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무리구성
대충 한 방향을 정해서 이동하며 형제들의 수를 세어보니 700명이 넘었다. 이렇게 많은 수가 나를 따라오다니.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졌다. 그만큼 형제들에게 강자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니까.
“그락카르 강하다.”
“강한 형제 따르면 강해질 수 있다.”
“그락카르 빨개졌다. 다른 형제와 다르다. 카록께 주목받고 있다. 그락카르 따라하면 나도 카록께 주목받을 수 있다.”
형제들이 내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그들도 나처럼 치열한 전투를 원하고 있다. 죽음이 진하게 느껴지는 강렬한 전투를 하고 카록께 주목받고 더 나아가 축복을 받아 나처럼 강해지길 원하고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형제들을 위해서라도 치열한 전투를 즐길 수 있는 상대를 빨리 찾아야 한다.
어디를 가야 할까. 2살에 부락을 나서 지금까지 3년간 떠돌며 많은 부락을 다녔지만 천이 넘어가는 수가 부딪히는 전장을 경험한 건 얼마 전 우드록 부락에서가 처음이다. 그리고 이번에 경험했던 드워프와의 전쟁까지.
그 외에는 수로 밀어붙이는 인간을 포함해도 양쪽 다 합쳐 500명이 안 되는 전장들뿐이었기에 700명이 넘는 형제들과 함께하는 전쟁터로 적합하지 않다. 수가 적고 약한 자들과는 싸우고 싶지 않다.
명예로운 오크 전사가 원하는 것은 정복과 약탈이 아니다. 오크 전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걸 부딪혀 싸울 수 있는 강인한 적수다.
내가 아는 한 나와 700명이 넘는 형제를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은 인간과 드워프밖에 없다. 북쪽에 리자드맨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내가 가본 적 없기에 확신할 수가 없다. 그리고 드워프는... 이번에 만 이상의 드워프를 죽였지만 엠그엔에게 듣기론 그 산맥에 수만의 드워프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적을 이 전력으로 찾아가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럼 인간밖에 없군. 결정했다. 바로 소리 질러 형제들에게 알렸다.
“우린 인간을 공격하러 간다!!!”
구워어어어어억!
그아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오!
카아아아아아아!
역시 좋아하는군. 나도 좋다. 형제들이나 나나 싸움에 굶주린 것은 같으니까.
전의 싸움에서 우드록의 팔을 자르고 도망쳤던 그 인간 대장. 만날 수 있겠지? 당연히 그 인간 대장은 내 몫이다. 예전의 나라면 절대 상대할 수 없는 강자겠지만 지금의 나라면...
“크흐..”
기대된다.
진로를 바꿨다. 인간들이 있는 곳은 저쪽이다. 한 번 갔던 곳이라면 절대 잊지 않는 나이기에 확실하다.
“가자! 형제들.”
인간들의 땅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
-아침 해.
턱.
“우웅차.”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칫솔을 들었다. 그리고 칫솔질을 하던 중 깨달았다.
“아. 더 자도 되는데.”
백순데 왜 이리 일찍 일어났을까. 며칠 째 계속 그런다. 매번 저녁에 알람을 끄고 자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 실행을 안 하고 있다. 멍청한 놈 같으니. 그락카르 닮아가는 거냐. 이왕 일어난 거 칫솔질을 마저 끝내고 침대에 가 앉았다.
이미 잠은 달아났다. 운동가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게 생각 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 멍 때렸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간밤에 본 그락카르가 생각난다. 그 썩을 놈이 잠잠하다 싶더니 또 전쟁하러 떠났다. 도끼 강화하는 데 한 달 걸린다고 해서 그 동안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겠다 싶었는데 역시 전쟁광답게 장인 오크를 재촉해서 2주 만에 부락을 떠났다.
하긴... 차라리 잘 됐다. 하루 종일 암컷과 놀아나는 것보단 낫지. 전성기의 아놀드 슈왈제네거보다 탄탄해 보이는 암컷... 저번에 만났던 이르크라는 암컷보다 더했다. 물론 내가 만나는 게 아니라 그락카르가 만나는 거긴 하지만 문제는 그락카르가 느끼는 것은 나도 모두 느낀다는 거다.
현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까이 가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암컷인데 그락카르의 입장이 되어 있을 땐 너무나 사랑스럽고 즐겁다. 그게 문제다. 지금처럼 일어났을 때, 내가 그런 암컷을 상대로 그런 감정과 쾌락을 느꼈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거다.
이러다가 그런 암컷에 적응되어버리면 어떡하지? 지금처럼 깨어난 이후에도 오크 암컷에 대한 매력을 느낀다면? 엄청 불안하다. 안 그럴 거 같지만 그락카르가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너무 실감나서 꼭 안 그럴 거라는 보장도 할 수 없다.
그래. 차라리 부락 밖으로 나가서 싸워라. 응원하마. 그락카르.
아. 맞다. ‘군주의 위엄’
생각났다. 그락카르가 무리를 이루면서 분명 ‘군주의 위엄’에 의해 향상되는 신체능력이 높아졌었다. 분명 스킬명과 스킬설명이 나 때처럼 보였던 것 같지만 그락카르가 까막눈이다보니 나도 까막눈이 되어버렸다. 영어도 모르는데 다른 세계 오크의 언어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도 신체변화에 민감한 그락카르의 감각 덕분에 나도 자세히 느낄 수 있었는데 변화는 분명 3~5% 사이였다.
-군주의 위엄 : 세력 형성 시 세력의 크기에 따라 군주와 구성원의 신체능력을 향상시켜준다.
현재 6% 향상 적용 중.
난 여전히 6%다. 안타깝게도 그락카르와 나는 서로 얻는 스킬을 똑같이 가질 수 있지만 적용되는 건 각자에게 따로 적용되는 모양이다.
그락카르를 따르는 무리가 대충 500마리는 넘어 보이던데 말이야. 그런데도 향상율은 겨우 3~5%. 10명에서 1%가 올랐는데 500명이 될 때까지 2~4%만 더 오른다는 이야기다. 지금 비텔교 신자가 31명이니까... 혁신적인 향상을 기대할 수는 없겠네.
뭐 6%정도 강해진 것도 충분하지. 내가 그락카르처럼 싸우고 다닐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향상율이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 지는 궁금하다. 흠... 내 ‘군주의 위엄’이 6%에서 7%로 넘어가는 순간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향상되는지 알 거 같은데 말이야. 그건 좀 기다려야겠다.
......
더 이상 할 생각이 없어. 계속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렸다.
......
“에이. 고급시계나 하자. 오늘 80점 찍어야지.”
최근 재미가 덜해지긴 했지만 역시 시간 때우는 데는 게임만한 게 없다. 그 뒤 하루 종일 게임을 하거나 웹서핑을 했다. 그리고 저녁.
“뭔가 여유로워서 좋긴 한데 말이야...”
분명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됐다. 그 사이에 뭔가를 한 거 같기는 하다. 그런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 게임도 적당히 하고 어딘가의 인터넷도 돌아다니고 유머사이트도 들어가고...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너 뭐했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니다. 요 며칠 동안 백수로 지내면서 항상 그랬다.
“초보백수의 하루는 허무한 거군.”
일을 할 때는 일요일 날 쉬어도 뭔가 바쁘게 보냈었는데 말이야. 직장인으로서 하루를 쉬는 것과 백수로서 하루를 쉬는 건 참 차이가 컸다.
쉬는 것도 쉬던 사람이 쉬어야지 안 쉬던 놈이 쉬니깐 제대로 쉬지를 못하는구만.
그래도 일 그만둔 김에 한 달 정도는 놀아 보기로 결정했으니까. 계속 놀아야지.
집에서 이제 쉬는 건 그만두고 내일부터는 뭔가 밖에서 할 만한 것을 찾아봐야겠다. 일 할 때는 집에서 쉬는 게 최고였는데 말이야. 집에만 있으니 나가고 싶어지는 이 마음.
그렇게 바깥에 돌아다녔다. 일어나고 좀 쉬다가 나가서 돌아다니고, 집으로 돌아와 잠들고, 그락카르의 세상을 보고 다시 일어나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오늘도 눈을 떴다. 상쾌한 아침이다.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났다. 그락카르가 요즘 같이만 해준다면 계속 상쾌할 것 같은데 말이야.. 전쟁을 위한 이동을 시작한 이후로 그락카르가 꽤 얌전하다. 굶으며 이동하니 인간이나 드워프를 잡아 먹는 일도 없고, 우락부락한 암컷도 없고, 누구 골통 부수는 일도 없었다. 거기에 오늘은 큰 실수를 하는 그락카르를 봐서 더 상쾌하다.
전쟁하겠다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땅으로 이동을 시작했는데 그냥 무작정 우드록이나 캄스니를 따라 움직였을 때처럼 굶어가며 이동한 거다. 하지만 5일 동안 굶으며 이동했는데도 아직 인간이 있는 땅에 가려면 3~5일을 더 가야한다는 걸 깨달은 거다.
아무리 강인한 체력을 가진 오크라고 해도 8~10일을 굶으면 기력이 다 빠져서 싸울 수 없다. 전쟁 전에 굶는 것은 더 잘 싸우기 위한 것이지 싸울 기력을 빼기 위한 게 아니니까. 결국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틀정도 이동을 멈추고 사냥하며 기력을 회복한 후 다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락카르 놈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지만 난 그놈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니까. 상당히 당황하는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고소하던지.
굶주림을 같이 느끼긴 했지만 오크의 몸은 어떻게 됐는지 5일 굶은 거 정도론 신경이 좀 날카로워지는 정도지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락카르 놈이 실패하는 장면 볼 수 있다면 충분히 참을만한 굶주림이다.
... 왠지 잘나가는 주인공을 시기, 질투하는 조연의 느낌인데? 하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건 어쩔 수 없지.
거기에 더해 드디어 알람을 끄고 잤더니 잘 만큼 푹 자기까지 했다. 매일매일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시계를 확인하니 원래 기상시간보다 10분 일찍 일어났다.
“..... 기존 기상시간에 너무 익숙해졌나.”
하긴 군대 막 전역했을 때도 알람 없이 6시에 일어나곤 했지.
오늘은 뭐하지... 요즘은 일어나면 항상 이 생각이다.
며칠 동안 바깥에 돌아다녀봤다. 그리고 재미있다고 하는 취미는 웬만하면 다 해본 거 같다. 그런데 다 재미없다. 그 취미에 대해 잘 아는 지인이 있다면 공유도 하고 배우기도 하면서 재미를 붙여볼 텐데 난 친구가 없어서 그럴 수가 없다. 혼자라서 못하는 것도 많고 말이야. 교우관계 좀 신경 쓸 걸, 그냥 모임에 잘 안 나가다 보니 연락이 뜸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목적 없이 노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흠... 아무 목표나 하나 세우고 그거 달성해볼까? 그러면 처음에 재미없어도 목표 달성을 위해 억지로 하다가 재미 붙일 수도...
일단 언제나 그렇듯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하게 씻고 나왔다.
그리고 버릇처럼 컴퓨터를 켜서 게임. 바깥에 돌아다닌다고는 해도 아침 일찍부터 나가봐야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니 아침에는 게임하거나 TV를 보다가 점심 쯤 밖으로 나간다.
-고급시계의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80점도 찍었다. 요즘 슬슬 하는데도 점수가 계속 오른다. 아무래도 신체능력이 강해진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역시 FPS게임은 반사 신경이 전부인 건가?
“확. 죽어라 열심히 해서 프로게이머나 해버려?”
충분히 가능성 있을 것 같다. 그락카르가 죽지 않는 이상 더 강해질 거고 내 신체능력도 더 강해질 테니까. 프로게이머만이 아니라 아무 운동이나 찍어서 연습해도 국가대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고급시계는 몇 판 하고 껐다. 요즘 좀 질린 느낌이랄까. TV를 켜 뉴스를 틀었다. 예전엔 뉴스 절대 안 봤는데 요즘은 뉴스가 조금씩 재밌어지는 느낌이다.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유나
기여부분 : 기도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선미
기여부분 : 기도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민영
기여부분 : 기도
뉴스를 보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벌써 아침 기도 시간인가? 요즘 단체로 함께 기도하는 경우가 늘어서 목소리도 한 번에 들려왔다.
연이어 다른 사람들의 기도 기여 포인트가 들어왔다. 그리고 헌금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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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교
교주 : 한상
신도 : 38명
교단 기여 포인트 : 831
헌금 : 99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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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도 꽤 늘었고, 헌금은 조금만 있으면 100만원이다. 너무 많다. 처음엔 폭발적으로 헌금하다가 최근엔 조금 줄기는 했지만... 애들 돈이란 생각에 인출할 수가 없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유나가 전도할 사람들은 뻔하지 않겠는가. 또래의 아이들이나 선생님 정도겠지. 어른이 몇 명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아이들일 거다.
이거 문젠데...
신도는 겨우 38명이고 헌금 시작한지 보름도 안 됐는데 벌써 100만원이라니. 원래 다른 종교도 헌금이나 시주를 이정도 하나? 무교라서 잘 모르겠다. 흠..
-어제 열린 전국체전 육상 100m 결승전에서 중학생 강선미 양이 체전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우승했습니다. 이 기록은 아시아 전체를 따져 봐도 유래가 없는 기록인지라 강선미 양이 미래에...
고민하는 데 시끄러워서 TV를 껐다.
“그래. 결정했다.”
유나를 찾자. 찾아서 전도는 몰라도 헌금은 적당히 하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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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나?”
“안 밀었다.”
“밀었다!”
퍽. 퍼퍽.
또 굶주림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형제들이 싸운다.
“크흐..”
기분 좋게 웃었다. 좋은 현상이다. 저 형제들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형제들 대부분이 툭 건들면 바로 폭발할 정도로 곤두서있다. 전투감각과 흉폭성이 최고조로 올라왔다는 뜻이다.
지겹도록 이어지던 숲이 끝나고 탁 트인 평야가 보인다. 저 멀리 익숙한 지형이 보인다. 인간들이 식량으로 삼을 식물을 심어놓은 땅들. 드디어 인간들의 땅에 도착했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우린 준비됐다. 너흰 준비되었는가? 인간들이여.
“가자. 형제들.”
인간들이 준비되었는지 알아보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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