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전쟁의 시작
=그락카르가 한창 멧돼지를 포획하던 시기의 한상=
-아침 해가 떴습.
턱.
훗. 오늘은 다른 날보다 빠르게 알람을 껐군. 다음엔 울리자마자 꺼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겠어.
“으다다다닷!”
기지개를 쭉 피니 살짝 뻐근했던 몸이 풀린다. 기분 좋은 뻐근함이다. 오늘 아침도 상쾌하구나. 요 며칠 상쾌한 기상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은 그락카르 놈이 사람 머리통을 깨부수지도 않고 인육을 먹지도 않는 덕분이다. 열심히 멧돼지만 잡으러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냥도 하게 돼서 짐승고기만 먹고 있다. 생으로 뜯어먹긴 하지만 육회나 회도 먹는데 생고기쯤이야.
앞으로도 그렇게만 살아라. 이 오크 놈아.
라고 빌지만 그런 일은 없겠지. 지금 멧돼지를 모아오는 것도 전부 더 즐겁게 전쟁하겠다고 준비하는 거니까. 전쟁광 놈 같으니. 곧 드워프랑 전쟁하고 난리치고 할 테지만 그래도 2주 동안은 잠잠해서 좋았다.
그 사이에 여행도 다녀왔다.
본의 아니게 유급 휴가를 한 달이나 받아버렸으니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다녀본 적 없는 여행이나 함 가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들 휴가에는 여행을 가니까. 얼마나 좋은지 한 번 체험해보고 싶었다.
6박 7일의 제주도 홀로 여행!
3일 전에 돌아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여행 혼자 다니는 게 아니란 걸. 그냥 동네 걸어 다니는 거와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더라. 관광지를 가도, 아름답다는 자연경관을 봐도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자연경관은... 그락카르를 통해서 매일 보는 자연이 훨씬 멋있다. 거기는 한 걸음만 걸어도 세계 제일의 자연경관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만한 것들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나 소 같은 걸 구경해도 그락카르 놈은 큰 뿔 누나 큰 어금니 멧돼지처럼 지구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는 신기한 동물을 잡아먹는 놈이니까.
그렇군. 이제 알았다. 여행이 재미없었던 건 다 그락카르 놈 때문이야.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고 그냥 무조건 짜증나는 놈 같으니.
“우웃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직행했다. 오늘은 얌전히 짐승 다리를 뜯어준 그락카르 덕에 딱히 분노의 양치질을 할 필요 없지만 매번 일어나자마자 양치질을 하다 보니 익숙해져 습관이 되어버렸다.
-교단 기여 포인트 1점 얻었습니다.
제공자 : 유나
기여부분 : 기도
칫솔에 치약을 바르는 중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나. 부지런하구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슷한 시간에 아침 기도를 하네.
예전에는 어쩌다 한 번 들렸던 목소리가 요즘은 자주 들리고 있다. 이 ‘교단 기여 포인트’를 얻었다는 형태로 말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했다. 어디보자.. 오늘로 29점인가. 매일 2~3점씩 들어오네. 그런데 이거 왜 주는 거야?
그냥 비텔교 교주라서 아무 의미 없이 주는 건 아니겠지? 그냥 나중에 ‘오. 400점 쌓았구나. 열심히 했네. 잘했다.’라고 칭찬만 하고 끝나는 그런 건 아니겠지? 요즘은 현금포인트가 최곤데 말이야. 1점에 1만원으로 바꿔준다던가 하면 얼마나 좋아.
비텔님. 벌써 2주동안 궁금해 하는데 이제 슬슬 알려줄 때도 되지 않았나요? 혹시 제가 이름이 틀렸나요? 그래서 대답을 안 해주시는 건가요? 비텔교긴 하지만 진짜 이름은 다른 건가요? 계속 목소리가 비텔이라고 말해서 그쪽 이름이 비텔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혹시 틀렸으면 지금이라도 말을 해주세요.
...
....
.....
역시 대답은 없네. 치사한 신 같으니. 어차피 이 세상에 교도는 나 혼자...는 아니고 둘 밖에 없는데 좀 1:1 대화 같은 거 해주면 덧나나? 혹시 유나하고만 대화하고 있나? 그래서 유나가 매일 기도하는 거고 말이야. 설마 아니겠지. 난 무려 비텔교 교주님인데 말이야.
“가르르르르. 퉤!”
잡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양치질이 끝났다.
화장실을 나와 방바닥에 대충 던져져 있던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그리고 바로 밖으로 나가..려다가 다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물을 묻혀 뻗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다시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달렸다. 목적지는 5분정도 달려가면 있는 공원. 속도는 꿈에서 그락카르를 보기 전이라면 전속력으로 달린다고 해도 될 정도다. 예전에는 30초만 달려도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었는데 이젠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는다.
늘어난 힘과 체력을 알기 위해 조깅과 체력단련을 시작했는데 이게 의외로 재밌다. 아무리 달려도 잘 지치지 않고 힘도 세져서 운동기구를 쉽게 다룬다. 그런 모습을 공원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곁눈질로 본다. 안 보는 척하면서 보는 게 전부 느껴지는데 그때 약간 우월감이 든 달까. 특히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들도 많이 나오는데 그 여자들 시선이 상당히 즐겁다.
열심히 달리고 체력단련을 했다. 자! 모두들 봐라! 내 분노의 윗몸일으키기를! 우워어어어! 1분에 100번도 넘게 한다! 어서! 어서 봐! 특히 여자들! 다 날 봐!
엇. 윗옷이 말려 올라와 배가 보일 것 같다. 황급히 하던 윗몸일으키기를 멈추고 옷을 내렸다. 운동 잘하는 남자의 정점은 몸에 딱 달라붙는 나시티를 입고 땀 흘리는 건데 말이야. 난 그걸 못한다. 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저질 몸이라서 말이다.
힘 세지고 체력 좋아졌으면 몸도 좋아져야 하는 거 아냐? 왜 배에 왕자가 안 생기는 거냐! 왜 이두박근이 안 나오는 거야! 그락카르 놈은 몸도 크고 두꺼운데 근육이 여기저기 빠방하게 붙어 있더만!
운동하다보면 근육 생기겠지? 혹시 영원히 안 생기는 거 아냐? 근육 생기는 원리가 찢어지고 파열된 근육이 회복될 때 더 강해지면서 생기는 거라던데. 난 뭘 해도 안 힘들고 근육통도 안 생긴다. 진짜 그러면 평생 이 저질 몸으로 살아야 하나?
그건 좀 곤란한데...
***
“온다...”
비온비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평야 너머로 오크 대군이 나타났다. 얼추 봐도 1만이 훨씬 넘어가는 수. 무리 최선두에 있는 족장으로 보이는 오크는 드워프보다 3배는 커보였다. 대전사의 수도 수십. 확실히 엄청난 전력이다.
오크무리 사이에서 큰 어금니 멧돼지를 가둔 우리가 나타나 앞으로 나왔다. 역시 오크놈들. 바로 전쟁을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비온비르는 저 멧돼지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고 있다. 비온비르는 올해 110살. 30살이 되어 대장용 망치를 들었고 50살이 되어 전투용 도끼를 들었다. 도끼를 든 이후로 60년. 오크와의 전투는 수십 번 치렀다. 그 중에 멧돼지를 다루는 오크도 있었다.
오크가 멧돼지를 다루는 방식은 단순했다. 전투 시작과 동시에 멧돼지를 몰아 돌격 시킬 거다. 그걸 과거 겪었던 상황을 떠올린 비온비르가 피식 웃었다. 그 방법은 자신들 드워프에게 단 한 번도 통한 적이 없다. 비온비르가 주변을 둘러봤다.
후! 후! 후! 후!
화! 화! 화! 화!
일관된 함성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다가오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형제들. 형제들은 하나같이 전신을 덮는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다.
드워프의 장비제작능력은 모든 종족 통틀어 최고다. 모든 드워프가 훌륭한 장인이며 자기 자신이 입을 장비란 생각을 하며 최선을 다해 만들며 일정 기준 이하의 장비는 녹여 버린다. 즉, 여기 있는 형제들이 입은 장비는 전부 깐깐한 드워프의 기준을 통과한 장비란 뜻.
모든 드워프가 대륙 최고의 갑옷을 입고 있는 셈이다. 돌격하는 멧돼지의 강점은 길고 큰 어금니와 거대한 몸집에서 나오는 충돌시의 강렬한 충격.
일단 멧돼지의 어금니는 갑옷을 뚫지 못하니 쓸모가 없다. 그리고 무거운 전신갑옷을 입은 드워프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멧돼지에 맞설 것이다. 강한 힘을 가진 드워프가 무거운 장비까지 입고 있다. 평범한 드워프 셋만 모여도 멧돼지의 돌격을 정면으로 막아낼 수 있다.
비록 멧돼지의 수가 이제껏 본 것에 비해 엄청나게 많기는 하지만 이쪽도 1만이 넘는 수. 멧돼지의 돌격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사그라질 것이다.
-카르라라라라라라라!
오크 족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후! 후! 후! 후!
드워프들의 함성에 묻혀 사라졌다. 비온비르는 곧 이어질 오크들의 공격 역시 그와 비슷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크족장의 고함소리에 맞춰 우리가 열리고 멧돼지가 튀어나왔다.
“시작이다! 준비해!”
멧돼지가 튀어나왔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우리 앞에 모여 있던 덩치 큰 오크들이 멧돼지의 진로에서 비키지 않는다는 거다.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오크들이 뛰어 멧돼지 위에 올라탔다.
‘이상한 놈들이군.’
저러면 빠르게 돌진해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무식한 오크 놈들이 멧돼지를 훈련시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리는 없고 그저 조금 빠르게 전장에 도달하는 것 외의 이점은 없을 것이다.
아니. 이점도 아니다. 단점이다. 멧돼지 없이 달려올 본진과 멀어지기만 할 테니 각개 격파 당할 것이다.
‘차라리 잘 됐군.’
핸드캐논이 안 통할 덩치 큰 오크가 많아 꽤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오크 본진이 오기 전에 덩치 큰 오크를 집중 공격해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다.
“핸드 캐논과 폭탄을 쓰지 마! 대전사급 이상의 오크에게는 낭비다! 핸드 캐논과 폭탄은 뒤에 오는 일반 오크들에게 써! 멧돼지도 공격하지마라! 그냥 빨리 오게 놔둬! 각개격파한다! 그리고 80살 이상의 형제들은 앞으로 나와라! 나와 함께 족장과 대전사를 상대한다!”
드워프는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진다. 그러니 80살 넘은 드워프라함은 정예 드워프 전사를 말한다. 비온비르의 말을 들은 정예 드워프 전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 수는 약 500명. 그 수라면 2~300명으로 보이는 멧돼지 탄 오크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비온비르가 이끄는 500명의 정예 드워프 전사가 조금이지만 앞으로 나와 멧돼지 탄 오크들을 기다렸다.
‘100... 50... 30... 20...’
그리고 10m.
“충돌 준비!”
비온비르가 정예 드워프 전사들에게 멧돼지와의 충돌을 대비하게 했고 정예 드워프 전사들이 다리와 허리에 힘을 주고 서로의 몸을 붙들어 충돌을 대비했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구구구궁!
충돌했다.
“이런 빌어먹을! 말도 안 돼!”
그리고 비온비르가 낭패 섞인 소리를 질렀다. 멧돼지에서 내려 자신들과 싸울 것이라 생각했던 오크들이 충돌 때 일어난 충격을 이용해 점프해서 정예 드워프 전사들의 머리를 뛰어넘어 일반 드워프 전사들 한가운데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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