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드디어 찾아온 내일 >
카록의 뜻을 전한다! 왼쪽 언덕위에 인간 2000이 숨어 있다! 너희의 늠름한 모습을 보면 도망갈 것이다. 몰래 다가가 전부 죽여라!
“크흐?!”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강렬하게 울렸다.
내가 갑작스런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자 형제들이 왜 그러냐며 물어왔지만 무시한 채 다른 형제들의 모습을 살폈다. 특별한 기색이 없다. 나만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분명 ‘카록의 뜻을 전한다.’라고 했다. 카록의 뜻이라... 카록께서 직접 뜻을 전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모르겠다. 고민하려니 머리가 아프다. 고민하기 싫다. 그냥 일단 가보자. 일단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말 카록의 말이 전해진 것이라면 당연히 언덕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고, 만약 카록의 전언이 아닌 날 함정에 빠뜨리려는 다른 무언가의 수작이었다면? 크흐.. 그것도 좋다, 그곳에 날 함정에 빠뜨리고 날 죽이려는 것들이 있을 테니 그것들의 머리를 부숴주면 된다. 함정이라면 더욱 치열한 전투가 이어질 터. 그러면 카록의 시선을 받을 가능성이 더 커지겠지.
“언덕으로 올라가자.”
확실히 숨어있기 좋은 언덕이다. 중간까지는 거의 아무 것도 없는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숲이 우거져 있다. 저 숲에 숨는다면 쉽게 찾기 어렵겠지.
정상에 올라 숲을 따라 걷기 시작하니 나뭇가지 같은 것이 귀찮게 하고 기를 따라 걷는 것보다 더 힘이 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전사에게 별 문제 아니지. 형제들도 별 말없이 잘 따라오고 있다.
그렇게 산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왜 그러나 형제.”
근처에 있던 형제가 물었지만 무시하고 전방을 주시했다.
느껴진다. 숲 너머 저곳 멀리에서 힘과 기세가 느껴진다. 인간의 군대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목소리는 진짜였다.
그렇군. 깨달았다. 내가 특별한 전사인거다. 충분히 특별하지. 다섯 살의 나이에 이미 두 번의 축복을 받았고 붉은 피부도 받았다. 분명 난 그 누구보다도 많이 카록께서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크흐..”
기분이 좋아졌다. 난 특별하다. 남들이 받은 적 없는 카록의 뜻도 받았다.
카록이시여. 원하는 대로 단 하나의 인간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형제들. 모두 조용해라. 카록의 뜻을 전하겠다.”
그다지 크지 않게 말했지만 주변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당연한 일이다. 그분의 뜻을 전하겠다는데 감히 떠들고 있을 오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저 앞에 2,000의 숨어 있다고 카록께서 알려주셨다. 카록께선 우리가 그 인간들과 싸우길 원하신다. 아니, 학살하길 원하신다.”
그워..
“조용.”
형제가 소리 지르려는 것을 커지기 전에 막았다.
“카록께서 인간들이 우리를 보면 도망갈 것이라 하셨다. 그러니 인간들이 모르게 조용히 다가가야 한다.”
“알겠다. 형제.”
“조용하겠다. 그락카르.”
형제들의 눈빛이 좋다. 싸우겠다는 의지가 강할 것이다. 당연하다. 카록께서 명령하신 싸움이다. 즉, 카록께서 지켜본다는 이야기다. 원래도 용맹한 형제들이지만 이번 싸움에서는 특히 더 용맹할 것이다.
“그럼 가자.”
인간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내 뒤를 따라오는 형제들은 아까에 비해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형제들이 자랑스럽다. 이 정도로 조용히 움직이다니. 세상에 우리보다 조용히 움직이는 오크 전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잘 하고 있다. 카록께서도 우릴 보면서 칭찬하고 있을 것이다.
***
빌어먹을 오크 놈들. ‘조용히’란 말의 뜻을 모르는 거냐?
까득.
부드득.
빠각.
돌 부서지는 소리, 바위에 무기 긁히는 소리,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등 온갖 소음이 일었다.
아니. 조용히 움직일 거면 허리 정도는 숙이고 밟는 것을 조심하면서 움직여야 하는 거 아냐? 왜 이리 당당하게 걸리적거리는 걸 다 부수며 움직이는 거야?
그래도 오늘은 제법 말이 통하긴 했다. 기습 비슷한 걸 하게 하는 데 성공하긴 했으니까. 이젠 이 소음 가득한 오크들의 기습을 인간들이 눈치 못 채길 비는 수밖에 없다.
점점 인간이 매복해 있는 곳이 가까워진다. 오크들이 매복지에 다가갈수록 긴장된다.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다. 마치 오크들의 움직임에 슬로우라도 걸린 듯한 느낌. 긴장해서 그런다. 오늘 그락카르가 살아남느냐 죽느냐는 오크들이 들키지 않고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에 달려 있으니까.
2km... 1km... 900m... 800m... 700m... 600m... 그리고 500m.
오크와 인간의 거리가 500m 정도 되었을 때 인간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들킨 것이다. 오크를 발견한 인간들이 오크의 등장을 알리며 소리쳤다.
젠장. 조금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면, 그랬으면 완벽하게 기습에 성공했을 텐데.
푸확.
내가 오크의 움직임이 일찍 들킨 것에 한탄하고 있을 때, 그락카르가 움직였다. 마치 용수철이 튀듯 땅을 박찬 그락카르가 빠르게 인간들을 향해 쇄도했다.
쉭. 쉬쉬쉭.
그락카르가 바람을 갈랐다. 빠르다. 마치 고속도로에서 오픈카를 몰며 바람을 맞는 것 같다. 이때까지 봤던 그락카르의 돌격 중 가장 빨랐다. 그락카르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카록에게 직접 명령을 받았다. 그것에 그락카르의 감정은 거의 극한까지 고양되어 있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전투를 치루기 전에 이미 ‘불가사의한 힘’이 최대치까지 발휘되고 있었고 그것이 그락카르의 달리기 속도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인간들이 오크를 발견하고 그락카르가 500m를 주파해 인간 매복지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5초. 아직 타격대장과 양손검병들은 상황을 파악 중인지 그락카르를 막으러 나서지 못했다. 물론 바로 반응했다고 해도 15초만에 그락카르를 막으러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간 진영은 가운데에 양손검병을 두고 양 날개에 검병을 두는 형식. 그 진영이 향한 방향은 언덕 아래였다. 그러다보니 숲을 통과해 인간 매복지에 다다른 그락카르의 돌격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오른 날개의 검병들이었다.
방심하던 중 돌격을 맞이하게 된 검병들이었지만 훈련을 잘 받았는지 빠르게 움직여 잔뜩 밀집해 서로의 어깨를 의지하며 방패를 들어 그락카르의 양손도끼를 막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락카르가 온힘을 다해 휘두르는 양손도끼는 일반 검병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콰콰쾅!
그락카르의 양손도끼는 굉음을 내며 밀집한 검병들을 쳤고 마치 도미너처럼 검병들을 쓰러뜨렸다. 가장 앞에서 그락카르의 도끼를 막은 검병의 모습은 처참했다.
“크흐..”
그락카르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에 만족하고 있었다. 카록이 좋아할 거라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날뛰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카록이 직접 명령했다고 생각하는 전투다. 그락카르는 이곳에서 어떤 오크보다도 더 카록의 눈에 띄고 싶었다.
“쿠워어어어!”
그락카르가 고함을 지르며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검병 진영 한 가운데에 떨어졌다.
쿵.
영문을 모르고 검병 둘이 그에게 밟혀 즉사했다. 착지함과 동시에 양손도끼를 양손으로 강하게 쥔 그락카르가 한 바퀴 돌며 휘둘렀다. 양손도끼에 걸린 검병들이 잘리고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크워어어어억!”
그리고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양떼에 뛰어든 늑대, 아니 호랑이의 모습이었다. 어떤 검병도 그락카르를 막지 못했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검병들에게 닥친 재난은 그락카르만이 아니었다. 그락카르를 따라 돌격했던 511의 오크가 드디어 도착했다. 그들은 그락카르로 인해 진영이 무너진 검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진영이 무너진 검병은 오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조짐이 좋았다. 기습이 실패하나 싶더니 그락카르가 적이 준비하기 전 들이닥쳐 억지로 기습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싸움. 적이 정면이 아닌 오른쪽에서 나타났으니 인간의 진영은 당연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난전이 이어졌다.
곧 두 명의 타격대장이 양손검병을 이끌고 와 그락카르를 막았지만 그때는 이미 오른 날개의 검병이 거의 궤명당한 상태였다. 난전상태니 석궁병과 궁병은 아무 것도 못하고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손만 빨고 있었다.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두 타격대장과 20명의 양손검병은 이전의 다른 ‘오늘’보다 그락카르를 더 잘 상대했다. 이미 그락카르가 날뛰는 것을 본 상태인지라 처음부터 방심하지 않고 상대한 덕이다.
하지만 다른 전장의 양상은 완전히 달랐다. 이제까지 그락카르가 잘 버티고 오크 본진이 밀리는 양상이었지만 오늘은 오히려 오크 본진이 밀어붙이고 그락카르가 밀리는 상황이었다.
구워어어어어억!
우워어어어어억!
그아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오!
카아아아아아아!
시간이 흐르고 여기저기서 승리의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간 본진이 거의 궤멸한 것이다. 그러자 그락카르를 잘 상대하고 있던 두 타격대장과 양손검병들이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서로의 합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그락카르의 공격이 유효타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른 오크들이 전투를 마치고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하자 그런 것이 더 심해졌다. 두 명의 타격대장마저 실수를 범하기 시작하니 밀리던 그락카르가 반대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각!
마지막 남은 타격대장을 그락카르의 도끼가 왼쪽 어깨에 박혀 들어가 오른쪽 옆구리로 나왔다. 타격대장은 사선으로 잘려 이등분되며 죽음을 맞이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구오오오오오오!
그아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오!
가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락카르의 승리의 포효를 질렀고 다른 오크들이 따라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나도 소리쳤다.
드디어! 드디어 그락카르를 살려냈어! 드디어!!!!!
***
꿈에서 깨어난 후 바로 화물청사에 출근했다. 이게 얼마만의 출근인지 모르겠다. 반복된 ‘오늘’에서는 100번 이상 무단결근 했었는데 말이야.
“하하. 힘드시죠?”
“아뇨.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예전에 퉁명하게 대답해서 미안. 오늘은 성실하게 대답해주마.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티 나나요?”
“네. 계속 웃고 계시더라고요.”
당연히 웃고 있을 수밖에. 그 빌어먹을 청개구리 같은 그락카르 놈을 드디어 살렸는데. 오늘은 직원들과 화기애애하게 일을 했다. 중간에 음료수도 뽑아줬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은 쏴야지.
그렇게 기분 좋게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쉬러 들어왔다.
“그러니까 일 끝나고 준다니까?”
“어제도 그랬잖소. 그래놓고 끝나면 바로 집에 가려고?”
역시나 소장과 아저씨가 싸우고 있다. 이걸 어떻게 할지 상당히 고민했었다. 저번에 했던데로 아저씨를 도와주기엔 교단 기여 포인트가 좀 아까웠으니까.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꿔 아저씨를 돕기로 했다.
소장이 너무 얄미워서 혼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렇게 싸워서 겨우 받아낸 30만원에서 5만원을 수수료라며 내게 준 아저씨의 마음이 좋게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권선징악. 나쁜 놈은 벌 받고 착한 사람은 상 받아야지.
“저기. 소장님?”
“응? 왜?”
“정말 돈을 주실 거라면 그냥 간단하게 계약서 작성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아저씨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물러나실 거 같은데.”
똑같은 말을 했고 똑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소장은 적극적으로 계약을 하겠다고 했고 중간에 도망갔으며 복통을 참지 못하고 돌아와 아저씨에게 돈을 줬다.
“자. 이거 받아라.”
그리고 똑같은 마지막을 맞이했다. 아저씨는 이번에도 5만원을 수수료라며 줬다. 거절해봐야 계속 권할 것을 알기에 순순히 받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네 덕분에 돈 받았는데. 내가 더 감사하지.”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너무 흥분해서 못자는 거 아냐 이거?
그락카르를 살렸으니 내일이 찾아올 거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함이 있긴 하다. 혹시나 그락카르를 살리는 것이 내일이 찾아오는 조건이 아니라면? 다른 조건이 있거나 그런 거 없고 영원히 하루가 반복되는 거라면?
정말 엄청나게 실망해서 당분간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거 같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과 내일이 찾아오겠지 하는 기대감에 잠자리를 설치다가 늦은 시간에 겨우 잠들었다.
***
-아침..
턱.
알람을 껐다. 분명 반복되는 ‘오늘’에서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났다. 알람 울린 후 일어났다는 말은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다.
오늘 꿈속에서 내일로 나아간 그락카르를 봤기에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기는 하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는 거니까... 폰은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해냈어!!!!”
폰에 찍힌 날짜는 분명 '내일'이었다.
< 48 드디어 찾아온 내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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