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실연과 분노 >
선아연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받아주세요. 그때는 정말 죄송했어요.”
“이게 뭐죠.”
물어봤지만 뭐일지는 뻔하다. 돈이겠지.
나오기 전에 선아연이 왜 날 보자고 할까 몇 가지 생각해본 게 있다. 그리고 이건 예상한 몇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다. 너무 뻔해서 그런가, 아니면 그락카르로서 느낀 상실감이 아직도 남아있는 탓인가.
짜증난다.
일단 집어 들어 열어봤다. 혹시나 돈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역시나 돈이 맞다. 천만원짜리 수표 3장이 들어있다. 꽤 무리했네. 아직 어려서 돈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말이야.
아무 말 없이 봉투를 테이블위에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향했다.
“저... 저기요!”
선아연이 당황하며 날 불렀지만 무시하고 나왔다.
햇빛이 부시다. 쭉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집 근처로 오라고 하길 잘했다. 멀리 나갔으면 귀찮을 뻔 했다.
“큭.”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3천만원을 거부하다니. 많이 컸네. 한상.
예전이었으면 절대 무시하지 못했을 돈이다. 그 때 고은형과 합의할 때라면 덥석 받았을 텐데 말이야.
아니. 어제나 내일이었으면 받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앞으로 얼굴 안 볼 거 돈이라도 챙기면 좋으니까. 하지만 오늘이라서 거절했다. 아마도 그락카르로서 느꼈던 상실감과 분노로 인해 아직도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거겠지.
전화기가 울린다. 당연히 안 받았다. 문자가 연이어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절대 한상씨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냥 그때 해고당하실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게 죄송해서...
-그 돈은 저 때문에 피해 입은 한상씨께서 당연히 받으셔야 하는 돈이에요.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제가 받은 합의금 중 일부니까 부담스러워 하실 필요도 없어요.
답장할까? 다 잊을 테니 그 쪽도 다 잊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고?
됐다. 그냥 마음고생 좀 더 하라지. 그냥 수신 거부를 했다.
고은형도 이제는 날 안 찾아올 테고, 선아연은 내가 안 만날 거고, 고 상무, 고 전무, 기 비서는 날 신경도 안 쓸 거고...
구원상사와의 인연은 대충 정리 된 건가?
***
그락카르! 그락카르! 그락카르! 그락카르! 그락카르!
리자드맨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500여 오크가 그락카르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락카르가 딱히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락카르의 분노에 찬 외침과 동시에 힘이 강해지고 상처가 회복됐다.
오크들은 당연히 그락카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전투의 최고 공로자로 그락카르를 뽑고 그락카르를 연호하고 있는 것이다.
“......”
원래는 그락카르가 형제들의 연호에 강렬한 고함을 질러 답해야 한다. 하지만 그락카르는 미로크의 시체를 든 채 조용히 있었다.
그락카르를 연호하는 함성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완전히 멈췄을 때,
“부락으로 돌아간다.”
그락카르가 조용히 말한 후 미로크의 시체를 들고 남쪽으로 움직였고, 다른 오크들은 식량으로 쓸 리자드맨 시체와 장인에게 맡길 장비들을 들고 그락카르의 뒤를 따랐다.
아무 일 없이 5일이 흘러 부락에 도착했다.
크아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오!
가아아아아아악!
카아아아아아아!
오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자신들이 도착했음을 부락에 알렸다. 그락카르는 그 함성에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부락에 들어갔다.
그락카르는 바로 오르히의 천막으로 향했다.
“돌아왔군.”
“승리를 축하한다.”
“덩치가 더 커졌군. 커진 덩치만 봐도 형제가 얼마나 활약했는지 알 수 있다. 정말 자랑스럽다. 형제.”
오르히의 천막엔 오르히와 캅카스가를 비롯한 족장급 오크가 있었다. 그리고,
“어서 와라. 형제. 내가 말한 대로 3,000의 리자드맨이 있었지? 이제 내가 보는 미래를 믿을 수 있나.”
주술사 노르쓰 우르드도 있었다.
그락카르가 노르쓰 우르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미로크가... 죽었군.”
“훌륭한 죽음이었으리라 믿는다.”
“명예로운 전사가 카록께 갔군.”
천막내의 오크들이 그제야 미로크의 시체를 알아봤다. 쉽게 알아보기 힘들긴 했다. 그락카르가 가로들고 있는 시체의 배 부분 위에 올려져있는 잘린 미로크의 목은 상당히 부패가 진행되어 있었으니까.
미로크의 갑옷이 아니었으면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노르쓰 우르드를 향해 걷는 그락카르는 충분히 가까워졌음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바짝 붙어서 그의 머리 바로 위에서 위협적으로 내려 봤다. 노르쓰 우르드는 무표정하게 그락카르를 올려봤다.
“네가 본 그 미래에 미로크의 죽음도 있었나?”
“못 봤다.”
“그락카르. 노르쓰 우르드가 보는 미래는 단편적인 장면이며 무작위이다. 보고 싶다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짧게 대답하는 노르쓰 우르드 대신 오르히가 설명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의 죽음은 봤으면서 한 부락에서 함께한 미로크의 죽음은 못 봤다? 정말 쓸모없는 능력이군.”
“왜 화내는 거지? 미로크는 전사다. 전사가 전장에서 죽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락카르가 살기어린 눈으로 위협적으로 말함에도 노르쓰 우르드는 태연하게 질문했다. 그의 말에 오르히와 다른 오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로크는 오르히의 딸이다. 하지만 딸이기 이전에 전사이기에 미로크의 시체를 바로 알아봤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넌 미로크를 전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오르히가 물었다. 만약 그락카르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미로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를 신청할 용의도 있었다. 그리고 저번처럼 대충하지 않고 정말 죽기 직전까지 패줄 것이다.
미로크는 전사로서 싸우다가 전사로서 죽었다. 그런 그녀를 전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죽어서 카록의 곁에 가지 못한다고 모욕을 하는 것과 같으니까.
“인정한다. 미로크는 명예로운 전사였다.”
“그런데 왜 분노하는 거냐. 미로크는 카록의 곁으로 갔다. 그건 명예로운 일이다. 슬퍼하거나 분노할 일이 아니다.”
안다. 그락카르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화난다. 분노가 식질 않는다.
“미안하다. 노르쓰.”
그락카르가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했다.
“잘못된 대상에게 화를 내고 있었군. 정말 멍청했다. 내 분노의 대상은...”
그락카르가 미로크의 시체를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쾅!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당연히 내가 되어야 했다.”
쾅! 쾅! 쾅! 쾅쾅쾅!
연이어 온힘을 다해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만해라. 형제. 왜 자학하는 거냐.”
보다 못한 오르히가 다가와 그락카르의 두 팔을 잡았다. 그리고 놀랐다. 강해졌다. 저번에 결투했을 때보다도 훨씬 강한 힘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오르히의 힘이 강했기에 그락카르의 자학을 멈출 수 있었다.
“미로크는 명예로운 전사다. 전사로서 미로크의 죽음은 명예로웠다. 용맹하게 싸웠고 죽었다. 카록께서도 미로크를 가까이 두실 거다. 하지만...”
그그극.
그락카르가 팔에 더 힘을 줬다. 오르히와 그락카르의 팔이 힘겨루기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 놀랍게도 그락카르의 힘은 오르히의 그것에 근접했다. 비록 오르히가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않고 순수한 자신의 힘인데 반해 그락카르는 능력의 도움을 받았지만 말이다.
“내게 미로크는 암컷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암컷. 내가 반해 평생 함께 하고 싶었던 암컷. 그런 암컷을 지키지 못했다.”
그락카르가 강한 눈빛으로 오르히를 바라봤다.
“전사는 암컷과 아이를 지켜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명예다. 그것을 지키지 못해 불명예로 가득한 내 자신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 그러니 놔라 형제.”
자학으로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설득된 오르히가 손에서 힘을 풀어 그락카르의 팔을 놔줬다.
쾅! 쾅! 쾅!
아까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그락카르는 계속해서 자신의 얼굴을 때려 자학했고 천막안의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5분정도 계속해서 자학하던 그락카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기절했다.
오르히가 다가가 그락카르와 미로크의 시체를 함께 들었다.
“적과 싸우는 것만 알던 어린 오크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군.”
기절한 그락카르를 보며 노르쓰 우르드가 말했고 오르히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위대한 전사가 탄생했다.”
그 말을 하고 오르히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락카르를 빈 천막으로 데려가 눕혀주려는 것이었다. 미로크의 시체도 함께.
천막 밖으로 가는 오르히를 보며 캅카스가가 고개를 저었다.
위대한 전사? 아니다. 오르히 눈에는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대족장이다. 누구나 그에겐 부족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오크들에게 그락카르는 이미 위대한 전사였다. 용맹하고, 물러설 줄 모르며, 싸우는 것을 즐기며, 강하다.
위대한 전사였던 그락카르가 성장했다. 전사로서 누군가를 지켜야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부락을 이룰 족장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위대한 족장이 탄생한 거다.”
천막안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깨어난 그락카르는 그의 옆에 눕혀져 있던 미로크의 시체를 들고 오르히 부락의 최고 장인에게 향했다.
“위대한 전사가 왔군. 이미 다른 형제들에게 형제의 활약상을 들었다. 다른 일 전부 뒤로 미루겠다. 뭐든 말만 해라.”
장인이 그락카르를 환영했다. 강한 전사의 무기를 만들어주는 것은 장인의 명예다. 그가 만든 무기를 들고 그락카르가 전장에서 활약하면 그의 명예도 함께 높아지는 것이며 카록께서 눈여겨 볼 것이다.
그락카르가 장인에게 양손도끼와 쌍도끼, 그리고 갑옷을 입은 미로크의 시체를 내밀었다.
“이것들을 뭉쳐 양손도끼를 만들어다오.”
“... 시체도 함께 말인가?”
그락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리자드맨이나 드워프의 시체를 우겨넣은 적은 있어도 오크의 시체를 우겨넣는 건 처음이군.”
장인이 건네받은 양손도끼와 쌍도끼를 손으로 두들겨 강도를 확인했다.
“상당한 장인이 만들었군. 이것들을 하나로 뭉치려면 아무리 나라도 세 달은 걸린다. 그동안은 천막안의 아무거나 들고 가서 써라.”
“나도 함께 만들겠다.”
“전사가 무기를 만들겠다고?”
그락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겠군. 오크의 시체로 무기를 만드는 것도 처음이지만 전사가 함께 무기를 만드는 것도 처음이야. 지금 바로 시작할 건가?”
“형제만 괜찮다면.”
“그럼 바로 하지.”
“어떻게 하는 거지?”
“거기 있는 망치를 들고 온 힘을 다해 두들겨라.”
“두들기기만 하면 되는 건가?”
“아니. 두들기기만 해서는 아무 것도 안 되지. 강하게 생각해라.”
“생각?”
“그래. 강한 무기야 만들어져라. 강한 무기야 만들어져라. 그걸 반복해서 강하게 생각해. 그러면서 두들겨야 좋은 무기가 만들어진다.”
오크의 무기 제작은 간단하다. 좋은 무기가 만들어지길 빌면서 두들기는 것. 계속 재료를 넣고 두들기다 보면 뭉치고 압축되고 합쳐져서 강한 무기가 만들어진다.
“한다.”
그락카르가 망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양손도끼, 쌍도끼, 미로크의 시체와 갑옷이 뭉쳐져 있는 곳을 내리쳤다.
푸콱! 쾅!
굉음을 내며 망치가 내리쳐졌고, 미로크의 시체가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카하! 좋다! 역시 강한 전사다! 힘이 좋아! 더 세게 내리쳐라! 그리고 강한 무기가 만들어지라고 강하게 생각해라!”
썩은 피와 살점이 얼굴에 튀었음에도 장인은 좋아했다. 그도 망치를 들어 그락카르와 함께 두들기기 시작했다.
< 72 실연과 분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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