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과거의 인연 >
“이번 고객은 특이하네요. 이 시간에 한식당에서 계약이라니.”
현재시간 10시 30분,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덩치가 아침 9시에 집 앞으로 차를 몰고 찾아왔다. 그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한식당이었다. 그것도 엄청 낯이 익은 한식당. 당시엔 상무였던 고 전무를 태우고 다닐 때 자주 왔던 곳이다.
고 전무외 기 비서만 안으로 들어가고 난 항상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대기했었지.
“덕분에 비싼 밥 공짜로 먹고 좋잖아. 여기서 밥 한 끼 하려면 제일 싼 게 50만원이야. 밥값 저쪽에서 대준다니까 마음껏 먹어.”
50만원... 고 전무, 기 비서. 이 나쁜 인간들. 자기들만 비싸고 맛난 음식 먹고 난 밖에서 김밥 먹을지 컵라면 먹을지 고민하게 만들었단 말이야?
그런데 브런치로 한정식이라니. 느낌이 묘하다.
“토요일하고 일요일은 일 없죠?”
“없지. 내일 해달라는 요청이 하나 있었는데 안 된다고 미뤘어. 주말은 쉬어야지.”
아니. 이 아저씨가 왜 마음대로 미뤄! 혹시 맘 바뀌어서 안하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한 분, 한 분이 소중한 고객...님은 개뿔. 이젠 좀 여유가 생겨서 계약 한두 개쯤은 안 해도 된다.
이미 이번 주에만 이게 3번째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마지막 일이 되겠지만 한 번 할 때마다 최소가 500만원, 최대 1,000만원도 받았다. 오늘 거가 1,000만원짜리라고 했으니까 딱 세 번 일해서 2,500만원 번거다. 저번 주에 했던 500만원짜리까지 생각하면 무려 3,000만 원.
그리고 내 돈은 이게 다가 아니다.
-----------
비텔교
교주 : 한상
신도 : 569명
교단 기여 포인트 : 5,642
헌금 : 34,657,000원
-----------
신도가 늘어나는 속도만큼 매일 빠르게 쌓여가는 헌금까지... 교단 기여 포인트도 모이는 속도도 빨라져서 일하느라 포인트를 꽤 소모했는데도 헌금 전부를 인출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돈 벌기가 이렇게 쉬웠던가.
한 달에 월급 몇 십 만원 올려준다는 말에 감사하다는 말을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야. 많이 먹어. 이런 때 아니면 니가 이런 거 언제 먹어보겠냐.”
정청원이 덩치한테 말했다. 나도 같다. 나도 이런 때 아니면 이런 거 언제 먹어보겠어. 한 끼에 50만원이라니...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밥 한 끼 먹는데 그런 돈을 쓴다는 건 지금의 내 마인드에서는 불가능하다.
혹시 모르지. 나중에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50만원쯤은 껌 값으로 생각이 들면 먹으러 올지도.
“너도 빨리 먹어. 저 인간들이 부르면 가야 돼. 그 전에 먹고 싶은 만큼 먹어둬야지.”
“네.
정청원의 재촉에 50만원짜리 한정식에 손을 댔다. ‘정갈’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정성껏 놓여있는 음식을 하나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
나중에 50만원을 껌 값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면 올지도 모른다고 했던 거 취소다. 평생 올 일 없을 거 같다. 이게 50만원이라니. 집 앞에 있는 분식집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졌다. 상위에 이거저거 엄청 많기는 한데... 딱히 맛있다고 느껴지는 게 없다.
내 입맛이 너무 서민적이라 그런가. 그냥 무난한 갈비찜이나 집중 공략하자. 갈비찜에 시래기라니. 특이하긴 하네. 시래기가 제일 맛있는 거 같다. 시래기 먹으니 감자탕 먹고 싶다. 저녁에 감자탕 먹어야지.
“아. 맞다. 내일 로또 발표하죠?”
“하지. 왜. 로또하게? 안 해도 돼. 로또 하는 거보다 돈 더 많이 벌 텐데 뭐.”
바로 폰을 꺼내 로또를 검색해봤다.
오오. 당첨금 160억. 160억인데 신경 안 써도 된다고? 그런데 더 검색해보니 당첨자가 많아서 회당 1등 당첨금이 10~30억 사이를 오가는 모양이다. 거기에 세금까지... 생각보다 그렇게 세진 않네. 그래도 단위가 억인데. 절대 적은 금액이 아니지.
갑자기 그락카르가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꿈에서 죽으면 내일이 반복될 거다. 내일이 반복되면 난 당연히 로또 당첨 번호를 확인할 수 있겠지. 그 번호로 한 10개쯤 사면... 세금 다 제하고 내가 받는 돈만 한 50억 되지 않을까? 그러면 계약 중개인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거 막 하고 살 텐데 말이야.
저번에 갔던 5성급 호텔 장기 임대하는 것도 괜찮...지는 않겠네. 아무리 50억이라고 해도 그런데서 계속 살면 금방 다 쓸 거다.
똑똑.
정청원이나 덩치와 즐겁게 대화를 나눌만한 친분이 없기에 혼자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가 노크를 해왔다. 반갑다. 이미 배도 잔뜩 불렀는데.
“네. 들어오세요.”
정청원이 말했고 문이 열리며 선 비서가 모습을 보였다. 잠깐. .... 선 비서?
“준비가 됐다는 말을 드리러...”
“선 비서님?”
“어? 한상씨?”
난 비서‘님’이라고 부르는데 선아연은 날 한상‘씨’라고 부르니 뭔가 진 기분인데.
“여기 어쩐 일로... 아. 이쪽에 취직하셨군요?”
“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잘 됐네요. 빠르게 일자리 구하셔서. 다행이에요. 윗선에서 한상씨 취직하는 걸 막는 다는 이야기가... 헙.”
선아연이 자기 입을 막으며 정청원의 눈치를 본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회사 치부를 말해서 그렇다. 저 철저한 선아연이 저런 실수를 하다니. 날 만난 게 의외긴 한 모양이다.
그래도 내가 일자리 구했다는 소식이 기쁘긴 한 모양인지 표정이 밝...은 건 정청원 등 다른 회사 사람들 앞이라서 그런 거겠지. 내가 취직했다는 게 정말 기쁜 인간이라면 내가 일 그만두고 전화 한 번을 안했겠어? 내 번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오. 한상군 전 직장동료야?”
“네.”
“한상군이 구원상사에서 일했을 줄이야. 구원상사면 꽤 크잖아. 거기서 무슨 일 했어?”
“운전기사일 했어요.”
“오호. 운전기사. 그럼...”
“지금 일 해야 하지 않나요? 저쪽에서 부른 거 같은데.”
말이 길어질 거 같아서 끊었다. 숨겨야 할 과거 같은 건 아니지만 내가 정청원이랑 내 사적인 이야기 나눌 사이는 아니니까. 무슨 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깨끗한 일을 하는 거 같지 않은 정청원이랑은 딱 돈 주고 돈 받는 관계면 충분하다.
“그래. 일해야지. 일하자.”
덩치를 남겨두고 정청원과 나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아연을 따라갔다. 선아연이 날 몇 번 힐끗 쳐다봤다. 하긴. 그녀가 보기엔 좀 이상하긴 할 거다. 누가 봐도 직책이 높을 거 같은 사람은 정청원인데 내가 말을 끊었으니까.
예전의 내 모습과는 많이 다를 거다. 예전엔 윗사람 말에 절대 토 달지 않는 싹싹한 운전기사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텐데 회사 윗사람으로 보이는 정청원의 말을 끊는 모습을 보며 뭔가 맞지 않음을 느꼈겠지.
굳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곧 왜 그런지 알게 될 테니까.
도착했는지 선아연이 똑똑 노크를 한다.
“모셔왔습니다.”
“들어와.”
익숙한 목소리다. 문이 열리고 보이는 얼굴은 역시나 그녀다. 고 상무, 고은서. 선아연이 여기 있다는 건 그녀도 여기 있다는 말과 동의어지. 선아연은 언제나 고은서와 함께하니까.
“음? 한 기사?”
“오랜만입니다. 고 상무님.”
“한 기사가 여긴 어쩐 일로...”
“우리 직원입니다. 계약 중개인으로 나설.”
정청원이 나서서 설명했다.
“한 기사가 최면술사?”
묘한 말투다. 눈빛이 ‘너 따위가 최면을?’이라고 깔보는 듯하다. 짜증나는 눈빛이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차 운전해주던 사람이 한 번에 1,000만원 받는 최면술사가 되어서 나타났으니까. 나라도 못 믿겠다.
“잠깐. 고 상무와 연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중개 제대로 못하는 거 아닙니까?”
이번엔 고은서와 계약할 예정이었던 상대가 불만을 제기했다.
“최면을 걸 때 나만 걸고 고 상무는 안 걸면 어떡합니까.”
“한 기사가 정말 최면 걸 수 있어요?”
둘 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던진다. 보통은 한쪽 질문의 답이 나온 후에나 자기 질문을 하고 그러지 않나? 이래서 돈 많은 것들은 안 돼.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단 말이야.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저번 주말에 비당 분이 계약 어기려다가 최면 페널티를 못 참고 계약을 이행했다는 소식 전부 들으셨을 텐데요.”
“들었지. 비당 한 사장이 거하게 뒤통수치려고 준비중이었는데 배가 너무 아파서 못했다고 말입니다.”
“들었어요.”
그런 일이 있었나? 저번 주말이라면 내가 계약 중개인으로 나선 일은 딱 하나다. 그 서로 원한이 깊었던 사람들. 강한 벌칙 걸어달라고 하다가 500만원 아까워서 가장 약한 벌칙을 선택했던 인간들이지.
한 인간이 계약을 어기려다가 복통에 시달렸었구나. 누굴까.
“그 일 역시 한상군이 한 겁니다. 그러니 중개가 잘못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그리고 고 상무님과 한상군의 관계는... 제가 말하기 힘드네요. 어떤가. 한상군.”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구원에서 일하다가 별로 좋지 못한 이유로 잘렸으니까요. 제가 구원에 이득을 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특히 고은서에게 좋은 일을 하지는 않을 거다. 저 여자는 그 사건에서 철저하게 선아연만 신경 쓰고 나는 무시했었으니까. 아니, 무시가 아니라 왠지 나를 싫어했었다. 선아연을 구해줬음에도 고은형을 경찰에 집어넣어서 그런 걸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게, 그걸 저 사람이 어떻게 믿어. 나도 못 믿겠다. 그래도 면전에서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네.
“어차피 동시에 같이 진행할 겁니다. 둘 다 안 걸리면 안 걸렸지 한 명만 걸리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라고 말은 했지만 믿을 거 같지는 않다. 고은서의 계약 상대가 여전히 불만스런 얼굴로 뭐라고 하려고 할 때, 정청원이 나섰다.
“확실한 거겠지. 한상군?”
“네.”
“좋아. 한상군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두 분, 이 일은 제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일 진행하시죠.”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정청원이 나서서 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엔 지금의 내가 되기 전 ‘과거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얼마 전의 과거인데도 그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그때와 비슷한 시선과 대접을 받으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다.
담배가 피고 싶어져서 그냥 방을 나왔다. 그들이 보기에 무례한 행동이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에이. 될 대로 되라. 엎어지든 말든. 1,000만원 따..위라고 말하긴 좀 큰 금액이지만. 그래도 되든 말든 신경 끄자.
한 쪽 구석에 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 하는데,
“한상씨.”
선아연이다.
“네. 아연씨.”
나도 똑같이 이름을 불러줬다. 선아연이 잠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한테 이름 불린 건 처음이던가?
“혹시 주말에 시간되시나요?”
시간은 물론 된다.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고민했다. 내가 이 여자를 만나야 할까?
나쁜 감정은 없다. 고은서에겐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선아연과는 딱히 나쁜 감정을 가질만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좋은 감정도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아연에 대한 이미지는 일 잘하는 피곤한 상사이자 고은형에게 성희롱당하는 불쌍한 여자라는 것뿐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꽤 예쁘다는 것 정도?
“부탁드려요. 귀찮게 안할게요. 잠깐이면 돼요.”
내가 고민하고 있으니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저렇게까지 부탁하는 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지. 말했듯이 그녀에 대한 감정이 없다.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악감정이 있어야 가능한 거다. 아무 감정이 없는데 부탁하는 것을 거절하는 건 힘들지.
그리고 예쁘니까... 할 일 없는 주말에 잠깐 만나는 것 정도야.
“한상군! 이야기 끝났으니 들어와서 일해!”
정청원이 불렀다. 일하라고 하는 걸 보면 잘 풀린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사기꾼 같은데 나름 신뢰가 있나보다.
들어가서 별말하지 않고 바로 ‘약속의 무게’를 걸었다. 작업이 끝나고 언제나 그렇듯 계약 당사자들이 정말 최면 걸린 거냐고, 너무 대충인 거 아니냐고 따졌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대답 없이 그냥 나왔다.
“대답 안 하고 어디 가요?”
황당한 듯 이야기하는 고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벌 2세가 한 번이라도 무시 당해본 적 있겠어? 소심한 복수지만 꿀꿀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게 느껴졌다.
뒷일은... 어떻게든 되겠지 뭐.
< 68 과거의 인연 > 끝
ⓒ 냉장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