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진실된 교주 >
어쨌든 인간이 살았다. 이제 인간이 말했던 대로 ‘오늘’이 끝내고 다시 시간이 흐를까? 꿈에서 그 인간이 죽는 걸 보면서 반복이 시작됐으니 살리면 다시 시간이 흐른다는 건 맞는 말인 거 같기도 하다.
...
.....
생각하기 귀찮다. 하루 지내보면 알겠지.
캅카스가와 미흐로크를 만나러 공터로 이동했다.
“형제. 왔나.”
“어서 와라. 형제.”
둘이 바닥에 뭔가를 그려가며 의논을 하고 있었다.
“식량 때문의 논의 중이었나.”
“어떻게 알았지?”
캅카스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천 번 봤으니까 알지. 지금 둘이 열심히 하는 계산의 결과도 이미 알고 있다. 곧 3일치가 남아있다는 결론을 내겠지. 3일치는 위험하다. 사냥이 잘 안 풀리면 형제들을 굶길 수도 있다.
전사들이라면 일주일을 굶어도 이상없겠지만 내 부락에 대한 형제들의 신뢰도가 내려가겠지. 부락은 항상 형제들을 배불리 먹여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니까. 식량을 충분히 공급해주지 못하는 부락이라 소문나면 내 부락을 찾아오는 형제의 수가 줄어들 것이다.
“식량천막을 채울 겸 오늘 리자드맨과 전투하러 가자. 리자드맨 1,000이라면 일주일치 식량은 되지 않겠나?”
“그락카르가 식량 문제를 신경 쓴다? 신기하군. 형제는 이런 문제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캅카스가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캅카스가의 말대로다. 난 부락의 운영에 대해서 신경 쓴 적이 없다. 원래는 부락에 식량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수천 번의 ‘오늘’을 반복하다보니 ‘오늘’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고, 부락의 사정도 빠삭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캅카스가와 미흐로크가 부락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명색이 족장인 내가 부락의 운영을 다른 형제에게 떠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족장으로서 불명예스런 행동이다. 아무 것도 몰랐던 예전이면 몰라도 알게 된 지금은 내가 책임지고 형제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리자드맨 1,000이라면 일주일은 문제없겠지만 주변의 리자드맨은 씨가 말랐다.”
인간이라면 1,000정도로는 6,000의 오크가 3일도 버티기 힘들겠지만 리자드맨은 덩치가 크다. 덩치만큼 양도 많기에 1,000이라면 일주일 이상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곳에 부락을 세운 후 근처의 리자드맨을 전부 쓸어버렸다는 거다. 그리고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주변 지리에 대해 잘 아는 형제가 없다. 우리에게 부락 근처 약간을 제외하면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이기에 사냥터도 모르고 리자드맨이 어디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미지의 땅이었지만 물론 지금은 아니다. 이 근처라면 수천 번의 ‘오늘’동안 완벽하게 파악해뒀다.
“북동쪽으로 지금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달려가면 리자드맨 부락 하나가 있다. 그곳에 사는 리자드맨의 수는 2,000정도고, 전사의 수는 1,300정도다. 1,000의 형제와 함께 가면 리자드맨들도 도망치지 않고 덤벼올 것이고, 7~800정도가 우리에게 죽고 나면 도망치기 시작할 거다. 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추격해서 2~300을 더 잡을 수 있을 테니 우리는 리자드맨의 시체를 1,000정도 얻을 수 있다.”
“....”
“....”
캅카스가와 미흐로크가 말없이 멍하니 날 바라봤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냐. 형제. 형제도 이 주변은 처음 오는 걸 텐데.”
캅카스가가 물었다. 난감한 질문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를 말해주려면 내게 일어난 일을 설명해줘야 할 텐데,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 수 있어도 하고 싶지 않다. 그 긴 이야기를 다 하려면 머리가 많이 아플 거다.
대답하지 않고 기다렸다. 비슷한 상황을 수백 번 경험했다. 기다리면 알아서 해결 된다.
“답답하군. 캅카스가.”
바로 저 미흐로크에 의해서.
“오면서 다른 형제들에게 들었을 텐데. 그락카르는 카록께 직접 전언을 받는다는 걸 말이다.”
“그럼. 설마... 정말인가. 형제.”
캅카스가가 날 보며 물었다.
“당연한 거다. 그럼 그락카르가 어디서 그걸 알았을까.”
가만있으니 미흐로크가 다시 나섰다. 참 편리한 형제다. 항상 저렇게 날 도와준다.
“크워어어어어!”
캅카스가가 더 물어보기 전에 다른 형제들을 내게 집중시키기 위한 고함을 질렀다.
“리자드맨과의 전투다! 제한은 1,000! 나와 함께 갈 형제는 북쪽 입구로 나와라!”
외치고 캅카스가, 미흐로크와 함께 먼저 북문으로 나섰다.
“캅카스가가 형제들을 이끌어주고 미흐로크가 나와 함께 형제들이 1,000이상 못 나오도록 막자.”
“...알겠다.”
“그러지.”
캅카스가가 잠시 뜸 들였다가 대답하곤 먼저 앞으로 나섰다. 우리를 따라 바로 온 형제들이 캅카스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난 수를 셌다.
대충 10.. 대충 20... 대충 50..... 흠... 이제 적당히 1,000쯤 되지 않았을까?
“미흐로크. 이제 된 것 아닌가?”
“그런 것 같다.”
“여기까지다!”
대충 입구를 나선 형제의 수가 1,000정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미흐로크와 함께 입구를 막아섰다. 형제들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다른 형제들이 카록의 눈에 띄는 것을 막을 셈인가!’라는 한 마디에 다들 돌아섰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오던 형제들도 다른 형제들이 몸을 돌리는 것을 보곤 불만을 토하며 알아서 몸을 돌렸다. 아무리 카록의 눈에 띄고 싶어도 다른 형제들의 앞을 막아서면서까지 그러고 싶어 하는 형제는 없다.
빠르게 달려 선두로 갔다. 선두는 언제나 제일 강한 자의 몫, 여기서 가장 강한 자는 나다. 그러니 내가 선두에 서야한다.
“지금부터 달리겠다.”
리자드맨 부락이 있는 곳에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도착하려면 달려야 한다. 형제들이 충분히 쫓아올 수 있을만한 속도로 꾸준히 달렸다. 그리고 이제까지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해가 중천에 오르기 직전 리자드맨 부락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쉬자.”
예전엔 쉬지 않고 달리느라 형제들이 지쳤음에도 쉬는 시간 없이 리자드맨 부락에 바로 돌격했었다. 그때는 나 혼자 싸우는 게 중요했으니까. 미로크를 잃고 나서 누군가를 지켜야 함을 깨달았지만 그때 내가 지켜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암컷과 아이만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다른 모든 형제들. 모든 형제가 내가 지켜야 할 대상이다. 난 족장이니까. 날 믿고 따르는 형제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아서 카록의 눈에 띌 수 있도록 돌봐야한다.
그게 족장의, 그리고 강자의 의무다. 강자로서 아직은 약한 형제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오래 전이다.
‘오늘’을 한 3,000번 쯤 반복했을 때쯤이었나? 갑자기 예전에 캄스니가 했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었다.
그냥 정면에 배치되어 있는 강자들과 바로 싸워도 됐을 텐데도 강한 형제들을 이끌고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드워프 진영에 혼란을 가함으로서 다른 형제들의 피해를 줄였다.
대족장이 되기 위한 중요한 전투였음에도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위험한 곳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목숨을 잃으면서도 나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의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능력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당시엔 그냥 캄스니의 말 그대로 적진 한복판에서 싸우는 것이 더욱 격렬한 싸움을 즐길 수 있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캄스니는 족장이자 강자로서 의무를 다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한 전사이자 족장이었다. 그가 살아남아 대족장이 되었다면 오르히의 부락 못지않은 거대한 부락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죽음이 안타깝거나 하진 않다. 그는 위대한 전사였기에 카록의 가까운 곳으로 갔을 테니까.
형제들의 숨소리가 안정되었다.
“형제들. 잠깐 보자.”
캅카스가와 미흐로크를 불렀다.
“저곳에 리자드맨 부락이 있다.”
“느껴진다.”
“제법 강한 기세가 느껴진다. 즐거운 싸움이 될 것 같다.”
거리가 멀지 않아 캅카스가와 미흐로크도 리자드맨의 기세를 느낀 모양이다.
“가서 일단 모습을 보여 리자드맨 전사들이 진영을 갖추도록 기다리자.”
“왜 그래야하지?”
“그래야 리자드맨들의 공격을 나와 형제들에게 집중시킬 수 있으니까.”
바로 돌격해서 아직 진영을 갖추지 못한 리자드맨을 공격하면 나나 캅카스가, 미흐로크는 상당한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은 리자드맨과 난전을 벌여야 한다. 난전이 우리 오크의 장점이긴 하지만 리자드맨 부락은 물 위에 지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리자드맨이 진영을 갖추기 전에 공격하면 리자드맨 부락이 전장이 될 터. 물 위에서 싸워야 하는데 덩치가 큰 나와 캅카스가, 미흐로크는 별 부담이 없을지 몰라도 다른 형제들은 큰 부담을 껴안고 싸워야 할 거다.
“그러니 리자드맨이 우리 수가 적은 것을 보고 싸워볼만하다고 여겨 육지로 올라와 진영을 갖추게 해야 한다.”
과거의 캄스니도 그의 대전사들과 이것과 비슷한 전략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리 큰 어금니 멧돼지를 미리 잡아두는 준비를 했겠지.
당시 캄스니가 나나 다른 대전사들에게 그런 전략에 대해 미리 말하지 않고, 그냥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가 싸우는 것이 더 즐겁다는 식으로 말했을까. 그건 지금 내가 다른 형제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관심이 없다. 오로지 싸우는 것만이 목적이기에 전략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며 싸울 것이다. 캄스니와 전투를 할 당시의 나도 그랬었으니까.
“정말 좋은 방법이다. 우리에게 유리한 육지를 전장으로 삼은 것도 그렇고, 리자드맨들이 우리 셋에게 집중하게 만들어 다른 형제들이 싸우기 쉽게 만들어주는 것도 그렇고... 다르다. 완전 달라.”
“뭐가 말인가.”
“형제 말이다. 어제와 너무나 다르다. 그것 아는가? 축복을 받아 덩치가 커지며 신체능력이 늘어날 때 여기.”
캅카스가가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머리도 함께 강해진다. 하지만 강해진 힘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곳과 달리 머리는 많은 시간이 흘러 지혜를 쌓아야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형제가 부락의 운영을 신경 쓰지 않아도 불만을 가지지 않고 나와 미흐로크가 신경 썼던 것이다. 아직 어린 형제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형제가 보여준 모습은 10년, 아니 적어도 20년은 경험을 쌓아 덩치에 맞는 지혜를 쌓았을 때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이다. 혼란스럽다. 어제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루아침에 마치 수십 년의 경험을 쌓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뜨끔했다. 수십 년... 나이는 그대로지만 수십 년의 경험은 확실히 쌓았다. 그걸 단숨에 알아차리다니. 캅카스가 현명하구나. 예전에는 몰랐는데 어느 정도 성숙하고 나니 캅카스가의 현명함이 눈에 보였다. ‘어제’까지의 나는 캅카스가의 눈에 얼마나 어리게만 보였을까. 부끄럽다.
그러고 보니... 겉모습으로 내가 어린 것을 안 게 아니라 내 행동을 보고 내가 어린 것을 알았던 거군. 내가 덩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이니 급격하게 덩치만 커진, 아직 지혜를 쌓지 못한 어린 형제란 걸 알았던 거다.
“그냥 받아들여라. 난 그락카르다.”
이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그럼 내 생각대로 따라줄 거라 믿는다.”
“당연하다.”
“물론이다. 형제가 말한 그대로 하겠다.”
“가자. 형제들.”
천천히 걸어 리자드맨 부락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리자드맨 부락이 눈에 들어올 때쯤,
“크워어어어어어어어!”
고함을 질렀다. 리자드맨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리자드맨들에게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조금 기다리니 리자드맨 전사들이 육지로 나와 진영을 갖췄다. 이렇게 될 것이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수백 번 겪은 싸움이니까.
리자드맨들이 어느 정도 진영을 갖췄다고 생각했을 때,
“크워어어어어어억!”
가장 먼저 리자드맨을 향해 달렸다. 내 뒤를 캅카스가와 미흐로크가 바싹 붙어서 따라왔다.
쿵! 쿵! 쿵!
족장급 전사 셋과 리자드맨 1,300이 부딪쳤다.
리자드맨들이 어떻게 공격해올지, 어떻게 막을지, 어떻게 피할지 모든 것이 보였다. 이미 수백 번을 싸워 본 적이다. 무슨 행동을 할지 미리 알고 있으니 죽이는 것이 너무나 쉬웠다.
푸확! 푸확!
도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리자드맨 하나가 쓰러졌다. 내 양손도끼 미로크를 한 번이라도 견뎌내는 적이 없었다. 나 홀로 리자드맨 진영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막지 못했다.
“까라라락! 내가 막는다!”
리자드맨 우두머리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꽤 강한자다. 1,300의 리자드맨 전사를 이끄는 자답게 족장급 무력을 갖추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상당히 고전한 끝에 이겼었다. 하지만...
푸확.
단 번에 그의 목을 잘라냈다. 아무리 강해도 수백 번을 싸운 상대다.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으며, 뭐가 약점인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게 당연하다.
전투는 우리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1,300 vs 1,000의 싸움이었는데도 우리 쪽 피해가 20명에 그쳤다. 처음 싸웠을 때는 거의 100명 쯤 죽었었는데 말이야.
그락카르! 그락카르! 그락카르!
형제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당연하다. 이번 전투에서 내가 보인 활약은 압도적이었다. 나 홀로 200정도 죽인 것 같다.
“엄청나다. 형제!”
“오르히가 와도 이정도로 잘 싸우지는 못할 것이다. 대단하다!”
캅카스가와 미흐로크도 감탄하며 다가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내 이름을 연호했다.
형제들이 내 이름을 연호하는 것은 좋지만... 아쉽다. 너무 쉬웠다. 단 한순간도 죽음의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싸움은 하고 싶지 않다. 형제들에게도 이런 싸움은 좋지 않다. 내가 너무 활약해서 일방적인 전투를 펼쳤기에 카록께서도 보고 싶지 않으셨을 거다. 그 증거로 이번 전투에서 축복을 받은 형제가 한 명도 없었다. 카록께서 보지 않는 싸움은 의미가 없다.
북쪽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저 너머에는 아직 내가 만나보지 못한 적이 있을 거다. 그들을 만나고 싶다. 죽음의 압박을 느끼며 싸우고 싶다.
“부락을 이곳으로 옮긴다.”
가자. 북쪽 저 너머로.
< 82 진실된 교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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