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반복과 변화<여기부터 유료 연재 시작입니다.> >
그락카르가 달렸고 다른 오크들이 뒤따랐다. 다른 오크들은 인간의 매복을 느끼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 그락카르가 달리자 일말의 의심 없이 바로 뒤따른다. 이게 오크의 강점이다. ‘형제’를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믿는다는 것.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해도 모두가 합심해서 그 일을 수행하니 실패 할 일도 뒤집어 해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크들은 신체능력이 워낙 강해서 그런 경향이 더 크다.
믿는다. 그락카르. 넌 해낼 수 있어.
... 내가 그락카르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응원하게 될 줄이야. ‘어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갑자기 오크들이 돌격해오자 인간들이 매복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며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완벽하게 기습을 성공했던 ‘오늘’과 다르게 오늘은 오크들에게 충분한 피해를 입히지 못한 상태에서 양쪽 진영이 맞부딪혔다.
이번엔 오히려 매복한 인간 쪽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훈련을 철저히 했는지 금세 진영을 정비해 오크들을 맞이했다.
역시나 대장급으로 보이는 두 명의 인간 강자가 20명의 양손검병과 함께 그락카르를 막아섰다.
“크흐..”
적이 강해보이니 좋아한다. 이 오크 놈. 좋아할 상황이 아냐 임마. 너 죽어.
저번 ‘오늘’과 마찬가지로 그락카르의 심장을 찌른, 끝까지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그 놈. 음.. 그래. 심장파괴한 놈이라고 하자. 줄여서 심파놈.
여하튼 그 심파놈이 나서서 그락카르의 공격을 막는다. 아마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저번 ‘오늘’과 이번 ‘오늘’은 싸우게 된 상황이 약간 다른데도 저 사람이 나서서 그락카르의 첫 공격을 막는 걸 보면 말이다.
“크억?!”
역시 맞고 날아간다. 다른 ‘오늘’보다는 적게 날아가긴 했지만 저 심파놈은 상황이 바뀌어도 비슷하게 당하네. 그러면 이후에도 똑같이 싸움이 진행 되서 또 심장 찔리며 죽으려나? 그러면 안 되지. 어떻게 잡은 기횐데.
야! 야! 저기 쓰러진 놈 확실히 죽여! 무조건 죽여야 해! 얌마! 죽여! 저놈이 나중에 니 심장 찔러서 죽인다고! 이름도 안 가르쳐주는 나쁜 놈이야!
열성적으로 소리쳤다. 내 말이 들린 건지, 아니면 저번보다 조금만 날아가서 가까운데 쓰러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도끼를 던지지 않고 심파농에게 직접 달려간다.
그래. 가서 직접 찍어버려! 너 잘하는 거 하라고. 사람 머리 쪼개는 거 좋아하잖아.
심파놈은 다른 ‘오늘’처럼 엎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었기에 그락카르가 쇄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격을 막을 때 받은 충격에 제정신이 아닐 텐데도 발악을 하며 그락카르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성했어도 누워있는 상태에서 그락카르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기 힘들었을 텐데 지금은 충격에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기까지 하는 상황.
빠각.
그락카르의 도끼가 그대로 심파놈의 머리에 박혀들었다. 좋아!
푹. 촤학.
그락카르도 무사하진 못했다. 심파놈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인간들의 공격에 등을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등을 찔렸기에 보이진 않지만 아픔의 정도를 보면 깊은 상처는 아니다. 이 정도 상처쯤이야. 인간이라면 몰라도 그락카르에게는 찰과상이나 마찬가지지.
심파놈을 죽인 대가가 이 정도라면 엄청나게 남는 장사다.
“크워억!”
그락카르가 거칠게 몸을 돌리며 양손도끼를 휘둘렀다.
“아악!”
“으어억!”
그락카르의 등에 무기를 박아 넣었던 네 명의 인간이 그대로 도끼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두 명이 도끼날에 걸려 한 명은 몸이 반으로 잘렸고 다른 한 명은 도끼날이 몸에 반쯤 박혀들었다. 남은 두 명은 자루에 맞아 날아갔다. 자루에 맞을 때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으니 그들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진짜 힘 하나는 끝내준다. 한 손으로 휘둘렀는데 가볍게 중장갑을 입은 사람의 몸을 갈라버리다니.
시작이 좋다. 다른 ‘오늘’엔 양손검병 하나를 무력화 시키는 정도로 끝내고 전투를 시작했는데 오늘은 대장급 하나에 양손검병 네 명을 죽이거나 무력화 시키며 시작했다.
이거 정말 이기는 거 아냐?
삐이이이이이이익!
남은 대장이 피리를 꺼내 불었다.
“2.5급으로 등급 상향 조정한다! 곧 지원군이 올 테니 그때까지 버틴다!”
피리소리가 지원군을 부르는 소리였던가? 상황이 달라지니 적의 대처도 바뀌었다. 다른 ‘오늘’에는 자기들만으로 그락카르를 죽이려 했는데 이번엔 버티기를 한다고 한다.
빨리... 빨리 저들을 죽여!
급한 마음에 소리쳐 그락카르를 재촉했다.
지금 당장 지원군이 오진 못할 것이다. 500의 오크에 의해 길이 막혀 있으니까. 하지만 인간 쪽이 수가 많은 만큼 몇 부대 빠져서 전장을 크게 돌아 올 수도 있고 오크들을 뚫어낸 후 올 수도 있다.
인간이 오크 본진을 뚫고 오지 못해도 문제다. 여기서 지체하면 결국 그락카르는 죽는다.
본진 대 본진의 싸움은 인간의 승리로 끝나니까. 인간 측이 4~500명쯤 살아남는다. 그락카르의 시야에 안 보이는 자들이 있어서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그쯤인 것은 확실하다.
아무리 그락카르라고 해도 혼자서 그 수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무리다. 쌩쌩해도 무리일 텐데 상당히 부상을 입은 상태일 테니까. 그러니 그락카르가 살아남기 위해선 인간 쪽 지원군이 오기 전에 이들과의 싸움을 끝내고 오크 본진에 합류해 함께 인간 본진과 싸워야 한다.
그러니 서둘러라 그락카르...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진영을 갖춘 인간들에게 그락카르가 달려드는 것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까 한 번 반응한 이후로 반응이 없으니 내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콰가가가각!
그락카르가 몰아치고 인간들이 막는 싸움이 시작됐다. 정말... 정말 대단하다. 그락카르의 공격은 한 번, 한 번이 바위를 부숴버릴 정도로 강한데 그걸 인간 3~4명이 힘을 합하는 것만으로 막아내다니. 여기 있는 모두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기술과 힘을 가졌구나.
이 세계의 인간들이 약한 게 아니었어. 우리 세계의 인간들과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뛰어나다. 다만 오크의 신체능력이 너무 뛰어나서 상대적으로 약해보이는 것이다.
치열한 공방이 오갔고... 3시간 30분이 지났다.
그리고... 또 졌다.
그락카르는 잘 싸웠다. 그와 싸우던 인간들을 3명만 남기고 전부 죽였다. 남은 3명도 10~20분만 더 있으면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눈에 띄게 지쳐있었고 그락카르는 ‘착취하는 손’ 덕분에 체력이 거의 줄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크 본진이 무너지고 인간 측 지원군이 왔다. 오크 본진은 저번 ‘오늘’보다 오래 버티긴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수십의 양손검병이 추가로 투입되어 그락카르를 포위했다.
‘착취하는 손’이 그락카르의 체력을 채워주고 얕은 상처를 치료해주긴 했지만 깊은 상처는 전혀 치료하지 못했다. 그락카르는 분전했지만 이미 이전의 싸움에서 6개의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그로 인한 움직임의 제약 때문에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그락카르는 처절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싸워 10여명의 양손검병을 더 죽였지만 결국 죽임 당하는 걸 피할 수 없었다.
“크윽.”
오늘은 심장이 아니라 목이 잘리며 일어났다.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목을 부여잡았다. 꿈에서 깼음에도 아직도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해냈어...”
하지만 고통과 별개로 기뻤다. 정말 너무나도 기뻤다. 드디어 변화가 일어났다. 무슨 짓을 해도 변화가 없던 ‘오늘’에 변화를 만들어냈다.
“해냈어!!!! 해냈다고!!!!”
한동안 집안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
훙. 훙. 훙. 훙.
“후욱. 후욱. 후욱. 후욱.”
저 사람 지금 뭐하는 거야? 서커스 하는 건가?
무슨 무술 같은 거 하는 사람인가보다.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한 거 해.
보지 마. 예미야. 나쁜 건 보는 게 아니야.
안 나쁘거든! 그냥 공원 공터에서 기다란 키만한 쇠파이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는 것뿐이거든요! 음... 으음.... 좀 폭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나?
뭐. 어차피 다른 ‘오늘’이 오면 저 사람들도 잊을 건데 뭐. 그게 내가 공원 한 가운데에서 이런 쇼를 할 수 있는 이유지. 모두 다 잊을 테니까. 그게 아니었으면 쪽팔려서 이러지 못하지.
와. 멋있다. 나도 저거 배우고 싶어.
훗. 그래. 고맙다. 꼬마야. 한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 멋있다는 말을 들으니 보람이 있구나.
지금 난 꿈 속 세계의 양손검병들이 보여줬던 움직임을 따라하고 있다. 웬만한 신체능력으로는 따라할 수 없는 움직임이지만 난 그락카르의 신체능력을 어느 정도 받은 덕에 따라하는 데 별무리는 없었다.
신체능력이 받쳐주니 움직임을 익히는 것도 빨랐다. 겨우 한 달 연습했는데 거의 비슷하게 따라하게 됐으니까.
내가 왜 이걸 연습하고 있을까.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락카르가 내 말을 듣고 행동을 바꾼 그 날 이후, 난 꾸준히 그락카르에게 개입해 미래를 바꿨다.
오늘은 그날 이후 55번 째 ‘오늘’이다. 예전엔 ‘오늘’을 몇 번 반복했는지 세지 않았지만 희망을 얻은 후엔 매일 몇 번짼지 헤아리고 있다.
그날 얻었던 희망, 아주 작은 희망이었다. 그락카르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한두 단어 정도였고 뭐든 한 번 전하면 그 ‘오늘’은 어떤 말도 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오늘’을 바꿀 순 있었지만 그락카르를 살릴 순 없었다. 하지만 그 작은 희망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처음엔 한두 단어 전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점점 전할 수 있는 단어의 양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젠 이 ‘하루의 반복’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도 어느 정도 알았다.
반복하는 ‘오늘’이 늘어갈수록 내 의식도 뚜렷해지고 그락카르에게 전할 수 있는 말의 양도 늘어나는 거다. 말을 전하는 요령도 깨달았다. 정신을 집중해 강조해서 말하면 된다. 그 외에 약간의 요령이 더 들어가는데 이건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여하튼 그락카르에게 내가 원하는 말을 전할 수 있게 되었고 전할 수 있는 말의 양도 늘어났다. 덕분에 ‘오늘’을 반복할수록 상황이 나아졌다.
어느 날은 처참히 실패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따지면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양손검병의 움직임을 직접 익히기 시작했다.
다가올 ‘내일’을 위해 뭔가를 얻고 싶기도 했고 양손검병의 움직임을 분석해 약점을 그락카르에게 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말이다.
내가 그락카르를 이렇게 열성적으로 돕게 될 줄이야.
“하핫!”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 저 아저씨 미쳤나봐.
위험하니까 다른 데로 가자.
미쳤다는 소리 들어도 괜찮다. 요즘은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내가 하는 말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그락카르의 모습과 상황. 내가 뭘 해도 변하지 않았던 예전과 비교하면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오늘은 무슨 말을 해볼까.
***
“점점 숲의 기운이 강해진다. 좋은 곳이다. 형제.”
“이 정돈 아직 약하다. 위로 더 가면 더 좋은 숲 있다. 그락카르.”
다시 오늘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시간이 흘러 그락카르가 반응을 보인 그날로부터 101번째 ‘오늘’이다.
요즘은 그락카르에게 제법 긴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수십 가지 방법으로 그락카르를 움직여 인간과 다양한 방법으로 싸우게 만들었다.
그리고 매번 졌다.
애초에 전력차이가 너무 컸다. 결국 내린 결론이 정면으로 싸워선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 오크들이 인간을 기습하게 하자는 생각을 했다.
요 며칠은 전부 실패했다. 기습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락카르가 크게 반발했다. 카록의 이름도 팔아봤지만 카록이 절대 기습을 권유할리 없다며 거부했다.
썩을 놈... 이기면 장땡이지 기습이 뭐 어때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기습을 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이 싸움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포기하겠어.
인간이 매복하고 있는 곳에 거의 다다랐다. 아직은 매복한 인간들이 오크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려면 지금이다. 조심하자. 기습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반발할 거다. 절대 기습 같지 않고 다른 말로 기습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후우... 긴장된다. 어제 하루 종일 생각해서 정리해온 기습 아닌 척 기습시키는 문장을 준비하긴 했는데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
자. 시작하자.
‘카록의 뜻을 전한다! 왼쪽 언덕위에 인간 2000이 숨어 있다! 너희의 늠름한 모습을 보면 도망갈 것이다. 몰래 다가가 전부 죽여라!’
아부도 섞어서 말했다. 지난 반복되는 ‘오늘’동안 깨달은 것은 그락카르에게 뭔가를 시킬 때 아부를 섞으면 좋아하면서 잘 따라준다는 거다.
“크흐?!”
그락카르가 반응을 보였다. 이번엔 제발 말 좀 들었으면 좋겠는데...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내가 말 안들을 때 우리 엄마의 마음이 이랬을까?
< 47 반복과 변화<여기부터 유료 연재 시작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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