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삼파전 >
‘이겨라. 오크. 반드시 이겨라. 너희들은 내 손으로 직접 갈기갈기 찢어야 하니까.’
“크흐?”
항상 들리는 형제들의 마음이 아닌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들이 오크를 갈기갈기 찢는다고 할리 없고... 분명 다른 종족의 마음소리다.
저쪽인가?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들려온 위치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 원래는 저렇게 먼 거리에서는 못 들었는데 최근 먼 거리의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아졌다. 카록께서 내게 준 능력을 강화해주신 모양이다.
자세히 살폈지만 딱히 보이는 것은 없다. 너무 멀어서인지 기세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 있다. 아무도 없는데 내가 마음을 들었을 리는 없으니까.
조용히 집중했다.
“왜 그러나. 그락카르.”
“형제. 무슨 일 있나?”
형제들이 물어왔다. 무시하고 집중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움직임, 나무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의 움직임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그리고... 확신했다. 누군가, 아니 어떤 무리가 저기 있다. 산위 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 광범위한 범위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연스러운 숲의 느낌이 아니다.
“고쿠로. 주술사가 말한 리자드맨의 위치는 어디지?”
“저쪽으로 반나절만 더 가면 된다.”
노르쓰.. 뭐였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주술사가 붙여준 길잡이 고쿠로에게 물었다. 고쿠로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내가 마음을 들은 곳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내가 들은 마음이 리자드맨의 것이 아닌 건가?
생각해보자. 내가 들은 마음은 오크에게 이기라고 했다. 그래야 오크를 직접 죽일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오크가 우리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근처에 다른 형제들이 있는 건가? 그리고 내가 들은 마음은 리자드맨의 것인가? 리자드맨의 것이 아니면 어떤 종족이지?
...
.....
.......
.........
빌어먹을 머리 아프다. 그냥 가자.
“우린 저쪽으로 간다.”
손을 들어 마음이 들렸던 곳을 가리켰다.
“갸르? 형제. 노르쓰 우르드는 저쪽으로 가라고 했다.”
고쿠로가 말했다. 그래. 주술사는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주술사는 내가 죽을 거라는 말도 했었다. 당연히 그건 틀렸지. 이미 틀렸던 자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고 분명 내가 들은 마음은 오크를 갈기갈기 찢는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우리의 적이란 뜻. 저기에 우리의 적이 있는 게 확실하다. 적이 저기 있는데 있을지 없을지 모를 적을 찾아서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바보 같은 짓이다. 왜 눈앞의 적을 두고 멀리 있는 적을 찾아간단 말인가.
다른 곳에 적이 있다는 주술사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저기 있는 적과 싸운 후 그들과도 싸우면 두 번 싸울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고쿠로. 주술사는 전사가 아니다. 전투는 전사가 한다. 주술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전사들을 이끄는 그락카르가 저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면 우린 가면 된다.”
내가 말하려는데 미로크가 먼저 나섰다. 크흐.. 역시 내가 반한 완벽한 암컷답다. 어찌 말하는 것도 저리 완벽할까.
“무리를 이끄는 자의 말에 반문을 하다니. 넌 전사가 아니군.”
“고쿠로. 이상하다.”
다른 대전사들도 말을 한마디씩 했다. 고쿠로의 녹색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형제들 말이 맞다. 내가 잠깐 미쳤나보다. 미안하다. 그락카르.”
“괜찮다. 형제.”
마음소리가 들려왔던 곳을 향해 걸었다. 모든 형제가 내 뒤를 따랐다.
***
‘왜 멈추지?’
가장 앞에서 오크 무리를 이끌던 붉은 오크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 오크가 멈추자 모든 오크가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멈춘 붉은 오크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을 때, 덜고바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몸을 숙였다.
‘빌어먹을.’
곧 저 거리에서 자신을 봤을 리 없다는 걸 깨닫고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이곳에 숨어있는 모든 병사는 나뭇가지와 풀로 위장을 한 상태. 아무리 오크의 시력이 좋아도 저 먼 거리에서 그것을 구분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불안하다. 우연히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을 거라 생각한 붉은 오크가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설마... 축복 때 감각계열 능력을 받은 오크인가?’
그렇다면 가능성 있다.
축복으로 신에게 받는 능력은 한계가 없다. 축복을 받은 이가 왕국에만 수천 명이 있지만 걔 중 완전히 같은 능력을 받은 자는 없다. 비슷한 능력을 받았어도 사람에 따라 능력의 강함 정도가 다르다.
그러니 시력, 청력 등을 강화하는 능력을 엄청나게 뛰어나게 받을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저 거리에서 자신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감각 강화 능력을 받은 오크가 보고 된 적이 있던가?’
들어본 적 없다. 감각 강화는 겉으로 알아보기 힘든 능력인데다가 오크와는 만나면 무조건 죽고 죽이기만 해서 정보를 얻기 힘들다.
붉은 오크가 손을 들어 이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곧 무리를 이끌고 분노대와 8, 10 타격대가 매복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들킨 모양이군.”
더 이상 조용히 할 필요 없다는 걸 느낀 덜고바트가 말했다.
“감각 강화 오크라니. 처음 봅니다.”
부대장 중 하나도 덜고바트와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카록도 주신 몰란님보다 격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신은 신이니까. 감각 강화정도는 할 수 있겠지.”
“청각 강화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싸우기 쉬울 텐데요. 오크처럼 무식한 놈들이 청각 강화의 약점에 대해 준비했을 리 없으니까요.”
청각 강화를 받은 적을 상대하는 방법이 있다. 큰 소리를 지르고 하는 건 아니다. 청각 강화는 청각에 관련된 모든 것이 강화되기에 가까이에서 큰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고막이 파열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작은 소리를 내는 거다. 작은 소리를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내면 거의 모든 소리를 듣는 청각 강화 능력자는 그 소리에 신경 쓰여서 약간이지만 둔해진다.
인간 쪽 청각 강화 능력자는 귀마개를 소지함으로써 전투 중 작은 소리를 무시하는 방법을 써 전투력 약화를 막지만 오크가 그런 대비를 할리 없다.
‘차라리 잘 됐다.’
덜고바트는 오크에게 매복이 들킨 것이 잘됐다고 생각했다. 오크 무리를 섬멸하고 싶은 마음을 명령서 때문에 겨우 참고 있었는데 이젠 참을 필요가 없어졌다.
자신은 분명 명령서에 나온 곳에 매복해 있었으니까. 명령서를 그대로 따랐는데 들킨 것이니 불가항력이다. 명령서에 들킬 경우의 행동방침에 대해선 적혀있지 않으니 이젠 자신의 마음대로 하면 된다.
“리자드맨은 아직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나타나려면 최소한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있다는 뜻, 그 안에 오크를 잡고 빠진다.”
네!!
분노대가 힘차게 대답했다. 분노대의 병사들도 이렇게 오크와 싸우게 된 것이 기뻤다. 그들도 직접 오크의 목을 따주고 싶었던 것은 덜고바트와 같았으니까.
3,000 vs 3,000. 일반적인 전투라면 인간 쪽이 일방적으로 당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측에는 분노대가 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전력에서 인간 측이 조금 더 앞섰다.
“분노대가 정면에 선다. 오크들은 분명 우리한테 돌격해올 테니 8, 10 타격대는 약간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가 오크무리와 우리가 붙으면 양쪽에서 치고 오도록.”
오크를 상대하는 인간의 전략은 어느 곳이나 뼈대는 비슷했다.
오크가 강함을 알아보고 그 강한 쪽으로 돌격해오는 습성을 이용해서 유인한 다음 양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오크를 포위하며 공격하는 것. 아무리 개개의 전투력이 뛰어난 오크라고 해도 포위당한 채 옆과 뒤에서 동시에 공격당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최고의 전략을 갖고 있음에도 인간은 엄청난 피해를 입거나 전투에 지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그만큼 오크의 전투력은 뛰어나다.
하지만 덜고바트는 자신 있었다. 이 전략이 실패하는 이유는 중앙에서 버텨줘야 할 부대가 오크의 돌격을 버티지 못하고 뚫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은 분노대다.
‘분노대는 마지막 한 명까지 전부 죽지 않는 한 뚫리지 않는다.’
덜고바트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정면으로 붙어도 이길 전력으로 전략까지 짜서 상대한다. 덜고바트는 대승을 예견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인간들이 배틀 크라이라 부르는 전투 시작을 알리는 오크 선봉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에 맞춰 덜고바트가 자신의 양손검을 가슴께까지 치켜들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분노대에게 시선을 던졌다.
“난 이미 죽었다.”
난 이미 죽었다!
분노대가 덜고바트와 똑같이 양손검을 치켜 올리고 덜고바트의 말을 그대로 복창했다.
“죽은 나를 움직이는 것은 분노.”
죽은 나를 움직이는 것은 분노!
“나의 분노는 멈추지 않는다.”
나의 분노는 멈추지 않는다!
“나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나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거기까지 말한 덜고바트가 말없이 분노대 모든 인원을 하나하나 훑었다. 분노대 역시 강한 눈빛을 덜고바트에게 던졌다. 그들 모두의 강인한 눈빛을 확인한 덜고바트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다시 몸을 돌려 전방으로 향했다.
치켜 올렸던 양손검을 돌격해오는 오크들을 향해 쭉 뻗었다.
“눈앞에 있는 것들에게 너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보여줘라!”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끼다. 혹시라도 다른 곳으로 세는 오크가 있을지 몰라 던지는 유혹적인 미끼다. 분노대의 악이 담긴 함성은 ‘여기 너희들이 원하는 강자가 있다. 모두 이곳으로 달려와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크라면 절대 피할 수 없는 미끼다. 언제나 그렇듯 오크들은 그 미끼를 물었다.
크워어어어어억!
크리야아아아악!
그어어어어어어!
쿠오오오오오오!
카아아아아아아!
분노대의 함성에 대답이라도 하듯 오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러대며 분노대를 향해 돌격해왔다. 3,000의 오크 중 다른 곳으로 빠지는 오크는 단 하나도 없었다.
돌격해오는 오크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가장 앞에서 양손도끼를 들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붉은 오크, 그락카르였다. 다른 오크들을 멀찍이 떨어뜨리고 독보적으로 튀어나와있는 모습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표출하는 거다.
“내가 인간 중 가장 강하다!”
덜고바트가 크게 소리쳤다. 이것도 미끼다. 오크 선봉을 유인하기 위해 던지는 정말 뻔한 미끼다. 하지만...
“크워어어억!”
이것 역시 분노대의 함성처럼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고급 미끼다.
덜고바트의 외침을 들은 그락카르는 당연히 그를 향해 달렸다. 함정이고 뭐고 상관없다. 오히려 함정이면 더 좋다. 더욱 치열한 싸움으로 카록의 눈에 띌 수 있으니까.
그락카르는 정말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산을 타고 올랐고 덜고바트가 있는 곳에 거의 근접했을 때, 강하게 뛰어올랐다.
하늘 높게 오른 그락카르는 해와 덜고바트 사이에 위치했다. 덜고바트의 눈에 햇빛을 등에 지고 있는 그락카르는 검은 바위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검은 바위가 점점 확대됐다.
“분노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덜고바트는 강하게 소리치며 정확히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그락카르를 향해 양손검을 올려쳤다.
쾅!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분노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분노대 전원이 덜고바트가 외쳤던 구호를 그대로 외치며 자신들을 향해 달려다는 오크들에게 덤벼들었다.
< 66 삼파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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