알고 있군.”
리자드맨? 아. 그렇군. 여긴 리자드맨의 영역이다. 그리고 전투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에서만 싸우는 것도 리자드맨 다운 짓이다. 리자드맨의 비열함은 인간보다도 뛰어나지.
잠시 후, 부락의 형제들이 대부분 모여들어 출발할 생각을 할 때쯤,
까락! 까락! 까락! 까락! 까라라라라라라라락!
리자드맨의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우리가 기세를 느끼지 못했을까봐 자기들 존재를 알리는군.”
노르쓰 우르드가 말했다.
***
“요즘 붉은 오크가 남쪽 우리 영역에서 활개를 친다고 하더군. 우리는 지금부터 이주 준비에 총력을 다해야한다. 원활하게 이주 준비를 하려면 우리 영역에서 귀찮게 하는 것들이 없어야 한다.”
리자드맨의 이주는 꽤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오크처럼 몸만 가서 대충 부락을 짓는 게 다가 아니다.
우선 이주할 땅을 물색해야 한다. 리자드맨은 물 위에 마을을 만든다. 물과 물고기가 충분한 곳이 아니면 마을을 세울 수 없다. 그러니 미리 그런 땅을 세우거나 만들어야 한다. 로드급이 되면 그들의 신 바틱에게서 그들의 터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하지만 그 능력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평범한 로드가 3,000~4,000의 리자드맨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해선 반년은 필요하다. 그러니 로드들이 미리 전사를 이끌고 오크의 영역으로 가 땅을 차지하고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이다.
오크는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거나, 주변 이종족을 침략해 식량을 확보한다. 그것들도 여의치 않을 땐 그냥 굶는다. 오크는 일주일을 굶어도 신체능력에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리자드맨은 다르다. 그들은 이종족의 시체를 먹지 못한다. 식량 대부분을 사냥과 채집으로만 확보해야하기에 이동 중이거나, 마을 건립 중 식량 확보에 차질이 생긴다.
그러니 미리 식량을 준비해야한다. 대규모 이동을 위해선 터전도 많이 필요할 테니 최소 5~10만 전사가 3달 간 먹을 식량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계속 식량을 모아 지원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인프라를 갖추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킨. 네가 가서 우리 영역에 들어온 붉은 오크를 처리해라.”
최연장자 로드가 로드 젊은 축에 속하는 자를 지목했다. 이제 겨우 110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 리자드맨 로드다.
“왜 나지?”
“붉은 오크는 네가 새로운 땅을 확보하겠다고 오크의 영역으로 갔다가 만났던 오크란 걸 알고 있다. 그 오크가 왜 우리 영역에 왔을 것 같나. 너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가서 처리해라.”
“그게 왜 내 책임이냐. 우린 지금 오크의 땅을 침범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가 바보로 보이나? 네가 오크의 땅에 갔을 때 우리 리자드맨에겐 아무 문제없었다. 그냥 네가 땅이 좁다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겠다면서 간 거였다. 온전히 네 문제다. 자킨.”
“.... 별 수 없군.”
정말 하기 싫었지만 자킨은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리자드맨 최연장자인 마넨의 권고이기도 하고, 다른 로드들의 눈초리도 심상치 않았기에 버틸 수 없었다. 잘못하면 숙청당할 수도 있다.
리자드맨들은 위기 상황에서는 협력하지만 평소에는 서로를 견제한다. 가끔 리자드맨 마을 간의 전투가 일어나기도 한다. 지금 상황은 그가 불리한 상황이다. 그로 인해 리자드맨 침공을 시작한 오크가 다른 리자드맨 마을에 꽤 큰 피해를 줬기 때문이다. 당연히 숙청을 제기할 수 있는 사안이다.
“대신 2만의 전사가 필요하다.”
“2만은 너무 많다. 오크들은 전사의 수가 5,000정도 된다고 들었다.”
“멍청한 소리다. 2만의 전사를 움직이면 이주 준비가 적어도 1달은 늦춰질 거다.”
자킨이 말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킨은 동요하지 않고 마넨을 바라봤다.
“그 붉은 오크는 강하다. 거의 궤멸 직전에 집어넣었었는데도 알 수 없는 능력을 써서 전황을 단번에 뒤집었다. 이번 전투에서도 그 능력이 사용된다는 걸 전제한다면 무조건 2만의 전사가 필요하다.”
“거짓말하지마라. 어린 것아. 그건 오크 대족장도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와 오크는 동수, 5,000의 전사를 이끄는 것이 대족장이라고 해도 7,000~8,000의 전사면 충분한 일이다. 그것도 네 무능력함을 상정하고 말하는 거다. 내가 간다면 5,000이면 충분하다.”
“그래. 난 어리고, 멍청하고, 능력이 없다. 그러니 그렇게 잘난 당신들이 가면 될 것 아닌가. 동포들의 피해도 줄이고, 이주 준비도 빨라질 거다.”
“......”
“......”
시끄럽게 떠들던 로드들이 전부 입을 닫았다. 전사를 내어주는 건 싫었지만 직접 가기는 더 싫었다.
“다시 말하지만 붉은 오크는 강하다. 동수의 리자드맨을 데려가라고 할 거면 집어치워라. 어차피 죽을 거 귀찮게 거기 가지 말고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
“그 정도로 강한가?”
“개인의 강함도 꽤 높지만 그보다 높은 건 마지막에 보여줬던 능력이다. 그 능력 한 방에 모든 오크들의 상처가 낫고, 2배씩은 족히 강해졌었으니까. 이건 바틱께 맹세하고 진실이다.”
바틱에게 맹세한다는 말에 로드들이 시끄러워졌다. 거짓말을 자주하는 그들이지만 신인 바틱에게 맹세한 이상 진실이란 뜻이다. 당연히 쉬운 전투를 위해 많은 전사를 얻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라 생각했던 자킨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는 것에 다들 놀란 것이다.
로드들이 자킨을 제외한 채 의견을 나눴다. 자킨은 가만히 지켜봤다. 더 이상 그가 할 것은 없다. 할 말은 다 했으니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시간이 흘러 로드들의 토론이 끝났다. 마넨이 자킨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각 마을에서 지원해 8,000의 전사를 주겠다. 남은 인원은 네가 채워라.”
“알았다.”
자킨은 만족했다. 8,000이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1,000이 더 많다. 처음에 2만을 불렀지만 그렇게 많은 수를 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원하는 숫자인 7,000을 부르면 더 깎을 것을 알았기에 던져본 숫자였다.
8,000이라면 자신의 마을 전사를 합치면 11,000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로드 둘을 지원하겠다. 그런 능력을 가진 오크라면 대족장급일 터, 상대하려면 둘 이상의 로드가 필요하니까.”
능력이 무서울 뿐, 개인의 역량은 평범한 족장급이었지만 그걸 굳이 말하진 않았다. 로드가 둘이나 더 함께한다면 그만큼 자신이 안전해질 테니까.
“네가 선택해라. 누구든 네가 선택하면 따라 나서기로 합의했다.”
“마넨 당신도 포함하는 건가?”
마넨은 리자드맨 최연장자이자 최강자이기도 하다. 그가 참여한다면 다른 로드 두셋이 참여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물론이다.”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마넨이 흔쾌히 수락했다. 자킨이 누굴 데려갈지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뽑은 것은 그보다 어린 로드 둘이었다. 마넨을 데려가면 마넨이 지휘하게 될 것이고, 다른 나이 많은 로드를 데려가면 지휘권은 빼앗기지 않아도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어린 로드를 데려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약체이기에 당연히 자기들을 안 뽑을 거라 생각했다가 뽑힌 로드 둘이 왜 자기들이냐고 불만을 터뜨렸지만 이미 뽑히면 따라가기로 했으니 별 수 없이 따라야했다.
자킨은 자신의 마을 전사 전부를 불렀고 다른 마을 전사들과 합쳐 대군 11,000을 만들어 그락카르의 부락을 향해 움직였다.
자킨은 오크들에게 감지당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도착한 후 주변을 정찰했다. 그리고 얕은 물가를 발견했다. 저곳이라면 리자드맨이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곳에 자리 잡은 자킨은 바로 다른 로드와 힘을 합쳐 정신력을 발휘해 전사들의 기세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단체로 소리까지 질렀다. 그러자 단순무식한 오크들답게 마을을 나와 자신들을 향해 달려왔다.
“오크가 무식한 건 영원히 변하지 않으려나.”
“변할 수가 없지. 종족의 한계인데. 몸만 튼튼한 놈들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우리 리자드맨은 축복받았지. 튼튼하고 머리까지 똑똑하니까. 바틱께서 위대하시니 그분께서 만든 우리 리자드맨 역시 가장 위대한 종족이 된 거지.”
로드 셋은 한 곳에 모여 수다나 떨었다. 긴장감은 조금도 없었다. 11,000의 전사를 이끌고 5,000의 전사를 치는 거다. 거기에 로드까지 셋이나 있다. 긴장감을 갖는 게 오히려 이상한 싸움이다.
“나타났다.”
붉은 오크, 그락카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락카르는 캅카스가, 미흐로크와 함께 리자드맨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다른 오크들은 그들 한참 뒤에 달려오고 있었다.
모든 오크가 무작정 전속력으로 달리기만 하니 당연히 진영은 중구난방이었다.
“멍청한 놈들. 중앙에 전사들을 모아라. 붉은 오크의 돌진을 막고 포위한다.”
“알겠습니다. 로드”
까락! 까락! 까락!
자킨의 명령을 들은 리자드맨이 울음소리로 지시를 알렸다. 리자드맨 진영의 중앙이 두터워졌다. 그리고 그곳에 그락카르가 부딪혀갔다.
자킨은 비웃었다. 어느 정도 활약은 하겠지만 곧 돌진은 멈출 것이고, 그 순간 전사들에게 포위당해 죽을 것이다. 하지만...
“왜 속도가 줄지 않지?”
자킨이 의아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락카르의 돌진 속도는 리자드맨 진영에 들어왔음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를 가로 막는 전사가 수백이었지만 그들이 없는 것처럼 가르며 돌파했다.
< 89 오크 vs 리자드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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