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크 더 오크-76화 (76/228)

< 76 그락카르의 즐거운 '오늘' >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처음 겪는 상황이지만 익숙한 상황이다. 그락카르가 내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가 죽어서 ‘오늘’을 반복했을 때다. 그렇다는 건...

‘나 죽어?’

죽는 거야? 왜? 내가 왜 죽지? 무슨 일로?

...

.....

.......

.........

많네. 잠깐 고민해봤는데 내 죽음에 관련되어 있을 것 같은 일들이 너무 많다. 계약 중개일이나 비텔교 쪽을 생각하면 그럴 일이 무궁무진하다.

짜증난다.

그락카르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말은 이미 수십, 혹은 수백 번 죽었다는 말이다. 에이씨. 죽는다는 걸 안 순간 당황하긴 했지만 조금 짜증나는 정도가 다다.

내가 이래봬도 죽음의 스페셜리스트다. 나보다 많이 죽어본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 그락카르로서 수십 번을 죽었다. 그것도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심장이 부서져서 죽었다. 그런 내가 죽는다고 해서 당황할 것 같아? 아니 죽으면 당황할 수 있기는 하지. 하지만 또 살아날 걸 아는데 당황할 거 같아? 절대 아니지.

그락카르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건 죽어도 오늘이 또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크게 당황할 필요 없다.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그리고 어차피 오늘은 그락카르만 기억할 테니 내가 힘들어할 이유도 없잖아?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도 나한테 ‘오늘’은 단 하루일뿐이니까.

그락카르는 많이 힘들 거다. 너도 힘들어봐라. 내가 너 살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너도 내가 했던 것만큼 고생해라.

그래도 조심하자. 최대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지. 원래대로라면 무조건 죽는 상황이겠지만 그락카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그걸 틀어버릴 가능성을 얻었다는 뜻이니까.

“유자차 한 잔 하세요.”

길거리에서 유자차를 나눠주며 교회를 알리는 사람 중 하나가 내게 유자차를 가져왔다. 평소라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받아 마셨겠지만 지금은 죽는 걸 안 직후기에 심란해서 누굴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한 번 마셔보세요. 아주 맛있어요.”

“방금 잔뜩 마셔서 힘들어요. 성의만 받을게요.”

“어유. 소화에도 좋아요. 가져가세요.”

이 아줌마가 왜 이리 끈질기지? 유자차 나눠주는 사람들은 여러 번 봤지만 이렇게 끈질긴 사람은 처음이다. 내가 쳐다보니 아줌마 눈빛이 조금이지만 흔들렸다.

‘아이. 빨리 가져가서 마셔. 네가 마셔야 50만원 받을 수 있단 말이야.’

그 순간 아줌마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50만원... 유자차 나눠주는 일로 50만원씩이나 받을 리는 없고 이 아줌마 뭔가 이상한 일에 관련되어 있구나. 그 일은 아마도 내가 죽는 것과 관련 있겠지.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받아들었다.

“그래요. 쭉 들이켜요. 쭉.”

들고 그냥 지나갔다. 이 아줌마가 어디서 약을 팔아. 이상한 거 다 아는데 내가 마실 거 같아?

“어어? 어디 가세요? 여기서 마셔요. 여기서.”

당황했는지 이상한 소리를 한다. 아줌마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아줌마 마음을 못 들었어도 엄청 의심했을 걸요. 그리고 아줌마 얼굴 기억했어요. 지금은 그냥 가지만 다음에 두고 봅시다. 물론 그것도 오늘 살아나야 소용 있는 일이겠지만.

사람 없는 골목으로 가서 바닥에 유자차를 쪼르르 쏟아봤다. 천천히 쏟으며 살피고 빈 잔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딱히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 하긴 뭘 탔어도 겉으로 표 안 나게 탔겠지.

탁. 휙.

골목 입구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 보니 평범한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골목에 들어오려다가 급히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저 인간들이 게이 커플이라서 엄한 짓 하려고 골목에 들어오다가 내가 있어서 몸을 돌린 게 아니라면 날 미행하고 있는 놈들이겠지.

그래도 날 바로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유자차에 독 타서 죽이는 건 좀 이상하잖아? 수면제나 마취제 같은 걸 집어넣었겠지. 날 미행한 저 인간들도 유자차를 마신 내가 쓰러지면 데리고 가려는 거일 가능성이 높고.

날 납치하려고 하는 자라. 누굴까...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내가 일을 벌이긴 정말 많이 벌였구나.

비텔교에도 계약 중개 쪽에도 날 납치할 이유가 넘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둘 다 이미 나와 만났던 사람이 아니라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도 날 납치할 이유가 있다는 게 문제다.

일단 집으로 가자. 이 동네는 낯설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군가를 상대하기 힘들다. 일단 적아구분이 안 되는 게 가장 문제다.

집근처는 모텔촌이라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익숙하기도 해서 적아 구분을 쉽게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 동네는 내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고 날 미행하는 놈들을 잡을 수도 있겠지.

잡아서 배후를 심문해야겠어. 심문할 방법이야 차고 넘친다. ‘약속의 무게’를 써도 되고 ‘착취하는 손’을 써서 고문을 해도 된다. 뭘 해도 고문이겠네. 어차피 날 납치하려는 놈들이니 걱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도로변으로 이동해 택시를 기다렸다. 잘 안 온다. 택시 잡기 정말 힘들다니까. 겨우 하나 잡아탔다. 집 위치를 말해주고 옆과 뒤를 살폈다.

설마 유자차 한 잔 안 마셨다고 미행을 포기하진 않았겠지. 이대로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면 그것도 나름대로 짜증날 거 같다. 유자차가 날 납치하기 위한 준비의 모든 것이었던 어설픈 놈들에게 죽었다는 뜻일 테니까.

딱히 눈에 띄는 차량은 없다. 멀리서 쫓아오는 걸까?

생각해보면 ‘비텔의 귀’ 성능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이런 고생할 필요 없다. 날 납치하고 죽이려는 자들의 생각을 전부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생각을 전부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텔의 귀’는 너무 제한적이다. 욕망, 욕구를 가득 담은 생각이 아니면 들을 수 없으니까. 1단계라고 적혀 있으니까 2단계가 되면 전부 들을 수 있을까?

‘비텔의 귀’가 모든 생각을 들을 수 있다면 기차나 버스를 탔을 거다. 그런 곳에서는 그들도 마음껏 미행을 해올 테고 긴 이동시간 동안 가까이 다가온 그들의 생각을 읽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운 좋으면 배후도 한 번에 알아낼 수 있을 테지.

그걸 못하니까 택시에 탄 거다. 물론 지금의 ‘비텔의 귀’로도 운 좋으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지만 모든 생각을 듣지 못하기에 언제 어디서 습격 받을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정면에서 주먹가지고 덤비는 애들은 몇 십 명이 덤벼도 무섭지 않지만 뒤에서 약, 독 등을 쓰는 인간들은 무섭다.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약이나 독에 당하면 끝이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100만원이야. 제발 가만있어라.’

운전기사의 마음이 들려왔다.

운전기사도 한 패였구나. 그러고 보니 택시가 가는 길이 이상하다. 우리 집으로 가려면 저쪽으로 가야 하는데 왜 이쪽이지? 택시가 한 패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뒤따라오는 차가 없는지만 살폈더니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흠... 어떡하지? 그냥 이대로 가서 정면 대결을 해? 라는 생각은 그락카르 같은 정말 멍청한 생각이지. 이미 수십 번쯤 날 죽인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랑 정면으로 붙어봐야 또 죽을 거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는다.

“손님. 주행 중에 문 열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택시기사가 태연히 말한다. 이 아저씨는 아까 유자차 주려던 아줌마보다는 연기 잘하네. 마음을 못 들었으면 전혀 눈치 못 챘겠어. 잠깐 기다리자.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지금이다.

퍽.

문 유리를 팔꿈치로 쳤다. 가볍게 부서졌다.

“어어? 손님!”

무시하고 그대로 부서진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야! 야 이 새끼야! 가지마!”

갈 거야. 이 새끼야.

부우웅. 끼익!

멀리서 갑자기 차 몇 대가 속력을 내서 달려오더니 근처에 멈춰 섰다. 내 앞과 뒤 사방에 멈춰선 차들, 차종이 다양한데다가 꽤 멀리서 쫓아오고 있었다. 저러니 아무리 살펴도 못 찾았지. 이 치밀한 새끼들. 국정원이라도 되나? 납치의 스페셜리스트들이네 아주 그냥.

차 문이 열리고 건장한 남자들이 나온다. 주변에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있기는 한데 신경 끄고 일을 진행하려는 모양이다. 이런데서 싸우기엔 나도 좀 그렇다. 누가 찍기라도 하면 내 얼굴 다 팔릴 텐데 그건 좀... 죽으면 상관없는데 살아남으면 그게 또 문제지.

오늘 생긴 문제는 오늘 안에 전부 해결해야 한다. 은근슬쩍 적당히 살아남아서 내일로 미루면 일이 더 복잡하게 커질 가능성이 크다. 적당히 넘어갈 거 같으면 자살이라도 해서 오늘을 또 반복하는 게 좋다. 몇 번이고 시도할 수 있는 ‘오늘’ 완벽하게 해결한 뒤에 내일로 넘어가야 깔끔하지.

일단 사람 없는 곳으로 가자. 골목으로 달렸다. 차에서 내린 놈들이 날 쫓아온다. 마음먹으면 완전히 따돌릴 수 있을 거 같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대충 살아남아서 내일로 넘어가면 안 된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달렸다. 그리고 길이 막혀 있는 골목을 발견했다.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저기다.

골목으로 들어가 날 쫓아오는 남자들을 기다렸다. 자. 한 번 날뛰어보자. 다 잡아서 배후를 캐겠다는 각오로 온 힘을 다해 싸울 거다.

“쏴!”

응? 뭘 쏴? 두 놈이 앞으로 나온다. 뭐야. 저거 총 아냐? 급히 몸을 날렸다.

퓩퓩!

몸을 날렸는데도 한 발을 맞았다. 몸에 주사기 같은 것이 꽂혔다. 마취총인가? 이건 좀 문젠데. 마취에 쓰러지기 전에 쓰러뜨려야...

풀썩.

***

“네. 네. 물론입니다. 긁힌 상처 하나 안 내고 잡아놨습니다. 아. 좀 때려도 괜찮다고요? 하하. 그건 사장님 보시는 앞에서 해야죠. 저희끼리 재미 봐서야 되겠습니까.

아. 시발... 마취총은 생각도 못했다. 그거 불법 이야. 이것들아! 효과 직빵이네. 나름 그락카르의 힘과 체력을 전해 받아서 마취총에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쓰러지다니.

“천천히 오시죠. 사장님한테 워낙 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코끼리도 쓰러뜨릴 만큼 약 탔습니다. 오늘 하루는 푹 잘 겁니다.”

이 썩을 놈들이. 코끼리도 재울 정도로 약을 쓰면 보통 사람은 죽어!

“아. 물론 바로 깨울 수도 있습니다. 깨우는 약도 있으니까요. 편할 때 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놈이 누군지... 아. 죄송합니다. 안 묻겠습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절대 누군지 궁금해 하지 않기로 하고서 말입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놈들한테 납치당한 거였군. 뭔가 자존심 상한다.

“그락카르. 듣고 있겠지?”

조용히 속삭였다. 분명 듣고 있을 거다. 내가 그랬으니까.

“너도 이 반복을 풀고 싶겠지. 그러니 잘 들어. 내일 나한테 마취총을 조심하라고 이야기해. 알겠지?”

내일의 ‘오늘’이 되면 난 오늘 있었던 일을 기억 못하겠지만 그락카르는 기억할 거다. 그러니 그락카르를 이용해야 한다. 그락카르를 이용해서 조금씩 발전해나가면 되는 거다. 그러면 언젠가는 완벽하게 ‘오늘’을 클리어 할 수 있을 거다.

***

역시 멍청한 인간이다. 오늘은 좀 다른가 싶더니 또 잡혔다. 그냥 보자마자 죽여야 하는데 왜 도망가지? 이해가 안 된다.

“그락카르. 듣고 있겠지?”

듣고는 있다.

“너도 이 반복을 풀고 싶겠지. 그러니 잘 들어. 내일 나한테 마취총을 조심하라고 이야기해. 알겠지?”

멍청한 인간. 긍지 높은 오크 전사인 내가 인간의 말을 들을 것 같나?

어림없다.

< 76 그락카르의 즐거운 '오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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