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그락카르의 부락 >
5,165만원이라. 공사대금은 1억330만원 이었나보네.
허... 5,165만원이라니. 잠깐 최면술사 흉내 내서 계약을 중개해준 것뿐인데...
얼떨떨하다. 살면서 이렇게 쉽게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으니까. 저번에 그 사건으로 받은 5,000만원은 내 퇴직금과 직장을 잃는 대가도 포함되어 있던 거니 그러려니 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5,000만원 벌면 엄청 기쁠 줄 알았는데 그냥 평온하다. 현금이 아니라 은행 숫자로만 확인해서 그런가?
명구 아저씨한테 돈이 들어왔다 말하고 소개비를 주려고 했지만 한사코 받기를 거절했다. 일이 매끄럽지 않게 진행 되서 자긴 받을 자격이 없다면서 말이다. 나도 계속 권유했지만 고집 싸움은 결국 내가 졌다. 그렇게 5,160만원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굴러다니면서 은행앱을 몇 번이고 켜서 돈을 확인했다. 통장엔 1억 5,000만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00만원도 없었는데 말이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돈을 벌게 된 걸까. 그리고 언제부터 번 걸까.
“흠...”
그락카르? 그래. 그락카르를 본 이후인 거 같다. 그락카르를 보기 전에는 통장에 4,000만원정도가 들어있었다. 철이 든 이후로 계속 일해서 모은 전재산이었다. 그런데 그락카르를 꿈에서 보게 된 후로 사람들의 영혼색을 보게 된 것을 필두로 여러 가지 능력이 생기고 비텔님도 만나게 되었다.
연이어 터진 사건에서 돈을 벌게 되었고 1억 5,000만원이란 돈이 통장에 들어 있는 것도 보게 되었다. 그락카르의 능력, 비텔님께서 주신 능력이 아니었다면 그 사건들을 잘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했겠지.
처음엔 ‘왜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꿔야 하는가..’라는 생각밖에 안 했었는데 말이야.
이제 잠자리에 들면 또 그락카르가 되어 그 세계를 여행하게 될 거다.
예전엔 잠자기 전이나 깨어날 때, 그락카르로서 할 일, 했던 일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이 들었었는데 최근에는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오늘’을 벗어나 내일을 맞이한 게 얼마나 기뻤던지. 그락카르가 되어 그 세계에서 겪은 ‘내일’도 상당히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락카르... 아직 좋은 건 아니지만 싫지도 않다.
궁금하다. 어째서 나는 그락카르와 연결 된 걸까. 그락카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비텔님이 연결한 걸까? 당연하게도 답을 내릴 방법은 없다. 그래도 계속 꿈을 이어가다보면 언젠간 알 수 있게 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시간을 보니 자정이 막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그락카르가 되러 갈 시간이구나.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
“카록의 축복이다!”
“오오! 카록께서 우리를 보고 있다!”
전투가 끝나자 역시나 카록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축복을 내려주시기 시작했다. 그분께서 우리를 보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니 기뻤다. 다만 아쉬운 건 축복의 대상이 내가 아니란 거다.
쿠드릭! 쿠드릭! 쿠드릭! 쿠드릭!
데리고트! 데리고트! 데리고트! 데리고트!
저기 붉은 안개에 휩싸인 두 명의 형제가 쿠드릭과 데리고트인 모양이군.
“쿠드릭! 데리고트!”
나도 그들 둘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카록께서 들을 수 있도록.
내 외침이 다른 형제들의 외침을 뚫고 강하게 울렸다. 형제들이 내 외침에 자극받았는지 더욱 크게 그들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축복을 받는 형제의 이름을 외치는 건 카록께 그들의 이름을 알리기 위함이다. 축복을 받는 중에는 카록께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니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이름을 크게 외친다. 카록께서 잠시라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어어어어어어!
쿠오오오오오오!
붉은 안개를 전부 받아들이고 축복을 마친 형제들이 기쁨의 고함을 외쳤다. 자랑스러운 형제들이다.
“쿠워어어어어어억!”
함께 외쳐 그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내 마음을 표현했다. 곧 모든 형제들의 함성이 시체와 핏물이 가득한 전장을 뒤덮었다.
“쿠드릭, 데리고트. 축하한다.”
축복이 끝난 그들에게 다가가 축하했다. 영혼의 색이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붉고 진한 것이 카록께서 축복을 내려줄만한 용맹한 형제들이다.
“고맙다. 그락카르. 형제 덕분이다.”
“쿠드릭 말이 맞다. 형제 덕분이다. 역시 형제는 카록께서 주시하는 명예로운 전사다. 형제를 따라다니면 나도 카록의 시야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거 같다.”
“맞다. 그락카르는 카록의 사자가 직접 카록의 말을 전해주기도 한다. 대단하다.”
“방금 전투도 카록의 전언을 들은 그락카르가 인도 한 거다. 그락카르 대단하다.”
“그락카르는 카록께서 항상 주시하는 것이 틀림없다.”
카록의 축복을 받은 쿠드릭과 데리고트를 축하해주기 위한 말을 했는데 그들이 오히려 내 덕분이라며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형제들도 둘의 말에 동의했다. 카록께서 날 주시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
형제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카록께서 날 많이 보고 계시다. 크흐.. 역시 난 보통의 오크 전사가 아니다. 피부도 붉지 않나. 분명 카록께서 다른 형제들 틈에서 쉽게 찾으려고 피부를 붉게 만든 것일 거다.
“그락카르 커졌다.”
“맞다. 커졌다. 원래 내 머리가 그락카르 어깨에 닿았는데 지금은 닿지 않는다.”
“크다. 그락카르.”
커졌나?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다른 형제들이 예전보다 더 작아 보인다. 가까운 나무로 가서 내 머리가 닿는 곳에 도끼로 흠을 냈다. 조금 물러나서 확인하니 확실히 커졌다. 저 정도면... 거의 우드록에 근접했다.
“역시 그락카르다. 카록께서 지켜보고 힘을 주신 것이 틀림없다.”
“대단하다 그락카르. 카록의 곁으로 가기 전까지 항상 그락카르와 함께 하겠다.”
“아까 싸우는 거 봤다. 그락카르는 내가 본 전사 중 가장 용맹하다. 카록께서 지켜보실 만하다.”
“형제와 함께한다면 언제나 카록께서 함께하는 치열한 전장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끝까지 따라가겠다. 형제.”
기분 좋다. 형제들이 줄줄이 나를 따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아직 족장이 되기는 부족한 것 같아 부락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안했었다. 그런데 이젠 덩치도 커졌고 따르는 형제들도 생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형제들이여! 나와 함께 하겠는가!”
함께 하겠다!
구워어어어어!
그락카르와 함께 간다!
형제들은 저마다 고함을 지르거나 말을 외쳐 내게 대답했다.
“크흐.. 그럼 이제부터 형제들은 나 그락카르가 만들 부락의 전사다!”
구오오오오오오!
우워어어어어억!
크아아아아아아!
가아아아아아악!
형제들이 함성을 질러 대답했다. 그리고...
“쿠워어어어어어어억!”
나도 답했다. 지금 이 순간. 나 그락카르의 부락이 만들어졌다.
***
식량으로 쓸 시체를 적당히 챙기고 다시 길을 나서려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닥쳐왔다.
“길을 아는 형제는 없나?”
“없다.”
“난 모른다.”
“난 형제만 따라왔다.”
우리를 이곳까지 이끌어온 형제가 방금 전 전투에서 죽은 것이다. 그 형제가 우리가 정착할만한 땅 몇 개를 안다고 했었는데 말이다. 식량이 풍부하고 언제나 치열한 전투를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땅을 말이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역시 그 형제 말고 길을 아는 형제는 없었다.
별 수 없다.
“가자.”
그냥 가자.
북쪽인 것은 확실하니 가다보면 정착할 만한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못 찾으면 잠깐 다른 형제의 부락에 있으면서 정착지를 찾아보면 된다. 얼마 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지만 지금은 여기 있는 모든 형제들이 나와 함께하기로 약속했으니 나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잘하면 그 부락에서 나를 따르겠다는 형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번 전투로 350까지 줄어든 무리의 수가 다시 불어날 테고 더 강한 상대와의 전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안개가 끼고 우중충해서 비가 올 것 같은 것이 좋은 아침이다. 이런 날에는 적, 특히 인간처럼 감각이 좋지 않은 것들은 길을 잃어 오크들의 땅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있다. 운 좋다면 그런 것들을 만나 싸울 수 있겠지.
“일어나라! 가자!”
내 말에 아무 곳에나 널브러져 자고 있던 형제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외침에도 일어나지 못하는 형제가 있었다.
“자는 형제를 깨워라!”
퍽!
퍼퍽!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먼저 일어난 형제들이 자는 형제를 발로 차거나 도끼자루로 때렸다. 확실한 기상방법이다. 나도 가까이 있는 형제에게 가서 발로 차...
“이..일어났다. 형제. 차지마라.”
려 했는데 자던 형제가 벌떡 일어났다. 입맛을 다시며 다른 형제를 깨우려고 시선을 돌렸는데 딱히 깨울 형제가 없이 전부 일어나 있었다. 아쉽다.
“가자!”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다. 어제 죽은 길안내를 해주던 형제의 말에 의하면 3일은 더 가야한다고 했었다. 그러니 3일 동안 계속 북쪽으로 가면 될 것이다.
으적.
배가 고파 이동하던 중 들고 있던 시체를 뜯어 먹었다. 아쉽다. 너무 부드럽다. 이게 드워프의 시체이거나 큰 뿔 누의 앞다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북쪽으로 한창 이동하던 중,
“크흐?”
안개 자욱한 숲 너머에서 강한 기세를 느꼈다.
퍽.
갑자기 멈춘 내 등에 따라오던 형제가 부딪혔고 줄줄이 따라오던 형제들이 앞의 형제의 등에 부딪혔다.
“무슨 일이냐. 형제.”
내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이번에 내 부락의 대전사로 임명한 쿠드릭과 데리고트 중 쿠드릭이 물었다.
“앞에 강한 무언가가 있다.”
“인간인가? 또 싸울 수 있는 건가?”
같이 듣던 데리고트가 살짝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모르겠다.”
그냥 기세만으로 상대가 누군지 구별할 수는 없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저 강한 것들이 다수 앞에 있다는 것뿐이다.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어제에 이어 다시 즐거운 전투를 할 수 있을 텐데.
기세도 어제 싸웠던 인간들에게서 느꼈던 것보다 강하다. 어제보다 더 강해진 내게 어울리는 상대다.
“나도 느껴진다. 강하다. 어제 만났던 것들보다 강하다.”
“나도 느꼈다. 쿠히.. 다시 카록께 나의 활약을 보여드리고 싶다.”
강한 기세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쿠드릭과 데리고트도 그들의 기세를 느꼈다. 둘은 도끼를 꺼내 들었다. 나도 등에 맨 양손도끼를 꺼내들었다. 족장으로서 대전사에게 선두를 빼앗길 수는 없지. 적임을 확인하는 순간 달려들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다.
다른 형제들도 하나둘 도끼를 꺼내들어 전투를 준비했다.
“어떡할 거냐. 형제.”
데리고트가 물었다. 아직 안개 때문에 누군지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가까워졌다. 어제 싸웠던 적에게 달려들 때의 거리 정도? 적이라면 지금 달려들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모르겠다. 인간일까? 아니면 다른 형제들일까. 모르겠다. 일단 달리자. 가서 형제면 멈추면 되겠지. 그래서 돌격하려고 한 그때..
크리야아아아아악!
저쪽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강한 기운이 담긴 형제의 고함이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억!”
나도 마주 외쳤다. 그리고 양손도끼를 다시 등에 맸다. 형제들이다. 싸움은 없다.
“아쉽군.”
쿠드릭이 아쉬워하며 도끼를 집어넣었다. 나도 쿠드릭처럼 아쉽다. 인간 혹은 다른 종족이었으면 이틀 연속으로 싸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크카카카카카. 역시 우리 형제들이다! 인간들에게 지지 않을 줄 알았다! 멍청한 주술사 때문에 헛걸음만 했다!”
저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고 가장 먼저 선두에 선 형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보다 조금 작은 전신을 덮는 두꺼운 철갑옷을 입은 형제였다.
< 52 그락카르의 부락 > 끝
ⓒ 냉장고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