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비텔교의 부상 >
“끝...난 건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실이란 거군.
“진실이군요.”
“그럼 진실이지. 나 이상한 놈 아니라니까. 그냥 평범한 사업가야. 정직한 사업가. 그런데 최면 걸었어? 아무 느낌 없었는데?”
“원래 아무 느낌 없습니다.”“워. 무섭네. 걸려도 아무 느낌 없다니. 이거로 막 사람 조종하고 하는 것도 가능 한 거 아닌가?”
“불가능합니다. 개개인이 스스로의 정신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방금처럼 약속이나 동의하는 것으로 그 보호를 풀어주지 않으면 최면을 걸지 못합니다.”
대충 나오는 대로 말했다.
“그렇군. 그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최면 걸릴 일은 없겠군. 아. 그럼 나와 함께 일하는 거야?”
“계약서 받아보고요.”
“하하. 그렇지. 계약서 보고 검토해야지. 사무실 가는대로 작성해서 보내주지.”
“네. 그럼 다음에 뵙죠.”
용건 끝났으니 바로 일어났다. 나한테 거짓말을 하진 않았지만 왠지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다.
“한상군. 잠깐 기다려봐.”
“더 할 말 있나요?”
“아니. 전화번호 좀 줘. 전화번호를 알아야 연락할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명함은 나만 받았네. 난 딱히 명함이 없어서 그냥 폰 번호를 불러줬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가 감독님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진 않고 귀찮은 일이 생겨서 일하기 힘들겠다고 말했더니 알겠다고 하셨다.
감독님도 기우형과의 일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시니까. 그 일 때문에 일 못하는 거라 이해하셨을 거다.
늦은 밤.
원래는 잘 시간이지만 동네 산위에 있는 운동장에 나왔다. 여기 오려면 어두운 산길을 걸어야 해서인지 아무도 없다. 원래는 무서워서 못 오는 곳이지만 지금 내가 무서워해야 할 사람은 몇 없으니까.
훙. 훙. 후웅.
양손검병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쇠파이프만이 아니다. 쇠파이프를 휘두르던 중 손과 발을 움직여 가상의 적을 공격했다. 내가 추가한 동작이 아니다. 양손검병이 하던 동작 그대로다.
양손검병은 양손검만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양손검을 휘두르되 기회만 되면 온 몸으로 타격 공격을 시도했었다. 그락카르로서 맞아본 경험을 떠올리면 그것들도 상당한 위력이었다. 종합격투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움직임은 꽤 좋다. 그락카르가 죽어서 하루를 반복할 때 열심히 연습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양손검병의 움직임을 완벽히 체화하지 못했다. 지금 내 앞에 양손검병이 있다고 생각하고 1:1로 붙는다면 100이면 100, 내가 질 것이다.
사실 내가 도둑놈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긴 하다. 잘은 모르지만 양손검병들은 대부분 긴 시간을 들여 뼈를 깎는 훈련을 하고 죽음이 오가는 수많은 전장을 겪었을 텐데 말이다. 그걸 한두 달 연습했다고 비슷해지길 바라는 건 정말 도둑놈 심보지.
그래도 최대한 가까워져야한다.
정청원이 위험은 없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난 바보가 아니다. 양지로 올라오지 못하는 계약이 제대로 된 계약일리 없다. 그런 계약이 이루어지도록 안전장치가 되는 것.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러니 준비해야한다. 몸을 단련해서 웬만한 위협에는 당하지 않도록 말이다.
적어도 양손검병 하나와 싸울 정도의 무력을 갖춘다면... 총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
“좋은 결투였다. 그락카르.”
“크흐.. 마찬가지다. 비흐로크.”
좋은 결투였다. 턱이 얼얼하다. 비흐로크의 주먹은 다른 족장급 전사와 비교해도 상당히 아픈 편이다. 얼마동안 싸운 거지? 해가 살짝 질 때 싸우기 시작해서 지금은 완전히 져버렸으니 꽤 싸운 거 같기는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어느 한 쪽이 쓰러질 때까지 싸우고 싶은데 말이야. 해가 완전히 져버려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싸우지 못하는 게 아쉽다.
비흐로크는 오르히 부락의 족장급 전사 중 하나다. 요즘 나는 족장급 전사들과 매일 한 번씩 결투를 하고 있다. 이런 강자들과 원 없이 결투할 수 있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잠깐 쉬다가 부락을 만들 곳을 찾아 나간다는 목표는 조금씩 미뤄지고 있다.
“비흐로크 강하다. 다른 족장급 전사보다도 더.”
부락에 온 첫날 캅카스가와 싸워 이겼고, 어제 싸운 형제도, 그제 싸운 족장급 형제도 이겼다. 그런데 비흐로크와는 승부를 내지 못했다. 캅카스가에 비해 덩치도 작고 기세도 약한데 말이다.
“나는 결투에 자신 있다. 주먹질이라면 오르히 말고는 누구한테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렇군.”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보다는 주먹질에 더 자신 있는 모양이다. 그런 형제들이 가끔 있다. 싸우다가 무기를 던져버리고 주먹으로 싸우는 형제들. 나는 잘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다.
“그락카르 맷집 좋다. 왜 오르히와의 싸움에서 쉽게 기절한 거지? 이해가 안 된다.”
“...... 그냥 운이 안 좋았다.”
오르히는 주먹질 한 방, 한 방이 너무 강했다. 보라색 빛이 날 치유해주고 체력을 채워주는 속도보다 입는 충격이 월등히 높으니 버틸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순식간에 기절하다니. 치욕이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라. 오르히는 원래 강하고 형제는 전날 캅카스가와의 결투에서 입은 상처가 낫지 않아서 그랬을 거다.”
“맞다. 그랬을 거다.”
얼른 맞장구 쳐줬다.
쉬면서 대화를 나눴다. 비흐로크는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오크다. 이런 오크와의 대화는 내게 큰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는 중, 대전사급 정도 되어 보이는 형제가 다가왔다.
“비흐로크. 오르히가 부른다. 오르히의 천막으로 가봐라.”
“오르히가? 왜 부르는 거지.”
비흐로크가 오르히의 천막 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내 부락의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가봐야겠군. 내 부락의 일원이 된 형제들은 한 곳에 모여 있다. 나도 쉴 때는 꼭 그곳에서 쉬고 있다.
“전쟁인가?”
우뚝 섰다. 부락 형제들에게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전쟁’이라는 단어가 잡아 세웠다. 바로 뒤돌아 비흐로크의 뒤에 붙었다.
“나도 가도 되나?”
“형제가? 흠... 괜찮겠지. 형제도 충분히 강자니까. 사실 딱히 누가 오고 가는 걸 막지는 않는데 아무도 안 오는 거다. 나나 캅카스가 같은 형제들은 강제 참가라서 가는 거고.”
그럴 거다. 누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둘러앉아서 대화 나누는 걸 하고 싶어 할까.
“둘 다 멋진 결투였다. 내일은 나와 싸우자. 그락카르.”
“다음은 내 차례다. 순서를 지켜라. 캅카스가.”
천막에 들어갔지만 누구도 비흐로크만 불렀는데 넌 왜 왔냐고 말하는 형제는 없었다. 마치 당연히 왔어야 할 오크가 왔다는 태도였다. 그들의 옆에 가 섰다.
노르쓰 우... 이름이 너무 길다. 여하튼 노르쓰가 꿈에서 리자드맨이 우리 땅을 침범하는 것을 봤다는 것이 대화의 주제였다. 내가 죽는 장면을 봤다는 그 꿈인가.
“그거 믿을 수 있는 건가? 저번에는 내가 죽었던 것을 봤다고 들었다. 잘 안 맞는 것 같다.”
“그게 처음 틀린 거였다. 형제.”
노르쓰가 직접 변명했다.
“그 외엔 전부 맞았었다.”
“전부?”
“그래. 전부다.”
“내 죽음을 본 건 틀렸다.”
“맞다. 그게 문제다. 이제까지는 내 꿈을 기반으로 부락의 움직임을 결정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 꿈이 틀렸기에 이번에 새로 꾼 꿈도 맞는 건지 의심된다.”
“의심하지마라. 네 꿈은 그 동안 수십 번 정확했다. 이제 한 번 틀렸다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오르히가 말했다.
“알겠다.”
“리자드맨 3,000이라고 했나 노르쓰 우르드?”
“그렇다. 오르히.”
“누가 나서겠는가.”
“나다. 내가 나선다.”
“아니다. 나다.”
“형제는 저번에 싸웠다. 내가 갈 거다.”
족장급 전사들이 서로 자기가 가겠다고 나섰다. 대충 보아하니 누가 가서 리자드맨과 싸울 건지 결정하는 것 같다. 나도 껴도 되는 걸까?
“내가 가겠다.”
내가 나서도 되는 건지 의문이 생겼지만 일단 나섰다. 싸워보고 싶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내 부락이 아니니까. 오르히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형제가?”
“리자드맨과 싸워본 적 없다. 싸우고 싶다.”
내가 가겠다고 나선 후에도 다른 족장급 형제들이 서로 가겠다고 아우성 댔다. 나도 그 사이에 꼈다. 정말 가고 싶다. 리자드맨... 만나본 적은 없지만 강하다고 들었다.
“역시 이번에도 다들 가고 싶어 하는군. 그렇다면 언제나 그렇듯 결투로 하지. 그락카르도 껴서 말이다.”
“좋다! 재밌겠군.”
“좋은 생각이다 오르히.”
다들 오르히의 말에 좋아한다.
“결투를... 어떻게 하는 거지?”
“전부 함께 하는 거다.”
바로 옆에 선 비흐로크가 대답해줬다.
“전부 함께?”
“그래. 여섯이 동시에 결투를 진행해고 단 한 명이 서 있을 때까지 싸운다. 그 승자가 이번 전투에서 형제들을 이끌게 될 거다.”
다섯의 족장급 형제들과 동시에 싸운다고? 이건... 이건......
“크흐..”
최고다.
***
“그락카르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군.”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참 부러운 삶이다. 복잡하게 이거저거 생각할 필요 없이 무조건 하고 싶은 싸움만 하며 사는 삶이라니. 그락카르한테 싸움이 곧 일이니까 일과 취미가 같은 삶을 사는 거잖아? 얼마나 좋을까.
정청원과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덩치 하나가 계약서 들고 나와 정청원 사이를 계속 왕복했지. 덕분에 직접 만나지 않고도 바로 계약했다. 정청원은 며칠만 기다리면 안전하고 괜찮은 녀석으로 하나 가져온다고 했다.
그 사이 나도 꽤 바쁘게 돌아다녔다.
난 그락카르처럼 단단한 피부를 갖고 있는 게 아니니까. 방검복 회사에 직접 찾아가 내 몸에 맞춘 전신 방검복을 주문했다. 그리고 쇠파이프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일이니 양손검 크기의 목검 10자루도 제작 주문했다.
돈은 제법 깨졌지만 무기와 갑옷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든든하다.
간단하게 씻고 나와 컴퓨터를 켰다. 이건 뭐지? ‘초능력’이 실검 1위에 올라 있었다. 갑자기 초능력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마우스를 움직여 클릭했다. 그러자 그것에 관련된 뉴스와 블로그가 쭉 나왔다. 전부 진짜 초능력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와. 진짜 돈이 사라지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김해역 손은 가만있었음. 주변 사람들이 돈을 잡고 있기까지 했는데 순간 사라짐. 진짜 초능력인 듯.
-돈만 사라지게 만드는 초능력이라니 웃기지 않냐? 막 어디다가 꼬불쳐놓고 자기가 쓸 듯.
SNS 실시간 검색 내용을 보면서 점점 불안해졌다. 마치 ‘헌금’에 대해 묘사하는 것 같지 않나.
급히 관련 영상을 찾아 봤다.
“아.. 빌어먹을...”
‘헌금’이 확실했다.
< 58 비텔교의 부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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