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크 더 오크-57화 (57/228)

< 57 법보다 가까운 것 >

“그러니까 제가 법원 같은 역할을 하는 거군요.”

“오. 비유 죽이는군. 맞네. 법원 같은 역할이지. 계약서의 내용이 지켜지지 않을 때 그걸 집행하도록 만드는 게 법원이니까.”

사업 제안을 하러 왔다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 정청원이 내게 한 제안은 이 사람은 최면이라고 알고 있는 ‘약속의 무게’에 관련 된 것이었다.

내가 이번에 우사장과 기우형의 계약을 중개했던 것처럼 최면을 걸어 계약을 중개하자는 것이었다. 최면은 내가 걸고, 중개할 만한 계약은 자신이 가져오는 방식으로 말이다.

“우사장이랑 갔던 직원들이 실패했다며 돌아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자 대답하려던 녀석이 전신마비에 걸리더니 막 울더군. 나중에 전신마비 풀리고 나서 왜 울었냐고 물었더니 너무 고통스러워서 울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남은 세 녀석한테도 자네에 대해 물어봤는데 똑같더라고.”

이 인간도 정상은 아니네. 한두 명 시켜보고 전신마비 걸려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보면 멈추는 게 정상 아냐? 이 인간의 영혼색은 어두운 푸른색, 그것도 상당히 많이 어둡다. 사이코패스인가 소시오패스인가 하는 종류의 인간인 걸까?

“그때 생각나더군. 우사장이 화물청사에서 일하는 한상이란 이름의 최면술사를 혼내줄 일이 있으니 직원을 빌려달라고 했던 게 말이야.”

짧고 굵게 아주 핵심적으로 나에 대해 전부 말했네. 우사장 이 썩을... 그냥 약속을 ‘무조건’이라고 걸고 ‘기한’을 무제한, ‘벌칙’을 강한 복통으로 할 걸 그랬다. 계속 쭉 아프게.

“여기 오기 전에 우사장에게 전화했는데 한상군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으려고 하더군. 우사장에게도 최면을 건 모양이야. 나한테 말 안 할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나한테 말 안 할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란 게 참 평범한 대화인데 사이코패스가 저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섬뜩하다. ‘말 안했다가 무슨 짓 당할지 아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쯤 되면 최면을 믿지 않을 수가 없더군. 그걸 믿게 되니 한상군과 나, 둘에게 도움이 되는 여러 사업아이템이 떠오르더군. 방금 말했던 계약 중개인 말이야.”

계약 중개인... 나도 얼마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일이다. 이미 계약 중개로 돈도 벌었지 않은가. 오천만원씩이나. 물론 그 일 때문에 며칠째 골치 썩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난 사회에 나와 택배회사 상하차 직원으로 시작해서 퀵서비스, 택배기사, 개인기사를 했고 대학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돈이 될 만한 계약을 할 사람, 그것도 최면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의 계약을 하는 사람을 알 리가 없다.

“최면이 필요한 계약을 많이 아시는 모양입니다.”

“꽤 알고 있지. 내가 일하는 업계는 그런 계약이 종종 있거든.”

“그 쪽 업계라면 제가 위험해지는 거 아닙니까?”

“한상군이 위험해져? 왜?”

“조... 건달 쪽 일이잖습니까.”

조폭이라고 하면 듣는 조폭 기분 나쁠 것 같아 건달이라고 말을 바꿨다.

“아? 하하. 한상군이 오해했군. 나 조폭 아니야.”

“아니라고요? 그런데 어제는...”

덩치 넷을 보며 말을 줄였다. 저 놈들이 한 짓이 있는데 조폭이 아니라고?

“우리 직원들이 한 일 때문에 오해했군. 자. 이거. 아까 바로 줬어야 했는데 늦었군. 미안해. 그러니 오해가 생기지.”

정청원이 명함 한 장을 넘겼다. ‘함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말과 정청원의 이름,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심플한 명함이었다.

“우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전문적인 능력을 빌려주는 인력회사 비슷한 곳이네. 다만 좀 고급인력을 제공한다는 게 다른 인력회사와 다른 점이지.”

“인력회사? 고급인력?”

고급인력이라고 말하며 슬쩍 덩치 넷을 봤다.

“아. 쟤들은 신입직원이야. 인상 더럽고 힘만 센 놈들이지. 애들이 순하고 싸움 못해서 조폭은 꿈도 못 꾸는 녀석들이야. 이미 한상군이 한 번 혼내줬잖아. 조폭이면 저렇게 순하게 있겠어? 웃는 거 봐봐. 얼마나 순해.”

정청원이 ‘웃는 거 봐봐.’라고 하자 네 덩치가 바로 웃었다. 저렇게 군기가 잡혔는데 조폭이 아니라고? 그리고 순하긴 개뿔... 웃으니까 인상이 더 더럽다.

“신입직원...입니까.”

“그래. 덩치 크고 얼굴 더러우니까 조폭 흉내 내면서 떼인 돈 받아주는 거지. 어제 우리 애들 보낸 것도 최면에 당해서 돈 뺏겼다고 해서 간 거야. 한상군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거든.”

“제가 정말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아냐. 한상군은 착한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었으면 쟤들이나 우사장 그 정도에서 안 끝내지. 그리고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도 이렇게 소박하게 일하며 살고 있다는 것도 착하다는 증거 중 하나지.”

그 소박한 삶은 능력을 얻기 전에 하던 건데요. 요즘은 제 능력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며 이 소박한 삶 때려 치려고 하고 있고요. 하지만 이 사람은 모르겠지. 아마 내가 예전부터 최면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 힘이 갑자기 생겼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대충 심부름꾼 같은 일을 하시는 거군요. 그거 조폭이 이름만 바꿔서 하는 일 아닌가요?”

“정말 이놈들 때문에 크게 오해했네. 우린 심부름꾼이랑 완전 달라. 이놈들 내 고향후밴데 일없이 놀고 있어서 데려와 소일거리 시키는 거야. 돈도 얼마 못 벌어. 건당 200~500만원. 한 달에 많아봐야 4~5건 나가니까. 이놈들이 벌어오는 돈이라고 해봐야 이놈들 인건비 빠지고 하면 얼마 안남아.”

“그럼 원래는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말했잖아. 고급인력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그리고 고급인력들은 남이 자기에 대해 아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한상군도 마찬가지일 거 아냐. 최면에 대해서 누가 떠벌리고 다니면 좋겠어?”

납득이 가는 말이다. 하지만 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증명하지 않으면 이 인간을 내가 어떻게 믿을까.

“눈에 불신이 가득하네.”

“어제 제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당연히 믿을 수 없죠. 제가 직접 겪고 본 것은 저분들 넷이 저를 협박하고 때린 일이고요. 말로만 들어서 실체를 알 수 없는 건 정사장님의 말이죠.”

“그렇겠지. 하지만 돈을 생각해봐. 돈이라면 한 번 속는 셈 치고 일할 수 있지 않겠어? 우리 사무실에 있는 고급인력이 받는 돈이 얼만지 알아? 최소 1,000만원에서 시작해. 최고 기록은 7억 8000만원. 지난달에 이룬 기록이지.”

최소 1,000만원... 7억은 바라지도 않는다. 한 건에 1,000만원만 받을 수 있어도 내가 1년에 버는 돈의 3분의 1을 버는 거다. 구미가 당긴다. 내가 인맥이 있다면 직접 돌아다니면서 계약 중개인 역할을 하겠지만

“길게 말 안할게. 한상군이 끼어들 수 있는 확실한 계약이 지금 당장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만 해도 2개야. 확실한 것들로 말이야. 좀 더 확인해봐야 하는 것들까지 합하면 5개까지 늘어나.”

“그렇군요.”

“처음 6개월은 무료로 연결해주지. 그 후엔 7:3 물론 한 상군이 7이야. 그리고 매출이 높아지면 8:2, 9:1로 조정도 가능해. 그 외에도...”

정청원이 여러 가지 말을 하며 날 설득했다. 내게 딱 필요한 일이라 솔깃하다. 지금의 나로서는 ‘약속의 무게’로 돈 벌 수 있을 만한 계약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역시나 말뿐, 실체가 없다.

“괜찮군요. 정사장님의 사업제안. 상당히 괜찮은 조건인 것 같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한상군의 능력과 내 영업능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엄청난 수익을 가져올 거야.”

“문제는 정사장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건 그렇겠지. 신뢰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우리 사무실의 다른 직원과도 신뢰를 쌓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한상군과도 앞으로 시간을 들여 신뢰를...”

“아뇨. 시간 보낼 필요 없습니다. 한 방에 저와의 신뢰를 쌓을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최면을 받아드리시면 됩니다.”

“아..안됩니다. 형님. 위험해요.”

이제까지 한 마디도 안하고 조용히 있던 덩치 중 하나가 놀라서 소리쳤다.

“아까 저희 어떻게 되는지 보셨잖습니까. 혹시라도 형님이 잘못 되면 우리들이랑 사무실 사람들은...”

“닥쳐. 이 새끼야. 내가 여기 오면서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했잖냐. 고향 내려가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있어라. 한 마디만 더 하면 쫓아낼 테니까.”

“.....”

험악하게 덩치를 갈군 정청원이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떤... 최면이야? 내가 먹여 살려야 할 직원들이 많아서 말이야. 위험한 건 안 되는데.”

“간단해요. 지금까지 내게 한 말 중 거짓이 있느냐 없느냐. 그게 최면 내용입니다. 거짓을 하셨어도 별로 위험하진 않아요. 잠깐 1분 정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후 풀어드릴 생각입니다.”

“.... 좋아. 하지. 그런데 그 전에 아까 한 말 중 당장 끼어들 수 있는 계약이 2개라고 했던 거. 그거 구라야. 조사해봐야 하는 계약 5개가 있다는 건 진짜고.”

“알겠습니다. 감안하죠. 그거 외에 잘못 말씀하신 건 없습니까? 최면 걸기 전에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

정청원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5분가량 지나고,

“없어. 전부 사실만 말했어. 아까 계약 건은 한상군을 너무 끌어들이고 싶어서 조금 과장되게 말한 것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최면을 걸도록 하죠. 당신은 저에게 확실한 계약 2건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 전부 진실을 말한 것이 확실하다고 약속하십니까?”

“약속한다...라고 하면 되나?”

-스킬 ‘약속의 무게’를 사용합니다.

교단 기여 포인트 100이 차감되었습니다.

제대로 ‘약속의 무게’가 발동되었다. 요즘 ‘약속의 무게’를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 교단 기여 포인트를 너무 많이 썼어. 이러다간 헌금을 꺼내서 쓰기는커녕 오히려 헌금해서 포인트를 벌어야 할 것 같다.

“만약 제게 거짓을 말하셨다면 1분간 전신마비 상태에 빠질 겁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

정청원. 당신의 진심을 나한테 보여줘. 진심이었다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거야. 하지만 거짓이라면...

‘기한’은 6개월, ‘벌칙’은 전신마비로 한다.

-스킬 ‘약속의 무게’ 제한 조건으로 ‘기한’ 6개월, ‘벌칙’ 전신마비를 지정합니다.

추가로 교단 기여 포인트 75가 차감됩니다.

나를 이용하려고, 속이려고 했는데 겨우 1분만 전신마비 걸리고 끝난다고? 안 된다. 여기서 가볍게 혼내고 보낸다면 또 나를 이용하고 속이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지금보다 더 큰 올가미를 내게 씌우려고 하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끊는다.

< 57 법보다 가까운 것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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