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축복
강한 전사들이다.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무리 앞으로 나와 전열을 갖추는 약 500명 될까 말까하는 저 드워프 전사들은 강자였다. 기세로도 느낄 수 있고 눈으로도 그들의 강함을 볼 수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저들의 붉은 영혼. 강렬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고민했다. 싸우고 싶다. 저들과 싸우고 싶다. 뛰어넘지 말고 저들과 싸우자!
강자와 싸우고 싶다는 내 본능이 머릿속에서 날뛰었다. 그래. 이대로 저들과... 아냐. 그래선 안 돼. 고개를 절레절레 강하게 저었다. 그렇게 하면 강자와 싸우고자 하는 본능이 머리 밖으로 튕겨나갈 것 같았다.
분명 캄스니가 ‘약속’했다.
그의 약속을 들었음에도 그의 말을 무시한다면 그에게 불명예를 안겨주는 것이다. 다른 형제라면 몰라도 내 평생 본 형제 중 가장 강한 자의 명예다. 그런 그의 명예가 걸린 약속이라면... 날 속이는 거라 할지라도 한 번 정도는 믿어줘야 하지 않을까. 강자의 명예라면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행군 도중 캄스니는 나를 비롯한 대전사와 강한 형제들을 불러와 멧돼지를 타고 넘어가 적들의 한 가운데로 가는 작전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적에게 혼란을 줘 다른 형제들이 쇠구슬로부터 안전하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이 반발했다. 나도 말은 안했지만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위대한 전사라고 생각했던 캄스니가 우드락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오크답지 않게 머리를 써서 전략을 짜다니.
이런 전략을 어떤 오크가 좋아할 수 있을까. 강자와 싸워야 하는데 높게 뛰어 어딘지 모를 적 한가운데 떨어진다면 거기에 강자가 있을지 약자가 있을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리고 만약 다른 형제들이 캄스니의 말을 들었다면 화냈을 것이다. 자기들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전사라고 말이다.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우리가 나서는 것은 그들의 명예를 짓밟는 일이다. 그래서 거부하려 했다. 다른 형제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런데 우리가 거부하기 전에 캄스니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내가 태어난 지 올해로 43년, 처음 도끼를 휘둘러 인간의 목을 자른 이후로 41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정말 많은 전투를 경험했지. 형제들은 전장에 나선 지 몇 년이 됐지?’
여러 대답이 나왔다. ‘11년’, ‘15년’, ‘22년’ 등등 다양했다. 엠그엔은 캄스니 다음으로 많은 ‘34년’이라 대답했다. 10년 밑은 없어서 겨우 3년 된 나는 조용히 있었다. 부끄럽지는 않지만 왠지 말하기 껄끄러워서... 여하튼 그걸 들은 캄스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형제들은 항상 강한 적을 향해 달려들었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대한 오크 전사니까.’
당연하다. 다들 그렇다고 대답했고 이때는 나도 대답했다.
‘그리고 형제들의 옆에는 역시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형제가 항상 같이 있었겠지?’
그렇다. 우리 오크는 본능적으로 정확히는 아니어도 대강은 강자를 알아볼 수 있고 어떤 형제도 강자와 싸우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 당연히 모든 형제가 강자가 모여 있는 곳으로 함께 달린다.
‘언제나 든든한 형제와 어깨를 맞대고 벌이는 강자와의 싸움. 즐겁지. 그걸 싫어하는 형제가 있을까? 형제들은 용맹하고 위대한 오크 전사니까. 그런데 형제들 중 홀로 수백의 적 사이에 서본 적 있는가?’
조용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럴 일이 있나? 오크가 싸움을 아무리 좋아한다 하더라도 혼자 적에게 덤비는 바보는 없다. 오크는 용맹한 것이지 멍청한 게 아니니까. 자살을 하는 취미는 없다.
‘든든한 형제 없이 날 죽이려는 적만 가득한 곳에서의 치열한 전투. 단언한다. 그것이 내 인생 최고의 경험 중 하나였음을 말이다. 약속한다. 형제들 또한 인생 최고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인생 최고의 경험... 이 때 거의 마음이 기울었었다. 위대한 전사이자 족장인 캄스니가 단언하고 약속했다. 그걸 믿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뒤이어 캄스니가 우리들 전부의 마음을 뒤흔드는 마지막 말을 했다.
‘그리고 그걸 경험한 날... 난 카록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한다.’
‘하겠다. 형제.’
‘무조건 하겠다.’
캄스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들 캄스니의 전략을 따르겠다고 했다. 카록의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캄스니는 말을 길게 할 필요 없었다. 그저 마지막 말만 했으면 됐다. 카록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느 형제가 하지 않겠다고 할까.
카록의 축복을 받았다함은 카록께 인정받았다는 뜻. 카록께 인정받았던 행동을 거부하는 오크는 세상에 있을 수 없다.
“크흐..”
카록께 인정받은 행동이다. 무조건 하자. 그리고 참자. 눈앞의 강자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을 누르자.
그래. 적 한가운데에 떨어져서 이쪽으로 오면 될 것 아닌가. 수백의 적을 뚫어내고 강자와의 전투를 하는 거다. 그러면 되겠어.
쿠구구구구구구구구궁!
멧돼지가 드워프 강자들과 충돌했다. 역시나 강자답게 멧돼지의 돌격에도 드워프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이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난 이미 충돌 때 일어난 반동을 이용해 멧돼지 등을 박차고 뛰었으니까.
드드득!
뀌이익!
강하게 박차는 내 힘에 비명을 지르는 멧돼지,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괜찮다. 멧돼지는 이미 쓸모가 다했다.
“쿠워어어어어!”
하늘을 난다. 저번에 인간의 마을을 침공할 때 목책위로 뛰어 올랐을 때보다 두 배는 더 높이 뛴 거 같다.
“크흐..”
웃음이 나온다. 수백의 형제가 하늘을 나는 모습이라니. 역시나 가장 높게, 가장 멀리 나는 것은 캄스니다. 저번과 같다. 저번에도 우드록의 뒤만 봐야 했는데 이번에도 캄스니의 등만 봐야 한다니.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당연히 캄스니의 등이 닿을 리 없다.
잡는다. 무조건 따라잡는다. 언제든 따라잡아 세계 최강의 전사가 될 거다.
그러기 위해선... 이번 전투에서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강렬한 싸움을 해서 카록의 눈에 들어야 한다. 강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카록께 축복을 받는 것.
몸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한다. 대충 어디로 도착할지 가늠이 됐다. 저기다. 드워프가 가득했다. 다시 드워프 강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려면 수백을 베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크흐.. 그러면 카록께서 기뻐하시겠지.
내가 떨어질 곳에 있는 드워프가 날아오는 날 발견하고 당황하며 얼떨결에 도끼를 내밀었다.
어설프다. 어설프다고! 우리 오크였다면 그런 어설픈 움직임은 죽어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딴 비리비리한 움직임으로 날 막겠다고! 어림없다!
쿠쿵!
드워프의 도끼가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피부만 살짝 가르고 지나갔을 뿐이다. 피부를 뚫지 못했기에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힘을 싣지 않은 어설픈 이런 공격은 내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다.
“쿠워억!”
앉은 자세로 착지한 후 일어나며 바로 양손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푹! 두두두두두두둑!
도끼는 무방비상태로 있던 드워프 하나의 허리에 박혔고 드워프가 박혀있는 상태 그대로 주변 드워프들을 강타했다. 드워프들이 튕겨나가며 순간적으로 양손도끼의 리치만큼의 원형 공터가 만들어졌다.
단단하다. 걸리는 모든 드워프를 갈라버릴 생각으로 했던 공격인데 단 한 명만, 그것도 완전히 가르지 못하고 반만 가르는 것에 그쳤다. 갑옷 자체가 두껍고 단단한 탓도 있지만 드워프의 뼈가 그 장비보다도 더 단단한 느낌이다. 역시 저 작은 몸으로 우리 오크 못지않은 힘을 내는 놈들답다. 강골이야.
“크흐..”
그래서 더 즐겁다. 하나하나가 강자다. 인간처럼 나약한 자가 대부분이고 강자가 적은 형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전부가 강했다.
“그아아!”
캉! 카강!
드워프 둘이 합심해 내 도끼를 쳐냈다.
크흐.. 그래 이거다. 평소에 전장에서 느꼈던 죽음은 천천히 앞에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죽음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다. 사방에서 빈틈없이 느껴지는 살기와 압박감. 마치 사방이 강철벽으로 꽉 막힌 느낌이다.
그래. 캄스니. 형제의 말이 맞았다.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야. 너무 좋다!
카록이시여! 이 전투를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저를 봐주십시오.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억!”
카록께서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하늘을 향해 온힘을 다한 고함을 질렀다. 이 정도면 카록께서 있는 곳에 닿았겠지? 카록께서 봐주셨으면 해서 지른 고함이 의외의 효과도 발휘했다. 강철벽처럼 단단했던 드워프의 기세가 잠깐이지만 출렁이며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자. 가자.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이 전투에 임하겠다. 드워프들의 마음에 귀 기울였다. 들리지 않는다. 역시 나약한 인간들과 달리 전투 중 사사로운 마음을 먹지 않는구나.
도끼를 휘둘러 박혀있는 드워프를 던졌다. 그리고 양손에 보라색 빛을 만들어냈다. 빛은 조금씩 이동해 도끼날을 덮었다.
“조심해! 알 수 없는 힘을 쓰는 오크 대전사다!”
그래.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나는 너희들의 악몽이 될 것이니까. 아까 그 강한 드워프들이 있던 곳이 저쪽 방향이던가?
“쿠워어억!”
몸을 날리며 체중과 힘을 실어 도끼를 내려찍었다.
“쿠워어억!”
소리를 지르며 힘을 줬고 도끼에 내 원래 힘을 뛰어넘는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카록께서 주신 능력 ‘불가사의한 힘’이 최대로 발휘된 것이다. 내 목표가 된 드워프가 도끼를 들어 막았지만 막힌 그대로 힘으로 눌렀다.
“쿠흑!”
드워프는 내 공격을 막았지만 내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밀렸고 내 도끼는 애초에 목표했던 그대로 드워프의 투구를 뚫고 머리를 반으로 쪼갤 수 있었다. 머리가 갈라진 드워프는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분명 막았는데?! 덩치에 비해 힘이 비정상적으로 강한 오크다! 절대 혼자 공격을 막으려 하지마!”
크흐.. 둘이면 될 것 같으냐. 비켜라! 난 강자가 있는 곳으로 가야하니 말이다!
***
“형제들! 다들 흩어져서 진영 안으로 날아간 오크를 죽이러 가야 한다! 빨리 움직여!”
비온비르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지시에 드워프 정예 전사들이 흩어져 진영 안으로 달려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정면으로 부딪힐 줄만 알았던 오크가 전략을 사용하다니. 분명 수십 년간 싸워온 오크는 정면 공격 외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멍청한 놈들인데...
너무 오크를 얕봤다. 수가 많으면 머리를 쓰는 놈이 한둘은 있을 수도 있는 건데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비온비르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것으로 후회는 그쳤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벌어진 일에 대해 후회만 하고 있으면 피해만 더 커질 뿐이다. 이제는 최선을 다해 수습해야 할 때다.
“형제들은 나와 함께 오크 족장에게 간다.”
비온비르는 자신의 근처에 있던 100살에 가까운 전사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수는 셋, 자신까지 합쳐 네 명이 오크 족장을 상대할 것이다. 둘만 모여도 평범한 족장 정도는 이길 수 있는 전력이지만 이번 오크 족장은 유난히 컸다. 그래서 확실히 하기 위해 네 명이 상대하기로 했다.
“빨리. 빨리 가야 한다.”
저 뒤에는 그 족장을 막을 만한 강자가 없다. 그러니 빨리 가서 막아야 한다. 형제들의 피가 바닥을 가득 적시기 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