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과거의 인연 >
“까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락!”
무슨 소리지?
“리자드맨이다.”
“리자드맨의 울음 소리다.”
몇몇 형제들이 동시에 리자드맨을 외쳤다. 이 소리가 리자드맨의 것이군.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다.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다.
이미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져 있는 것을.
“가자! 형제들!”
형제들을 이끌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
“오늘 또 하루 종일 싸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락카르에서 다시 한상으로 돌아왔다. 어제 잠에서 깰 때만 해도 오늘 꿈에선 또 하루 종일 싸우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는데 작은 싸움도 없었다.
추격전만 있었다고 해야 할까?
분명 소리는 들리는데 그곳으로 가면 리자드맨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리자드맨의 울음소리.
‘대놓고 유인하고 있는데 말이야.’
인간이라면 절대 걸리지 않을 유인이지만 단순무식한 오크놈들은 걸린다는 게 문제다.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걸린다. 그락카르놈. ‘크흐..’라고 이상하게 웃으면서 함정 좋다고 따라가는 모습이란...
하는 모습을 보니 무조건 죽을 거 같다. 썩을 놈. 죽을 거면 오늘 죽었어야지. 로또 사야 한다니까.
내일은 뭐 없나? 일요일이라 주식 시장도 안 열리고... 저번에 반복할 때 주식을 신경 썼어야 했는데 말이야. ‘오늘’이 안 끝난다는 좌절감과 ‘오늘’이 끝날 거 같다는 희열 때문에 주식 같은 건 생각도 못했었다.
그때 단타 좀 쳤으면 돈 많이 벌었을 텐데.
그래. 리자드맨이 유인을 하루 더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고 죽으면 월요일이 반복될 거고 그때 주식이든 뭐든 하면 되겠지...는 죽으면 안 되는데 그락카르.
하루를 반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반복되는 하루를 내가 벗어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혹시라도 그락카르가 너무 완벽한 함정에 빠져서 죽는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이라면?
어우. 생각만 해도 무섭네. 한창 밉고 말 안들을 다섯 살이라 말 안 들어서 더 살리기 힘든 놈이다.
그래. 돈은 천천히 벌어도 되니까. 제발 죽지 마라. 그락카르. 죽으면 형한테 죽는다.
대충 씻고 공원으로 향했다. 요즘 다시 운동에 불이 붙었다. 살이 빠지는 게 느껴진 덕분이다. 저녁에 나가서 쇠파이프 들고 열심히 휘두른 보람이 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나도 王자를 가질 수 있겠지.
그락카르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니라 날렵한 이소룡 근육이 갖고 싶다.
일단 처음 두 바퀴는 빠르게 달려서 사람들을 한 번씩 전부 추월한다.
‘오늘은 저기다!’
그리고 모두를 추월하며 봐둔 명당으로 가 천천히 다른 사람들 속도에 맞춰 달린다.
‘이야.. 몸매가...’
앞만 보며 달리는 척 하면서 조심스럽게 조깅 중인 여자의 뒤태를 감상한다. 바로 뒤에서 달리면서 보는 건 초보다. 금방 걸린다. 한두 명 정도 사이에 두고 달려야 걸리지 않고 꾸준히 감상할 수 있다. 두 명이 제일 좋은 거 같다.
요즘 여성들 몸매가 서구화 되고 있다. 참 바람직한 현상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뒤태만 보는 거다. 얼굴이 아무리 궁금해도 참아야 한다. 얼굴을 봐버렸다간 즐겁게 감상했던 뒤태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나쁜 기억으로 바뀔 수 있다.
그렇게 1시간가량 달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근력운동은 하지 않았다. 공원에 있는 약하게 맞춰진 운동기구들로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헬스장이라도 갈까 생각했었는데 헬스장에 가도 운동기구를 최대치로 맞추지 않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최대치로 맞추면 거기 직원들이 뭐라고 할 거 같다.
뭐라 하지 않더라도 이상하게 보겠지. 나처럼 평범한 몸을 가진 애가 가볍게 기구를 사용하는 걸 보면 말이야.
차라리 작은 사무실을 하나 빌려서 체육관으로 개조할까? 사람들 신경 안 쓰고 양손검 연습만 할 수 있어도...는 천장 때문에 안 되겠네. 양손검을 마음껏 휘두르려면 천장이 4m는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곳이 있겠어?
그리고 있어도 엄청 비싸겠지. 나중에 한 10억 벌면 그때 생각해보자.
어. 문자 와있네. 확인하니 선아연이 보낸 거다.
-죄송합니다.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나올 수가 없네요. 내일 뵐 수 있을까요?
알겠다고 문자 보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몰라도 만약 그때 잘리지 않았다면 나도 저 일 때문에 바빴겠지. 유나한테도 문자가 와 있다. 어제 저녁에 온 문자인데 확인을 못했네.
-아저씨! 저 다음 주 토요일에 콩쿨 예선이에여!
‘어. 그래. 열심히 해라.’라고 보냈다.
-보러 안 와여?
이른 아침인데도 바로 답장이 왔다. 부지런하구... 아니지. 얘 학생이잖아. 지금 시간에 일어나 있는 게 당연한 거네.
그런데 네가 콩쿨 나가는데 내가 왜 가겠니. 본심을 적진 못하고 일이 있어 못 간다고 보냈다. 일 없겠지만 없어도 만들어야지. 어른들 발레도 안 보는데 애들 발레 하는걸 뭐 하러 보겠어.
-일요일엔 결승인데! 결승엔 올 거져!
무슨 콩쿨이 토요일에 예선하고 일요일에 결승을 하는 거냐.
-화이팅!
-화이팅 와서도 해줄 거져!
안 가. 이것아. 내 딸이면 몰라도 남의 딸 발레 하는걸 뭐 하러 봐. 귀찮게.
-화이팅!
다시 똑같은 문자를 보낸 후 폰을 집어넣었다. 문자가 연이어 날아왔지만 신경 껐다. 저렇게 보내다가 답장 안 해주면 알아서 멈추더라.
집에 도착하니 원룸텔 앞에 고급 세단 하나가 주차해 있다. 저거 엄청 비싼 차다. 이 동네 올 차가 아닌데? 갑자기 개인기사 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나도 저런 거 몰았었는데. 나중에 다시 운전석에 앉아 볼 수 있겠지. 엄청 편안한데.
“한상씨?”
세단을 지나쳐 건물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세단 뒤쪽 창문이 내려져 있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다. 어제 고은서와 계약했던 그 상대다.
“맞군요. 한상씨. 운동하고 오시는 길인가 봅니다.”
여기에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가 우연히 날 발견한 건 아닐 테고, 날 찾아온 거겠지.
“혹시나 했는데 정말 아직 여기에 사는군요. 돈을 많이 버셔서 좋은 곳으로 이사 가셨으면 어쩌나 했는데.”
“여기 살기가 좋아서요.”
맛있는 식당 많지, 교통 편리하지, 괜찮은 공원 있지, 예쁜 젊은 여자들 많지. 젊은 남성이 홀로 살기에 이 근처처럼 괜찮은 곳이 몇 없다.
“아침 식사 안 하셨죠?”
“이제 먹으려고요.”
지금 시간이 7시 50분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시간이... 저 인간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돈 많은 것들은 이제 일어나서 느릿느릿 출근할 준비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저 운전기사는 뭔 죄야? 너 이 시간에 싣고 오려고 훨씬 일찍 일어나서 준비했을 거 아냐. 월급은 제대로 주고 있는 거겠지?
“괜찮으시면 제가 아침을 대접해드려도 될까요?”
아침을 대접한다니. 어제 있었던 중개 때문에 뭔가를 부탁하려는 거겠지. 딱히 구미가 당기진 않는다. 불편한 자리가 될 거 같거든. 자리가 불편하면 아무리 비싼 걸 먹어도 맛없지.
“혹시 어제 일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한 번 작업하면 저도 멈출 수 없으니까요.”
“그런가요? 좋은 걸 알았네요. 괜찮습니다. 제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온 건 맞지만 어제 일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닙니다.”
흠... 어제 일 때문이 아니라 이건가. 그러면 뭐... 괜찮다. 돈 많은 사람과 관계 맺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내가 그런 인맥이 없어서 정청원과 일하는 것 아닌가. 개인적인 관계를 쌓으면 나중에 정청원 없이 혼자 일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저 땀을 흘려서 조금 씻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10분후...
“... 씻으셨나요?”
“네.”
아주 여유 있게 씻었는데요?
그 남자가 날 대접하겠다고 데려간 곳은 고급 빌딩 최고층에 있는 한식당이었다. 또 한식당... 나 스테이크 좋아하는데.
“죄송합니다. 더 좋은 곳으로 모셔야 하는데 우리 회사 식당 중 아침에 식사 가능한 곳이 여기밖에 없군요.”
‘우리 회사?’
“아. 혹시 제가 누군지 모르시나요?”
내가 살짝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나 보다. 바로 자기에 대해 아냐고 묻는다.
“죄송합니다. 원래 일할 때 상대에 대한 편견 없이 일하기 위해 어떤 정보도 듣지 않는지라...”
거짓말이다. 그냥 내가 안 물어보고 정청원이 안 가르쳐줘서 모르는 것뿐이다.
“이런. 제가 정말 무례한 행동을 했군요. 자기소개도 안 하고 저 하고 싶은 말만 했다니. 자. 여기. 전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가 고급 케이스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건넸다. 명함 주변에 둘러져 있는 이거 진짜 금인가? 부자가 가짜를 쓰진 않았겠지? 진짜면 가져다가 팔..기는 힘들겠지. 그냥 가지고 있자.
“예던?”
남자의 이름보다 회사의 이름이 먼저 보였다. 예던이라면 상당히 큰 기업이다. 정확히 뭘 하는 회사인지는 잘 모르지만 예던의 이름이 박힌 식품이 마트에 잔뜩 진열되어 있고 영화관이나 방송국도 하나 가지고 있는 거로 안다. 관심 없는 내가 아닌 것만 이정도니 더 많은 걸 하고 있을 거다.
확실한 건 구원상사보다 예던이 더 크다는 거다.
“네. 예던의 전략기획본부장인 김진서라고 합니다.”
“아. 네. 전...”
“하하. 알고 있으니 소개 안하셔도 괜찮습니다. 한상씨.”
3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전략기획본부장이라... 명함에 보면 전무라고도 표시되어 있다. 역시 이 인간도 재벌 2세다. 분명하다. 친하게 지내야지.
그런데 여기가 예던이 운영하는 식당이었구나. 들어오면서 곁눈질로 가격을 봤는데 1인당 3~5만원정도 한다. 어제 갔던 한식당보다는 훨씬 싸지만 서민을 노리고 만든 곳 같은데 가격이 꽤 세다.
“그런데 식당이 일찍 문 여네요.”
“아. 정식 오픈은 11시에 합니다. 제가 한상씨 대접하려고 조금 당겼죠.”
어쩐지 손님이 하나도 안 보여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재벌 2세. 이 큰 식당의 오픈 시간을 3시간 당겨버리다니.
안쪽에 들어가 방에 자리 잡았다. 빌딩 최고층에 있는 식당답게 경치가 장난 아니다. 나중에 이런데서 살아야 하는데.
각자 메뉴를 주문하자 직원들이 음식들을 하나둘 가져다줬다. 아까 들어올 때 뷔페식으로 되어 있는 걸 봤는데 이렇게 전부 직접 가져다주다니. 다시 한 반 더 감탄하자. 역시 재벌 2세.
“실은 어제 제가 좀 힘들었습니다.”
뭐가 힘들었다는 거지? 주어를 말해. 주어를 말해야 알아듣지.
“최면 사실 좀 우습게 봤는데... 진짜더군요. 한 30분쯤 전신 마비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계약을 안 지키려고 했구만. 고은서와 이 양반은 1,000만원짜리 ‘전신마비 코스’를 선택했었다. 나름 괜찮은 코스다. 전신마비는 적어도 아프진 않잖아.
“저도 비당 이야기는 들었지만 헛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고은서 상무가 최면술사를 중개인으로 부르자고 했을 때 멍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떻게 어겨야 최대한의 이익을 볼 수 있을까 생각을 했죠.”
이 아저씨도 음험한 인간이구만. 역시 돈 많은 것들은 믿으면 안 돼.
“열심히 준비했던 계획을 실행하려는 순간, 전신마비가 찾아왔습니다. 30분 동안 죽어라 노력했지만 풀리지 않던 전신마비가 계약을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풀리는 걸 보고 한상씨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변탠가. 전신마비 때문에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저렇게 환하게 웃다니. 변태짓 당하기 전에 지금 빨리 도망가야 하는 걸까.
“그래서 한상씨와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능력자와 친해지면 써먹을 데가 많거든요.”
솔직한 인간이네. 보통은 돌려 말할 텐데 저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다니.
“그리고 그 동안 저를 괴롭히던 고민이 한상씨께서 능력 발휘를 해주신다면 가볍게 해결되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혹시 이 인간이... 밥 한 끼 사주고 일 해달라고 하려고 날 부른...
“2,000만원 드리겠습니다.”
건 아니네. 또 감탄하자. 역시 재벌 2세. 통이 크십니다.
< 69 과거의 인연 > 끝
ⓒ 냉장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