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과거의 인연 >
“이게 정식계약이었으면 정사장님을 통해 요청했을 겁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인, 아니 집안 문제라서...”
“그렇군요.”
“해주시겠습니까?”
“일단 들어봐야겠습니다.”
한 번 튕겼다. 예전이라면 2,000만원 나온 순간 게임 끝이었겠지만 요즘은 나도 꽤 배가 불러서 앞뒤 잴 정도는 된다.
“흠...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한상씨를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곳에는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네.”
거짓말. 믿고 말한다는 건 거짓말이지.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을 믿는다는 게 말이 되나? 저 말의 뜻은 이런 거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지만 내 입에서 나왔다고 말하면 안 된다.’정도?
“이번에 제 여동생이 약혼을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상대가 소문이 별로 좋지 않아요.”
소문.. 대충 상대 남자한테 구린 구석이 있다는 건가?
“어머니 없이 힘들게 자란 아이입니다.”
재벌 2세가 퍽도 힘들게 자랐겠다.
“세상 좋은 것만 보고 살아도 부족할 아이인데. 남편 될 사람이 부정한 일이라도 하면 크게 충격을 받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할 일이...”
“네. 저와 제 매제 될 사람의 계약을 중개하는 겁니다.”
혼인 서약서와 비슷한 형식인 건가. 보통 이혼할 시 위자료를 못 받는다는 내용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런 내용은 아닐 거다. 그런 거라면 나 없이 정식으로 작성할 수 있으니까. 뭔가 불법적인 내용이 들어가니까 날 부른 거겠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거절하셔도 됩니다. 혹시 마음에 걸리면 정사장님을 불러도 돼요.”
“아뇨. 괜찮습니다. 해드리죠.”
정청원을 왜 불러.
“감사합니다. 그럼 식사마치시고 바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면 되겠네요.”
천천히 여러 음식을 즐겼다. 메인 메뉴 외에도 뷔페 음식도 많으니 하나씩만 먹어도 꽤 양이 많다.
“하하. 대식가시네요. 보기 좋습니다.”
너무 많이 처먹는다는 걸 순화해서 말한 건가. 근데 내가 봐도 난 많이 먹는다. 원래 이렇게 많이 안 먹었었는데 그락카르와 연결된 이후로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걸 모르겠다. 그렇다고 항상 배고픈 것도 아니라서 적당히 먹고 멈추는 것도 가능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끝없이 먹을 수도 있단 말이지.
하나씩 전부 맛 봤으니까. 이제 끝내자.
“잘 먹었습니다. 여기 음식 맛있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여기 오픈할 때 제가 주도했었죠.”
여기가 전에 갔던 50만원짜리 한식당보다 나은 거 같다. 역시 내 입맛이 저렴해서 그런가.
“이제 계약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여기서요?”
“네. 한상씨만 괜찮으시다면요. 귀찮게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 있겠습니까.”
“전 상관없습니다.”
나야 차라리 여기가 낫지. ‘약속의 무게’가 자리 따지는 능력도 아니고 말이야. 다른 데로 옮기고 그러면 시간만 더 허비되고 귀찮아질 거 아냐.
“여기 좀 치워주세요. 그리고 그 사람 올라오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처럼 보이는 사람이 김진서의 지시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밥 먹는 동안 석상처럼 가만히 서있기만 해서 참 신경 쓰였던 사람이다. 같이 밥 먹기라도 하지 말이야.
그 사람이 나가고 곧 직원들이 들어와 식기를 내가고 탁자를 닦았다. 철저하게 구석구석 박박 닦는다. 본부장이 앞에 있어서 그렇겠지.
그런데 ‘그 사람 올라오라고 해요.’라니. 설마 그 매제 될 사람을 밑에 대기 시켜둔 거였어? 알았으면 대충 빨리 먹고 불렀을 텐데. 말 좀 해주지. 사람 무안하게끔.
대우가 별로 좋지 않네. 벌써부터 김진서의 매제 될 사람이 불쌍하다. 거기에 결혼하기 전에 불법 계약서까지 작성해야 할 정도다. 지금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결혼하고 나면 얼마나 시달릴까.
“모셔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들어오자마자 김진서에게 90도로 인사하는 남자. .... 낯이 많이 익은데.. 그 남자가 ‘어서 오게.’라는 김진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선이 김진서에게서 내게 오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놈이네.
“너 이 새끼!”
고은형이다. 고은형을 보자 궁금해진다. 고자 된 건 나았을까?
“개새끼 니가 왜 여기 있어!”
“매제. 지금 뭐하는 건가?”
“음? 아! 죄송합니다. 형님. 형님한테 한 말이 아닙니다. 저 새...”
“내 손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지?”
김진서의 ‘내 손님’이라는 단어에 고은형이 심하게 당황한다. 김진서가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있구만. 왜 그러지? 고은형도 예던보다는 약하지만 제법 큰 구원상사의 2세인데 말이야. 저렇게 일방적으로 굽실거릴 필요가 있나?
“손님이라뇨. 형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겠지만 무조건 속고 계신 겁니다. 저 새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서 밑에서..”
“알아. 구원상사에서 운전기사로 일하셨다는 거. 그런데 그거랑 내 손님인 거랑 무슨 상관이지?”
“... 그걸 아시면서 왜 저 새...”
“내 손님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지? 날 무시하는 건가?”
김진서가 정색하며 이야기했다. 그래. 혼내라. 혼내.
“아.. 아닙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한상씨. 저 녀석이 저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상씨를 모신 겁니다. 저런 녀석이라 믿을 수 있어야 말이죠.”
“네. 이해합니다.”
내가 이해한다고 말하자 고은형이 노려봤지만 지가 노려보면 어쩔 거야. 나도 마주 노려봐줬다.
‘이 새끼. 여기서 나가면 죽여 버...’
노려보며 속으로 마음껏 욕하다가 눈빛 살기 좀 담아서 쳐다봤더니 곧 눈을 피한다. 내 눈깔이 그락카르 눈깔인데 어디서 눈싸움으로 덤비고 있어.
갑자기 김진서의 마음이 이해된다. 저 새끼가 매제라니. 고은형이라면 계약서를 작성하는 거 충분히 이해한다. 아니, 나라면 내 동생 절대 고은형한테 안 준다. 강간범 새끼가 어디서 내 동생을 넘봐!
없는 동생 주는 상상을 한 건데도 짜증난다.
“밑에서 계약서는 읽어봤겠지?”
“네.”
“지킬 자신 있나?”
“물론입니다. 평생 유진씨만 보고 살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고도 치고 그랬지만 지금은 철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절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퍽도 그러겠다. 아니다. 그럴 수도 있네. 고자 된 거 아직 안 고쳐졌으면 가능할지도. 그런데 지입으로 철들었다는 말을 하다니. 안 부끄럽나.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한상씨의 중개도 받아들일 수 있겠지?”
“중개요? 물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왜 저 새... 아니 저 사람한테 중개를...”
그래. 이해 못하겠지. 운전기사나 하던 놈이 갑자기 재벌 2세들 결혼 계약 중개를 한다고 나타났으니 말이야.
“여기 한상씨께서 그 계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 안전장치가 되어 주실 거네.”
“안전장치요? 저 사람이 어떻게...”
“계약 중개를 해주는 최면술사에 대해 들어봤겠지?”
“물론입니다. 요즘 이쪽 계통에 소문이 쫙... 설마 저 사람이 그 최면술사입니까?”
그래도 눈치가 없진 않네.
“맞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 새... 아니, 저 사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다고 말했지 않나. 운전기사 하셨단 거. 내가 그런 것도 안 알아보고 일을 맡길 거 같나?”
“아닙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라면 그 소문이 아예 거짓말일 수도...”
“쯧.”
김진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자네 요즘 한직으로 밀려났다고 하더니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군.”
“네?”
“어제 내가 고 상무와 계약을 체결한 건 아나.”
“은서가요? ... 죄송합니다.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도 듣지 못하겠지.”
“..... 죄송합니다.”
그렇군. 그때 그 사건으로 한직으로 밀려났군. 그래도 구원상사가 양심은 있구나.
“그때 한상씨가 중개해주셨네. 바로 사실 여부도 이미 확인했지.”
“그렇다면 진짜...”
“그래. 진짜네. 물론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이 자네는 그 계약서의 내용을 지킬 테니 받아들이겠지?”
고은형이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잠시 고민한다. 이 새끼 말만하고 계약서 어길 생각이었군. 그래. 니놈 성격이 어디 가겠냐. 아마도 한직으로 밀려난 다음 돌파구로 다른 재벌과의 결혼을 추진한 모양이다.
‘시발... 그 오크년만 보면서 살라고? 지가 내 입장이면 그게 가능하겠어? 지도 두 집 살림 하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 지랄이야.“
이놈이 진짜 오크 암컷을 못 본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세상 그 누구를 데려와도 오크 암컷보다는 예뻐.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오크 세계로 가면 미인이 될 수 있어. 그리고 그락카르가 반한 암컷은 아놀드보다 더 크다.
‘그래. 일단 받아들인 다음에 어떻게 하면 될 거야. 최면이 가짜일 수도 있고 진짜면 저 새끼를 족쳐서 최면을 풀면...’
나를 노려보기에 다시 그락카르 눈깔을 치켜 떠줬더니 금세 피한다. 저럴 거면 왜 자꾸 노려보는 거야.
그런데 날 족쳐서 ‘약속의 무게’를 풀겠다고? 절대 불가능하다. 내가 해주지 않을뿐더러 해주고 싶어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어.
“하겠습니다. 형님. 유진씨에 대한 제 사랑은 지고지순합니다. 그것만 믿어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웃기고 있네.
“좋아. 잘 됐군.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상씨.”
“어제 해보셔서 알겠지만 작업은 금방 끝납니다. 그러니 기간이랑 벌칙을 먼저 정해야 합니다.”
“기간이라... 기간은 당연히 평생이고, 벌칙은... 심장 멈추는 정도면 될까요?”
“혀..형님!”
심장 멈춘다는 말에 고은형이 크게 당황했다. 나도 조금 당황했다. 하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한데 역시나 아직 살인자가 되기엔 마음가짐이 부족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살인은 안 됩니다.”
“심장마비는 병사입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그거 아쉽군요. 그러면... 하반신 마비정도면 괜찮을 것 같군요.”
“하반신 마비... 괜찮겠습니까? 동생 분 남편이 되실 건데 동생분과도 상의하셔야...”
남편 하반신이 마비되면 부인도 싫어할 수 있을 텐데.
“괜찮습니다. 제 동생은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요. 그리고 어차피 계약을 어길 때만 벌칙이 발동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러면 괜찮아요. 어차피 동생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쓰려고 할 때만 하반신 마비가 올 테니까요.”
계약서를 그런 식으로 작성해둔 모양이군.
“어떤가. 괜찮겠지? 어차피 어기지만 않으면 상관없는 거잖아.”
“무... 물론입니다. 형님. 절대 제가 계약을 어기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물론은 개뿔... 너 목소리 엄청 떨리고 있어 임마.
‘시발. 개새끼. 그 장애인 년이랑만 평생 해야 하다니. 그게 말이 돼? 나가자마자 사람 불러서 운전기사 족쳐서 최면부터 풀어야겠어.’
그래. 니가 그래야 고은형이지. 그런데 김진서의 ‘제 동생은 그런 거 신경쓰지 않아요.’라던가 고은형이 부인 될 사람을 장애인이라 생각하는 거보면 김진서의 동생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모양이구나. 그래서 김진서가 직접 나서서
이런 계약을 하려는 거고.
무슨 상황인 걸까.. 에이 됐다. 내가 그런 거 신경 써서 뭐해. 그냥 계약 중개나 해주자.
“그런데 기간이 평생이면 2,000만원은 너무 적습니다. 기간이 길어지면 제가 짊어져야할 리스크가 커져서요. 정사장님한테 기간에 따라 요금이 늘어난다는 이야기 못 들으셨나요?”
“아. 그런가요? 정사장님과는 고 상무님이 주로 말씀을 나누셔서 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최면이 단순하게 말만해서 거는 게 아닌 모양이군요.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있으시다니.”
있지. 교단 기여 포인트가 더 사용되는 리스크. 김진서는 그 리스크를 다르게 오해할 거 같지만 딱히 그 오해를 풀어줄 필요는 없겠지.
“하긴 그런 대단한 능력이 그냥 사용되는 거면 더 이상했겠습니다. 그러면 얼마를 드려야 할까... 3개월에 1,000이었으니까. 1억이면 될까요?”
“그 정도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오오. 역시 재벌 2세! 앉은 자리에서 8,000만원을 올려버리다니.
“그럼. 이번 일에 대해선 저와 1억을 주시기로 약속하시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약속드리죠.”
-스킬 ‘약속의 무게’를 사용합니다.
교단 기여 포인트 100이 차감되었습니다.
틈을 봐서 김진서와도 ‘약속의 무게’를 사용했다. 내가 저 인간을 뭘 믿고 구두계약만 하겠어. 곧바로 고은형에게도 ‘약속의 무게’를 사용했다. 기간은 평생에 벌칙은 하반신 마비.
-추가로 교단 기여 포인트 1,153이 차감됩니다.
어우... 역시 기간이 늘어나니까 포인트 엄청 날아가네. 2,000만원 받았으면 짜증날 뻔 했다. 사실 2,000만원만 받아도 그리 손해는 아닌 거 같지만. 포인트 1당 인출 가능한 헌금이 1만원이니까.
“그럼 일이 끝났으니 가보겠습니다.”
“아. 벌써 가시게요? 점심도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요.”
한식당은 이제 그만... 그냥 김치찌개 먹고 싶다.
“괜찮습니다. 매제와 오붓하게 식사하시죠.”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다음에 일이 있으면 또 부탁하겠다는 건가? 그건 나도 환영이다.
“네. 다음에.”
“손님 가시는데 인사 안 드리는 거냐?”
“... 가십시오.”
고은형이 마지못해 인사한다. ‘안녕히’는 빼는 거 봐라. 표정이 잔뜩 구겨져 있다. 그래도 저놈 못사는 거 보니까 기분 좋다. 김진서 보통내기 아닌 거 같은데 김진서한테 평생 면박당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 70 과거의 인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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