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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리고 예쁘다고?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여성 100명 예쁜 순서대로 세우면 중하위권에 서 계실 누님인데 어리고 예쁘다고? 하긴 숙부가 조카를 보는 콩깍지 씌운 눈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다. 못생긴 건 아니니까.
하긴 저 사람이 예쁘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냐. 어차피 뒷자리에 태우고 다녀야 할 VIP인건 똑같은 데 말이야.
“아. 그 싸웠다는 분?”
... 이상하게 기억하고 있네. 용감한 시민상도 받은 사람인데 말이야.
“안녕하십니까. 고 상무님을 모시게 된 한상이라고 합니다.”
“네. 잘 부탁해요.”
저번 고 상무는 50넘은 중년에서 할아버지로 넘어가는 아저씨였는데 이번 고 상무는 30초반의 여자라니. 같은 고 상문데 갭이 크다.
“근데 왜 오셨어?”
부르니까 왔죠. 물론 나한테 물어본 건 아니다. 날 부른 여자한테 물어본 거였다.
“업무 협의 때문에요. 우리하고 저쪽하고 일하는 방식이 좀 다르잖아요.”
“그렇구나.”
그 말을 끝으로 나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는지 그대로 부엌으로 가 ‘상수 어머니. 밥 좀 부탁할게요.’라고 한다. 말하는 건 싹수가 있네. 고 전무도 성격 나쁘진 않았으니까. 집안 자체가 무난한 성격의 집합소인 모양이다.
“따라와요.”
시선도 주지 않고 말하나 툭 던지더니 혼자 간다. ... 이 집안의 문제는 밑에 있는 것들이 싸가지가 없다는 거다. 왜 비서들은 하나같이 전부 싸가지가 없을까. 진지하게 어딘가에 연구 의뢰하고 싶다.
그녀를 따라 간 곳은 ‘서재’란 이름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방이었다. 나 영화에서 이런 데 봤어!
“거기 앉으세요.”
한 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 맞은 편 소파를 권한다. 행동이 아주 자연스럽다. 기 비서 말로는 분명 고은서는 이번에 상무로 승진하면서 비서와 운전기사를 지원 받는 거 아니었나? 아까 대화 나누는 걸 보나 지금의 자연스런 움직임을 보나 아주 오래 전부터 고은서와 일한 느낌이다.
“일이 꼬였어요. 원래 우리 쪽에서 고용해서 준비한 기사님이 있었는데 그 쪽 분이 오는 바람에...”
“아. 그런가요.”
“또 우리 방식을 가르쳐야 한다니 솔직히 짜증나네요.”
그게 내 탓이냐! 나도 피해자야!
“우리와 일하게 되면 그쪽 분이 이제까지 했던 방식은 전부 버리셔야 할 거에요. 이거 받으세요.”
비서. 성을 모르니 그냥 비서라고만 부르자. 비서가 나한테 뭔가 잔뜩 프린트 된 A4용지를 넘겨줬다. 말없이 기다리는 걸 보면 나보고 읽으라는 것 같은데. 대충 살펴보니 고은서의 일정표다.
“지금 예정된 상무님의 다음 주 스케줄이에요. 외워두시고 그 일정표 안의 길은 네비게이션 없이 갈 수 있게 익혀두세요. 상무님은 차 안에서도 일하셔서 네비게이션 화면과 소리에 민감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다. 택배, 냉동탑차, 퀵서비스 전부 수도권에서 했다. 서울에서 내가 차타고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돈데 그 정도쯤이야. 주소만 알려주면 척하면 탁하고 머릿속에 경로가 나온다.
“그리고 일이 없어도 매일 아침 8시까지는 이곳에 와 계셔야 해요. 30분 전에 와 있으면 더 좋겠죠.”
7시 30분까지 오라는 말이다.
“퇴근은 오후 6시입니다. 물론 그 후에도 상무님께서 차가 필요하시면 있으셔야 해요. 5시 이후에 근무한 시간은 시간외 근무로 들어갈 거예요.”
오. 그건 좋네. 야근 수당 준다는 거잖아. 고 전무랑 일할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이거. 일하면서 그쪽분이 지켜야 할 규칙들이에요.”
비서가 작은 글자로 빼곡한 A4용지 2장을 건넸다. 역시나 시간을 준다. 쭉 훑었다.
아... 벌써부터 골이 아프다. 뭐 이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많아. ‘다리 보지 말 것.’이랑 ‘가슴 보지 말 것.’은 왜 있는 거야. 그건 운전기사 이전에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거잖니. 내가 그것도 못할 것 같냐!!! 라고 외치고 싶지만 사실 아까 비서 몸매 살짝 훑어봤다. 예뻐서 나도 모르게 그만...
백미러 보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말 걸지 말고, 경적 울리지 말고. 뭐야 이건. SNS 금지는 왜 들어가 있는 거야. 애초에 안 하긴 하지만 이런 거까지 통제해?
뭐 이리 하면 안 될 게 많아. 마치 이등병이 된 느낌이다.
“그리고...”
끝이 아니었다. A4 용지 러시는 끝없이 이어졌고 30분 후 비서에게서 풀려나 집을 나설 때 내 손엔 수십 장의 A4 용지가 들려 있었다.
‘다음 주까지 전부 숙지할 수 있으시겠죠?’라니. 젠장. 고딩때도 안했던 시험 공부를 지금하게 생겼구나.
컹! 컹! 컹!
기분도 심란한데 개까지 날 갈구는 구나. 재벌집 개니까 나보다 비싼 밥 먹겠지? 난 한 끼에 4,000원 하는 도시락 먹는데 넌 뭐 먹냐. 하지만 아무리 비싼 밥을 먹는다해도 만물의 영장인 내가 너한테까지 갈굼 받아야 하냐!
거품이라도 물 듯 짓고 있는 개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커... 끼. 끼잉.
좀 쏘아붙이니 짖으려다가 빳빳하게 세웠던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넣곤 눈을 내리 깐다. 그래. 그거다. 이 개놈아. 좋은 모습이다. 앞으로 날 보면 계속 그 모습을 유지하도록. 아무리 비싼 밥을 먹어도 만물의 영장 인간에게 까불면 안 돼.
기분 좋게 우리 집보다 비싸 보이는 개집을 지나쳐 차고로 향했다. 계속 깐깐하게 구는 것이 출근도 알아서 하라고 할까봐 불안했는데 그 정도로 융통성 없진 않았는지 차키를 받을 수 있었다. 차고에 들어가니 역시나 고 전무의 차 못지않은 ‘와. 비싼차다!’라고 쓰여 있는 차가 있었다.
시동도 부드럽게 잘 걸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카센터에 가서 전체적으로 확인해봐야지. 어차피 영수증 가져가면 내줄 돈인데 하면 좋은 거지.
차고를 나가 집으로 향했다. 고 전무의 집보다 좀 멀어지긴 했다. 20분 정돈가. 뭐. 20분 정도면 집 안 옮겨도 되겠지.
빨리 가서 고급시계나 해야겠다. 예전엔 죽어라 했는데 말이야. 얼마 전에 60점을 찍었더니 뭔가 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느낌이라 시들시들해졌다. 그래도 심심할 때 간간히 해주면 시간 때우긴 좋더라.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민희
기여부분 : 기도
민희... 누구냐. 너. 어제부터 갑자기 들리기 시작한 이름이다. 유나 이것이... 누구한테 말하지 말라니까. 왜 전도를 하고 있는 거야.
어디 보자. 이제 몇 점이지? 분명 아침에 유나가 기도하면서 38점됐었지? 그럼. 39점이네? 도대체 어디에 쓰는 걸까. 궁금하다.
***
며칠 지났다. 그 사이에 카센터에 다녀왔고 심심해서 고급시계를 하다 보니 65점까지 올려버렸다. 그 외엔 별 일이 없...어야 했지만 있었다.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이서
기여부분 : 기도
신도가 또 늘었다. 이서만이 아니다. 선미라는 이름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민희, 이서, 선미... 유나야. 너 너무 전도 열심히 하는 거 아니냐. 이름이 여자애들 이름 같은데. 친구들한테 전도 하고 있는 건가. 유나야. 여기 다단계 아냐. 너 전도해도 받는 거 없어.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선미
기여부분 : 기도
단체기도 올리고 있나... 그나저나 몇 점이지? 90점 됐으려나? 요즘 너무 많이 들려서 귀찮아서 집계 안했다.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유나
기여부분 : 기도
교단 기여 포인트가 100점이 되었습니다.
아. 100점이구나. 알려줘서 고마워요. 근데 왜 알려준 거야.
-교단스킬 ‘세력 현황판’을 얻었습니다.
교단스킬? 기여 포인트를 올리면 교단스킬이란 걸 받는 거였어? 근데 ‘세력 현황판’이라니. 뭐하는 스킬인 거야? 라고 생각한 순간. 내 눈에 뭔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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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교
교주 : 한상
신도 : 4명.
교단 기여 포인트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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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시야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반투명한 텍스트. 뭔가 현황판이라기엔 너무 간단한 거 아니냐.
-비텔이 기뻐합니다.
그래. 기쁘시겠지.
-비텔의 축복이 내려졌습니다.
스킬 ‘스킬 목록 열람’을 얻었습니다.
이건 또 뭐야. ‘스킬 목록 열람’이라니. 보자마자 뭐하는 스킬인지는 알겠지만... 왜 스킬 이름이 이따구야? 누가 지었어. 비텔님이 지은 거예요? 왜 이렇게 지어요. ‘착취하는 손’이나 ‘내면을 보는 눈’ 같은 건 괜찮더만. 이럴 거면 ‘착취하는 손’도 ‘생기 흡수’ 같이 간단하게 짓지 그랬어요.
하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스킬 이름이 뭔 상관이야. 나한테 도움만 되면 되지. 힘세지는 스킬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여기서 힘 더 세져서 뭐에 써먹겠어.
그럼. 스킬이나 확인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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