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지나가는 길 >
복통이 진행되는 중인지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였다. 뭐라고 대답할까...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빨리 대답 안 해? 나한테 최면 걸었어. 안 걸었어!
잠깐도 못 참는군. 아직 자기 배 아픈 게 최면 때문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모양이다. 내가 최면 거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최면이라고 확신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최면 걸릴 만한 상황이 생각 안 나겠지. 난 그저 지나가는 말로 약속해달라고 했을 뿐이니까.
대답해줄까? 음... 이렇게 배가 아프다는 건 나한테 돈 안 줄 생각을 했다는 건데. 내가 왜 쉽게 대답해줘야 하지?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일단 한 번은 모른 척 하자.
-왜 그러세요? 왜 그러세요?!! 지금 그 말이. 으윽. 나와!
많이 아픈지 흥분한 상태에서도 중간에 말을 멈추고 신음소리를 흘린다. 전에 소장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이거 많이 아픈 모양인데?
-나한테 최면 걸었지! 빨리 멈춰!
“걸긴 걸었죠.”
-시발 우사장한테 걸면 됐지 나한테 왜 최면을 걸어! 이거 당장 안 멈춰!
“전에 말씀 드렸을 텐데요. 최면은 중간에 못 멈춘다고. 저하고 한 약속만 지키시면 되요. 그러면 최면은 풀립니다.”
-약속?
말이 끊겼다. 나하고 무슨 약속을 했는지 생각해보는 모양이다.
-난 약속한 적 없어! 빨리 이거나 멈춰!
“말귀 정말 못 알아 드시네요. 못 멈춘다니까. 그리고 잘 생각해보세요. 저하고 분명 뭔가 약속했어요.”
-으..으으윽. 너 이거 경찰에 신고할 거야. 내가 가만 둘 줄 알아? 고소해서 니 인생 시궁창에 빠뜨려줄 거라고!
웃기고 있네. 되지도 않는 협박을 하고 앉아있다.
“맘대로 하세요. 경찰서에 가서 제가 최면을 걸어 아프게 했다고 신고하시면 되겠네요. 그런데 전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세상 누가 최면을 누가 믿냐고.”
바로 네놈이 그렇게 말했지.
-이이... 왜 나한테 최면을 건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잘 생각해보시라니까요. 저하고 무슨 약속을 하셨고 지금 그 약속을 안 지켜서 아픈 거니까요.”
-크윽. 그 약속이 뭔지 말해달라고! 으으으.
계속 못 떠올리면 한 10분 뒤에는 말해줄까? 아니지 우사장이 31분 버텼으니까 우사장보단 더 버텨야 하지 않겠어?
-아! 그거야? 중개 수수료?
에이. 빨리도 떠올렸다.
“생각나셨나 봐요.”
-근데 왜 나한테 이래! 아직 우사장한테 돈 못 받았어! 우사장한테 최면 잘못 건거 아냐?! 왜 우사장은 별 탈 없고 나만 아픈 건데! 우사장한테 돈 받으면 줄 테니까 빨리 멈춰!
이 아저씨가 아직 덜 아픈 모양이다. 거짓말을 하네? 우사장일은 분명 완료되었다고 목소리가 말해줬는데 말이야.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니까! 아아악! 으아아아! 미치겠다. 정말! 빨리 멈추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못 멈춘다고. 최면을 멈추는 방법은 약속을 이행하는 것뿐이에요.”
-크윽. 그러니까 이거 뭔가 잘못됐다니까! 나 우사장한테 돈 못 받았어!
괴로운 중에도 한껏 억울함이 담긴 목소리로 자신의 무고함을 피력한다. 너무 진짜 같아서 나도 순간 ‘정말 스킬이 뭔가 실패했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스킬이 실패했다는 건 비텔님이 실패했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비텔님이 실패했다? 그럴 리 없지.
“우사장님한테 돈 못 받으셨다고요?”
-그래! 정말 못 받았어!
“그렇군요.”
-... 뭐야. 그게 끝이야? 이거 멈춰줘야지!
“아까부터 몇 번을 말씀드리는지 모르겠네요. 못. 멈. 춘. 다. 니. 까. 요.”
-이 시바새꺄!
욕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아직 버틸만한가 보다. 전화도 끊고 말이야. 정말 아파 죽을 거 같으면 그깟 돈보다 고통 멈추는 걸 더 원할 텐데. 다음부터는 ‘강한 복통’이 아니라 ‘죽을 정도로 강한 복통’을 ‘벌칙’으로 할까? 아니면... ‘5초마다 고환을 세게 차이는 고통’이라든... 아우. 아니다. 그건 너무 잔인하다. 아무리 상대가 짜증나게 해도 이 정도로 잔인한 짓은 하지 말자.
곧 다시 전화 올 거라 생각했는데 잠잠하다. 신경 끄자.
“미안합니다. 급한 전화라서요.”
“괜찮아요. 물건 천천히 들어가서 다 일할 필요는 없는데요. 뭐.”
다른 직원들에게 사과하고 일에 집중했다.
“한상아! 한상이 어디 있냐!”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날 찾는 목소리가 들려서 봤더니 명구 아저씨다. 각 컨베이어 벨트를 돌아다니며 날 찾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에게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한 후 명구 아저씨한테 갔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아. 한상아. 방금 우형이한테 전화 받았는데 말이다. 너 우형이한테 최면 걸었어?”
그 이야기군.
“네.”
“왜 그랬어? 어서 풀어줘.”
“못 합니다. 아시잖아요. 최면 한 번 걸면 약속 지킬 때까지 못 푸는 거.”
“으음... 왜 우형이한테 최면을 건 거냐?”
“명구 아저씨라면 믿겠지만 처음 보는 아저씨는 믿을 수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명구 아저씨가 그럴 수 있다며 수긍했다.
“하지만 이 녀석 돈 못 받았다고 한다. 근데 니가 안 믿는다고 내가 대신 말해달라고 하더라고.”
“그러던가요?”
“이 녀석이 거짓말할 녀석이 아니거든. 아마 최면이 잘못된 거 같다. 함 풀어줘라. 나중에 다시 걸면 되잖냐.”
명구 아저씨가 나긋나긋한 말로 날 설득했다. 이 아저씨는 참 좋은 분인데 말이야... 친구가 왜 그런 인간일까.
“그런데 정말 못 풀어요. 그리고 풀 수 있어도 풀어줄 생각이 없어요.”
“그때 말을 싸가지 없게 해서 그러냐? 그건 내가 사과 시킬 테니까 그만 용서해줘라.”
“그거 때문이 아니에요. 이전에도 최면을 못 믿고 절 무시하는 사람 많이 만나 봤는걸요. 익숙해져서 이제 겨우 그 정도로 화내진 않아요.”
아. 거짓말도 하다보면 늘어나나보다. 정말 자연스럽게 거짓말 하네. 나.
“최면이 잘못 될 일도 없어요. 최면의 발동 여부는 걸린 사람이 판단하는 거거든요. 제가 발동하는 게 아니에요. 본인이 판단하는 거기에 최면의 판단력은 절대적이에요. 그리고 제가 아저씨 친구 분한테 어떤 최면을 건 줄 아세요?”
“어떤 거냐.”
“대금을 받은 후 중개 수수료를 안주겠다는 생각을 할 때 배가 아프도록 최면을 걸어뒀어요.”
내 말에 명구 아저씨 표정이 굳었다.
“정말 최면 내용이 그거냐?”
“네. 확실합니다. 대금 받은 후 저에게 수수료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때, 복통이 생기도록 최면을 걸어뒀어요.”
“... 알았다.”
명구 아저씨가 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했다.
“우사장님. 접니다. 정명구.”
명구 아저씨 성이 정씨구나. 뭔가 드디어 퍼즐이 맞춰진 느낌이네. 딱히 그냥 아저씨라고 부를 때와 달라진 건 없지만. 통화중인 명구 아저씨 표정이 일그러진다.
“욕 하지 마세요. 우사장님.”
아. 우사장이 욕해서 표정이 일그러진 거였군.
“그러니까 돈을 줬다는 거군요.”
한참동안 우사장이 일방적으로 떠들고 아저씨는 듣기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명구 아저씨가 원하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전화하죠.”
명구 아저씨는 전화를 끊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한상아. 그 새끼가 그럴 줄은 몰랐다.”
“아니에요. 아저씨 탓이 아닌 걸요.”
“아니. 내 탓이지. 내 친구랍시고 널 소개시켜줬는데도 무시하더니 이젠 중개 수수료까지 떼먹으려고 해? 빌어먹을 새끼.”
다시 폰을 든 명구 아저씨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건 덕에 연결음이 그대로 들렸다.
-아으... 해결했냐? 멈추겠데?
“우형아. 거짓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라. 너 우사장한테 돈 받았냐?”
-너까지 왜 그러냐. 나 정말 못 받았다니까? 그 우사장이 쉽게 돈 줄 인간이냐? 으으. 배 아파 죽겠는데 너까지 왜 그래. 빨리 그 새끼한테 말해서 이거 멈추라고 해.
“우형아!”
명구 아저씨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명구 아저씨를 쳐다봤지만 아저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통화에 집중했다.
“진짜 마지막이다. 너 우사장한테 돈 받았냐. 못 받았냐. 그거만 말해라. 다른 말 하면 전화 끊고 한상이도 니 전화 안받을 거다.”
-.... 그래. 받았다.
“그런데 왜 거짓말 했냐.”
-시발. 그거 잠깐 해놓고 5천만 원이 말이 되냐? 내가 그거 벌겠다고 몇 달을 일했는데!
“그럼 애초에 적게 준다고 했으면 되잖냐.”
-너도 알잖아. 돈 못 받을 때는 눈 뒤집히는 거. 그때 내가 뒤집혀 있었다. 물불 안 가렸어.
“그래서 지금은 물불 가리는 거냐?”
-그래. 시발. 내가 그 돈 어떻게 벌었는데 그걸 10분 일 한 새끼한테 줘! 못 준다. 내 배가 터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못줘!
“후... 한상아. 이거 언제 멈추냐?”
“안 멈춰요. 스스로가 약속을 완벽하게 이행했다고 느껴야 멈춥니다. 그리고 세상 누구도 자신을 속일 순 없어요.”
“그러냐. 알았다. 우형아. 들었냐?”
-시발 그러니까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거잖아! 너 내가 얼마나 독한 놈인지 알지? 이거 버틴다. 무조건 버텨! 어린 새끼 거기 듣고 있냐? 세상 그렇게 쉽게 살지 마라. 잠깐 일해주고 오천? 시발 어린 새끼가 어디서 주워 먹으려고.
정신력으로 이긴다니. 저 아저씨가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거 같다. 못 멈춘다니까. 우형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명구 아저씨가 전화를 끊었다.
“정말 미안하다.”
“아뇨, 괜찮아요. 아저씨가 그런 게 아니잖아요.”
“내가 어떻게든 오천... 빌어먹을. 정말 미안하다. 나 돈이 없어. 돈 없어서 저 개새끼 같은 소장한테 붙어 있잖아. 오천만원은... 정말 없다. 미안하다.”
“그만하세요.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요.”
아저씨는 그 뒤에도 한참 더 사과하고 나서야 사과하는 걸 멈췄다.
“그런데 안 멈춘다고? 우형이가 버텨내면 멈추는 거 아냐?”
“그런 사람 본 적 없어요.”
“그러냐.. 계좌번호는 줬지?”
“네. 저번에 일하기 전에 줬어요.”
“그럼 됐다.”
아저씨는 우형에게 ‘이제부터 한상이랑 나 둘 다 전화 안 받을 거다. 멈추고 싶으면 약속했던 수수료 1원 한 장 빼지 말고 한상이 계자로 보내.’라고 문자를 보냈다.
“우형이 전화 받지 마. 지금 제정신 아니라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네.”
“정말 미안하다.”
아저씨는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곤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기우형이 복통을 버틸 수 있을까? 복통이 알아서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한을 ‘약속 지킬 때까지’로 해뒀으니까. 기우형이 신의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인물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그런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복통이 오지도 않았겠지.
강한 복통을 평생 가지고 간다? 신음을 흘릴 정도로 강한 복통을? 그게 가능할까?
다시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기우형의 번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궁금하지만... 배터리를 분리했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긴 하지만 악에 받힌 사람 상대하는 건 피곤하다. 괜히 그런 피곤을 자처할 필요는 없겠지.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일이 거의 끝날 때쯤,
-스킬 ‘약속의 무게’가 완료 되었습니다.
추가로 교단 기여 포인트 2가 차감됩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을 확인하니 12시 17분이다. 거의 2시간 정도 버텼네. 말은 몇날 며칠이든 버틸 것처럼 하더니...
폰을 꺼내 은행앱을 켜 확인하니 5,165만원이 들어와 있었다.
< 51 지나가는 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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