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약속의 무게
유나를 찾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병원에 있을 때 확인한 이름 ‘정유나’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뉴스가 하나 떴다.
=지난 xx일, xx병원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암으로 인해 다리를 잘라야 할 지경에 있던 프리마돈나를 꿈꾸는 발레 꿈나무 정유나 양(15세, xx여중), 채 꽃피지 못하고 질 지경에 있던 정유나 양을 안타깝게 생각한 xx병원 일동의 적극적인 치료로 완쾌 된 것이다.
xx병원은 정유나 양의 다리를 자르는 것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발레를 계속할 수 있도록 치료를 하였으며....
xx여중. 검색 한 번으로 유나의 학교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병원 놈들 참... 지들이 거침없이 유나 다리 자르려는 거 내가 막은 건데 지들이 막았다고 뉴스를 냈네. 보아하니 기사 낸 인터넷 신문사도 들어본 적 없는 곳인 거로 봐서는 병원에서 돈 주고 낸 광고성 기사 같다.
덕분에 유나를 쉽게 찾긴 했는데 짜증도 났다.
바로 xx여중로 향했다. 그리고 하교 시간에 근처 카페, 식당, 길거리에 서 있으면서 유나를 찾았다. 참 힘들었다. 젊은 남자가 여자 중학교 앞에서 얼쩡거리려니 사람들 눈치가 엄청 보였다. 혹시나 신고 당할까 얼마나 무서웠는지.
여하튼 4일간 학교 주변에 잠복한 끝에 드디어 유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발레학원 차에 타서 놓치긴 했지만 괜찮다. 학원 차에 발레학원 이름이 적혀 있었으니까.
인터넷으로 학원 이름을 검색해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으음...”
망설였다. 조금만 더 가면 유나를 만날 수 있는데, 학원 입구에 도달했지만 들어갈 수가 없다. 뭔가 방어막이 쳐져 있는 느낌이랄까. 여기 들어가면 100% 변태로 몰릴 거 같은 느낌이...
결국 여중 주변을 배회했듯 학원 주변을 배회했다. 유나가 나오면 말 걸어야지. 딱히 큰 걸 말할 것도 아니다. 그저 헌금을 자제하라는 말만하고 돌아설 생각이다. 유나가 전도했으니까 유나한테만 말하면 다른 애들한테도 전해지겠지.
유나에게 말을 전한 후에는 일자리 구해야겠다. 노는 것도 하던 사람이나 하는 거지 난 정말 못하겠다. 오히려 노니까 더 심심한 느낌이다.
카페에도 들어가 있고 식당에도 들어가 있고 길거리를 배회하기도 하고... 여중 앞에서 했던 일을 반복했다. 정말 어렵다. 근처에 학원 입구를 살피는 카메라라도 설치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려면 항상 근처에 있어야 하니까 계속 다른 사람들 시선이 얼마나 신경 쓰이던지.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간 드디어 유나가 나왔다. 그리고...
“어어?”
또 놓쳤다. 말 걸 새도 없이 바로 학원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래. 철저한 학원이구나. 저 정도는 해야 부모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기지. 요즘 어린 애들을 노리는 변태들이 많으니까. 특히 발레학원이면 예쁜 아이들이 좀 많겠어? 당연히 아이들 혼자 돌아가게 하면 위험하니까 저렇게 학원에서 하나하나 데려다 줘야지. 그런데...
난 어쩌지?
***
“후웁. 후...”
떨린다. 그냥 학원에 들어가는 것뿐인데 이렇게 떨리다니. 변태 놈들 대단한 놈들. 변태 짓도 용감해야, 아니 미친놈이어야 할 수 있는 거구나. 정상인은 불가능한 거네.
결국 다음 날, 학원으로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학교에 찾아가는 것보다는 학원에 찾아가는 게 쉽지 않겠어? 변태로 보이기 싫어서 운전할 때 입었던 정장도 빼입고 왔다. 나름 작업복이라 비싼 거 샀었다.
심호흡 몇 번 한 후 학원으로 발을 들였다. 어릴 때 내가 다니던 학원과 별다를 건 없다. 제법 세련된 인테리어, 불투명 유리와 투명유리가 섞인 유리벽에 둘러싸인 교실. 저기에서 발레를 배우겠지. 그대로 가서 유나를 찾으면 발레 하는 여자애들 훔쳐보러 온 변태처럼 보일 거 같은데.
왜 아무도 없지.
난 들어오자마자 카운터가 있고 그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람이 ‘왜 오셨어요?’라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카운터는 비어있고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안녕하세요.”
잠깐 멋쩍게 입구 근처에서 서성였더니 학원 선생님으로 보이는 30대 중후반의 여자가 방에서 나와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오신 건가요?”
“네.”
“잘 오셨어요. 남자분들은 처음 올 때 낯설어하시는 데 그럴 필요 없어요. 요즘은 남자 분들도 발레 많이 배우시거든요. 저희 학원 성인부에 남자분만 10분이 넘어요. 발레를 배우면 근력도 강해지고 몸매 균형이 딱 잡히거든요. 헬스장에서 키우는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닌 매끄럽게 잘 빠진 근육도 알알이 박히고요.”
갑자기 영업을 한다. 말 잘하네...
‘원장님 없으니까 이 남자 학원 등록하겠다고 하면 찾아온 게 아니라 내가 데려온 거라고 말해야지. 그러면 원비에서 10% 인센티브 받을 수 있으니까.’
열심히 영업한다 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난 발레 할 생각이 없는데.
“아. 저 발레 배우러 온 게 아니라 조카 만나러 왔어요. 병원에서 퇴원했다기에 수고했다고 인사하고 싶은데 바빠서 그 동안 못 만났거든요. 집에 물어봤더니 여기 있다고 하던데...”
어제부터 계속 연습한 말이다. 어떻게 하면 유나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까 얼마나 고민했던지. 처음엔 ‘유나가 다니는 교회 오빤데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였다. 그대로 했으면 바로 경찰에 끌려가지 않았을까.
그런데 꽤 괜찮다고 생각했던 말도 뭔가 문제가 있는지 여선생 눈빛이 경계의 눈빛으로 바뀐다.
“아. 그러시구나. 병원에서 퇴원했다고 하면...”
“유나요.”
유나란 이름을 말하자 경계의 눈빛이 더 강해진다.
“죄송하지만 유나 부모님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누나 이름은 박인선이고... 매형 이름은 모르겠네요. 이름으로 불러본 적이 없어서요.”
유나 어머니 이름은 병원에서 확인했다. 보호자가 어머니로 되어 있었으니까.
“죄송한데 유나가 그런 일 겪은 후로 기자분들이 몇 번 찾아오셔서요. 그 중에는 친척이라고 사칭하는 분도 계셨어요. 그래서 확실하지 않으면 만나게 해드리는 게 좀... 유나 부모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아. 그랬군요. 나쁜 인간들 같으니. 어린애가 겨우 병에서 나았는데 그걸 이용해먹겠다고 사칭까지 하고 오다니.”
큭. 찔린다. 나도 사칭인데. 그리고 유나 부모님과 통화라니. 바로 걸릴 텐데 그럴 수는 없지.
“지금 누나가 일하느라 바빠서 전화를 안 받을 텐데... 저도 급한 일이 있어서 오래 있을 수 없구요. 정말 잠깐 인사만 하고 가려고 한 거거든요. 흠... 같이 가서 유나를 만나는 거로는 안 될까요? 유나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 선생님께서 막아주시면 되잖아요.”
설마 유나가 나 까먹은 건 아닐까? 불안하다. 설마 까먹었겠어. 지금도 매일 비텔님에게 기도하고 있던데 비텔님의 사제인 내 얼굴을... 믿자. 안 까먹었을 거야.
이렇게 또 만나야 할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그때 전화번호 달라고 할 때 줄 걸. 괜히 안 줘서 힘들어지네.
여선생은 잠깐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네. 그렇게 하죠.”
정장 입고 오길 잘했네. 평소처럼 후줄근하게 입고 왔으면 바로 걸러질 뻔 했다.
“유나는 지금 저쪽 교실에서 수업 중이에요. 그리고 저쪽은 성인반이 수업 받고 있거든요. 한 번 보시면 남자분들이 꽤 많다는 거에 놀라실 거예요. 정말 꽤 많거든요. 그리고 성인반은 남자분과 여자분이 함께 교육을 받아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수업 받는다는 말을 강조한다. 내가 그렇게 얄팍한 남자처럼 보이나요. 제가 그런 1차원적인 미끼에 낚이는 사람은 아니...진 않은 거 같다. 발레복 입은 여자들 옆에 합법적으로 있을 수 있다니. 솔직히 확 끌린다.
아직 의심을 풀지도 않았으면서 영업은 멈추지 않는다. 인센티브 10%의 힘은 대단하구나.
‘내가 민주보다 잘하는데 왜 민주가 콩쿨에 나가지? 정말 소문대로 민주가 선생님 조카인건가? 콩쿨에 나가고 싶다.’
‘저 봐. 계속 무릎이 접히잖아. 그런데 왜 민주가 학원 대표로 콩쿨에 나가는 거야? 내가 훨씬 나은데.’
‘민주는 아무리 잘해봐야 학원 중위권의 실력인데 왜 선생님은 민주만 이뻐하시지? 정말 친척이란 소문이 맞는 건가? 아니면 돈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는데 나도 엄마한테 졸라서 돈을 드리면 콩쿨에 나갈 수 있을까?’
교실에 가까이 가니 욕망과 욕구 가득한 마음들이 휘몰아치며 나에게 들려왔다. 대부분 민주라는 아이와 콩쿨이 주제였다. 그 중에는 익숙한 유나의 마음도 있었다.
‘왜 민주지? 나도 콩쿨에 나가고 싶어... 나 병 다 나았는데, 이제 아픈 거 아닌데...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학원 대표로 콩쿨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비슷한 내용이었다.
“여기가 유나가 수업 받고 있는 교실이에요. 어머. 민주가 솔로를 하고 있네요. 잘하죠? 저 아이가 이번에 학원대표로 xx콩쿨에 나갈 아이에요. xx콩쿨은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랍니다. 민주는 그곳에서 상위권에 입상할 거라 기대 받는 아이에요. 아. 물론 유나도 잘한답니다. 원래 유나가 대표였는데 이번에 병에 걸리는 바람에... 안타까워요.”
그렇군. 안을 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벽에 붙어 앉아 한 아이의 움직임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회 준비를 한다고 저 아이에게 집중해서 수업을 하는 모양이다. 잘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저기 춤추고 있는 민주라는 아이의 단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발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엔 그냥 잘하는 것 같다.
“잘 됐네요. 마침 쉬는 것 같으니 제가 유나를 데리고 나올 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선생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유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표정이던 유나가 날 보더니 활짝 웃었다.
“아저씨!”
“아저씨?”
날 부르는 유나의 호칭에 여선생이 의아한 얼굴을 한다. 윽. 빨리 뭐라고 해야겠어.
“외삼촌한테 아저씨가 뭐니. 아저씨가. 너희 엄마가 그 말 들으면 또 혼난다.”
“헤헤. 네. 외삼촌.”
휴.. 다행히도 유나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바로 호칭을 바꿔 부른다.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 그동안 계속 오고 싶었는데 너도 알잖니. 외삼촌이 좀 바쁜 거. 오늘 온 것도 겨우 온 거야.”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와 주신 거 정말 기쁘거든요.”
유나와 나의 대화를 들은 여선생의 얼굴에서 의심이 사라졌다. 그래. 이런 대화를 듣고도 의심을 하면 나처럼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인간이겠지.
“선생님. 여기 휴게실이 어디죠? 잠깐 유나와 둘이 대화하고 싶은데.”
“제가 알아요. 선생님 외삼촌이랑 이야기 나눠도 돼요?”
“물론이지. 그런데 외삼촌 분.”
“네.”
“수업중이니까 너무 오래 잡아두시면 안 돼요.”
“네. 걱정마세요. 저도 시간 없어서 금방 가야 하거든요.”
유나와 둘이 휴게실로 왔다.
“헷. 다시는 저 안 보신다더니. 찾아오셨네요.”
“그래. 네가 찾아오게 만들었구나. 네가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다고 비텔님께서 말하시더구나.”
“헤헤. 네. 좋은 분이잖아요. 좋은 분은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최근에 갑자기 몸도 더 튼튼해졌어요. 비텔님이 잘했다고 칭찬해주신 거 같아요.”
‘그거 내 스킬이다. 비텔님 스킬 아냐.’라고 말할 순 없겠지.
“그래. 전도에 대해선 비텔님도 좋아하시더구나. 그런데 헌금은 조금 달라.”
“헌금이 왜요?”
“비텔님께서 나한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너무 헌금을 많이 한다고 말이야.”
“전부 받아주시던데?”
그래. 다 받지. 비텔님은. .... 나도 잘 모르는 분이지만 오는 거 안막는 분이신 거 같아.
“너희들의 정성을 거절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비텔님이 좋아하시는 게 아니야.”
사실 몰라. 헌금 많이 하면 좋아할 지도... 수수료도 떼어가는 신인데...
“너희들의 헌금은 전부 부모님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잖니? 너희들이 직접 벌어 하는 헌금이라면 그 분도 기분 좋게 받으시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받아 하는 헌금은 그리 좋아하시지 않는단다.”
“아... 그렇구나....”
살짝 의기소침해지는 유나. 거짓말해서 미안. 하지만 아이들이 돈이 사라져서 신기한 마음에 헌금을 많이 하는 걸 수 있으니 제동을 걸어주긴 해야 한다.
“전도를 막지는 않아. 다만 헌금은 학생답게 조금만. 알겠지?”
“네...”
“네가 전도한 다른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전해주고.”
“네. 알았어요.”
이 정도면 알아들은 것 같다. 더 이상 말해봐야 혼내는 것밖에 안되니까. 이제 할 말은 다 했다. 다시 헤어질 시간이네.
“자. 그러면...”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는 찰나.
-비텔이 그녀의 첫 번째 신도와 다른 신도를 굽어 살핍니다.
비텔의 축복이 내려졌습니다.
임시스킬 ‘약속의 무게’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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