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죽음을 끊다 >
죽었구나. 그것도 여러 번. 한두 번 죽은 게 아닐 거다. 나도 그락카르에게 말을 걸 수 있었던 게 수십 번 죽은 후였으니까.
좀 충격이다. 내가 죽는다니, 아니. 죽었었다니. 그것도 고은형 그 인간한테? 재벌 2세긴 하지만 찌질한 모습만 봤기에 나한테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한편으론 안심된다.
그락카르가 말을 걸었다는 것은 나도 반복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죽어도 다시 살아날 기회가 주어진다는 거잖아. 이전까지는 그락카르와 달리 내가 죽으면 완전히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죽어도 ‘오늘’을 반복함으로써 내일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는 걸 알았으니 안심이다.
그런데 마취총하고 총? 한국에서 그런 게 가능해?
뉴스에서 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군대에서 총을 잃어버리고나 탈영병이 총가지고 나왔다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말이야.
총이라면 당할만하다. 그락카르처럼 피부가 단단하면 몰라도 난 총에 맞으면 바로 치명상일 테니까.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해봐. 고은형이 어떻게 날 납치하는 거야? 그리고 총이랑 마취총은 누가 쓰는 거야? 고은형이 가지고 있어? 고은형이 직접 날 납치한다는 거야? 아니면 사람을 써서 납치한다는 거야?”
.... 대답이 없다. 하긴 꽤 길게 말했다. 얼마나 반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보다 더 길게 말하긴 힘들겠지.
일단 고은형 단독 범행은 아니라고 생각하자. 아무리 총과 마취총을 들었어도 고은형 한 명에게 내가 납치당한다? 뒤에서 총을 갈겨서 바로 죽이는 거면 몰라도 납치까지는 이해가 안 된다.
그래. 납치까지는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마취총이 있으니까. 멀리서 몰래 쏜다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냥 납치만 하는 건 아닐 테고, 목적이 있으니까 납치하는 거고, 납치해서 뭔가를 하려고 할 텐데 그 때 내가 가만있을 리 없다.
한 명이라면... 총을 들었어도 질 것 같지 않다.
그리고 고은형은 직접 행동하는 육체파가 아니다. 저번에 날 손봐주겠다고 왔을 때도 덩치 두 명을 데리고 왔었지 않나. 내가 가볍게 제압하는 걸 분명 봤을 텐데 혼자 날 상대하려 한다고? 그럴 리 없다.
분명 동조자가 있다. 그걸 기본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역으로 고은형을 납치해버려? 그 놈이 주동자니까 그 놈한테 전부 물어보면 될 거 아냐. 어떻게 잘 데려오면...
..
....
아니다.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하게 고은형을 납치해올 자신이 없다.
살아난다는 게 확실해진 이상 중요한 점은 안 죽는 게 아니다. 내일이 찾아와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 완벽하게 ‘오늘’을 끝내는 게 관건이다.
내가 이쪽의 전문가도 아니고 평생 처음 납치를 시도하는 건데 여기저기 구멍이 생길 게 뻔하다. 그러면 나중에 경찰에게 덜미를 잡힐 수 있다.
그래. 이건 전문가한테 맡기자. 날 납치하려는 놈들은 전문가겠지. 알아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장소로 날 이동시켜줄 거다.
납치당하는 척 하고 역으로 그 놈들을 잡아 계획을 알아내고 이용하자.
혹시라도 실패하면?
상관없다. 난 다시 살아날 거고, 그락카르가 있다. 오늘 그락카르가 상황을 말해준 걸 보면 그 녀석도 날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 같다.
오늘 실패하면서 잘못된 점을 그락카르에게 말하고 내일 말해달라고 하면 된다. 그러면 오늘 실패해도 언젠가는 완벽하게 일을 끝낼 수 있겠지.
그락카르가 내게 준 정보가 단순하고 말이 길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반복을 시작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 같다. 채 100번이 되지 않았겠지. 그락카르가 내게 말을 건 것도 얼마 되지 않았을 거고, 그래서 이렇게 정보가 단순한 거겠지.
조급해하지 말자. 천천히... 하지만 완벽하게 ‘오늘’을 끝내는 거야.
그락카르를 믿자.
***
‘괜찮을 거야. 단순한 수면제라고 했고, 이 사람도 사람 죽이고 숨어 사는 흉악범이라고 아까 그 형사들이 말했으니까. 나쁜 사람을 잡는 걸 도우는 거야. 그리고 50만원도 받고.’
“왜.. 왜 그러세요?”
커피 받으러 왔다가 들려온 마음 소리에 빤히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이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억지웃음을 띄웠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시작됐구나.
그냥 평범한 하루라 생각하고 돌아다니면 알아서 납치하러 접근할거라 생각했다. 사람이 없는 곳에 돌아다니면 마취총이나 총에 당할 수도 있으니까 일부러 다른 방법을 쓰게 하기 위해 사람이 많은 식당이나 카페를 선택했다.
저쪽은 날 납치하기 위한 시작으로 카페를 선택한 모양이네. 직원이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이 음료에 무슨 짓을 한 모양이다. 수면제겠지. 일단 납치를 목적으로 할 테니까.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일단 카페 내부에는 나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흩어져있는 남자 몇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날 살피고 있군.
커피를 마시고 입을 닦는 척 하며, 바깥의 남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냅킨에 조금씩 뱉어냈다. 폰을 꺼내 뭔가를 하는 척 하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20분 정도 지났을 때, 탁자에 머리를 붙이고 누웠다.
5분 정도 미동도 없이 그렇게 있으니 누군가 내게 접근해왔다. 그들은 날 부축해서 일으켰다.
“저기. 정말 나쁜 사람이죠?”
“물론입니다. 아까 신분증 보여드렸잖아요. 그리고 통장에 들어온 돈에 경찰서 이름이 찍혀있지 않던가요? 그게 전부 협조해주신 분께 국가에서 드리는 겁니다.”
“그런가요.”
“제가 용감한 시민상 후보로 신청하겠습니다. 이 녀석 정말 흉악한 놈이거든요.”
“무서운 사람이면 제가 드러나는 건 좀...”
“그걸 원하시면 걱정마세요. 절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경찰로서 협조자 신원 보호는 확실히 해드려야죠.”
확실히 해주겠지. 아예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없는 일이니까.
형사? 무슨 놈의 형사가 수면제로 범인을 잡아. 이 직원 놈도 양심에 털 났구만. 분명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알 텐데도 50만원 받으려고 처음 본 사람한테 수면제를 먹이다니.
남자들은 날 데리고 가더니 어떤 차에 태운다.
“형님. 태웠습니다. 네. 문제없었습니다. 네. 쉬웠습니다. 대기하던 애들 전부 돌려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네. 공장으로 가겠습니다. 네. VIP 오기 전에 가겠습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복명복창 열심히 하네. 요즘 군대도 저런 복명복창 안한다. 조직 폭력배 같은 건가?
“빨리 가자. 형님께서 그 새끼한테 잡았다고 연락하신단다. 그 새끼 오기 전에 도착해야해.”
“네. 알겠습니다. 형님.”
내 옆에 앉은 자가 말하자 운전석에 있는 녀석이 대답했다. 이 안에도 서열이 있구만. 느껴지는 인기척을 생각하면 차 안에 타는 녀석은 넷이다. 운전석에 하나, 조수석에 하나, 내 옆에 하나, 내 뒤에 하나. 내 뒤에서까지 인기척이 들리는 걸 보면 승합차인 모양이다.
조용히 기다렸다.
“네. 형님. 지금 서울 나왔습니다. 네. 공장 근처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더 기다렸다. 제법 멀다. 서울을 나온 후에도 30분을 더 달렸다. 상당히 외진 곳으로 가는 모양이다.
“네. 형님. 지금 공장 도착 10분 전입니다. 네. 그럼 공장가서 뵙겠습니다.”
10분...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리고 5분 정도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손을 내 옆에 앉은 남자의 몸에 살짝 대고 ‘착취하는 손’을 사용했다.
“음.. 뭐지. 갑자기 힘이...”
생기를 빼앗긴 남자가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어?! 형님! 괜찮으십니까? 야! 차 세워봐!”
뒤에서 보고 있던 녀석이 소리 질렀다. 차가 멈췄고 뒤에 앉아있던 놈이 날 밀치며 앞으로 왔고 앞에 타고 있던 녀석들이 내려서 승합차 옆문을 열었다. 살짝 눈을 떠 밖에 있는 녀석들을 봤다. 잡기 좋게 나란히 서있다.
턱. 턱.
둘의 목을 잡고 ‘착취하는 손’을 사용했다. 발버둥 치며 내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어림없다.
“끄어어어.”
“그르륵.”
“뭐하는 거야!”
퍽. 퍽.
뒤에 앉았던 놈이 치는 게 느껴졌다. 적당히 아프지만 견딜만하다. 목을 잡았던 녀석들의 기력이 완전 빠진 걸 확인한 후 나를 치던 놈의 목도 잡아 생기를 빼앗았다.
“흐어억.”
넷 전부가 쓰러졌다. 이제 이놈들을 처리해야한다. 그냥 놔줄 수는 없다. 날 납치해서 죽이려고 했던 녀석들이다. 살려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미 한 번 성공했던 거, 두 번 성공하지 말란 법 없지. 뒤끝이 없게 깨끗하게 없애자.
이미 굳게 마음먹고 왔지만 막상 행하려고 하니, 아무리 날 죽이려고 했던 녀석들이라고 해도 죽이는 건 조금이지만 거부감이 들었다.
“어쩔 수 없어. 손쓰지 않으면 네가 죽을 거야.”
말을 하며 나 자신을 설득했다. 그리고 쓰러진 녀석들의 심장에 손을 댔다.
“끄으으으.”
이미 ‘착취하는 손’에 생기를 빼앗겨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이기에 신음만 흘릴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하나씩 심장이 멈췄다.
“뭐.. 하는 짓이야.”
내 옆에 앉았던 자가 말했다. 대답하지 않고 다른 세 명의 심장 쪽 생기를 완전히 흡수해 멈추게 만들었다. 주변을 살폈다. 정말 외진 산속의 도로다. 지나가는 차량은 한 대도 없다.
자리 옮길 필요 없이 여기서 하면 되겠네. 그 자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마. 저..리가.”
생기를 너무 빼앗겼는지 조금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하지만 그래도 말을 할 수는 있으니까. 말만 할 수 있으면 된다.
“저와 약속 하나 하셔야겠어요.”
그리고...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말하기도 힘들어하던 사람이 어디서 힘이 났는지 귀가 아플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미리 문을 전부 닫아두길 잘했네.
“말할게! 말... 허억허억.”
말하겠다는 마음을 먹어서 고통이 멈췄는지 비명 지르는 걸 멈췄다. 제법 버텼지만 강한 고통엔 장사 없다.
약속 ‘내 질문에 진실만을 말하고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와 벌칙 ‘전신 극통’의 결과다. 기간을 길게 할 필요가 없기에 2시간으로 했는데도 추가로 21포인트가 소모 되었을 정도로 강력한 벌칙이다. 이걸 한 달로 늘리면 천단위로 포인트가 소모 되겠어.
“의뢰자는 몰라.”
내가 알아. 그건 말 할 필요 없어.
“우린 청부조직이야. 돈 많은 사람들의 청부를 받아 대신 더러운 일을 해주지. 금액은 그때그때 다르고 큰형님만 정확한 액수를 알아. 하지만 나서는 사람의 수와 질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이번엔 30명에 큰형님까지 나섰어. 형님은 푼돈에 움직이지 않으니까. 적어도 10억이 넘는 의뢰라는 뜻이야.”
10억...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걸 보면 전부 진실이다. 차라리 그 돈 날 줘. 고은형 이 개새끼야.
“널 잡으려고 30명이 흩어져서 여러 가지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어. 우리가 성공해서 다른 애들은 돌아갔어. 전부 공장에 가 있을 거야.”
청부업자 주제에 빌딩도 큰 거 하나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조직이 아니야. 정말 다 죽일 각오를 하든가 나에 대한 흔적을 전부 없애서 나중을 걱정할 필요 없게 마무리 지어야겠어.
그 외에 공장의 위치와 어떤 무기가 있는지, 인원배치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등을 물어본 후 심장에 손을 댔다.
“아아아아안 돼! 살려줘! 말해주면 살려주기로 했잖아!”
공포에 떨며 빌었다. 말 지어내지마. 살려주기로 한 적 없잖아.
“몇 명한테 그런 말 들어봤어요?”
진심 궁금하다. 진짜 검다. 영혼의 색이 이렇게 검은색에 가까운 놈은 처음 본 거 같다. 도대체 얼마나 나쁜 짓을 해야 이 정도로 검게 변할 수 있는 거지.
“아.. 아무한테도.. 끄아악!”
대답이 끝나기 전에 생기를 빨아들였다. 어차피 대답 듣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 79 죽음을 끊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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