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비텔
구워어어어어어억!
“쿠워어어어어어억!”
부락이 가까워지자 형제들이 함성을 질렀고 나 또한 따라 질렀다. 우리가 승리했고 귀환했음을 알리는 함성이다.
우워어어어어어억!
우릴 환영하는 부락에 남은 모든 오크들의 환영 인사가 들려왔다. 남은 수컷보다는 암컷의 수가 많다보니 암컷의 함성소리가 두드러졌다. 그걸 들은 형제들이 벌써부터 몸을 들썩였다. 빨리 돌아가 암컷을 안고 싶은 거다. 한동안은 어떤 형제도 암컷에게 거절당하지 않겠지. 전투에 나가 적의 피를 잔뜩 묻히고 돌아온 수컷을 거부하는 암컷이 있을 리 없다.
부락 입구에 도착했다. 우리는 입구 바로 앞에 도착했음에도 부락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일을 먼저 했다. 바로 끌고 온 인간을 놓아주는 것.
인간은 전리품을 운반하는데 이용했다. 우리 오크가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짊어질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다. 만약 이번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을 전부 우리 오크만으로 가져오려 했다만 반의반도 가져오지 못했겠지.
인간은 나약하고 비열하긴 하지만 도구를 다루는 실력은 제법이다. 그들은 수레와 나귀를 이용해 많은 양의 물건을 옮길 줄 안다. 우린 승리 후 주변의 인간마을을 마음껏 약탈했고 적당한 수를 살려 전리품 옮기는 것을 돕게 했다.
저 인간들은 살려줄 것이다. 우리가 전사로서 살려준다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인간들의 세상에 돌아가는 것까지 책임져주진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놓아줄 것이고 쫓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살아서 돌아가느냐 마느냐는 이제 그들에게 달렸지.
다른 형제들이 인간을 풀어주는 사이 난 바로 부락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래도 된다. 전쟁에서 용맹했으니까. 형제들도 불만 없을 것이다. 먼저 가서 가장 좋은 암컷을 품어야겠다. 난 그럴 자격이 있다.
“케흐흐. 그락카르.”
익숙한 목소리가 불러 보니 우드록이다. 우드록은 왼팔이 사라져있었고 깊은 상처를 여러 개 입은 상태였지만 느껴지는 위압감은 여전했다. 느껴진다. 그의 강함이. 팔을 하나 잃었으니 조금은 약해졌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왜 부르나.”
“어디 가는 거냐. 형제.”
“암컷에게 간다. 내 힘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암컷을 찾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힘이 세지니 안 좋은 것은 아무 암컷이나 안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약한 암컷은 내가 안으면 뼈가 부러질 거다.
“잘됐군. 따라와라.”
“바쁘다.”
빨리 가서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암컷을 찾아야 한다. 그런 암컷은 인기가 많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암컷을 안지 못할 수도 있다.
“너에게 좋은 일이다. 약속한다. 형제.”
“... 알았다.”
암컷을 찾아가는 일이 급하긴 하지만 우드록이 약속이라는 말을 한 이상 그의 명예를 더럽힐 것이 아니라면 그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 우드록처럼 위대한 전사의 명예를 더럽힐 순 없지.
우드록의 용건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군. 다른 형제들이 좋은 암컷을 차지하기 전에 말이다.
***
“우드룩의 암컷이다. 마음에 드나?”
“.... 좋은 암컷이다.”
내 가슴에 달할 정도로 큰 키, 강렬한 허벅지 근육과 튼실한 가슴, 날카로운 송곳니, 새끼를 잘 낳을 거 같은 넓은 골반. 저 정도 몸이면 평범한 수컷과 싸워도 밀리지 않을 것 같다. 이제껏 봐온 어떤 암컷보다도 완벽한 암컷이다.
“우드룩의 암컷이다. 이젠 네 암컷이다.”
“그래도 되나?”
“죽은 대전사의 암컷을 새로운 대전사가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암컷이 거부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 그리고 어느 암컷이 형제를 거부할까. 맞지?”
우드록이 물었고 암컷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컷이 날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난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렸다.
“대전사...”
내가 대전사라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락카르. 우리 부락의 새로운 대전사여.”
“.... 알았다. 나도 잘 부탁한다. 족장.”
대전사. 내가 대전사라니... 잠깐 정신이 나간 것 같다.
퍽.
“음?”
대전사라는 말에 취해있는데 누군가 날 쳤다. 암컷이었다.
“내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다니. 나 말고 다른 암컷을 떠올리는 거냐?”
“아니. 아니다. 그럴 리 없지. 최고의 암컷을 두고 다른 암컷을 떠올린다니.”
“카흐. 카흐. 카흐.”
암컷이 기분 좋은지 웃었다. 그래. 이런 암컷을 눈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대전사는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중요한 것은 최고의 암컷을 품는 거니까. 암컷을 향해 달려들었다.
***
“오랜만이다. 형제.”
“오. 이번 전쟁에 나갔다고 들었는데 살아있었군. 대족장이 될 형제.”
“당연하다.”
“덩치도 더 커진 것 같군. 대족장이 되기 위한 길을 착실히 걷고 있구나.”
내게 양손도끼를 준 장인형제를 찾아왔다. 내가 커진 것을 한 눈에 알아보다니. 역시 장인답게 눈썰미가 좋다.
“도끼는 어떻던가.”
“최고다.”
“당연하지. 내가 만들었는데. 오늘은 왜 왔지? 이번에 얻은 전리품을 재료로 방어구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하러 왔나?”
고개를 저었다. 방어구는 필요 없다. 이번에 깨달았다. 진정한 오크 전사는 적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싸워야 한다. 적의 공격을 많이 받아낼수록 내 피부는 강해질 거다. 그 증거로 우드록도 방어구를 입지 않는다.
난 장인형제 앞에 도끼 두 개를 던졌다.
“이건... 우드룩의 도끼 아닌가.”
“맞다.”
역시 장인이다. 다 똑같이 생긴 도끼인데 어떻게 알아보는지 모르겠다.
“그렇군. 우드룩은 카록의 곁으로 간 거군.”
“맞다. 용맹한 싸움 끝에 카록의 곁에 갔으니 상당히 가까운 곳으로 갔을 거다.”
“우드룩이라면 그랬겠지. 그는 우리 부락 최고의 대전사였으니까.”
우드록의 아들인 우드룩. 그는 이번 전투에서 카록의 곁으로 갔다. 11명의 인간과 싸워 7명을 죽였지만 남은 넷을 죽이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 훌륭한 죽음이었다. 강자와 치열하게 싸움 중 죽었으니 카록께서도 좋아했을 것이다.
모든 전투가 끝난 후 우드록은 우드룩의 시체 앞에서 좋은 죽음이었다며 크게 웃었다. 그리곤 우드룩의 무기를 내게 던져줬다.
난 거절했다. 당연하다. 난 쌍도끼를 다룬 적 없으니까. 하지만 ‘형제. 형제도 죽으면 강자가 형제의 무기를 써주길 원하지 않겠는가.’라는 우드록의 말에 그 무기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카록의 곁에 간다면 남은 내 무기는 우드록과 같은 강자가 써주길 바랄 테니까.
“이제 내 무기다. 우드록이나 우드락처럼 허벅지 양쪽에 걸고 다닐 수 있는 걸이를 만들어다오.”
“알겠다. 내일 와라.”
“알았다.”
장인의 천막을 나와 식량 천막에 들러 먹을 것 한 움큼 들고 이번에 받은 천막으로 향했다. 최고의 암컷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
“... 그러니까 신의 힘을 빌리는 사제시고 절 고쳐주시겠다고요?”
유나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런 사람들 많이 봤고 많이 찾아왔다. 나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의도라는 건 안다. 하지만 언제나 찾아와서 하느님이 고쳐줄 거라며 소용없는 기도를 하고 헛된 희망만 심어주고 떠난 후 다시는 오지 않았다. 뒤에 남은 자신은 그 혹시 모를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결국 절망해버리는데도 말이다.
“어떻게 고쳐주실 거예요? 사제시니까 기도를 해서 고쳐주시는 건가요? 전혀 소용없는 기도를요.”
당연히 유나는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보통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면 대부분 ‘힘들어서 그러는 구나. 그럴수록 더욱 믿고 기도를 해야 해.’라고 말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비슷했다.
“아니. 기도는 하지 않아. 내가 모시는 신은 기도를 원하지 않으시거든. 행동하는 걸 좋아하시지.”
“행동이요?”
지금까지 만났던 종교인과 다른 대답에 유나는 약간이지만 당황했다. 원래는 ‘더욱 믿고 기도해서 며칠 뒤에 다리를 잘라내는 수술을 해야 해요.’라고 말할 예정이었다. 보통 그렇게 하면 상대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예상과 다른 대답에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 난 신께 능력을 받았고 너를 고치란 계시도 받았단다. 그 증거로 곧 신께 받은 힘을 네게 보여줄 거야. 치료를 받을 건지는 그 후에 결정하면 돼. 하지만 그 전에 네가 한 가지 약속을 해줘야 한단다.”
“무슨 약속이요?”
“나에 대한 모든 것. 누가 널 고쳐줬는지, 어떻게 고쳤는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해주면 돼. 너희 어머니에게도 말하면 안 돼.”
남자의 표정과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눈앞의 남자는 진짜 자신을 신의 사제이며 초능력을 갖고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미친놈일 것이다. 원래의 유나라면 여기까지만 듣고 병실로 돌아가 엄마에게 휴게실에 미친 남자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나는 왠지 남자를 믿고 싶었다. 며칠간 그에게서 느꼈던 편안함, 그로인해 형성된 친밀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말이 진실이고 이 편안함을 느끼는 시간이 앞으로도 이어지길 원했다. 그래서 유나는 평소보다 더 인내심을 갖기로 했다. 엄마에게 말하기 전에 남자가 하는 말과 행동을 전부 듣고 보기로 한 것이다.
‘다 듣고 본 후에 엄마에게 일러도 늦지 않아.’
“알았어요. 대신 아저씨가 정말 신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요. 그런 힘이 없으면 바로 엄마한테 달려가서 이를 거예요.”
“그래. 알았다.”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 없이 맑은,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유나는 저런 웃음을 지을 줄 아는 남자가 미친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병원에서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남자와의 시간이 영원히 사라지게 될 테니까.
‘지금이라도 장난이었다고 말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용서해줄 수 있었다. 그러면 안식처를 지킬 수 있다. 하지만 남자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는 아까부터 옆자리에 두고 있던 화분을 들고 유나 앞으로 왔다. 화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녹색 식물이 심어져 있었다.
“잘 보렴.”
그가 손을 들었다. ‘무슨 마술이라도 하려는 걸까?’라고 유나가 생각하는 순간. 남자의 손이 보라색 빛으로 물들었다.
“어?!”
“쉿.”
유나가 놀라자 남자는 미소 지으며 빛나지 않는 손의 검지를 입에 가져가 댔다. 유나가 급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면서 보라색으로 빛나는 손을 열심히 살폈다.
혹시 손전등 같은 걸 숨겨 놓은 걸까? 아니면 발광물질이라도 발랐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보라색 빛이 손을 너무 자유자재로 돌아다녔다. 어떤 신기한 장치를 가져와도 저런 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손이 화분의 식물을 향해 움직였다. 유나의 두 눈은 그 손에 고정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하지만 빛이 식물에 닿았음에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나가 남자를 바라봤지만 남자는 여전히 웃으며 다른 손으로 식물을 가리켰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유나는 기다렸다. 그리고...
“읍!”
유나가 놀랐다. 크게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남자가 ‘쉿.’하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 겨우 입을 막았다. 그녀의 크게 뜬 두 눈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유나의 시선 끝. 그곳엔 화분에 담긴 식물이 있었고 그 식물은 조금씩 색이 바래지며 시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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