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비텔
빠각.
손으로 움켜쥐자 사과가 박살났다. 딱히 힘을 준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사과가 박살나다니. 나 정말 힘이 세긴 하네. 그런데 더 강해진 건지는 모르겠다. 그 ‘불가사의한 힘’이란 스킬이 내게도 적용된 건지 알고 싶어서 사과를 잡고 힘을 준건데. 적용됐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 그락카르가 얻었던 ‘카록의 눈’이나 내가 얻었던 ‘비텔의 귀’는 바로바로 서로에게 적용됐었으니까 이번에도 비슷할 거라 생각하지만 이번에 받은 임시스킬 ‘착취하는 손’, ‘내면을 보는 눈’이 그락카르에게 적용 안 된 것을 보면 혹시나...하는 마음이 든다.
‘임시’란 표가 달려 있어서 적용 안 된 걸 수도 있긴 한데... 그 외에도 많은 변수가 있어서 확신할 수가 없다.
‘불가사의한 힘’이 나한테 적용됐는지 아닌지만 확실히 알 수 있으면 어떤 기준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확실히 알 것 같은데 말이야.
다른 걸로 확인해볼까?
부순 사과를 주워 먹으며 생각해봤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락카르의 힘이 나한테 얼마나 전해졌는지도 확인 못했다. 내가 원래 가졌던 힘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강해졌는지 그대론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뭐 앞으로도 스킬은 얻겠지. 그때가 되면 확실히 알게 될 테니 조급해하지 말자.
그나저나 임시스킬이라니. 딱히 뭘 한 것도 없는데 줬다. 저번에 ‘비텔의 귀’를 받았을 때는 나도 허접하기는 하지만 목숨 걸고 싸웠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번엔 딱히 그런 일이 없었다. 스킬을 받을 때 있었던 일을 상기해보면...
역시 그거겠지.
아이를 보며 안타까워했던 거. 그거 외엔 딱히 사건이라 부를만한 게 없었다.
이미 두 스킬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확인했다. 난 업무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에 게임을 하는 하드 게이머. 스킬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대충 어떤 스킬인지 예상하는 비범한,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지.
‘착취하는 손’. 이름을 보자마자 생각나는 게 있어 병원 밖으로 나가 구석에 있는 화단으로 갔다. 어두운 밤이었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스킬을 발동시켰다.
손이 약한 보라색 빛을 발했다. 그대로 화단의 풀을 잡았다. 바로 변화가 일어나진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풀이 말라갔다. 5분정도 잡고 있으니 녹색의 파릇파릇하던 풀이 갈색으로 변했고 완전히 말라버렸다.
생각한대로 ‘착취하는 손’은 생기를 빨아들이는 스킬이었다. 빨아들인 생기가 내게 더해지는지, 아니면 그냥 사라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병원에만 있었더니 이미 몸이 쌩쌩해서 말이야. 생기가 더해졌다고 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
두 번째 스킬인 ‘내면을 보는 눈’은 처음엔 투시능력 같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내면’을 보는 스킬이었다. 물체를 투과해 그 너머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의 내부를 보여주는 스킬.
그 스킬을 사용해 내 손을 보니 손의 내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의 내면이나 다른 물체의 내면이나 모두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론 뭔가를 구분하는 것이 힘들다. 내가 처음 스킬을 사용했을 때도 비슷했다. 손의 근육, 핏줄, 뼈, 살, 뼈의 내부. 그 모든 것들이 혼합되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했다. 어지러웠지만 적응될 때까지 사용했고 곧 스킬의 사용법을 익힐 수 있었다.
무작정 보는 것이 아니라. 지정을 하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범위를 지정할 수도 있고 종류를 지정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핏줄을 생각하면 핏줄을 중심으로 한 내면이 보였고 손바닥 중간을 떠올리면 그곳을 중심으로 주변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의아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왜 이런 스킬을 준 거야? 아이를 안타까워하던 상황이랑 ‘착취하는 손’, ‘내면을 보는 눈’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사람들의 욕망, 욕구어린 마음만 듣는 스킬을 주는 걸 보면 악한 신일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혹시 아이를 해치라고 준 걸까?
고민된다. 정말 악한신이고 아이를 해치라고 준 스킬이면 난 어떡해야하지? 해치는 게 아닌 다른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아. 잠깐. 내면을 보는 스킬과 생기를 뺏는 스킬. 두 개를 합치면 암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암이 다리 전체에 퍼져있다곤 하지만 ‘내면을 보는 눈’의 영역을 암세포로 한정한다면 모든 암세포를 찾아낼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것들을 ‘착취하는 손’으로 생기를 빼앗아 없앤다면...
가능성 있다. 역시 이 두 개의 스킬은 아이를 고치고 싶어 하는 날보고 고치라고 내려준 걸까? 맞으면 그냥 치유의 힘 같은 거나 주지 왜 복잡하게 이 두 개를 준거지?
“흠...”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았는데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문제는 ‘착취하는 손’이다. 암세포는 여자아이의 몸 속에 있다. 당연히 그곳까지 손을 넣을 수 없다. 대충 암세포가 있는 곳 근처에 스킬을 사용한다면 더 문제다. 암세포가 죽을 정도로 스킬을 사용하면 그 외의 피부, 살, 핏줄, 근육 등 모든 게 죽어버릴 테니까.
‘착취하는 손’을 사용했다. 손이 보라색 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들은 내 의지에 따라 손가락 끝으로 가기도 하고 손바닥 중앙에 모이기도 했다.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아이의 암을 고쳐주는 데는 별 쓸모가 없다. 결국 빛은 내 손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공간을 격하고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면 별 고민 안 할 텐데 말이야. 떨어진 곳에서 암세포에만 스킬을 쓸 수 있는 정확도만 올리면 될 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고치라고 이 스킬들을 준 거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말이다.
***
“이거야.”
방법을 찾아낸 거 같다.
젓가락을 뚫어져라 봤다. 젓가락은 연한 보라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냥 궁금했다. 무생물인 젓가락에 스킬을 쓰면 어떻게 될지 말이다. 그런데 보라색 빛은 손에서 젓가락으로 건너갔다. 그 젓가락을 화분의 식물에 가져다대니 분명 조금씩 생기를 잃어갔다. 완전히 죽기 전에 젓가락을 뗐다.
이거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준비물이 필요하니 이따 병원 밖을 다녀와야겠네.
***
“아오. 시바... 큰 뿔 누 좋아한다며. 그거나 좀 잡아먹어 이 자식아.”
오늘도 아침은 그락카르 욕과 함께 시작되었다. 빌어먹을 오크 놈들 같으니. 전쟁이기더니 아주 살판이 났다. 보이는 인간마을 모두를 침공해서 약탈하고 식인하고 난리였다. 그 난리통의 중심에 그락카르 놈이 있는 건 당연했고 말이다. 그 놈이 그런 데서 빠질 리 없지.
또 인간을 씹어 먹는 걸 경험해야 했다. 이건 정말... 도저히 익숙해질 만한 종류가 아니다. 화장실에 들어가 언제나 그렇듯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분노의 양치질을 했다. 그래도 하고나면 기분이 좀 가라앉는다.
좀 기다리니 아침밥이 들어왔다. 병원에 있어서 좋은 점은 매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을 수 있다는 거다. 차려주고 배달해주고 치워주기까지 하니까. 내 돈 내고 입원해 있는 게 아니라면 정말 좋지. 여기에 개인 컴퓨터까지 있으면 천국일 텐데 말이야.
“후... 아자! 아자! 아자!”
세수를 하다말고 거울을 보며 소리 질렀다. 각오를 다지기 위함이다.
드디어 오늘이다.
3일간 준비하고 스킬 사용을 연습했다. 내 몸을 이용해 연습도 했다. 덕분에 몸속에 있던 작은 종양을 전부 제거해서 건강해진 느낌이다. 놔둬도 상관없을 정도로 작디작은 놈들이었지만 제거하면 좋은 거니까. 더 연습하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다. 며칠 뒤에 다리 절단 수술을 할 예정이라서 말이지.
고민 많이 했다. 정말 고쳐줘야 할까...라는 내용으로 말이다.
이 세상에 없는 힘이다. 믿지도 않을 거고 믿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퍼지면 내 신변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 나를 잡아가 가둬놓고 스킬을 쓰게 한다던가, 국가기관에 잡혀가 실험 당한다던가.
단순한 음모론일수도 있지만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세상이다.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없지 않은가.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결국 능력을 얻었음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켜볼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결정했다.
-능력에 대해 밝히는 것은 당사자인 여자아이 한 명으로 국한한다.
-담백한 설명과 간단한 시범도 보여주며 아이를 설득하되 여자아이가 거절한다면 미련 없이 그만둔다.
난 아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고 그걸 시도하기 위해 설득도 할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고치겠다는 마음은 없다. 다리를 잃을 아이가 불쌍하긴 하지만 아이가 거절하는데 억지로 고치려 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억지로 하려다간 탈이 나는 법이다.
아이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암병동 휴게실로 갔다. 아이는 가끔 밖으로 나와 휴게실에 있는 컴퓨터를 사용한다. 게임이 안 되기에 난 쓰지 않지만 말이야. 여하튼 그때 아이의 어머니는 대부분 병실에서 TV를 보신다. 휴게실은 사람이 잘 오지 않기에 아이와 나 단 둘이 될 것이다.
그때 아이를 설득할 생각이다. 그리고 거절한다면 다시는 암병동으로 발을 들이지 않을 거다.
***
‘오늘은 있네.’
휴게실로 들어선 유나는 오늘은 그 아저씨가 휴게실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거의 하루 종일 휴게실에서 책을 보는 20대 중후반의 아저씨. 며칠 전 스마트폰 충전하는 걸 깜빡 잊어 대신 컴퓨터를 하러 잠깐 휴게실에 왔다가 보게 됐다.
그 뒤로 계속 휴게실에서 책을 읽었었는데 어제는 어디 갔었는지 보이지 않았었다.
‘다행이다.’
유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뭔가 신기한 느낌을 풍기는 아저씨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평범한 사람과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같이 휴게실에 있으면 서로 아무 말도 안함에도 편안함을 느꼈다.
이 지옥 같은 병원과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느낄 수 있는 편안함. 유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있음에도 엄마를 졸라 용돈을 받아 컴퓨터를 하러 나왔다.
유나는 500원 짜리 동전 4개를 집어넣어 컴퓨터를 켰다. 이거면 40분을 함께 있을 수 있다.
유나는 컴퓨터를 하는 중에도 온 신경은 책을 읽는 아저씨에게 가 있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 움찔했다.
‘안 돼. 가지마요.’
그가 가면 이 편안함은 사라진다. 다행이도 그는 자판기로 향했고 유나는 안도했다. 그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두 개 뽑았다.
‘두 개를 먹으려는 건가?’
유나는 그가 ‘음료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유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음료수 하나를 옆에 내려놓으며 “안녕.”이라고 인사해왔다.
유나는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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