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뜻밖의 결과
사마르랜드의 전장 ‘세 번째 길’은 사마르랜드가 보유한 네 개의 전장 중 가장 치열한 곳이다.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된 이유는 간단했다.
인간의 입장에선 바로 뒤에 사마르랜드 최대 곡창지대인 로즈코 평야가 있기에 그곳이 농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반드시 방어를 해야 하는 지역이었고 오크 쪽은 사마르랜드에 접한 오크의 땅 중 가장 큰 숲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풍부해 오크 부락 몇 개가 자리 잡았는데 오크들의 평야 진입을 막기 위해 인간 쪽이 방어를 굳건히 하다 보니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됐다. 식량과 전장. 오크에게 필요한 그 두 가지가 충족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크가 더욱 몰려들었고, 인간은 몰려든 오크를 막기 위해 병력을 충원하고, 당연히 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또 오크가 몰려오고, 또 인간이 병력을 충원하고... 그것이 반복되다보니 지금의 사마르랜드 최대 전장 ‘세 번째 길’이 만들어졌다.
크름 성.
‘세 번째 길’은 백작가의 가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전장이 아니기에 백작가가 직할군을 파견해 방어하고 있다. 그런 사마르 백작가가 ‘세 번째 길’과 로즈코 평야 사이에 세운 것이 크름 성이다.
백작가는 크름 성을 절대 뚫리지 않는 성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축성했고 실제로 완성된 이래 단 한 번도 오크에게 뚫려본 적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다.
크름 성은 방어 진지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길’ 전체에 보급과 파병을 담당하는 병력 주둔지이자 방어 전략을 결정하는 사령부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크름 성 깊은 곳에 위치한 전략 사령부. ‘세 번째 길’에서 행해지는 모든 작전이 결정되고 실행되는 곳이다. 방 한가운데 ‘세 번째 길’ 전체를 자세히 그려둔 지도가 올려 진 탁자를 둘러싼 여럿의 장교가 전략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창 회의를 하는 중 밖에서 들어온 병사 하나가 의견을 나누고 있는 장교들을 지나쳐 가장 상석에 있는 헤옴 남작에게 향했다.
“정찰 보고인가?”
헤옴 남작이 병사에게 물었다. 일개 병사가 다른 장교들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러 오는 일은 정찰보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길’ 넓게 펼쳐져 있는 초소에서는 특이사항이 있을 경우에만 정찰보고를 한다.
그렇기에 정찰보고가 들어왔다는 것은 전장에 변화를 주는 움직임을 관찰했다는 뜻이기에 헤옴 남작은 모든 정찰보고가 자신에게 직접 보고되도록 만들었다. 혹시라도 중요한 사안에 대한 보고가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12소초 8번 초소에서 온 정찰보고입니다.”
“12소초라면 남쪽이군.”
“8번 초소의 위치는 이 곳입니다.”
장교 중 하나가 지도에 손을 뻗어 12소초 8번 초소의 정확한 위치를 짚었다. 장교가 가리킨 곳은 ‘세 번째 길’에서 제법 떨어진 남쪽 국경이었다. ‘세 번째 길’이라고 해서 ‘세 번째 길’ 주변만을 감시하지 않는다. 오크의 걸음은 빠르기에 주변에서 발견하면 이미 대처하기에 늦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세 번째 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빠뜨리는 곳 없도록 꼼꼼하게 초소를 만들었다. 그 결과 초병이 머물며 초소로 출퇴근하는 본부가 되는 소초만 15개나 된다. 각 소초마다 10개의 초소를 담당하니 초소의 수를 따지면 150개나 되는 것이다.
“보고해라.”
기다리고 있던 병사는 헤옴 남작이 허락하자 그제야 입을 열어 보고하기 시작했다.
“500여마리의 오크 북으로 이동 중, 무리 선두는 3.5~4급 사이.”
“3.5~4급 사이의 오크가 500마리를 이끈다고? 특이한 일이군.”
보통 3.5급이면 족장에 근접한 대전사, 4급이면 평범한 대전사다.
3.5~4급사이라고 보고가 온 것을 보면 3.5급이라고 하기엔 작고 4등급이라고 하기엔 크다는 뜻일 터. 실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끄는 무리의 수가 결정되는 오크들의 경우 그 정도 등급이면 2~300마리 정도를 이끄는 것이 맞다.
“아무래도 두 무리가 함께 전투를 치르다가 한 무리선두가 죽은 경우던가, 원래 무리선두가 죽어서 두 번째 큰 녀석이 최근에 무리를 물려받은 경우겠군.”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장교들도 동의했다.
“어떡하실 겁니까. 곧 무리가 흩어져서 반토막이 될 것 같은데.”
“흠...”
장교의 물음에 헤옴 남작은 고민에 빠졌다.
오크들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 본능이 의외로 정확하다. ‘길을 잃는 오크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길을 기억하고 가는 게 아니라 본능대로 움직이는데 항상 목적한 곳을 향해 정확히 움직이는 오크를 관찰한 귀족 중 하나가 한 말로써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보다 정확한 오크의 본능에 대해 설명하는 말로서 널리 퍼진 말이다.
무리의 크기와 무리 선두의 무력에 대한 관계도 그렇다. 어떻게 그렇게 맞추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리가 안정되면 항상 ‘무리선두의 무력=무리의 크기’라는 식이 성립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무리선두의 무력>무리의 크기’인 경우가 말이다. 하지만 반대인 ‘무리선두의 무력<무리의 크기’인 경우는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거의 없다.
약한 대장 밑에 있기 싫어하는 오크의 본능. 그것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진다. 그러니 3.5~4급의 오크가 이끌고 있는 500여마리의 무리라면 곧 흩어져 2~300마리의 무리가 될 것이다.
물론 ‘특별한 경우’가 아닌 경우에만 말이다.
“특이사항 보고도 있습니다.”
“특이사항?”
“네. 무리선두의 피부색이 붉은색이라고 합니다.”
“붉은 피부? 그건 또 처음이군. 피칠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전투 후 상대방의 피를 몸에 바르고 다니는 오크가 더러 있다.
“온 몸의 피부색이 일정한 붉은색이었다고 합니다.”
“흠... 그러면 희귀종이라는 가정하에 판단을 내려야겠군.”
괜히 지금 희귀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가 정말 희귀종이면 뜻밖의 피해를 입을 수 있다. 희귀종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덩치에 맞는 힘보다 더 강한 힘을 내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교가 다시 물었다. 재촉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이곳의 일처리가 그랬다. 일이 생기면 그때 생각해서 바로 처리했다.
“무리선두의 무력 등급을 3~3.5급으로 올리고 격파한다.”
헤옴 남작이 결정했다.
무리선두를 희귀종이자 무력등급 3~3.5급으로 결정했다는 것은 그 무리선두가 500마리의 오크를 이끌 자격을 가지고 있고 그 무리는 흩어지지 않고 굳게 뭉쳐있을 것이라 가정한다는 말과 같다.
이런 경우 갈수록 결속력이 굳건해지므로 가만 놔뒀다가는 큰 피해를 야기할 수도 있다. 그래서 격파하기로 결정했다. 이게 ‘세 번째 길’의 기본 전략이다.
‘세 번째 길’의 대(對)오크전략의 기본은 뭉치기 전에 먼저 치는 것이다.
초기에는 오크가 쳐들어오길 기다렸다. 보통 쳐들어오는 오크들은 뭉쳐서 오기에 그 수가 많았다. 몇 번은 1만이 넘는 수가 쳐들어오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세 번째 길’의 모든 방어가 뚫리고 크름 성을 최후의 보루로 두고 방어전을 펼쳤었다. 견고한 크름 성 덕분에 전부 막아내긴 했지만 피해가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수많은 피해를 입고 나서 정비한 전략이 어차피 쳐들어올 오크들이니 미리 쳐서 대규모로 쳐들어오는 것만은 막자..라는 것이었다.
“근처에 타격대가 있나?”
“17타격대와 22타격대가 하루거리에 있습니다.”
“2천이라... 병과 구성은?”
“17타격대가 양손검병 200, 검병 700, 석궁병 100이고 22타격대가 양손검병 100, 검병 700, 궁병 200입니다.”
헤옴 남작이 물을 때마다 그 사실에 대해 아는 장교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세 번째 길’은 넓고 숙지해야 할 사항은 많다.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없기에 장교들이 각자 전문분야를 정해서 그 분야만큼은 철저히 파악하고 있다. 그렇기에 헤옴 남작이 무엇을 묻든 막힘없이 바로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비슷한 다른 전투와 비교하면 전투에서 승리하고 4~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겁니다.”
‘세 번째 길’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전투 중 비슷한 사례를 비교한 장교가 바로 대답했다.
“4~500명이라...”
보통 3:1로 교환되는 평범한 오크와의 전투와 비교하면 상당히 양호한 피해인데도 헤옴 남작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에게 최선의 수는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오크를 전멸시키는 거다. 오크는 어딘가에서 계속 나타나지만 그의 군대는 그렇지 않으니까. 4~500명의 숙련병을 다시 키워내기 위해선 1년가량의 시간과 큰돈이 들어간다.
“주변에 다른 부대는 없어?”
헤옴 남작은 한 부대만 더 있어도 피해를 2~300이하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3일 거리에 37예비타격대가 있습니다. 병과 구성은 검병 900, 궁병 100입니다.”
“음.. 3일 거리면 오크 놈들이 이미 손댈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갔을 거 아냐.”
오크 부락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면 공격할 수 없다. 타격대가 갔다가 다른 오크 무리에 걸리기라도 하면 지옥 끝까지 쫓아올 테니까.
“이틀거리 정도만 되도 괜찮을 텐데 말이야. 다른 부대 없어?”
“........”
헤옴 남작의 물음에 막힘없이 대답을 해오던 장교진도 이번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없다는 뜻이다.
“별 수 없군. 17, 22타격대에게 오크무리를 격파한다. 일단 전령을 보내 두 부대에 오크무리쪽으로 이동하라 지시하도록. 타격대가 오크무리에 근접하기 전에 세부전략을 짜서 전해줘야 하니 서두르자.”
타격대는 전원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이동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미리 이동명령을 내려놓은 뒤 세분 전략을 나중에 전달하기로 했다.
“흐음. 오크 밀집 지역으로 가기 위해선 이곳을 지나야 할 텐데. 이곳에서 매복하는 건 어떤가.”
“그 지역은 왼쪽에 낮은 언덕이 있으며 반대편에는...”
세부 전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고 역시나 말을 탄 전령에 의해 17, 22타격대에 전달되었다.
두 타격대는 세부 전략에 적힌 대로 언덕 위에 매복을 한 채 오크 무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크 무리, 그락카르의 무리가 석궁과 활의 사거리에 들어왔을 때. 17타격대장이 조용히 수신호를 했고 그 수신호를 본 100명의 석궁병과 200명의 궁병이 사격을 시작했다.
***
“무리 선두는 무시해라! 뒤의 오크들에게 사격!”
석궁병과 궁병들은 지시가 있기 전부터 그락카르에게는 한 발의 화살, 볼트도 날리지 않았다.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락카르만큼 덩치가 큰 오크에게는 화살과 볼트가 거의 소용없다는 것을 말이다.
남쪽 울프람과 마찬가지로 이곳 ‘세 번째 길’의 병사들도 그락카르 같은 덩치가 큰 오크를 평범한 병사가 상대하는 것은 무리란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락카르를 상대하기 위해 별도의 병력이 진영에서 빠져나왔다.
각 부대의 대장이 10명씩 양손검병을 이끌고 나섰다. 즉, 2명의 타격대장과 20명의 양손검병.
1,000명의 병사를 이끄는 타격대장은 반드시 ‘몰란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설 수 있는 자리다. 그러니 그락카르를 상대하기 위해 축복을 받은 2명과 양손검병 20명이 나선 것이다. 물론 같은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울프람에 비하면 타격대장 쪽이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수가 둘이고 20명의 양손검병이 함께한다.
이 정도면 2.5급의 우드록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을 전력. 3~3.5급이라 평가된 그락카르에게는 과한 병력이지만 최소한의 피해로 적을 잡아내는 것을 전제로 전략을 짜는 헤옴 남작이 명령서에 정확한 수를 적어뒀기에 두 타격대장은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그락카르에게 간 병력을 제하고 그락카르의 무리에 맞서는 타격대의 총 병력은 양손검병 280, 검병 1,400, 석궁병 100, 궁병 200. 그 무리를 향해 돌격하는 오크 전사의 수는 511이었다.
두 곳 다 전력이 인간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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