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크 더 오크-74화 (74/228)

< 74 다시 시작되는 반복 >

전화벨이 울렸다.

“유나?”

바로 받았다.

“어. 유나야.”

“안녕하세요. 아저씨.”

“어어.. 그래.”

평소의 유나 목소리가 아니다. 발랄하던 하이톤이 아니라. 톤이 상당히 다운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침울한 느낌도 아니고 뭔가 진중한 느낌. 무슨 일이지?

“고민 상담 좀 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고민 상담이라... 내가 그런 걸 해줄 깜냥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들어는 줘야지. 어린애가 고민 상담을 해달라고 전화했는데 ‘내 알바 아냐!’라고 끊을 수 없지 않나.

“어제 예던의 전략기획본부장이란 사람이 찾아왔었어요.”

“김진서?”

“어? 알고 계시네요?”

김진서가 유나를 찾아가다니. 갑자기 예던이 발레에 관심을 가졌을 리는 없고 이유는 비텔교 밖에 없다. 역시 그 5억 헌금 김진서였구나. 어제 어울리지 않게 5만원만 헌금했을 때가 있는데 그때 유나는 찾아간 거겠지. 5만원은 비텔교 신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거고.

“응. 사업상 아는 사이야.”

“그렇구나.”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고민이 생긴 거야?”

“비텔님의 성전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비텔님의 성전? 성전... 그걸 왜? 딱히 성전 같은 거 없어도 기도할 수 있고, 헌금도 바칠 수 있는데 왜 성전을 만들려고 하는 거지? 비텔님 모습을 모르니 신상 같은 걸 세울 수도 없고, 비텔님의 말씀이라곤 ‘자유로워져라!’밖에 없으니 설교를 할 사람도 없을 텐데 말이야. 필요 없지 않나?

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지. 음. 그럼. 당연하지. 교주로서 성전은 반드시 만들고 싶었습니다. 비텔님. 절대 ‘그딴 거 필요 없지 않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구심점 없이 민간신앙처럼 퍼지고 있는 비텔교를 위해 신도들이 모여서 서로 의지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그거 좋은 일이네. 비텔님께서 기뻐하시겠어.”

“그렇겠죠?”

모르겠다. 비텔님은 우리 세계의 신이 아니니까. 아직 그락카르의 세상에서 성전이나 신상 같은 건 본적이 없다. 오크가 무식해서 그런 걸 안 만드는 건지, 아니면 신들이 그런 걸 싫어해서 그런 걸 만들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김진서가 그런 걸 만드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사실은 이해 못하지만 돈 많은 재벌이니까. 돈이 썩어나... 아니지. 흠흠. 비텔님은 숭배할 수밖에 없는 분이기에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재벌2세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나에게 그걸 말하러 왔다?

유나가 비텔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아이란 걸 알았구나. 하긴 김해역도 찾아낸 전도의 시작점을 김진서가 못 찾아낼 리 없지. 나한테 찾아오지 않은 걸 보면 비텔교의 시작이 내가 아니라 유나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지만 유나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절 비텔님의 첫 번째 딸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러면서 저한테 허락과 협조를 구하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난 그런 걸 허락할 능력이 없는데. 진짜 허락을 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아저씨한테 물어봐야 할 텐데.”

나한테 물어봐도 답은 없다. 난 유나만큼 비텔님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유나가 나보다 비텔님에 대해 더 잘 알지도. 유나는 비텔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적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고민인가? 딱히 고민거리가 아닌 거 같은데...

“꼭 만들고 싶어요. 비텔님의 첫 성전이라니. 그걸 만드는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기 싫어요. 아. 물론 아저씨가 하시겠다면 양보할 수 있어요.”

“난 괜찮으니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네. 헤헤. 그런데 성전을 만들고, 신도들을 만나고 하면서 비텔님의 사제로서 역할을 다 하려면 수녀님들처럼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사제로서의 생활만 해야 하는 걸까요? 발레도 너무 좋고, 엄마도 너무 좋은데... 그래도 모든 걸 바쳐 비텔님을 모셔야만 비텔님께서 좋아하시겠죠?”

아빠는 왜 빼는 거니. 아빠가 슬퍼하겠어...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유나에겐 심각한 상황인데 잡생각하지 말자.

이거였구나. 고민은 이거였다. 성전은 이미 만들기로 결정한 듯싶다. 그리고 비텔님의 사제로서 행동하고 싶은 마음도 든 거겠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인생도 버릴 수 없는 거다. 당연한 거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발레에 대한 유나의 열정은 비텔님을 움직여 치료하라고 나에게 시킬 정도로 컸다. 그런 발레를 쉽게 포기할 수 없겠지.

사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도 비텔님의 뜻을 모르니까. 비텔님께서 신부나 수녀처럼 인생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내가 유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내 마음에 있는 말이다.

“고민하지마라.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

“하지만 비텔님의 사제가 됐는데 다른 삶을 살면서 사제의 역할까지 하는 건...”

“유나야.”

유나의 말을 끊었다.

“네.”

“너 참 바보 같구나. 이상한 고민을 하고 있어.”

“네? 이상..한가요?”

“그래. 정말 이상해. 넌 얼마 전 비텔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어. 그분이 뭐라고 하셨지?”

“자유로워져라라고 하셨어요.”

“그래. 자유로워지라고 하셨어. 비텔교에 헌신하라고 하신게 아니라 자유로워지라고 하셨어. 그러니 넌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걸 하면 된다. 그게 비텔님께서 원하시는 거야. 비텔교 사제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니? 그럼 해. 그리고 발레를 하고 싶어? 그것도 하면 된다. 어머니와 지내고 싶으면 지내면 되고, 다른 걸 하고 싶으면 하면 돼.”

“아...”

“그게 비텔님의 말씀을 따르는 거다. 네가 만약 다른 하고 싶은 것을 버리고 사제로서 산다면... 오히려 비텔님께서 싫어하시지 않을까? 분명 자유로워지라고 하셨는데 넌 얽매이는 삶을 선택한 거잖니.”

“그런... 건가요?”

“유나야.”

“네.”

“자유로워져라.”

“...... 네!”

마지막 대답 목소리 톤이 원래의 유나 목소리였다. 내 말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그분의 딸이 허락했습니다. 협조도 최대한 해주겠다고 하는 군요.”

유나의 연락을 받은 김진서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아버지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 아이의 허락이 중요한 거냐?”

“보고서 드렸잖습니까. 그분의 기적을 가장 처음 받은 아이입니다. 그분의 이름도 그 아이의 입을 통해서 처음 알려졌고요.”

“그 기적이란 게 좀... 그냥 암이 나았다는 것뿐이다. 암은 현대의학으로도 얼마든지 나을 수 있어.”

“하루아침에 싹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수술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입원해있었을 뿐인데 말이죠. 거기에 그 아이는 며칠 뒤 다리 절단 수술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 나은 것 같다면서 재검사를 요청했죠. 검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자신이 나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버님도 그분의 힘을 체험하고 있을 텐데요.”

김진서의 아버지, 예던의 회장인 김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텔에게 기도를 하자마자 몸이 건강해지는 기적은 자신도 체험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 건강해지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도 비텔의 존재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고서를 읽었기에 유나란 아이가 비텔교의 시작점이란 것도 안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꼭 유나란 아이와 함께 해야 하는 거냐? 우리 예던의 이름으로, 아니면 네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다. 그 아이를 내세우면 돈은 우리가 내면서도 모든 공로는 그 아이가 갖게 될 거다.”

그게 싫었다. 발레리나를 꿈꾸는 어린 여자애일 뿐이다. 부모님도 그저 적당히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대한민국에 몇 만 명은 있을 듯한 평범한 여자아이. 유나는 그런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비텔교의 책임자로 내세울 필요가 있을까? 그냥 비텔교라는 미래가 기대되는 교단을 우리가 먹으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김건영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교단의 정상에 예던이 위치한다. 아직 제대로 된 종교로 자리 잡지 못한 비텔교의 기초를 예던이 직접 잡고 예던이 나서서 교세를 확장시킨다. 손쉽게 교단의 수뇌부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망상을 펼치던 김건영의 생각이 김진서의 말에 의해 끊겼다.

“되지도 않을 생각하지 마시고 꿈 깨세요.”

“너...”

김진서가 독설을 퍼부었다.

“교단을 차지하려는 생각을 하고 계시겠죠. 그 무한할지도 모를 권력을 갖고 싶으신 거겠죠.”

“...”

김진서는 김건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욕심. 김건영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렇기에 몸이 아픈 자신의 딸을 망나니라고 소문난 구원 상사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거다.

“비텔교는 실제로 현세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신께서 계시는 종교입니다. 그걸 한낱 평신도에 불과한 아버지께서 그분의 첫 번째 딸을 제치고 차지하시겠다고요? 신벌을 받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현생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까지 고통 받고 싶으신 모양이죠?”

“으음...”

다른 신을 들먹이며 말했으면 코웃음 쳤을 김건영이다. 그는 신을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 비텔의 힘은 그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믿는 것만으로도 몸이 건강해지고 헌금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돈이 사라진다.

큰 기적은 아니지만 작은 기적을 매일 경험하고 있는데 어찌 비텔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김진서의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비텔교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 모든 힘을 다해 비텔교의 전파를 지원한 최초의 기업으로 남으면 되는 겁니다. 비텔교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예상할 수 있으시겠죠.”

실제로 확인 가능한 기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종교, 다른 사람이 행하는 기적을 구경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기적을 행하고 받을 수 있는 종교.

“세계 최대.”

비텔교는 무조건 성공한다. 지금은 비록 수가 적지만 기적이란 것이 기록상에만 남겨진 다른 종교와 달리 현재 진행 중인 기적이 있는 종교다. 누구든 이 기적을 경험하고 나면 비텔교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텔교를 처음 지원한 기업이란 것만으로도 비텔교 교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것입니다. 그분의 첫 번째 딸인 그 아이의 지지도 얻을 수 있겠죠. 그렇게 되면 생활필수품을 주로 파는 우리 회사의 특성상 매출이 늘어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리고 한국 시장에만 의존하던 우리가 비텔교가 퍼진 곳이라면 세계 어느 곳이든 쉽게 진출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우리 예던이 한국 재계 30위이던가요?”

“그쯤 되지.”

김건영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직접 일군 회사가 한 국가의 30위 안에 들어가는 기업이 되었다. 그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비텔교가 커진다면 국내 1위, 아니 세계 1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필요 이상의 욕심은 내지 마세요. 모든 걸 잃고 싶지 않으시다면.”

“... 알았다.”

“그럼 성전 건축은 허락하신 거로 알겠습니다.”

“이번 주 내로 회의를 소집하마. 돈은 얼마가 필요하냐.”

아직 이사회를 열어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함에도 김건영은 비텔교 성전 걸립이 결정 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힘이 있었다. 예던은 그의 것이니까. 이사회는 그저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의식이나 다름없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최초의 성전이자 최대의 신전이란 타이틀은 좋은 거니까요.”

“사내 유보금의 30%를 지원하마.”

“감사합니다.”

예던의 사내 유보금은 2조. 그 중 30%라면 6,000억이다. 야망이 큰 김건영이지만 그 큰 야망만큼 돈을 써야 할 때는 과감하기도 했다.

< 74 다시 시작되는 반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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