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드워프
“빌어먹을... 형제. 갈 건가?”
우드락이 갑자기 물었다. 왜 물어보는 거지?
“당연하지 않나?”
집결의 외침이다. 다른 형제들에게 말만 들어봤지 직접 듣는 것은 내 5년 인생 처음이다. 집결의 외침은 거대한 전투의 준비동작이다. 집결의 외침을 시시한 전투에 사용할리 없으니 근원지를 찾아가면 아마도 내 인생 최대 규모의 전투를 할 수 있겠지.
분명 얼마 전 치렀던 인간과의 전투보다도 큰 전투가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찌 안 갈 수 있겠는가.
무조건 가야한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거다. 대부분의 형제가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이르크는 어찌 할 건가.”
“이르크...”
내 인생 최고의 암컷.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하지만...
그것과 전쟁의 희열을 비교할 수 있을까? 명예로운 전사로 인정한 우드락이기는 하지만 살짝 화가 나는군. 날 어떻게 보고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지?
“이상하군. 우드락. 암컷과 전쟁을 비교하다니. 내 전사로서의 명예를 모욕하는 건가?”
“... 미안하다. 내가 실언했다. 자넬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형제가 부락에 머물러준다면 암컷과 새끼들이 배부르고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그렇군. 이해했다. 우드락은 이 부락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다. 나나 다른 형제들처럼 세상 모든 곳을 터전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터전을 이 부락으로 한정한 것이다. 그래서 자꾸 형제들의 피해를 감소하기 위한 의견을 내놓거나 부락의 전력이 감소하는 걸 막으려 한 것이다.
전투를 찾아나서는 걸 포기하고 정착한 전사. 그걸 비난하진 않는다. 형제마다 생각이 다른 거니까. 모든 형제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렇군. 이해했다.”
“날 비난해도 이해한다. 형제. 난 이 부락에서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물론 족장의 아들은 수십이 있었지만 대부분 전장에서 죽거나 부락을 떠나 세상으로 갔지. 하지만 난 특이하게도 이 부락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세상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부락에 정착했다. 그게 전사로서 불명예스런 행동인 것은...”
“형제.”
우드락의 말을 멈추게 했다. 그는 변명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명예가 없는 전사로 오해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건 그만큼 날 명예로운 전사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 기분이 좋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우드락. 너는 그 누구보다도 명예로운 전사다. 난 전장에서 강적을 상대로 물러나지 않는 형제를 봤다. 그 누구보다도 용맹했다. 그리고 부락에 머물며 암컷과 새끼를 지키는 것 또한 그 어떤 것보다도 명예로운 일. 난 널 존경한다. 형제여.”
“형제...”
쿵.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팔뚝을 부딪쳤다.
“크흐..”
“케흐..”
우린 서로를 보며 웃었다.
***
“케흐. 아쉽군. 몸만 멀쩡했어도 우드락에게 부락을 맡기고 나도 갔을 텐데 말이야.”
우드록이 아쉬워했다. 왼팔을 잃었음에도 위압감은 여전했지만 아직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기에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무리긴 했다. 그나저나 족장이 부락을 버리고 떠나겠다는 말을 저렇게 쉽게 하다니. 저런 아버지 밑에서 우드락 같은 성격이 어떻게 나온 건지 모르겠군. 둘이 완전 정반대야.
짐은 단출했다. 장인형제에게 쌍도끼를 달고 다닐 걸쇠를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양손도끼 걸이까지 만들어준 덕에 양손도끼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양손도끼를 등에 매고 쌍도끼를 양 허벅지에 매달았다. 크흐.. 내가 봐도 진정한 전사답다. 모든 암컷이 나만 쳐다보겠군.
“그럼. 다음에 보지. 형제.”
이미 이르크, 우드락과는 작별 인사를 했다. 우드록이 마지막이다. 부락을 떠나는 데 작별인사를 해야 할 인물이 셋이나 있다니. 아무말없이 떠나 온 이전의 부락을 생각하면 많은 인연이 생겼다.
그리고 많이 강해졌지. 그게 진짜 중요한 거다. 앞으로 혹시나 다시 우드록 부락에 오는 일이 없어도 이들과의 인연은 영원히 잊지 않을 거다.
바로 부락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공터로 갔다. 내가 공터에 나타나자 형제들이 술렁였다. 나는 잠시 공터 가운데 서서 형제들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집결의 외침이 들려왔던 방향으로 걸었다.
형제들이 하나, 둘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국엔 공터에 있던 대부분의 형제가 내 뒤를 따라 걸었다.
저들은 기다렸던 것이다. 저들도 집결의 외침을 들었을 것이고 부락을 떠나 그곳에 가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로 부락을 떠나지 않고 공터에 모여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기다린 것이다. 강자의 이동을.
강자를 따라 함께 간다면 그 강자를 따라 전방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치열함을 느낄 수 없는 후방에 배치되고 싶은 형제는 없을 터.
그리고 기다리는 그들 앞에 내가 나타났다. 이 부락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인 내가. 요 이틀동안 벌인 결투로 인해 나에 대한 소문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족장인 우드록이나 그의 아들인 우드락은 부상이 심해 참여하지 않을 터. 그런 와중에 내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이 따를 수 있는 최고의 강자가 나타났다. 그러니 망설이지 않고 집결의 외침이 부르는 곳으로 가려던 형제 모두가 따라 나선 것이다.
고개를 돌려 날 따르는 형제들의 수를 확인하니 대략 3~400. 인간과의 전투로 부락 전사의 수가 상당히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남은 전사의 반 정도다.
여기만 이 정도다. 다른 부락에서 몰려오는 형제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수천, 어쩌면 만을 넘을지도.
과연 어떤 적과 싸울게 될까. 사실 누구든 상관없다. 강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크흐..”
기대된다.
***
저 멀리 거대한 규모의 부락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했다.
오로지 이동에만 집중했는데도 일주일을 움직였다. 생각보다 멀었다. 중간에 두 번이나 형제들과 사냥을 해야 했다. 전투를 하러 가는 거라면 굶어서 전투의지를 날카롭게 갈고 닦았겠지만 이번 이동의 목표는 합류기에 괜히 그런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쿠워어어어어억!”
내가 먼저 소리 질렀고,
그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오!
형제들이 따라 질렀다.
일종의 신고다. ‘우리가 왔다.’정도의 느낌으로 소리 지르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큰 함성으로 우린 강하다고 의사표현을 함으로서 전투에서 선두에 세워달라고 부탁하는 뜻이기도 하지.
부락 쪽에서도 답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수천의 형제들이 내는 함성은 전투를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나로 하여금 고양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구우우우우우우우우우!
“음?!”
엄청나다. 한 형제가 지르는 고함이 수천이 지르는 함성을 뚫어냈다. 고함에 담긴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엄청난 강자다. 고함만으로도 이미 우드록의 존재감을 뛰어넘었다.
“크흐..”
***
“환영한다. 형제. 난 캄스니다.”
“캄스니... 반갑다. 난 그락카르다.”
우드록보다도 머리 반개는 더 큰 덩치, 그 큰 덩치 전신에서 불처럼 피어오른 검붉은 색의 영혼, 그냥 서 있을 뿐인데도 그의 기운이 강하게 나를 압박해왔다. 우드록앞에서도 이런 느낌은 없었는데... 과연 집결의 외침을 지를만한 자다.
“강자의 합류를 환영한다. 대전사일 것 같은데 어느 부락에서 왔나.”
“우드록의 부락에서 왔다.”
“우드록. 강한 형제지. 그의 쌍도끼가 수천 명의 인간을 갈랐다고 들었다. 그도 왔으면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안 오려는 모양이군.”
“오고 싶어 했지만 최근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회복중이다.”
“그 우드록이 거동이 힘들 정도로 부상을 입어? 누군지 모르겠지만 상당한 강자였겠군. 카르.. 이번 전투가 끝나면 그 쪽으로 가 봐야겠군.”
웃으며 말하는 캄스니. 우드록의 팔을 잘랐던 그 인간 대장의 목숨이 얼마 안 남았군. 이런 괴물이 찾아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으니.
“엠그엔. 내 외침에 응해준 명예로운 전사 그락카르와 그를 따라온 명예로운 형제들에게 식사를 대접해줘라.”
“알았다. 족장.”
캄스니의 지시에 대답한 엠그엔 역시 보통 오크는 아니었다. 나보다 약간 큰 것 같은데.. 인간과의 전투에서 죽은 우드룩과 비슷한 덩치다. 엠그엔의 뒤를 따라 캄스니의 천막을 나갔다. 천막을 나섬과 동시에 엠그엔에게 질문을 했다.
“물어볼 것이 있다.”
“물어봐라.”
“캄스니는 대족장인 건가?”
궁금했다. 내가 살면서 본 그 누구보다도 크고 강해보였다. 거기에 대전사급 무력을 갖고 있는 내가 위축될 정도의 기세까지 뿌리고 있다. 아직 본 적은 없지만 내가 항상 상상해왔던 대족장의 모습과 같았다.
“곧 될 수 있을 테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이라...”
엠그엔이 걸으며 대답해줬다. 캄스니의 천막밖에 대기하고 있던 나와 함께 온 형제들이 나와 엠그엔을 따라왔다.
엠그엔의 대답을 듣고 주변에 시선을 줬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쳐져 있는 천막들. 그 천막 사이를 오가는 엄청난 수의 형제들. 이런 엄청난 규모인데도 만 명이 안 된다는 건가?
“수가 부족한 건가?”
“수가 부족하지는 않다.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형제들이 집결의 외침을 듣고 계속 모이고 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 정도면 1만의 형제가 이곳에 모이겠지.”
과연. 내 눈이 잘못되지는 않았군. 딱 봐도 1만에 근접한 수로 보였었다.
“그럼. 대족장이 되는 것 아닌가?”
“아니. 대족장은 1만을 휘하에 두는 것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만을 휘하에 두는 것은 대족장이 되기 위한 시험을 치룰 수 있는 조건일 뿐이다.”
“대족장이 되기 위한 시험?”
들어본 적 없다. 대족장이 되기 위한 시험이란 게 있었던가?
“그렇다. 인간을 제외한 이종족 1만의 죽음.”
“이종족 1만의 죽음?”
리자드맨이나 드워프, 혹은 본 적 없는 엘프 같은 것들을 말하는 건가?
“그리고 그것을 한 번의 전투로 이뤄야한다.”
“그렇군. 크흐..”
순간적으로 희열이 찾아왔다. 대족장이 되기 위한 조건이나 시험... 딱히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다. 내가 희열을 느끼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한 번의 전투로 이종족 1만을 죽여야 한다는 대목.
그 말은 1만이 넘는 이종족과의 전투가 곧 벌어진다는 뜻 아닌가. 인간과의 전투도 즐거웠지만 다른 이종족과의 전투는 더욱 즐거울 것이다. 그들은 나약한 인간과 달리 우리 오크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훌륭한 전사들이니까.
“상대는 정해졌나?”
“물론이다. 그러니 캄스니 족장이 집결의 외침을 지른 거지. 저쪽.”
엠그엔이 손가락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3일을 이동하면 드워프 부락이 있다. 그곳에 1만이 넘는 드워프가 있는 걸 확인했다.”
드워프... 드워프! 드워프라니. 그 드워프가 1만이 넘게 모여 있다고?
“저기가 식량 천막이다. 형제들과 가서 얼마든지 배를 채우도록. 식량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알았다.”
드워프.. 1년 전인가? 그들과 싸웠었다. 우리가 200명이었고 드워프가 150명이었는데도 살아남은 형제는 나를 포함해 20명이 채 안됐었다. 나도 드워프와 1:1로 싸우다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었지. 그만큼 그들은 강하다.
드워프와 싸운다니. 그것도 1만이 넘는 수와.
“크흐..”
밥맛이 정말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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