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드워프
“크흐. 맛있나?”
“카흐. 카흐. 정말 맛있다. 신선해서 핏물이 가득하고 육질이 부드럽다. 고맙다. 그락카르.”
“크흐. 크흐.”
기본 좋아졌다. 고맙다는 말을 듣다니. 수컷의 ‘고맙다’에 비하면 암컷의 ‘고맙다’는 무게가 좀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쉽게 하는 말은 아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짝짓기를 해주겠다.’라는 뜻이니까. 수컷이라면 누구나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사냥 나가 큰 뿔 누를 잡아온 보람이 있다.
까드득.
살이 많고 부드러운 뒷다리는 암컷에게 주고 난 앞다리를 씹어 먹었다.
암컷, 그러니까 이르크의 표정을 보면 이따 자는 시간이 꽤 즐겁겠다. 이르크는 정말 최고의 암컷이다. 지금 먹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입안 한 가득 고기를 넣고 씹을 때마다 핏물을 조금씩 흘리는 그 모습이... 크흐. 기다리기 힘들군. 하지만 참아야지. 난 대전사니까. 대전사는 참을 줄 아는 명예로운 전사다. 암컷이 식사할 때 방해하는 것은 불명예스런 일이다.
대신 참은 만큼 이따... 이르크를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요렇게 해야겠다.
“크흐. 크흐. 크흐흐.. 음?”
뭐지 이건? 큰 뿔 누 앞다리를 잡고 있는 손이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다. 이게 왜 빛나는 거지?
신기해서 가만히 보고 있으니 신선한 큰 뿔 누의 앞다리가 천천히 말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빳빳하게 서 있던 털이 힘을 잃고 구부러졌고, 밝은 빨간색에 촉촉했던 살덩이가 점점 탁한 붉은색의 푸석푸석한 살덩이로 변해갔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체력이 회복됐다.
체력의 변화는 미미했지만 진정한 전사는 항상 민감하게 자기 신체의 상태를 파악하기에 바로 알 수 있다.
알 수가 없군. 새로운 능력이라니. 전언이 없는 걸 보면 카록께서 주신 것도 아니고 저번에 얻었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이후로 두 번째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설마 진짜 나 스스로 깨우친 능력인건가? 내가 알지 못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른 이의 마음을 읽고 싶었고 체력을 빼앗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군. 정말.
“그게 뭐냐.”
“새로운 능력이다.”
“오오. 대전사 그락카르. 새로운 능력 얻었으니 더 강해졌다.”
아. 그런가? 강해진 건가?
그렇군. 강해진 거야. 강해졌으면 됐다. 강해졌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왜 갑자기 생겼는지 생각하지 말자. 내가 강해지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든 상관없으니까.
손발이 근질거렸다. 강해졌다는 생각이 드니 빨리 이 힘이 전투에서 어떤 도움이 되고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고 싶다. 강함을 측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전투가 대표적인데 지금 당장 전투를 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측정 방법은... 형제들과의 결투다.
마음이 급해졌다. 큰 뿔 누 앞다리를 집어던지고 일어나려...
‘강한 그락카르. 더 강해졌다. 그락카르와 격하게 짝짓기를 하고 싶다.’
다가 멈췄다. 이르크의 마음이 들려왔다. 이르크를 보니 두 눈이 빨갛게 빛나고 있다. 짝짓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는 것이다.
으음. 고민이... 지금 당장 가서 형제들과 싸우며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고 싶은데.. 잠깐이지만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깊은 고민이었지만 결정을 내리는 속도는 빨랐다.
그래. 형제들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니까. 암컷이 먼저다.
난 이르크에게 달려들었다.
***
“쿠워어어어어어어어억!”
공터 주변에 있던 형제들의 시선이 고함을 친 내게 집중되었다.
“난 대전사 그락카르! 형제들과 주먹을 겨루고 싶다! 누가 나서겠는가!”
주먹을 겨룬다함은 무기를 쓰지 않는 결투를 말한다. 우리 오크들의 놀이 방법 중 하나다. 예전에 무기를 겨루다가 죽는 형제들이 너무 많이 생겨 만든 놀이라고 한다. 주먹을 겨루면 마음껏 격렬한 결투를 할 수 있는데다가 팔다리가 부러지고 송곳니가 부러지는 일은 있어도 죽는 일은 거의 없다.
나다! 형제!
내가 나서겠다! 형제여!
아니다! 나다! 내가 그락카르와 싸우겠다!
“크흐..”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내 형제들이다. 이번 전투에서 더 큰 나는 우드락보다도 더 커졌다. 그리고 공터 주변의 형제는 대부분 내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키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덩치차이만큼 힘도 압도적으로 차이 날 터. 그럼에도 서로 나서서 나와 싸우려고 난리다.
이러다간 나와 싸우겠다고 서로 싸우겠군.
“크흐. 그렇게 놔둘 순 없지.”
서로 싸우다가 다치면 나와 싸울 형제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 아닌가.
“쿠워어어어어어억!”
다시 한 번 더 고함을 터뜨려 소란스러워진 형제들의 이목을 내게 집중시켰다. 그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치며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모두 덤벼라! 형제들이여! 나 대전사 그락카르가 형제들 모두를 상대해주겠다!”
구오오오오오!
우워어어어억!
그아아아아아!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십의 형제들이 망설이지 않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즐겁게 웃으며 나도 싸울 준비를 했다.
“크흐. 크흐. 쿠워억!”
퍽.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형제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형제가 피를 뿌리며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튕겨나갔다. 송곳니가 부러진 것 같군. 저 형제 얼굴이 더 박력 있어지겠군. 암컷들에게 인기 있겠어.
퍼버버버버버벅.
“크흐으.”
한 명의 형제를 날려 보내는 사이 도착한 형제들의 주먹에 온몸을 두들겨 맞았다. 아프다. 덩치가 커지며 내구력도 크게 올라갔는데도 아프다. 과연 내 형제들답다. 이정도 주먹은 갖고 있어야 내 형제지.
“쿠워어!”
사방팔방으로 주먹과 발을 뻗었다. 맞추려고 노력할 필요 없었다. 사방에 형제가 있었으니까. 대충 휘둘러도 다 맞았다. 그리고 내가 때리는 것의 몇 배를 맞았다.
형제를 날려 보내고 맞고 맞고 맞고 맞고 때리고 맞고 맞고 맞고 맞고 맞고 맞고...
“그래! 좋은 주먹이다! 형제들이여! 크흐흐흐흐하. 크훅.”
웃다가 배에 한 방 먹었다. 내 어깨에 올 정도로 큰 형제가 온몸을 던져 내 배에 박은 것이다. 그걸 보고 형제들이 좋은 공격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 저마다 몸을 던져 공격해왔다. 나한테 잘못 걸린 형제는 몸을 던진 만큼 큰 상처를 입고 날아갔지만 수가 수인 만큼 대부분의 공격이 내게 적중했다.
누군가 내 무릎 뒤를 쳤고 무릎이 꺾였다. 그리고 수십의 형제가 덮쳐왔다. 수십의 형제에게 완전히 깔려버렸다. 크흐. 형제들 무게가 보통이 아니군, 무겁다. 무겁기만 한 것도 상당한 공격으로 올 수도 있군.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다.
“크흐. 크흐. 크흐흐.”
즐겁다! 때려서 즐겁고, 맞아서 즐겁고, 아파서 즐겁다. 생동감이 느껴졌다. 마치 작은 전투를 치루는 듯한 느낌이다. 이 즐거운 것을 왜 하지 않았을까.
온몸에 새로운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인간 강자 테론을 죽이라 카록께서 주신 힘이다. 그분께서 주신 스킬 ‘불가사의한 힘’. 며칠 동안 사냥을 다니며 확인했다. 이 스킬은 내 기분 상태에 따라 힘을 더해준다. 즐거움 너무도 크기 때문인지 테론을 죽였을 때 못지않은 힘이 솟아났다.
그래. 이 즐거운 놀이를 여기서 끝낼 순 없지. 형제들이여. 내가 힘을 좀 더 내겠다. 더 즐겁게 놀자.
힘을 가득 줬다가 한 방에 발산했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억!”
내 위를 덮고 있던 형제들이 튕겨져 날아갔다.
가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오!
나와 형제들의 싸움 덕에 불이 붙었는지 구경하던 수십의 형제들도 난장판이 된 공터 중앙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크흐.”
좋다. 형제들이여. 즐겨보자.
“쿠워어어어어어!”
***
“아. 맞다. 새로운 능력.”
신나게 놀고 천막에 돌아와 다시 이르크와 격하게 짝짓기를 한 후 쉬는 중 갑자기 생각났다. 분명 난 새로운 능력을 시험하려고 공터에 간 거였다. 그런데 너무 신나서 싸우다보니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걸 깜빡했다.
“무슨 문제 있나?”
옆에 누워있던 이르크가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문제없다.”
없지. 전혀 없다. 크흐.
***
한 낮. 난 다시 공터에 섰다. 몸 곳곳에는 시커먼 멍이 들어 있었다. 몸이 제법 쑤시고 움직일 때마다 아프다. 어제 형제들에게 맞은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지.
“형제들이여! 나 대전사 그락카르다! 오늘도 즐겁게 주먹을 겨뤄보자!”
구오오오오오오!
우워어어어어억!
그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오!
공터엔 어제보다 형제들이 많았다. 소문을 듣고 모여 있었겠지. 어제보다 많은 수의 형제들이 날 향해 달려왔다.
“크흐..”
오늘도 즐겁겠구나. 오늘은 능력 쓰는 걸 잊지 말아야지. 곧 양 주먹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
“상당히 괜찮은 능력이군.”
손에 머물러 있는 보라색 빛을 보며 말했다. 이게 꽤 괜찮았다. 큰 뿔 누의 앞다리에 사용했을 땐 속도도 느렸고 체력이 회복되는 양도 적었는데 형제들을 주먹으로 때릴 땐 의외로 꽤 체력이 회복됐고 멍들고 부은 상처가 조금씩 나아진 걸 보면 미미하지만 치유효과도 있었다. 그렇게 효율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잡고만 있을 때에 비해 훨씬 나았다.
이 정도면 전투 지속력이 훨씬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만큼 형제들의 체력을 빼앗았겠지. 그게 중요한 거다. 앞으로 나와 상대하는 이의 체력도 빼앗아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능력을 얻은 것은 확실한 듯하다. 만족스럽다.
“형제.”
이르크와 내가 머무는 천막에 누군가 찾아왔다. 우드락이었다. 우드락은 저번 전투 이후로 더욱 남자다워졌다. 죽음 가까이 가게 할 정도의 치명적인 상처가 몇 개 더 늘어난 것이다. 나도 꽤 많은 상처를 얻긴 했지만 우드락과 같은 엄청난 상처가 없어서 그가 부러웠다.
“왜 왔나. 형제.”
“오늘도 공터에 가서 주먹을 겨룰 건가?”
“그럴 생각이다.”
그 즐거운 걸 어찌 안할 수 있을까. 보라색 빛 덕분에 체력도 회복되어 쌩쌩하다.
“당분간 참아다오.”
“왜 그러지?”
“자네가 벌인 이틀간의 축제로 형제 넷이 죽었다.”
그렇게 많이 죽었나?
“그런데 그걸 왜 말하지?”
결투를 하다보면 죽음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얼마 전 인간과 벌인 전투로 부락에 형제들이 많이 줄었다. 당분간은 형제들을 늘려야 할 때다. 더 줄이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
“....”
정말 이상한 오크군 우드락은. 보통 나나 다른 형제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한다. 그저 싸워서 이길 수 있으면 좋은 거고 져도 카록께 갈 수 있으니 좋은 건데 말이야.
다른 형제가 이런 말을 했다면 주먹을 날려주고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했겠지만 우드락은 내가 인정한 명예로운 전사다.
“알았다.”
“케흐.”
내가 알겠다고 하자 기분 좋은지 우드락이 웃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그 정도는 상관없다. 형제.”
아쉽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참는 수밖에 없겠..
-구와와와와와!
음?! 머릿속에 직접 전달되어 오는 이 강렬한 고함은... 우드락을 봤다. 그 또한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락카르. 자네도 들었군,”
“그렇다. 형제.”
“집결의 외침...”
분명 집결의 외침이었다. 족장 중에서도 관련 능력을 깨우친 강자만이 쓸 수 있는 능력으로 큰 전투를 앞두고 주변의 형제들을 부르는 외침이다.
“크흐...”
기분 좋게 웃었다.
전투. 전투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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