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축복
쿠쿵!
캄스니가 떨어져 내린 곳에 있던 드워프 전사들이 폭탄에 맞기라도 한 듯 튕겨나갔다. 캄스니는 착지와 동시에 양손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그락카르와 같은 행동이었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달랐다.
지익. 지익. 지익.
뭔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도끼가 지나간 자리에 있던 모든 드워프가 양단되었다. ‘불가사의한 힘’ 덕분에 강화된 힘을 갖고 있던 그락카르도 드워프 한 명의 몸통을 반 정도 가르는 것에 멈췄는데 캄스니는 드워프가 마치 짚단이라도 되는 듯 가볍게 양단한 것이다.
캄스니는 이 한 동작으로 주변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었고 드워프들은 질린 표정으로 감히 캄스니에게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캄스니가 여유롭게 주변을 살폈다. 짤막한 드워프들 사이에 우뚝 솟아 존재감을 과시하는 형제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마다 힘을 다해 주변의 드워프와 도끼를 부딪치고 있었다.
“카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군.”
캄스니가 놀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무조건 드워프의 쇠구슬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엄청난 전략인 것처럼 말했지만 캄스니로서도 처음 써보는 전략이었다. 그저 집결의 외침을 쓰는 중 여러 잡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다.
다른 형제들을 속인 것은 아니다. 형제들 전부 죽고 혼자남아 수백의 적과 싸웠던 것이 그의 인생 최고의 경험 중 하나인 것은 진실이고 그 때 카록의 축복을 받은 것도 진실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쇠구슬에 대한 대책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도 진실이다. 그저 이렇게 효과가 좋을지 몰랐다.
독보적으로 큰 키를 가진 캄스니에게 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에 흩어져 떨어진 형제들과 그 형제들을 공격하는 수백, 수천의 드워프. 그리고 전방에 있던 나이 많은 드워프들이 다시 진영 안으로 달려오는 장면이 보였다.
‘반, 아니 반이 넘는가?’
전방이 아닌 자신들 사이로 떨어진 오크들에게 신경 쓰는 드워프를 말함이다. 드워프들은 저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오크 전사를 경계했다. 가장 신경 쓰였던 나이 많은 드워프 전사들도 자신들을 신경 쓰는 듯 하고... 그 말은 전방에서 돌격해오는 13,000명의 오크들을 경계하는 드워프가 5,000명도 안 된다는 뜻이다.
4분의 1정도만 전방에 대한 경계를 풀게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전략이다. 그런데 목표의 두 배 이상을 달성했다.
“이 전투! 우리의 승리다! 형제들이여! 카르하!”
캄스니의 외침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승리?’
캄스니의 외침은 비온비르에게도 들려왔다.
“멍청한 오크답게 헛소리도 잘하는구나!”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곧 드워프들은 자신들 안에 뛰어든 수백의 오크에 전방에서 돌격해오는 그 수를 알 수 없는 오크 전사들까지 더해져 안팎으로 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오크 대군이 두렵지 않은 것은 이쪽의 전열이 제대로 갖춰진 상태에서 공수가 조화를 이룰 때의 경우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지 못한다면 전쟁은 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개싸움은 드워프가 아니라 오크의 장기다. 숫자도 부족한데 적의 장기가 발휘되는 전장이 된다면...
‘필패다. 이 상황을 역전하려면... 족장과 대전사들을 빠르게 처리해야 해.’
족장과 대전사가 아닌 오크들은 다른 드워프 전사들이 알아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족장과 대전사급의 오크들이었다. 그들은 평범한 드워프 전사들로는 죽이는데 꽤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물론 무조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드워프 전사라고 해도 그들은 약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것이 문제였다.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드워프 측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다. 자칫하면 수습이 불가능할 수도...
‘이대론 너무 늦어.’
오크의 돌격에 대비해 진영을 밀집시켜놓은 것이 이런 때 방해됐다. 따닥따닥 붙어 있는 형제들을 지나 오크 족장이 있는 곳으로 가려니 너무 느렸다.
‘힘을 아낄 때가 아니다.’
비온비르는 결심했다.
“80세 이상의 형제들은 온힘을 다해 최대한 빨리 오크 대전사를 죽여야 한다!”
크게 소리쳤다. 비온비르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이 알아서 80살이 넘은 드워프 정예 전사들에게 말을 전해줄 것이다. 그들은 ‘온힘을 다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그대로 할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미적거릴 때가 아냐. 형제들. 전력으로 오크 족장에게 향한다.”
비온비르의 말에 함께 달리던 3명의 드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시간이 없음을 느끼던 차였다.
비온비르는 곧바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키웠다. 작게 가슴 부근에서만 불타고 있던 그 불꽃은 곧 온몸 구석구석 불길을 퍼뜨렸다.
화기.
어째서 80살이 드워프 사이에서 일반전사와 정예전사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가. 전부 이 화기 때문이다. 화기는 드워프가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나며 나이를 먹을수록 조금씩 몸에 쌓이는 기운이다. 불을 가까이 할수록 쌓이는 속도가 빨라지긴 하지만 그 차이는 근소하다.
화기는 일정한 양이 되기 전에는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정한 양에 도달하면 드워프가 자신이 가진 화기의 불길을 일시적으로 키울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전체적인 신체능력이 2배 가까이 상승하게 된다.
커진 불꽃은 금방 사그라지는데 당연하게도 가진 양이 많을수록 불꽃을 더 크게 키우고,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드워프는 나이가 많을수록 강한 것이다.
비온비르는 화기를 키울 수 있는 시간이 짧기에 오크 족장이 있는 곳에 도착한 후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급박해진 지금 그럴 수 어쩔 수 없이 오크 족장이 있는 곳까지 가는 데에 화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후아아압!”
비온비르가 땅을 박찼고 하늘을 날 듯 높게 뛰어 올랐다. 뒤이어 비온비르와 함께 달리던 다른 세 명의 드워프도 자신들의 화기를 키워 비온비르의 뒤를 따랐다.
“형제들! 길을 만들어다오!”
비온비르의 말을 들은 드워프들이 도끼를 들어 그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쿵. 팍. 쿵. 팍.
드워프들이 들어 올린 도끼를 밟고 점프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발판이 되어준 드워프에게 강한 충격이 갔지만 애초에 타고난 강골들이고 주변의 다른 드워프들이 도와주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부상을 입을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몇 명이 부상 입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족장을 죽이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캄스니와 비온비르 사이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무리하는군.”
40년 전쟁 경험을 갖고 있는 캄스니는 곧바로 비온비르와 3명의 드워프가 화기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용히 비온비르와 3명의 드워프 면면을 확인한 캄스니는 만족했다.
“100살 근처의 드워프가 넷이라. 카르..”
캄스니는 기분 좋게 웃었다.
“재밌겠어.”
캄스니는 주변의 드워프들을 신경 쓰지 않고 비온비르를 향해 달렸다. 형제들을 쇠구슬에서 지키기 위해 적진 한가운데서 최대한 시선을 끌어야 한다고 그락카르를 비롯한 대전사들을 설득한 그였지만... 그 역시 강자와의 싸움을 갈망하는 본능을 가진 오크였다.
달려오는 캄스니를 보며 비온비르가 같이 달리는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형제들! 시간이 없다! 화기가 떨어지기 전에 모든 걸 쏟아 부어야 한다! 방어보다 공격에 집중하도록!”
“알았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아무리 110살인 자신이라 하더라도 화기를 키울 수 있는 시간은 밥 먹는 시간보다도 짧다. 그의 옆에서 달리는 형제들은 더욱 짧다. 그러니 시간을 끌면 자신들이 질 터. 화기가 떨어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오크 족장을 죽여야 했다.
자신들 중 누군가 죽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카르라락!”
“후아압!”
시간이 없어 공격에 집중하기로 한 비온비르와 3명의 드워프, 애초에 방어를 모르는 오크 전사 캄스니.
급속도로 가까워진 비온비르와 캄스니가 서로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
카앙!
“크흐..”
드워프가 홀로 내 공격을 막아냈다. 내가 찾아가려고 했던 그 강한 드워프 전사다. 그들 중 셋이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았다.
전투가 시작하고 평범한 드워프 전사들을 쓰러뜨리며 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가고 있었다. 평범한 드워프 전사도 강했기에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날 멈추진 못했다. 보라색 빛이 내 체력을 계속 채워주었기에 상처도 계속 나았고 체력도 회복되었다.
전투를 시작하고 꽤 시간이 흘렀지만 난 여전히 처음과 같은 강력한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마치 무적이 된 느낌이었다.
아무리 많은 수가 덤벼봐야 체력과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날 죽이는 것은 무리였다. 날 죽이려면 보라색 빛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혀야 했다. 그걸 깨달았기에 나 스스로가 급소만큼은 공격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싸웠다.
그런 내 앞에 드워프 강자 셋이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나자 다른 평범한 드워프 전사들은 뒤로 물러나 싸우기 좋게 공터를 만들어주었다. 곧 그들과 내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순식간에 보라색 빛으로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 두 개가 내 몸에 새겨졌다.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다. 카록께 받은 스킬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내 공격도 약간은 밀리긴 하지만 홀로 막아낼 정도로 힘이 강했고 속도 또한 조금은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빨랐다.
캉캉! 카가가가가가강!
강하다. 정말 강하다. 이들 하나하나가 예전에 만났던 인간 강자 테론을 뛰어넘었다. 테론을 한 번의 공격에 죽이긴 했지만 그것은 그가 방심했고 내 힘이 갑자기 강해졌기에 가능했던 일. 제대로 싸웠다면 결국 내가 이기긴 했겠지만 어느 정도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 테론보다 강한 자 셋이라니.
촤학!
다시 내가 막지 못한 도끼가 허벅지를 갈랐다. 제법 깊게 베였다.
“쿠워어억!”
퍼벅.
“쿠훕.”
당연히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른 둘의 공격을 도끼로 막고 한 놈의 얼굴을 발로 차 피범벅으로 만들어줬다. 그 놈은 벌렁 넘어졌지만 강자답게 바로 몸을 일으켜 덤벼왔다.
호각. 완벽한 호각이다. 이길지 질지 가늠할 수가 없다.
분명 아까 모여 있던 드워프 강자들은 500명쯤 본 것 같은데. 3명이서 대전사, 그것도 대전사 중 강한 편에 속하는 나와 호각이라니. 이런 자들이 500명이라 함은 대전사가 백.... 모르겠다. 대충 이백 명쯤 되나? 여하튼 대전사가 수백 명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 않나.
엄청난 전력이다.
“형제들! 내가 왔다!”
“잘 왔다. 시간이 없어! 우린 거의 끝나간다! 어서 합류해라!”
끝나간다고? 뭐가 끝나간다는 거지. 내가 끝나간다는 건가. 아닌데? 깊은 상처 몇 개 입긴 했지만 난 아직 팔팔하다. 절대 ‘끝나가는’상태가 아니다. 음.. 모르겠군. 여하튼 또 하나의 드워프 강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곳으로 오고 있는 드워프 강자 둘이 더 보였다.
이런 강자들이 여섯이라. 크흐.. 죽음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카록께 갈 수 있겠군. 강자와 치열하게 싸우다 죽는다니 이보다 즐거운 일이 세상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냥 죽어줄 순 없지.
카록, 그리고 그분의 곁에 있는 형제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너희들 몇은 데려가야겠다!
“쿠워어어어억!”
퍽. 촤악.
방어를 멈추고 멈을 앞으로 날리며 강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두 곳에 공격을 허용하긴 했으나 앞으로 나서며 타점을 흐렸기에 치명상은 피했다. 이번엔 내 차례다!
“후웁!”
내 목표가 된 드워프가 급히 몸을 튼다. 보아하니 죽이는 것은 무리고 큰 상처 하나는 낼 수 있겠어.
카르라라라라라라라라락!
그때 머릿속에 강렬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 소리는... 캄스니다. 집결의 외침과 비슷한 외침이었다.
외침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알 수 없는 힘이 솟았다. 이 느낌은 ‘불가사의한 힘’을 얻었던 그 때와 같다. 그리고...
“이 무슨!”
푹!
결과도 같았다. 드워프가 갑자기 빨라진 내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내 도끼는 그 드워프의 목을 날려버렸다.
순간 나와 드워프 둘 다 움직임을 멈췄다. 난 그 틈을 이용해 캄스니가 있던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내 눈에 들어오는 믿을 수 없는 광경.
누구도 죽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캄스니의 머리에 어떤 드워프의 도끼가 박혀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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