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그락카르의 부락 >
의아하다. 왜 저 정도 덩치를 가진 형제가 철갑옷을 전신에 두르고 있지? 다른 덩치가 작은 형제라면 몰라도 덩치가 저 정도 되면 인간이 쏘는 것들은 충분히 무시할 수 있을 텐데. 어느 정도 중요부위를 가린 갑옷을 입은 형제를 본 적은 있는데 저렇게 전신에 두른 형제는 처음이다.
“크흐?”
의아함은 거리가 가까워지자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암컷?”
“그렇다. 암컷이다. 문제 있나?”
“아.. 아니. 없다. 형... 아니 자매.”
오랜만에 당황했다. 자매란 말을 해본 적 있던가? 없다.
우리는 오로지 전사만을 형제와 자매란 호칭으로 부른다. 그 동안 내가 자매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암컷 전사를 만나본 적 없다는 거다. 그런데 처음 만난 암컷 전사가 대전사급의 덩치를 가진 전사라니.
그래. 그래서 철갑옷을 입고 있었군. 암컷은 선천적으로 수컷에 비해 피부가 부드럽고 약하다. 당연히 방어력이 약하지. 그래서 철갑옷을 입은 모양이다.
아니. 잠깐.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 자매의 뒤에 모습을 드러내는 형제들도 자매만큼은 아니지만 꽤 두터운 갑옷들을 입고 있다. 그냥 이 곳의 전사들이 갑옷을 좋아하는 건가? 모르겠다.
자매가 다가와 팔뚝을 내민다. 재빨리 나도 내밀었다.
쿵.
묵직하다. 힘이 보통이 아니다. 힘만은 대전사급인 것이 확실하다.
“크카카. 단단하고 강한 팔이다. 강한 형제구나. 난 미로크라고 한다. 형제의 이름은?”
“난 그락카르다. 자매.”
“신선한 인간 시체를 들고 있는 걸 보면 하루나 이틀 전에 인간과 싸웠구나.”
“맞다. 어제 싸웠다.”
“크카카카카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주술사는 멍청하다. 전사도 아닌 자가 전사가 질 것이라 매번 말하더니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호탕하게 웃는 모습, 강한 힘, 날카롭게 솟은 송곳니와 내게 뒤지지 않는 덩치.
“우리가 왜 왔는지 궁금하겠...”
“반했다. 나와 자자.”
“크카?”
“나 정도면 괜찮지 않나. 나 강하다. 상처도 꽤 있다.”
완전히 반했다. 내 인생의 암컷을 만났다. 지금껏 봐온 그 어떤 암컷보다도 압도적으로 완벽한 암컷이다.
“크카카카. 형제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난 아버지보다 약한 자와는 자지 않는다.”
아버지보다 약한 자와 자지 않는다고? 이상한 말이지만 그냥 수긍했다. 최고의 암컷이 한 말이니까.
“그래서 이제껏 나와 잔 형제는 없다. 모두가 아버지보다 약했으니까.”
“아버지가 누구지? 싸워서 이기겠다. 난 강하다.”
“대족장 오르히.”
“대족장...”
대족장. 그 강했던 캄스니조차 대족장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서 실패해 목숨을 잃었다. 캄스니가 넘지 못한 벽을 넘어 대족장이 된 자. 분명 강할 것이다. 캄스니보다 강할 것이고 나보다 강할 것이다. 하지만...
“싸우겠다. 어디에 있나.”
“크카카. 정말 싸울 생각이냐. 대족장이다. 아버지는 정말 강하다.”
“내 인생 최고의 암컷을 만났는데 전사로서 싸우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다.”
“크카카카. 알았다. 날 따라오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그때 싸워라.”
“알았다.”
저 호탕한 웃음. 정말 매력적인 암컷이다.
“아까 하던 말을 이어서 하겠다. 왜 우리가 여기 왔는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다.”
사실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미로크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
“주술사가 자신의 꿈속에서 형제들과 인간이 싸우는 것을 봤다고 했다. 인간이 너무 많아서 형제들이 지는 모습도 봤다고 했다. 그래서 가서 복수해주라고 했다. 멍청하다. 우리 전사들은 아무리 숫자가 부족해도 이겨낼 수 있는데 말이다. 전사가 아니라서 그걸 모른다.”
“우리가 진다고? 바보 같다. 우린 아주 쉽게 이겼는데 말이다. 그런데 주술사? 주술사가 누구냐.”
“주술사를 모르나?”
“모른다.”
처음 듣는다. 주술사라니.
“주술사는 주술사다. 전사가 아니지만 부락에서 대족장 다음의 위치에 있다.”
전사가 아닌데 대족장 다음 위치에 있다고? 이상하다.
“전사가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다.”
“태어날 때부터라. 몇 살이냐. 미로크.”
“13살이다. 형제는 몇 살이냐.”
“.... 11살이다.”
“11살? 아직 10살이 안 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하다.”
도대체 내 나이를 다른 오크들이 어떻게 아는 거지? 난 봐도 다른 오크의 나이를 모르겠던데.
“아니다. 나 11살 맞다. 정말이다.”
“그렇군. 알겠다. 너무 어려 보인다. 상처 몇 개 더 만들어야겠다.”
“그럴 거다.”
다음 싸움에서는 일부러 얼굴에 칼 몇 대 맞아야겠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그락카르.”
“부락을 만들어야하는데 길안내를 하던 형제가 죽었다. 그래서 일단 북쪽으로 가서 부락을 만들 땅을 찾을 생각이다.”
“부락을? 숫자가 너무 적지 않나?”
미로크가 나와 형제들을 수를 헤아렸다. 왠지 부끄럽다.
“원래 이것보다 훨씬 많았다. 오면서 몇 번 싸우느라 수가 줄어서 그런 거다.”
“그렇군. 알겠다. 당장 지낼 데가 없다면 우리 부락에서 지내도 된다.”
미로크의 부락?
“잘됐다. 가자. 자매의 아버지도 만나서 싸워야 하니까.”
“크카카. 알았다.”
몇 번을 들어도 호탕한 웃음이다. 미로크는 정말 매력적인 암컷이다. 반드시 그녀와 천막을 함께 쓸 것이다.
미로크를 따라 이틀을 더 이동했다.
“여기가 내가 사는 부락. 대족장 오르히의 부락이다.”
거대하다. 1만 명이상의 전사가 모였던 캄스니의 부락보다도,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부락보다도 컸다. 그리고 뭔가 정리되어 있는 느낌이다. 캄스니의 부락은 ‘집결의 외침’으로 모인 형제들이 급하게 만든 천막으로 중구난방이었는데.
“그냥 아무데서나 쉬면된다. 난 아버지에게 가보겠다. 갔다 왔다고 말은 해야 하니까.”
“같이 가자.”
“왜?”
“말했지 않나. 자매의 아버지와 싸워 이겨 자매와 함께 밤을 보내겠다고.”
“크카카카. 그렇군. 그랬다. 그럼 함께 가자.”
다른 형제들에게는 알아서 쉬라고 말해준 뒤 미로크를 따라갔다. 형제들과 헤어질 것은 염려하지 않는다. 출발할 때 고함을 지르면 내 고함 소리를 듣고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찾아오지 않으면... 뭐 어쩔 수 없다. 수가 줄어들면 내가 원하는 싸움에서 멀어지겠지만 형제의 거취는 형제가 결정하는 거니까.
부락이 넓다보니까 대족장의 천막까지 가는데 꽤 오래 걸렸다. 도착한 천막은 대족장의 것이라서 그런지 식량 천막만큼이나 컸다.
미로크는 거침없이 입구의 천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뒤따랐다. 그리고 천막 안에 들어서자마자 멈칫했다.
우드록급의 전사 여섯이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섯 족장급 전사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크고 훨씬 강한 기세를 뿌리고 있는 전사가 있었다. 저 오크가 대족장 오르히겠지. 나보다 족히 머리 하나 반은 더 크다. 당연하겠지만 이제껏 만난 전사 중 가장 강했던 캄스니보다도 훨씬 강한 기세다.
“왔구나. 미로크. 형제들의 복수는 했나?”
거대한 전사들 사이에 평범한 다른 형제보다도 작은 듯한 오크가 하나 있었다. 내가 멈칫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다른 덩치가 큰 전사들의 기세는 그러려니 했다. 그 정도 덩치면 그만한 기세를 뿌리는 것이 당연하니까. 하지만 이 작은 오크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족장급보다 강하고 대족장보다는 조금 약한, 거의 캄스니급의 기세였다.
기세는 곧 강함을 의미한다. 저런 작은 오크에게서 캄스니에 버금가는 강함을 느끼다니. 최고의 암컷인 미로크를 만났을 때 버금가는 충격이다.
작지만 강한 오크. 그가 미로크에게 질문했다.
“노르쓰 우르드. 이번엔 네 말이 틀렸다.”
노르쓰 우르드. 그게 저 오크의 이름인가? 길다. 보통 오크들은 저렇게 길게 이름을 짓지 않는데. 너무 길면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틀렸다고?”
“네가 꿈속에서 형제들이 지는 것을 봤다고 했지? 하지만 형제들은 지지 않았다. 여기 그락카르가 그 형제들을 이끄는 족장이다.”
저 오크가 주술사였군. 주술사는 강하구나. 노르쓰 우... 주술사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강렬함이 담긴 눈빛이다. 분명 저 주술사는 강자다. 싸워보고 싶다.
“붉은 오크? 어떻게 여기 있지? 분명 인간의 양손검에 심장이 찔려 죽는 것을 봤는데?”
기분이 나빠졌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왜 인간에게 죽나. 난 안 죽는다. 살아남아서 강해지고,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대족장이 될 거다.”
“으음... 모르겠군. 대족장. 난 가보겠다. 뭔가 어긋났어. 뭐가 보이는지 잠을 자봐야겠다.”
“그래라.”
주술사는 빠르게 걸어 나와 미로크를 지나쳐 천막 밖으로 나갔다. 주술사와 싸워보고 싶다. 만약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았다면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대족장 오르히! 난 그락카르다! 결투를 신청한다!”
오르히와의 결투다. 그와 싸워 이겨 미로크와 자야한다.
“결투? 크카카칵. 보자마자 결투라니. 어리지만 호탕한 형제군.”
미로크의 호탕한 웃음이 아버지를 닮은 거였군. 소리의 크기 차이는 꽤 많이 나지만 그 안에 담긴 호탕함은 비슷하다.
“왜 나와 싸우고 싶지? 여기 강한 전사들이 많이 있는데. 나보다는 비슷한 전사와 싸우는 것이 도움 될 거다.”
“미로크와 같은 천막을 쓰기 위해서다. 미로크가 형제를 이겨야만 같이 자준다고 했다.”
“뭐? 크카카카카칵. 그렇군. 그런 거였어. 미로크가 매력적인 암컷이긴 하지. 그럼 한 번 상대를...”
“안 된다. 오르히.”
오르히가 나와 싸우겠다고 하려는 찰나, 족장 중 하나가 나서서 막았다.
“너는 나와 결투하기로 약속했지 않은가.”
“그 전에 나와 해야 하지.”
“그 다음은 나다.”
족장들이 전부 나서서 자신과의 결투가 먼저라고 말했다. 짜증난다. 분명 오르히가 나와 결투하겠다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이상하군. 어느 전사가 결투를 순서를 기다리며 하지? 하고 싶으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말에 족장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강하지만 역시 어리다. 아직 강해진 신체만큼 정신이 성숙되지 않았다. 자제력이 없고 무모하다. 어쩔 수 없지. 정신의 성숙은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으니까.”
화난다. 어리다고? 정신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참았다. 여기서 화를 내면 나를 비난하는 저 오크의 말처럼 미성숙한 오크가 된다. 나는 미성숙한 오크가 아니다. 전사다.
“순서를 지켜서 싸워야 정신이 성숙한 것인가. 정신이 성숙하고 미성숙하고를 따지기 전에 명예로운 전사로서 결투를 순서대로 하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
“어린 형제. 생각해봐라. 오르히는 대족장으로서 할 일이 많다. 그리고 대족장처럼 강한 전사와 싸우고 싶어 하는 형제는 많지. 그 많은 형제들의 결투를 받아줬다간 오르히는 대족장으로서의 일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 인정하기 싫지만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난 빨리 오르히와 싸우고 싶다. 미로크와 함께 천막을 쓰고 싶다.
“모든 것은 순서가 있다. 대족장과 싸우고 싶으면 이 부락의 다른 강자를 이겨라.”
“그럼 다음에 대족장과 싸울 오크를 내가 전부 이겨버리면 되겠군. 그럼 내가 대족장과 결투를 할 수 있겠어. 여기 있는 형제들이 이 부락에서 가장 강한 전사겠지?”
그들에게 강한 기세를 뿌렸다. 저들을 모두 이기면 바로 대족장과 싸울 수 있겠지. 그들 역시 피하지 않고 나를 향해 기세를 내뿜었다.
“형제. 결투다. 설마 형제와 결투하는 것도 순서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족장 중 가장 덩치가 크고 기세가 강한 형제를 가리키며 결투를 신청했다.
“... 세상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 형제에게 할 수 없는 것도 있음을 알려줘야겠군.”
“나와라.”
그가 결투를 수락했다. 바로 천막을 나섰다.
대족장의 천막이 공터에서 멀지 않았기에 금세 그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족장이 공터에 마주서자 형제들이 알아서 공터를 비워줬다.
“나는 전사 그락카르! 형제의 이름을 대라!”
“나는 전사 캅카스가.”
캅카스가. 이상한 이름이다.
“그럼. 간다! 쿠워어어억!”
이름을 교환하고 캅카스가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캅카스가 역시 마주 주먹을 뻗었다.
퍽!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쳤다. 강하다. 주먹 한 방에 큰 충격을 입었다. 역시 덩치답게 강하다.
“크워억!”
“크라락!”
퍽! 퍽! 퍽!
때리고 맞는다. 캅카스가 한 발자국 밀려나고 내가 두 발자국 밀려난다. 강하다. 캅카스가. 우드록보다도 더 강한 것 같다.
퍽!
한 대 강하게 맞고 뒤로 밀려났다. 머리가 띵하다. 단단한 주먹이다.
“크흐..”
내가 밀리고 있지만 기쁘다. 이런 강자와 주먹을 교환하고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미로크도, 대족장도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눈앞의 캅카스가만이 남았다.
퍽! 퍽!
주먹을 교환할수록 즐거워지고 내 힘도 그에따라 강해진다. ‘불가사의한 힘’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락?”
점점 강해지는 내 힘에 캅카스가가 의아해한다. 하지만 그가 의아해하든 말든 서로의 주먹이 서로의 얼굴과 몸을 무차별적으로 강타했다.
퍽! 퍽! 퍼버버버버벅!
밀리던 내가 점점 동수를 이루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내가 캅카스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워어억!”
쾅!
“크락!”
지금까지완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소리와 함께 주먹에 맞은 캅카스가가 크게 뒤로 밀렸다.
< 53 그락카르의 부락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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