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드워프
-구와와와와와!
!!!
머릿속을 울리는 이 강렬한 고함 소리는 분명 집결의 외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쿠훅!”
“꾸억!”
같은 천막에서 자던 형제 몇이 밟혀 소리를 질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최단 거리로 어제 갔던 캄스니의 천막으로 달렸다.
보고 싶다. 집결의 외침을 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지금도 가슴을 울리고 있는 이 외침을 지르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집결의 외침이 끝나기 전에 캄스니의 천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더 다행하게도 캄스니는 천막 밖에서 집결의 외침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난 의아해졌다.
그냥 서 있었다.
캄스니는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고 입을 꾹 닫은 채 우뚝 서 있는 캄스니에게서 내가 상상했던 장렬한 모습은 없고 고요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왔나. 형제.”
돌아보니 엠그엔이다. 어제 날 식량 천막으로 안내해줬던 캄스니 부락의 대전사.
“저게 집결의 외침인가?”
“그게 궁금해서 왔군. 이상할 테지. 족장이 어떤 소리도 지르지 않는 것이 말이야.”
그의 말대로다. 지금도 머릿속엔 강렬한 외침이 들리고 있는데 정작 캄스니가 있는 이곳 주변은 조용하다. 직접적으로 귀를 통해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도 없다.
“집결의 외침은 육체로 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지르는 것이어서 그렇다.”
“마음?”
“그렇다. 겉으론 그냥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족장이지만 속으론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있다. 조금이라도 멀리 있는 형제들에게 외침이 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말이야.”
그런 거군. 하긴 직접 외치는 소리라면 일주일 거리에 있던 내게 들렸을 리 없지. 마음으로 외쳐 마음으로 전달하니 사방의 형제들에게 목소리가 닿았던 거야.
“그나저나 잘 왔다. 형제. 이따가 찾아가려 했었는데.”
“할 일이 있나보군.”
시킬 일이 있으니 찾은 거다. 할 일이 없다면 전쟁 당일까지 날 찾지 않았을 것이다.
“드워프와의 싸움이다. 아무리 우리라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지. 그들의 쇠구슬은 위험하니까.”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드워프의 쇠구슬은 위험하다. 단 한 번 싸워봤을 뿐이지만 확실하게 깨달았다. 우리가 200명, 드워프가 150명으로 수적 우위를 갖고 싸웠음에도 형제들이 180명이나 죽은 것은 그 쇠구슬 때문이었다.
기다란 막대에서 뿜어지는 작은 쇠구슬. 그 작은 것이 맹렬하게 날아와 우리의 두꺼운 피부를 뚫어 상처를 냈다. 한두 개로 우리를 멈추게 할 수 없지만 그것 수십 개가 몸에 박히면... 아무리 강인한 형제라 할지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다.
“자네나 나정도 되면 쇠구슬 따위 신경 쓸 필요 없겠지만 다른 형제들은 아니니까.”
그런가? 지금의 나 정도면 쇠구슬을 걱정할 필요 없는 건가? 예전 드워프와 싸웠을 땐 6개의 쇠구슬이 몸에 박혔었다. 급소가 아니었기에 문제없이 싸울 수 있었지만 그 중 한 발이라도 급소에 박혔으면 1:1로 싸웠던 드워프 전사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드워프와 나는 박빙이었으니까.
팔뚝을 들어 쳐다봤다. 다른 형제의 허벅지만한 팔뚝이 거기 있었다. 그래. 난 커졌다. 드워프와 싸웠을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머리 2개는 더 커졌을 것이다. 그 만큼 피부도 단단하고 질겨졌을 터. 저 작은 쇠구슬 따위가 강인해진 내 피부를 뚫을 리 없지.
“갑옷을 만들 재료라도 구해 와야 하나?”
쇠구슬에 대한 방비를 하려는 것 같은데 두꺼운 갑옷을 덧대 입으면 다른 형제들도 쇠구슬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재료를 구할 데도 없고 구한다 해도 만들 장인이 부족하다. 집결의 외침으로 모이는 형제는 대부분이 전사니까.”
그렇겠군. 떠돌이는 대부분 전사다. 장인은 보통 부락에 정착하니 집결의 외침을 듣고 오는 수는 얼마 되지 않겠지.
“그럼. 어떤 준비를 하려는 거지?”
“멧돼지를 모은다.”
“... 멧돼지?”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멧돼지라니. 젠장...
***
나와 함께 우드록 부락에서 온 형제들과 함께 숲으로 나왔다. 엠그엔의 ‘멧돼지를 모은다.’라는 말은 멧돼지를 포획해오라는 것이었다.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엠그엔이 싫으면 다른 형제에게 부탁하겠다고 했지만 괜찮으니 하겠다고 했다.
멧돼지를 포획하는 것은 싫었지만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은 전사의 의무다. 그걸 거절 할 순 없지.
“흔적을 찾았다. 형제.”
가장 앞에서 무리를 선도하던 형제가 멧돼지 흔적을 발견한 모양이다.
“한 마리, 큰 놈이다. 속도를 올리겠다.”
고개를 끄덕여줬다. 흔적을 발견한 형제는 이 전보다 3배 정도 속도를 올려 빠르게 추적해 들어갔다.
꾸이익!
멧돼지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역시나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좋지 않은 기억이 절로 떠올랐다.
멧돼지... 몇몇 부락에서는 멧돼지를 전투에 이용한다. 캄스니의 부락도 그런가 보다. 그리고 내가 나고 자란 부락을 떠나 처음 합류한 부락에서도 멧돼지를 이용했다. 그 때도 지금처럼 멧돼지를 포획하러 나왔었지.
당시의 나는 자신만만했지만 멍청했다. 이제 막 부락을 벗어난 주제에 위대한 전사가 된 것처럼 행동했고 멧돼지를 포획하는 일에서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맨 앞에서 나댔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에 멧돼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 어금니 멧돼지.
전쟁에 사용하는 멧돼지는 일반적인 멧돼지가 아니다. 큰 어금니 멧돼지라 불리는 종으로서 ‘큰’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종이다.
평균 몸길이 3m, 어깨 높이 1.5m. 일반 멧돼지의 3~4배에 달하는 덩치를 가진 몬스터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짐승. 덩치만큼 성격도 거칠어지는지 그 흉포함은 진짜 몬스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 녀석을 어떻게 전쟁에 이용하는 걸까. 난 멧돼지 포획에 나선 적이 있음에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모른다. 난 그 때 있었던 전투에 나가지 못했으니까.
빌어먹을 멧돼지의 뿔에 박혀 일주일동안 사경을 헤맨 덕분에 말이다.
뀌이이이이이익!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화난 모양이다. 멧돼지를 이번에 두 번째 보는 거지만 확실하다. 그 빌어먹을 놈의 뿔에 박힐 때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까. 절대 잊지 못하지. 그 소리는.. 그 때가 내 인생 최고의 위기였으니까.
.... 멧돼지의 뿔에 박혔던 것이 인생 최대의 위기라니. 전사로서 치욕도 이런 치욕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멧돼지를 떠올 릴 때마다 인상이 찡그려진다.
쿵. 쿵. 쿵.
그 놈이 달려오고 있다. 아직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그 놈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이쪽으로 오늘 길에 있는 나무들이 쓰러지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지. 작은 나무는 쓰러지고 큰 나무는 흔들리고 있다.
여전히 무식한 놈이군. 앞에 뭐가 있든 피할 생각을 안 하는 놈이다. 나무에 머리 박아봐야 자기만 손해인 것을.
“이쪽으로 온다! 준비해라 형제들!”
멧돼지를 추적해온 형제가 말했다. 멧돼지를 포획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죽이는 건 더 간단할 텐데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이 아쉽다. 죽여도 된다고 하면 신나게 뛰어다니며 죽일 텐데 말이야.
여하튼 포획방법은 지금처럼 근처에 가서 우리 냄새를 풍기면 성질 더러운 이놈이 알아서 달려온다. 그때 우리들이 전부 달려들어 힘 싸움을 하는 것이다.
짐승 놈이 아무리 세 보아야 전사 수십이 달려드는데 어찌 버틸까. 멧돼지는 날뛰다가 결국 지치게 된다. 그러면 끌고 가서 부락에 있는 우리에 가두면 된다.
“음! 이 길로 온다! 모두 여기 양옆에 대기해!”
아무리 크고 흉포해봐야 멧돼지다. 직선으로만 달리는 것은 작으나 크나 똑같다. 그러니 우리는 그놈이 달려와 지나갈 길 옆에 서 있다가 덮치면 되는 것이다. 한 명만 빼고.
“뭐하지. 옆으로 가야 한다. 형제.”
미끼 역할을 하기로 한 형제가 내게 말했다. 아무리 멧돼지가 직선으로만 달린다 하더라도 그건 앞에 공격할 대상이 있을 때다. 멍청한 놈이긴 하나 공격할 대상도 없는데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장 앞에서 놈이 인식하기를 기다렸다가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유인할 미끼 역할이 필요하다.
내가 그때 다른 형제들이 말리는데도 멋모르고 그 역할을 하겠다고 고집 피워 나섰다가 죽음 직전까지 갔었지.
“내가 한다. 형제는 옆으로 가라.”
“괜찮겠나? 미끼 역할은 상당히 위험하다. 안 해본 형제가 하면 다칠 수 있다.”
그때도 다른 형제가 이렇게 말렸었지. 그리고 난 그때 말을 안 들었고... 지금도 안 들을 거다.
“괜찮다. 형제. 미끼 역할은 예전에 해봤다.”
“오. 멧돼지 포획 경험도 있다니. 역시 대전사답다. 경험이 많다. 그럼 부탁한다. 형제.”
“맡겨라.”
내 말을 들은 형제가 다른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물러났고 내가 앞에 나섰다. 형제들은 내 뒤에 두 줄로 늘어섰다. 난 여기 서 있다가 멧돼지가 모습을 드러내 날 보면 달려서 형제들 사이를 통과하면 된다. 그러면 멧돼지가 날 쫓아 형제들 사이를 지날 것이고 그 때 형제들이 달려들어 포획할 것이다. 하지만 난....
뀌이이익!
“늦었다! 어서 달려라 형제!”
멧돼지가 나타났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멧돼지가 점점 가까워져왔고 올수록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힘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안 돼! 모두 달려! 형제를 구해야 한다!”
뒤에서 당황한 형제들이 날 향해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다. 형제들이여.
아무리 서둘러도 형제들보다 멧돼지가 먼저 내게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내가 보는 광경 안에서 멧돼지의 쓸데없이 큰 대가리가 점점 확대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보는 광경 전부를 멧돼지가 채웠을 때. 거대한 어금니가 내게 도달했다. 그리고 난 손을 뻗어 그걸 잡았다.
쿠웅!
“그락카르!”
내가 멧돼지와 부딪히자 형제가 놀라서 날 불렀다.
“왜.. 부르나. 형제.”
잔뜩 힘을 준 채로 대답하려니 힘들군.
“도대체...”
달려오던 형제들이 제자리에 멈췄다. 그들이 달려올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형제들은 상상했을 것이다. 멧돼지 어금니에 받혀 배에 구멍이 뚫리는 내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그 상상은 틀렸다. 난 어금니를 잡아 멧돼지를 멈춰 세웠으니까. 그리고..
“쿠워어어억!”
뀌익!
그대로 뒤로 집어 던졌다. 큰소리를 내며 멧돼지가 형제들 앞에 떨어졌다. 형제들이 급히 달려들었다. 멧돼지는 나름 발버둥 쳤지만 내게 던져진 충격에 그 반항은 약했다. 이내 형제들 주먹을 몇 대 맞고 조용해졌다.
“크흐...”
상쾌하다. 이젠 멧돼지란 단어를 들어도 얼굴 찡그릴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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