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그락카르의 즐거운 '오늘' >
아침이다. 눈을 떴다.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암컷이 누워있다.
드르릉. 퓨후.. 드르릉. 퓨후..
곤히 자고 있다. 깨우면 또 달라붙을 것을 알기에 조용히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강한 걸 알기에 미리 손으로 눈을 가렸다. 금방 적응했다.
“인간도 괜찮은 전사가 있긴 있어.”
인간 대부분이 겁쟁이에 나약하지만 전사들의 마음가짐은 괜찮다. 강한 전사도 꽤 있고, 죽음이 다가올 걸 알면서도 싸움에 임하는 자들이 있다.
어젯밤 꿈에서 본 인간은 어제까지는 그런 괜찮은 전사에 속하지 않았다. 지금껏 수백 번 봐왔지만 어제까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란 물을 먹고 잠든 후, 어딘가에 잡혀가서 싸우다가 드워프가 쓰는 쇠구슬 쏘는 무기와 비슷한 것에 맥없이 당해 죽었었다.
그딴 같잖은 무기에 당해 죽는 걸 보고 역시 나약한 인간답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본 전투는 꽤 괜찮았다. 나름 괜찮은 전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내가 말을 했기 때문인가? 지금까지는 그냥 지켜보기만 했는데 이번엔 한 마디 했더니 그걸 듣고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내일도 오늘 했던 것과 똑같이 말을 걸어야겠다. 어제 봤던 전투라면 당분간은 봐줄만할 것 같다.
공터로 향했다. 서두르자. 빨리빨리 움직여야 최대한 많은 리자드맨을 죽일 수 있다.
“크워어어어어어!”
고함을 치자 형제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북동쪽으로 반나절 정도 달리면 리자드맨 1,000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딱 1,000의 형제만 나와 함께 가자!”
그 말을 하고 북쪽 입구로 나섰다. 아침 일찍이라서 형제들이 어슬렁거리며 나왔지만 1,000은 금세 채워졌다.
“여기까지! 더 이상은 나오면 안 된다! 들어가라!”
입구를 지키다가 1,000의 형제가 나왔을 때쯤 더 이상 나오지 못하도록 돌려보냈다. 언제나 그렇듯 형제들이 투정부렸지만 몇 마디 하자 돌아갔다.
그리고 선두에서서 빠르게 달렸다. 정확히 반나절 정도 가서 리자드맨 부락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리자드맨 부락은 희한하게 생겼다. 얕은 물속에 나무로 기둥을 세워 물 위에 집을 짓는다.
“크워어어어어어어!”
형제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물가에 나와 있던 리자드맨을 보이는대로 죽이다보면 리자드맨 전사들이 나와서 덤볐다. 역시 제법 강하다. 하지만 우리 오크들에 비할바는 아니다.
수는 비슷하지만 전세는 우리 쪽에 확 기울었다. 전세가 기울자 리자드맨 전사들은 망설이지 않고 도망쳐 물 속으로 들어갔다. 저렇게 되면 더 이상 쫓지 못한다.
짜증난다. 500정도밖에 죽이지 못한 것 같은데. 항상 이렇다. 최대한 많이 죽인 게 600정도다. 비겁한 녀석들 같으니. 인간도 그렇게 도망가진 않는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라.”
형제들을 기다리게 하곤 한 리자드맨의 집으로 들어갔다. 중앙에 불씨가 살아 있었다. 그것을 도끼로 쳐 집 사방에 흩뿌렸다. 얼마가지 않아 불이 붙었다. 형제들에게 돌아가 집에 불이 붙는 것을 구경했다.
20번쯤 싸웠을 때 도망가는 리자드맨을 보고 분에 못 이겨 집 몇 개를 부수다가 발견한 사실인데 리자드맨의 집은 물위에 지어진 것 답지 않게 불에 약했다. 나무로 지어졌고 집이 전부 연결되어 있어 한 집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부락 전체로 불이 번졌다.
“이제 다시 북서쪽으로 가자.”
리자드맨 부락이 불타오르는 것을 어느 정도 구경하다가 리자드맨이 돌아와도 불을 끌 수 없다는 확신이 들 때쯤 형제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지금쯤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달리자 리자드맨 전사 1,200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달려들어 싸웠다. 우리는 방금 전투에서 50정도의 형제가 죽어 950쯤. 수에서 밀리지만 나와 캅카스가, 미흐로크 등 족장급 전사만 3명이 있고 한 명, 한 명의 형제들이 리자드맨보다 강했기에 역시나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리자드맨 전사들을 700쯤 죽였을 때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근처에 물이 없기에 신나게 추적하여 400을 더 죽일 수 있었다. 중간에 사방으로 흩어졌기에 100을 놓친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 북동쪽이다.”
계속 북쪽으로 갔다. 빨리 움직여야 오늘이 가기 전에 한 번 더 싸울 수 있다. 바쁘다.
“형제는 어떻게 적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아는 거냐.”
캅카스가가 물었다.
“그냥 안다.”
“그냥 안다고?”
내 대답에 캅카스가가 더욱 의문을 드러냈지만 더 말해줄 필요 없다. 대신 말해줄 형제가 있으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캅카스가. 부락에 퍼진 소문 못 들었나? 그락카르는 카록의 전언을 들을 수 있다.”
“그건 들은 적 있지만 또 들은 건가?”
“갑자기 한 번도 온 적 없는 지역에 있는 적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된 이유가 그것 말고 뭐가 있을까.”
“그렇군. 대단하다. 그락카르.”
잘못 알고들 있지만 정정하지 않고 내버려뒀다. 정확히 설명하려면 많은 말을 해야 하는데 귀찮다. 어차피 다음 ‘오늘’이 되면 잊어버리고 또 물어볼 텐데 매번 어떻게 설명하나. 귀찮다.
그렇게 이동해 어두워질 무렵 만난 건 1,500쯤 되는 리자드맨 무리. 두 번의 전투로 우리는 800정도 남았지만... 이 정도 차이는 전투를 더욱 즐겁게 하는 요소다.
“크워어어어어어!”
언제나 그렇듯 첫 외침은 나의 특권이다. 내 외침과 함께 형제들이 함성을 지르며 리자드맨에게 달려들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이겼다.
우워어어어어억!
그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오!
살아남은 300여 형제들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연이은 3번의 전투로 4명의 형제가 축복을 받았다.
“최고다. 오늘 같은 하루는 처음이야!”
“역시 형제를 따라오기 잘했다!”
형제들이 기뻐하며 내 이름을 연호했다. 오늘의 마지막 전투로 나쁘지 않았다. 꽤 즐거운 전투였다. 내일은 함께 나오는 형제의 수를 900으로 줄일까?
그리고 하루... 또 하루... 계속해서 ‘오늘’이 반복되었다.
“형제들. 가자.”
캅카스가와 미흐로크 둘만 데리고 부락을 나왔다. 그리고 하루 종일 달렸다.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올 때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리고 목표한 곳에 도착했다. 약 500이 모여 사는 리자드맨 부락.
다른 형제들은 느려서 여기까지 데리고 올 수가 없다.
캅카스가, 미흐로크 그리고 나. 단 셋이서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200정도 되는 리자드맨 전사들이 나왔다.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다. 난 팔을 잃었고 캅카스가는 목숨을 잃었다. 사지 멀쩡한 것은 미흐로크 정도였지만 결국 승리는 우리 것이었다.
정말 치열한 전투였다. 하지만...
“지겹군.”
지겹다. 이 전투도 몇 번을 반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내 부락 주변의 적은 이미 수십, 수백 번씩 싸워봤다. 수를 줄여서 치열한 싸움도 해봤고 오늘처럼 단 셋이서 200의 적에게 덤비는 무모한 전투도 했다. 즐거워야만 할 전투지만 같은 적을 계속 죽였더니 이젠 지겹기 그지없다.
이제는 다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던 리자드맨의 생김새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흠. 그 한상이란 인간을 꿈에서 보기 시작한 후 ‘오늘’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 인간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인간이 안 죽고 살아나면 ‘오늘’의 반복이 끝나는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싸우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
-이제 저기로 가면 된다.
“알았어.”
처음 그락카르가 말을 걸었을 때는 놀랐지만 곧 이해했다. 난 죽었다. 그리고 죽음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놈이 날 보고 있었나? 그런데 왜 지금까지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빨리 가라!
“알았어. 알았다고.”
일단은 이놈 말을 들어줘야겠다. 살고 봐야지.
“이 건물이라고?”
-그렇다.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5층짜리 빌딩. 그락카르가 날 데려온 곳은 여기였다.
-들어가서 보이는 모든 놈을 죽이면 된다.
“그런데 사람 죽이는 건 좀... 살인자 되면 평생 쫓겨 다니거나 교도소 들어간단 말이야.”
사형이 집행 된지 수십 년인 우리나라이니 사형당하는 일은 없겠지만 무기징역으로 교도소에 평생 갇혀 있느니 차라리 사형당하는 게 낫지. 물론 둘 다 당하기 싫다.
-걱정마라. 이 건물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 네가 가장 무서워하는 카메라인가 뭔가 하는 것도 이 안에는 없다. 그러니 네가 이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걱정 없다는 거다.
“아. 그래? 그런데 너 어떻게 이렇게 우리 세상에 대해 잘 아는 거냐.”
정말 그동안 날 지켜봤는데 신경 안 썼던 건가? 그건 그거대로 슬프다. 내 존재가 이놈한테는 그 정도밖에 안 됐다는 뜻이니까.
-또 죽고 싶은 것이냐! 빨리 가라!
“아. 알았어. 알았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다른 건물과 달리 입구에서부터 누군가 나와 용건을 물어본다.
-죽여라. 널 죽이려는 자들과 한 패다.
다짜고짜 죽이라니. 난 오늘 처음 봤는데 말이야. 그리고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평범해 보이기만 했다. 정말 맞는 건가?
“개인 소유의 건물입니다. 혹시 용건이 있어서 오신게 아니라면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입구에서부터 출입을 관리하는 빌딩이라니. 좀 수상하긴 하다. 보통은 건물 안에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더 안으로 들어갈 때 신분증 확인 같은 걸 할 텐데 말이다.
-의심되면 네 무기를 꺼내봐라. 그러면 너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될 거다.
일단 그렇게 해봐야겠다. 그런데 너 왜 이리 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거야. 나 몇 번 죽...
-빨리 해라! 더 망설이면 네가 죽든 말든 아무 말도 안 해줄 거다.
알았어. 알았다고. 아까부터 뭔 생각만 하려고 하면 자꾸 더 이상 말 안해준다고 협박한다.
내 전용 목검을 담기 위해 특별히 주문한 긴 통을 열어 목검을 꺼냈다. 최고급 목재로 만든 수제 양손 목검이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도 예전에 주문한 특제 방검복이다. 그락카르의 말을 듣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온 거다.
“... 너 이새끼. 뭐하는 새끼야.”
친절한 미소를 띄우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흉악하게 변했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도 있는 거구나.
“야! 나와서 이 새끼 잡아!”
네!
남자가 소리 지르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 수십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어디 있다가 나온 거야? 잘도 숨어있네.
“정말이네. 이상한 곳이었어.”
-전부 죽여라. 네 놈은 이상하게 영혼의 색이 검붉은 색이면 죽이거나 상처를 입혀도 신경 쓰지 않더군. 잘 봐라. 몇몇 푸른색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검다.
그락카르의 말대로다. 붉은 색이든 푸른색이든 검은색에 가까울수록 나쁜 놈이라는 뜻이니까. 그런 놈들이라면... 괜찮겠지.
온 힘을 다해 목검을 휘둘렀다.
-오른쪽에서 적이 나온다.
-위쪽에서 내려오는 적 중에 마취총을 가진 자가 있다. 조심해라.
-저 문 안쪽에 10명의 적이 있다.
아무리 내가 잘 싸워도 무리가 있는 수의 적이었지만 그락카르의 적절한 도움으로 잘 싸워나갔다. 하지만 결국 4층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좁은 복도에 수십 명의 적이 있으니 뒤에서 마취총을 겨눈 놈을 보지 못하고 당해버린 거다.
-오늘은 4층까지군. 내일 더 잘해보자.
너 이새끼... 정말 여기가 나 죽이려는 애들이 있는 곳 맞...
***
탕!
“크윽!”
두목으로 보이는 자의 목젖에 목검을 찔러 넣음과 동시에 총알이 심장을 꿰뚫었다. 시발. 몇 번 죽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또 죽겠구나.
-아쉽군. 거의 다 왔는데.
“커헉. 커컥. 너 이새끼... 여기가 정말 나 죽이려는 놈들이 있는 곳 맞는 거냐?”
-맞다. 그놈들의 본거지지.
“거짓말은 아니겠지?”
-명예로운 전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 정말이겠지. 그락카르 저놈이 전사 어쩌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는 걸 본 적은 없으니까.
“쿨럭. 그런데 여기 놈들 다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게 맞긴 한 거냐?”
-당연한 것 아닌가? 적을 죽여야 살아남는 거다. 그 외에 무슨 방법이 있지?
빌어먹을. 내가 오크 놈을 믿고 따른 게 문제다. 저놈이 거짓말을 할리 없다는 생각이 믿고 따랐지만 거짓말은 안 해도 잘못된 길을 가르쳐줄 수는 있는 건데.
“내가 뭘 해달라고 하지 않더냐?”
-하긴 했다만 전사로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라 무시했다.
이 개새... 아냐. 참자. 이놈 화나게 해봐야 나만 손해다. 설득해야해. 이놈을 설득하려면...
“그락카르. 네가 전사이듯 나도 전사다.”
-그래서?
“생각해봐라. 누군가가 너를 마음대로 움직여서 싸우려고 한다. 아무리 그게 너한테 도움 되는 거라고 해도 그럴 것인가?”
-카록께서 그런 거라면 그러겠지만 아니라면 그놈의 머리에 도끼를 박아줄 것이다.
그래. 그거야. 이새끼야.
“컥. 커커흑.”
피나온다. 얼마 못 버틸 거 같다. 빨리 설득하자.
“나도 전사다. 그락카르 네 도움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면 좋겠지만 나도 나름의 방식이 있지 않겠나?”
-....
“한 번만 내가 해달라고 했던 걸 해다오. 그걸 보고나서 아니다 싶으면 다시 간섭해라.”
-......
“전사로서의 부탁이다.”
-알겠다.
***
-아치..
턱.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평범한 아침...
-고은형이 널 납치해서 죽이려 한다. 적은 마취총과 총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알아서 해봐라.
은 아니구나.
< 78 그락카르의 즐거운 '오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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