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그락카르의 즐거운 '오늘' >
여전히 정신을 잃은 척 하고 모든 감각을 동원해 주변을 살폈다. 눈 떠서 본 게 아니기에 확신할 수 없지만 난 어떤 폐건물 안에 있는 것 같다. 바람이 없는 걸 보면 건물 안에 있는 게 분명 한 것 같다.
내가 묶여 있는 철기둥이 녹슬어 있는 것이나, 앉아있는 바닥 여기저기가 깨져있고 돌 부스러기가 주변에 마구 흩어져 있는 걸 보면 제대로 관리된 건물은 확실히 아니다.
건물 안 사람 수는 20명 정도 되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인기척과 마음소리 등을 따져봤을 때 거의 정확할 것이다.
저들이 내게 해둔 조치는 몸을 묶은 밧줄과 팔에 채워둔 수갑이다. 이 정도면... 해 본적은 없지만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밧줄이 질겨서 안 끊어진다면 쇠기둥을 뽑아서라도 나와야지.
여기저기서 들리는 마음을 들어보면 이들은 청부업자들이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살인, 납치, 감금, 폭행 등을 대신 해주는 그런 종류의 청부업자.
못 봤지만 보지 않아도 영혼색이 검은색에 가까울 거란 걸 예측 할 수 있다. 마음을 들어보면 사람 죽이는 것쯤은 예사로 했던 것 같으니까.
20명... 순수하게 폭력 대 폭력이라면 내가 죽을 이유가 없다. 여기 격투기 선수 20명이 있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런데 죽었다. 그락카르가 말을 걸었으니 확실하다.
마취총에 당하는 걸까? 그거라면 이해된다. 한 방 맞았을 뿐인데 바로 잠들었을 정도로 강하니까.
그러고 보니 그락카르도 날 보고 있었던 건가? 그 동안 왜 티를 안 냈지? 꿈속에서 날 봤다는 사실을 아예 신경 쓰지 않은 걸까? 그럴 수가 있나? 나에 대해 신경 안 써도 신경 안 쓰겠다는 생각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그락카르의 마음까지 공유하는 내가 모를 정도면 그락카르도 처음부터 날 보고 있었던 건 아닐 거다. 날 꿈속에서 계속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기엔 내가 비텔님에게 스킬을 받은 후 그 스킬의 쓰임새를 깨닫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착취하는 손’ 같은 건 며칠 지난 후에 우연히 사용법을 알아냈었으니까.
어떻게 된 걸까. 이번에 내가 죽은 후에 처음 날 보게 된 걸까? 그거라면 지금까지 나에 대한 언급이나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게 이해가 되는 데 말이야.
“아. 거의 오셨다고요? 그럼 깨워두도록 하겠습니다.”
날 잡아오라고 한 놈이 근처에 도착한 모양이다. 누굴까.
“야. 깨워라. 그 새끼 왔단다.”
“네. 형님. 깨우겠습니다.”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일어날 때 연기를 잘 해야 내가 깨어 있었다는 걸 안 들킨다. 잘하자. 뭔가를 내 코에 가져다댄다.
“크흑! 컥. 컥.”
“깨웠습니다.”
아. 내 코. 눈물이 나온다. 연기는 개뿔. 코에 뭔가를 대는 순간 톡 쏘는 향이 찌르고 들어왔다. 그건 참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기침을 해댔다.
눈물을 흘리며 겨우겨우 주변을 살폈다. 계속 감고 있다가 떠서 그런지, 눈물 때문인지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야. 그 새끼 와서 의자 찾을지도 모르니까. 사무실 가서 푹신한 거로 하나 가져와.”
“알겠습니다. 형님. 푹신한 의자 가져오겠습니다.”
“한 놈 더 가서 커피 같은 음료수 종류별로 다 가져오고. 돈 많은 놈들은 성질 지랄 맞으니까 미리미리 준비하자.”
“네. 형님. 음료수 종류 별로 가져오겠습니다.”
일어날 때 보였던 내 반응이 이상하진 않았는지 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신경은커녕 아예 내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폐건물이 맞았지만 떠올렸던 모양과는 달랐다. 짓다만 아파트 같은 걸 생각했는데 창고나 공장 같은 느낌이다. 여기저기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와 자재들이 널려있다.
무기로 쓸 만한 게 있나? 가장 먼저 무기를 찾았다. 양손검 훈련을 집중적으로 한 만큼 맨손으로 싸우는 것보다는 양손검 비슷한 걸 들고 싸우는 게 몇 배는 더 세다.
좀 두껍고 긴 철제 봉이 보였다. 너무 길어서 쓰기 힘들 거 같긴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나, 둘, 셋... 스물, 스물 하나. 스물한 명이다. 공장에 있는 사람은 날 제외하고 정확히 스물두 명이지만 스물두 번째 사람은 적이 아니다. 웬 여자가 옷이 다 찢어진 채 더러운 매트리스 위에 눕혀져 있는데 다리에 기둥과 연결된 밧줄이 매여 있다. 취급을 보면 저 여자가 이놈들과 한패일리는 없다.
여기저기 3~4명씩 뭉쳐서 흩어져 있다. 날 경계하는 의미로 그러고 있는 건 아닌 거 같고 그냥 친한 놈들끼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 같다. 아까 봤던 마취총은 안 보인다. 꽤 크고 길었기에 몸에 지니고 있다면 내 눈에 안 띌 리가 없다.
근처에 보관하고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들고 경계하고 있는 건 아니니 안심이다. 마취총을 찾아 들고 마취약을 장전해야 할 텐데 그걸 내가 두고 보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마취총만 조심하면 스물한 명 정도는... 어쩌면 그락카르의 도움 없이 오늘 일을 끝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긴 이미 그락카르가 말을 건 순간 변화는 일어난 거다. 원래는 유자차를 마셔서 쓰러졌겠지. 당연히 마취총에 대해 몰랐을 거고, 지금처럼 배후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오면 싸웠을 거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마취총에 당했겠지.
그러니 마취총에 대해 아는 지금의 ‘나’는 ‘오늘’을 반복하며 죽었던 ‘나’와는 다르다는 거다.
그래. 오늘 끝내자. 오늘 끝내고 기분 좋게 내일을 맞이하는 거야.
건물 밖으로 나갔던 놈들이 의자와 음료수 등을 가져온 후에도 배후는 한참 나타나지 않았다. 거의 왔다더니 뭐가 거의 온 거야.
건물 안에는 말하는 이 하나 없이 침묵만 감돌았다. 난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고 지형을 숙지했다. 직접 싸워본 적은 없지만 그락카르로서 수십 번의 전투를 경험했다. 전투에서 주변 환경은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락카르도 전투를 할 때 주변을 살피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을 아주 잘했다. 생각하고 움직인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주변 환경을 이용했다. 물론 나한테 그런 본능은 없으니까 미리 익히고 어떻게 이용할지 준비해야한다.
“왔답니다. 형님.”
전화를 받은 녀석이 두목에게 말했다.
건물 밖에도 패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망보는 녀석들이라든가 대기조라든가 그런 게 있는 모양이다. 좋은 정보를 알았다. 건물 안만이 아니라 바깥도 정리해야 하는 건 좋은 정보다. 건물 안을 처리했다고 방심하다가 바깥 놈들에게 뒤통수 맞는 일은 없도록 조심하자.
“준비해라.”
“네. 형님. 준비하겠습니다.”
덜컹. 그르르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입구의 문이 열렸다.
문으로 세 놈이 들어왔다.
“시발... 또 너냐.”
나도 모르게 말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배후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고은형 그리고 저번에 봤던 고은형의 덩치 둘.
또 저놈이네. 저놈은 왜 이리 날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만났을 때 백치로 만들든가 죽이든가 했을 텐데. 물론 난 미래를 읽을 수 없으니 그때 미리 아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나중에 날 귀찮게 할 것 같다고 이놈저놈 전부 죽이거나 백치로 만들고 다닐 수도 없잖아.
그런데 이 새끼가 어떻게 사람들을 시켜 날 잡아온 거지? 아. 그거군. 저 두목 놈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 내가 ‘약속의 무게’로 저놈에게 하지 못하게 만든 건 나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거니까. 나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냥 잡아오게 시키는 건 되는 거였나.
그런데 이렇게 다짜고짜 납치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때는 경찰에 신고하거나 고소만 못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정도로 약속을 정하는 게 당연했었다. 저놈이 이런 미친놈일 줄이야.
“사장님. 오셨습니까.”
“그래요. 잠깐만요. 저 여자는 뭐죠? 왜 여기 있어요. 나 온 거 누가 알면 안 되는데.”
고은형은 두목과 인사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바로 여자에 대해 물었다.
“아.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통나무로 쓸 년이거든요. 내일 이 시간엔 세상에 없을 년입니다.”
“통나무요? 생긴 거 꽤 괜찮아 보이는데 아깝지 않아요?”
그새 여자를 살핀 모양이다. 하긴 여자 밝혀서 강간까지 하는 놈인데 어련하겠어.
“원래 비싸게 팔던 년인데 자꾸 사고 쳐서 말입니다. 통나무로 팔아서 손해를 메꾸고 본보기로 눈은 잘 장식해서 다른 년들 보라고 기숙사에 전시해둘 생각입니다.”
“그래요? 흐음...”
기숙사가 진짜 기숙사는 아니겠지. 매춘 시키는 여자들 가둬두는 곳인가.
“며칠 즐기시겠습니까? 통나무 일정은 뒤로 미뤄도 됩니다.”
“음.. 일단 저 새끼 처리하고요. 그 전엔 즐길 수가 없어서.”
퍽!
고은형이 나에게 다가와 구두 신은 발로 얼굴을 찼다. 온힘을 다해 찼는지 꽤 아프다. 한 방으로 끝낼 생각이 없는지 본격적으로 양손과 양발을 마구 휘둘러 날 패기 시작했다.
퍼버벅! 퍼퍼퍽!
아무리 맷집이 좋아졌어도... 이정도로 맞으면 아프고 짜증난다. 원래는 뭘 원해서 날 잡아왔는지 알아서 말하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단순 원한인지, 다른 목적이 있는지 말이다. 계획을 바꾸자. 나중에 직접 물어보자.
“흡!”
힘을 강하게 주자 수갑과 밧줄이 후두둑 끊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내게 날아오던 고은형의 발을 잡았다.
“뭐.. 뭐야!”
뭘 거 같냐. 양손으로 잡고 힘을 줬다.
뿌득.
“끄아아아아악!”
고은형의 무릎이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였다. 옆에 있던 두목이 말없이 발로 내 머리를 차왔다. 빠르고 정확하지만 내겐 전부 보이고 느리다. 손으로 발을 툭 쳐냈다. 두목이 균형을 잃고 크게 흔들렸다.
그대로 힘을 싫어 옆구리 위쪽을 찼다.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두목이 뒤로 날아갔다.
“형님!”
“죽여!”
흩어져 있던 남자들이 날 향해 달려왔다. 맨손으로 달려오는 놈도 있었고 작은 주머니칼을 손에 쥔 자, 막대기, 드라이버, 렌치 등 다양한 것을 들고 달려왔다. 나도 미리 봐뒀던 철제 봉이 있는 곳으로 갔다.
플라스틱 끈으로 몇 개가 뭉텅이로 묶여서 고정되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플라스틱 끈을 잡아 뜯었다. 그리고 철제 봉을 집어 들어 날 향해 달려오는 놈들을 향해 휘둘렀다.
텅! 우득.
“컥!”
온힘을 다해 휘두른 철제 봉을 다리에 맞은 놈이 휘릭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땅에 떨어졌다.
텅. 텅. 텅. 텅.
날 향해 덤벼오던 놈들은 내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철제 봉에 맞아 이리저리 튕겨나갔다.
오늘은 힘을 자제할 생각이 없다. 전부 죽이겠다는 각오로 온힘을 실어 때렸다. 나를 죽이려는, 아니. 이미 수십 번이나 죽여 왔던 놈들이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힘을 아낄 필요는 없지.
내 인생 처음으로 사람을 죽일 각오로 싸웠다. 이미 몇 명에게 치명상을 입혔지만 별다른 거부감이나 위화감은 없었다.
이미 그락카르로서 수천 명을 죽였다. 그때 느꼈던 도끼가 살을 가르는 그 생생한 감각. 그걸 떠올리면 지금 내가 철제 봉을 휘둘러 뼈를 부러뜨리는 정도는 양반이다.
터텅! 터터터텅!
상대가 되지 않는다. 철제 봉이 휘둘러질 때마다 한 놈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이거 정말 그락카르의 도움 없이 ‘오늘’을 끝낼 수 있겠는데?
탕! 탕! 탕!
푸확!
어? ... 굉음과 함께 어깨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아아아아아악!”
찾아오는 격통. 그락카르로서 많이 느껴봤기에 고통에는 익숙하지만 그 고통을 느낄 때마다 항상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오늘 소원을 푸는 구...는 시발! 총이라니! 여기가 미국이냐!
건물 안이라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서 어디서 쐈는지 바로 찾지 못했지만 좁은 곳이기에 고개 몇 번 돌리지 않고 찾아낼 수 있었다. 두목이었다.
입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거 보면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찌른 게 분명하다. 움직이기 힘들 텐데도 일어나서 권총을 들어 나를 겨누고 있다. 보통 아픈 게 아닐 텐데.. 저 놈도 보통 놈이 아니다.
“으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철제 봉을 두목에게 던지고 그대로 낡은 기계 중 하나의 뒤로 몸을 숨겼다.
“이 시발새끼들아! 한국에서 총이 말이 되냐!”
악을 썼다. 마취총까진 어떻게 이해하겠는데 권총이 말이 되냐. 이래서 내가 죽은 거였구나. 오늘도 또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총이 상대인데 그런 생각이 안 들면 오히려 이상하지.
조용히 ‘그락카르. 총이다. 마취총과 총 두 개가 있다고 나한테 말해줘야 한다. 꼭이다. 그래야 이 반복을 빠져나갈 수 있어.’라고 중얼거렸다. 이러면 내일의 ‘오늘’에서 또 몰라서 당해는 상황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야! 나가서 애들 불러오고 마취총 가져와!”
시발. 계속 여기 있다간 죽는다. 마취총 한 방이라도 맞으면 그대로 쓰러질 거다. 쓰러진 날 가만 놔두진 않겠지. 숨어 있던 기계에서 나와 달렸다.
탕! 탕!
다른 엄폐물 뒤로 숨을 때까지 두목이 두 발을 쐈지만 빗나갔다. 처음에도 세 발을 쏴서 한 발만, 그것도 어깨에 겨우 맞췄다. 부상이 심해서인지 원래 못 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행이다.
손에 잡히는 거 아무거나 잡아 두목을 향해 던졌다. 고개 내밀었다가 총 맞을까봐 보지도 않고 대충 던졌더니 맞지를 않는다. 그래도 잡동사니가 많아서 계속 집어서 던졌다.
퍽.
“윽.”
두목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다. 엄폐물에서 튀어나와 최대한 몸을 수그리고 두목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탕! 탕! 탕!
파학! 푹!
이새끼 갑자기 왜 이리 잘 쏴!
하나가 팔을 스치고 지나갔고 하나가 오른다리에 박혔다. 순간적으로 오른다리에 힘이 빠지며 균형을 잃었지만 땅을 손으로 짚으며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왼다리를 구부렸다가 강하게 땅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퍽!
콰드득!
두목 얼굴에 박치기를 했다. 얼굴 뼈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두목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퍽!
우득.
혹시 몰라 총을 잡고 있는 팔을 주먹으로 쳐 부러뜨렸는데 완전히 정신을 잃었는지 죽었는지 미동도 없었다. 두목 손에서 총을 빼들었다.
몇 발 남았지? 모르겠다. 두목놈이 8발인가 9발인가 쏜 거 같은데 난 이 총에 총알이 몇 발 들어가는지 모른다.
“쏴! 형님을 구해!”
또 ‘쏴.’라는 소리다. 아까는 저 소리 듣고 마취총 맞고 쓰러졌었지. 주변에 숨을 데가 없다. 급히 두목의 목을 잡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들어올렸다.
푹푹.
두 발이 두목 몸에 박히고 3~4발이 나와 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발, 마취총이 도대체 몇 개야.
탕! 탕!
“악!”
“아악!”
운 좋다. 두 발 쏴서 두 발 다 맞췄다. 그래.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라면 이 정도는 쏴야지.
“총 맞기 싫으면 다 꺼져!”
“지랄 마!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무조건 죽는다!”
탕!
대답한 녀석한테 쐈는데 이번엔 빗나갔다. 다시 쏘려는 데 그놈이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나도 급히 몸을 숨겼다.
휙! 휙!
마취탄 몇 개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리가 있던 공간을 지나갔다.
방금 소리 지른 놈이 저기 누워있는 두목 대신 남은 놈들을 지휘하는 것 같았는데 아쉽다. 그놈을 맞췄으면 일이 쉬워졌을 텐데.
“총을 이길 수 있을 거 같냐!”
“총알 4발 남은 거 다 안다! 그거 떨어지는 순간 넌 죽는 거야!”
4발 남았냐. 고맙다. 몰랐는데.
그런데 너무 적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놈까지 다 들어왔는지 꽤 쓰러뜨렸는데도 열대여섯 놈이 아직 남아있다. 내가 한 발에 4~5명씩 맞추지 않는 이상 그 놈들을 다 죽이는 건 무리일 거고, 오른다리에 총을 맞아 기동력도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마취총을 피하며 때려잡기도 요원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락카르. 마취총, 총, 고은형이다. 잘 기억해. 마취총, 총, 고은형이란 단어를 꼭 나한테 말해.”
상황을 정리해서 나한테 필요하겠다 싶은 단어를 그락카르한테 말했다. 그 무식한 놈이 긴 문장을 기억할 거 같진 않으니까. 짧게 단어로 만들어줘야지.
저 세 단어면 충분하다. 그락카르가 말하는 순간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고은형이란 단어를 들으면 그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총과 마취총을 말하면 그 두 가지 무기에 의해 내가 당한다는 것도 알게 될 테니 조심해서 싸우겠지.
그 후 30분을 더 대치하며 싸웠지만 결국 마취총에 맞았다. 끝났다. 역시 마취제를 잔뜩 탔는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 순간...
‘오늘은 꽤 잘 싸웠다. 인간.’
그락카르의 말이 들려왔다. 너 이새끼. 더 말할 수 있었냐?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한 거냐. 아니. 그보다 너 왜 이리 말을 많이 해. 나 도대체 몇 번 죽은...
< 77 그락카르의 즐거운 '오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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