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작지만 큰 전투
울프람, 브라가트 vs 그락카르.
그들과는 별개로 인간 vs 오크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오크들은 울프람, 브라가트와 싸우고 싶었지만 최고의 강자인 그락카르가 그들과의 싸움을 시작했기에 그들이 없는 것처럼 지나쳐 성벽으로 향했다. 가장 빨리 달린 그락카르가 강자 둘을 선점했듯 자신들도 빨리 달려가 강자와 싸우고 싶었던 것이다.
“쏴! 쏴라! 장전되는 대로 그냥 갈겨!”
최고지휘관인 울프람과 브라가트가 성벽 아래로 내려갔지만 지휘의 부재 같은 것은 없었다. 인간군의 특성상 100명마다 1명의 지휘관이 배치되어 있었고 이 자리에 있는 그들 대부분은 오크와 수년에서 수십 년을 싸워온 베테랑들이었다.
비록 울프람이 전투에 나설 시 대신 지휘를 맡아주던 테론이 저번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그가 있을 때도 큰 줄기만 지휘했지 세세한 지휘는 현장 지휘관들에게 맡겨놓았었다.
쉬시시시시식!
화살과 볼트가 가까이 다가온 오크들을 향해 직사로 날아갔다.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었다. 이전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대가 석궁부대였고 겨우 한 달 정도 지난 지금 부대는 복구되지 않았다.
석궁이라도 충분하면 검병들에게 들려서 바로 앞에서라도 쏘라고 하겠지만 석궁은 고급무기다. 아직은 저번에 잃은 물량의 반의반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각 지휘관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현재 울프람군의 전력은, 양손검병 400명, 검병 1,000명, 석궁병 150명이었다. 오크의 수는 700이 조금 넘는 수. 전력을 비교하면 일반적으로 양손검병이 오크와 동수를 이룬다고 하니 각각 400씩 지우고 나면 검병 1,000명과 석궁병 150명이 오크 300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보통 일반 병사 3명이면 오크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는데다가 성벽위에서 싸우는 것이니 결국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인간 쪽 전력이 우세하다고 볼 수 있으나 불안요소가 곳곳에 있었다.
브라가트와 함께 온 200명의 양손검병 말고 다른 200명의 양손검병의 반 이상은 이번에 수를 채우기 위해 검병에서 양손검병으로 급히 승급해 1달가량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적어도 반년은 훈련 받아야 그나마 양손검병으로서의 기본적인 실력을 낼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직은 제대로 된 양손검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검병 1,000명 역시 반 이상이 신병이다. 아직 한 달밖에 훈련을 받지 않은 자들이었다. 원래는 절대 전장에 데려오지 않을 신병중의 신병이지만 지금은 급하기에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 그렇기에 이 전투를 단순하게 숫자를 비교해서 승패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검병대를 지휘하는 장교가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다. 철저한 훈련을 거친 후 전장에 배치하는 울프람 군의 특성상 긴장을 하는 병사는 있어도 불안해하는 병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별거 없다! 기어 올라오는 오크 나부랭이들을 방패로 툭 쳐내기만 하면 돼! 그러면 알아서 떨어져서 죽을 거다! 싸울 필요도 없어!”
알겠습니다!
장교가 별거 아니라며 격려했지만 여전히 표정 속에 불안함은 남아 있었다.
문제는 신병만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란 거다. 숙련병들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전투의 결과가 절대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장교 자신의 얼굴에도 불안함이 있을지 모른다. 장교는 급히 고개를 돌려 전방을 주시했다.
앞을 보고 있으면 적어도 병사들에게 자신의 불안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으니까.
크와와와왁!
구어어어억!
그라라라라!
카라아아악!
“올라온다! 준비해! 방패로 쳐낼 때는 온힘을 다해 체중을 실어 쳐라! 몸을 던진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쳐봐야 오크는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까!”
오크들이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줄도, 갈고리도, 사다리도 없이 맨손으로 오르는 오크들이지만 마치 전원 암벽 오르기의 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벽을 이루고 있는 돌의 틈에 손가락을 찔러 넣으며 빠르게 성벽을 오르고 있었다.
“미친... 뭐 저리 빨라. 힘이 얼마나 센 거야.”
오크를 처음 경험하는 신병이 장비 없이 손가락 힘만으로 그 큰 덩치를 지탱하며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올라오는 오크를 보며 사색이 질렸다.
“누가 신병 앞으로 밀었어! 숙련병이 앞으로 나오고 신병 뒤에 배치하라니까!”
고개를 내밀어 성벽 밑을 보던 신병은 숙련병에게 뒷덜미를 잡혀 거칠게 뒤로 당겨졌다. 하지만 신병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숙련병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크를 항상 초원 등 탁 트인 곳에서 상대했지 이렇게 성벽위에서 싸우는 것은 대부분 처음이었으니까.
가볍게 성벽을 올라오는 오크를 보고 있자니 새삼 그들의 힘이 놀라웠다.
“방패준비! 연습한대로만 해라! 그러면 피해 없이 이길 수 있다!”
거짓말이다. 피해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장교들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으면 병사들이 겁먹어 더욱 피해가 커질 테니까.
“뒤에 있는 놈들도 놀지 말고 방패로 치는 앞의 병사를 밀어줘!”
‘그렇게 해도 오크가 밀릴지 안 밀릴지 확실하지 않으니까.’라는 말은 집어 삼켰다.
“보이면 쳐!”
“끄아아압!”
숙련병이 오크의 머리통이 보이자마자 방패에 온힘을 실어 쳤다.
“구억!”
제대로 맞았다. 그 충격에 오크의 머리가 뒤로 튕겨나갔다.
‘한 번 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한 번 더 쳐내면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방패를 빼며 뒤로 물러났다.
‘무조건 떨어뜨린다.’
이번엔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턱.
“으음?!”
방패가 안 빠진다. 보니 오크의 손이 방패의 윗부분을 잡고 있었다. 오크가 방패에 맞아 정신없는 중에도 손을 내밀어 방패를 잡은 것이다. 오크가 손을 내밀어 잡은 것뿐인데 마치 못으로 박아 고정시켜둔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찔러! 이 새끼들아! 뭐해! 빨리 찔러!”
숙련병이 급한 마음에 뒤의 신병들에게 소리 지르며 방패에 고정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오크가 방패를 잡아당겼고 방패에 손이 고정된 숙련병은 마치 짚단인형처럼 가볍게 뽑혀 성벽 아래로 던져졌다.
“카하..”
숙련병을 던져버린 오크가 성벽 위로 올라왔다.
“카아아아아아아!”
오크는 광전사처럼 검병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든 오크가 방패 밀치기를 견뎌내고 위로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방패 밀치기에 당해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오크들도 부지기수였다.
쿵. 쿠쿵. 쿵.
떨어진 오크 중에는 다시 일어나기 힘든 부상을 입은 자도 있었지만 그런 오크는 소수였다. 대부분 잠시 후 몸을 일으켰다. 자잘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터프한 오크가 부상을 입었다고 누워있을 성격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다시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미친.. 이게 말이 돼?”
장교들이 성벽 위와 성벽 아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크게 놀라 얼굴빛이 변했다. 그들의 상식과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방패 밀치기를 버티고 올라오는 오크가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떨어진 오크 중 다시 일어나 올라오는 오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평범한 오크가 아냐.”
그들이 알고 있던 오크에 대한 상식과 달랐다. 이 오크들의 덩치라면 이 정도 힘을 낼 것이고, 이 정도 내구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는 예측이 통하지 않았다.
전부 그락카르의 스킬인 ‘군주의 위엄’때문이었다. 9% 신체능력 강화. 신체능력이라 함은 힘, 속도, 내구력 등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떨어졌어야 할 오크가 떨어지지 않고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어야 할 오크가 작은 부상만으로 끝났다.
그것이 전장에 큰 변화를 만들고 있었다.
“눈앞의 오크가 전부 희귀종이라 생각하고 싸워라!”
장교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물론 의미 없는 말이었다. 희귀종이라 생각하고 싸운다고 해서 갑자기 상대하기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성벽 곳곳에 오크가 올라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그 수는 점점 늘어갔다. 수백 vs 수천, 본격적으로 격렬한 싸움이 시작됐다.
그런데 수천이 어우러져 싸우는 전장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보이는 전장이 있었다.
단, 셋이 싸우는 전장. 하지만 수천이 싸우는 광경보다도 치열함과 격렬함이 강하게 느껴졌다.
콰악! 까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푸르게 빛나는 울프람의 무기와 전신에 은은한 푸른빛을 내는 브라가트의 할버드, 그들에 대항해 보라색으로 빛나는 그락카르의 양손도끼와 한손도끼가 맞부딪쳤다.
힘이 강해진 그락카르는 양손도끼를 오른손만으로 든 채 휘둘렀고 왼손에 허벅지에 있던 한손도끼를 꺼내들어 싸웠다. 싸움이 시작된 지 겨우 몇 분 지났을 뿐이지만 한 번, 한 번의 공격에 온 힘을 다해 주고받는 결투의 특성상 체력은 급속도로 빠지고 있었다.
“후.. 후욱.”
특히 브라가트가 더욱 지쳐 있었다.
“저 보라색 빛! 체력을 급속도로 소모시킵니다!”
울프람이 오기 전 그락카르와 합을 나눴을 때는 이 정도로 체력이 빠지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보라색 빛. 그것뿐이다. 브라가트의 공격은 점점 빨라졌고 빨라지는 만큼 더욱 보라색 빛이 담긴 무기와 많이 부딪쳐 그만큼 체력을 빼앗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경고는 울프람에게는 별로 필요 없는 경고였다.
치익. 치이이익.
서로 싸우듯 보라색 빛과 푸른빛은 만날 때마다 서로를 태웠고 두 개의 힘이 서로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신의 힘끼리 상쇄된 것이다. 만약 저 보라색 빛이 없었다면 무기를 강화해주는 푸른빛의 특성상 그락카르의 무기는 이미 날이 너덜너덜해져 있어야 했을 것이다.
여하튼 보라색 빛의 영향을 받지 않아 여전히 체력은 충분한 울프람이지만 그의 낯빛은 체력을 빼앗겨 헐떡이는 브라가트의 얼굴과 다를 것이 없었다.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아.’
울프람은 브라가트의 실력이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페가수스가 없어도 페가수스 나이트는 페가수스 나이트니까. 하지만 브라가트와 그락카르의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다.
만약 그락카르의 능력이 울프람의 그것처럼 무기를 강화해주는 것뿐이었다면 브라가트는 자신의 실력을 원 없이 뽐낼 수 있었을 것이다. 페가수스 나이트의 지급품인 브라가트의 할버드는 그런 차이를 메꾸고도 남을 명품이니까. 그런데 체력을 빼앗는 능력이라니.
빠른 공격 속도로 적을 압박하는 브라가트와 최악의 상성인 셈이다.
울프람은 결단을 내렸다.
“이대론 우리 둘 다 죽을 것이오.”
“허억. 아닙니다! 둘이 힘을 합친다면 이깟 오크쯤은!”
“브라가트 경! 여전히 오크를 얕보고 있구려!”
말없이 싸움에만 집중할 때 박빙이었는데 말을 하면서 싸우게 되니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대화가 무조건 필요하다고 생각한 울프람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냉정하게 생각하시오. 이대론 우리 둘 다 죽소. 그리고 우리 둘이 죽으면 이 오크가 전장에 뛰어들어 모든 병사를 학살할 것이오. 전쟁은 지고 모든 인간이 죽겠지. 그걸 바라는 것이오!”
“....”
브라가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남아있는 아주 작은 자존심에 함께 싸우자 했지만 이대론 둘 다 죽을 것이란 걸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내가 막을 테니 성으로 향하시오. 병사들과 함께 오크들을 물리치고 병사들과 함께 이 괴물을 죽이시오. 브라가트 경이라면 할 수 있소.”
“허억. 허억, 그걸 제가 하겠...”
“헛소리하지 말고 가시오. 지금의 브라가트 경이라면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하니 어서 가시오!”
“.... 꼭! 꼭 전쟁에서 승리하겠습니다!”
울프람의 각오를 읽은 브라가트는 결국 그락카르를 공격하던 할버드를 회수하고 성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몰란의 축복을 받은 브라가트가 작정하고 달리니 그 속도가 빠르기 그지없었다.
그락카르가 브라가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꿈도 꾸지 마라. 내가 있는 이상 넌 어디도 가지 못한다.”
브라가트의 등을 보는 그락카르를 보며 쫓아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울프람이 말했다. 그는 이곳에 목숨을 던져 최대한 그락카르를 잡아둘 것이다. 그러면 병사들과 합류한 브라가트가 오크 무리를 물리치고 그락카르도 죽여줄 것이다. 그렇게 굳게 믿었다.
“크흐..”
그락카르는 그 모든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눈앞의 인간 대장이 위대한 전사긴 하나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전쟁 시작 전 확인한 전력으로 병사 대 오크 무리의 싸움에서 성벽 위에서 싸우는데다가 전력에서도 앞선 병사들이 전투를 이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울프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고개를 돌려 성벽을 바라봤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크 무리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다간 그락카르에 의해 죽을 것이 분명하기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처음부터 성벽 쪽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그락카르에게 울프람과 브라가트의 대화가 얼마나 우습던지. 이미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성벽의 전투는 지친 브라가트 하나 쯤 가세한다고 해서 달라질 전황이 아니었다.
그락카르는 우선 눈앞의 인간대장과의 싸움에 집중했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가볍게 이길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성에서의 싸움도 거의 끝나 있었다. 오크들이 성벽을 완전히 점령했고 브라가트와 병사 일부가 성 안으로 피신해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브라가트가 분전했지만 울프람을 죽인 그락카르가 시가전에 참가하자 인간들의 반항은 덧없이 사그라졌다. 차라리 울프람이 브라가트를 성에 보내지 않고 함께 싸웠다면 이 전투는 조금이나마 더 진행되었을 것이다. 결국 지는 것은 마찬가지였겠지만.
박빙 혹은 인간 쪽의 우세라고 판단되었던 이 전투. 하지만 처음부터 전력차는 오크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는 전투였고 그 전력차만큼 자연스럽게 오크가 이긴 평범한 작은 전투였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억!”
하지만 그락카르가 태어나 처음 자신의 무리를 이끌어 승리를 쟁취해낸 그락카르에게 의미가 큰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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