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격돌
치열하다.
카록께선 정말 위대하시다. 힘을 얻은 후 인간을 상대론 이런 치열함을 느끼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이런 강적을 만나게 해주시다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더욱더 강렬한 전투를 카록께....
내 모든 힘을 다해 싸우고 있음에도 11명의 인간은 내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축복을 받고 대전사급의 힘을 갖게 된 후로 인간에게 도끼가 막힐 거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이들은 2명, 3명이 뭉쳐 내 양손도끼를 막아냈다.
물론 그들이 손쉽게 막아내는 것은 아니었다. 내 양손도끼는 우드록에게 바칠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최고의 무기. 그런 무기에 내 힘이 합쳐졌다. 그런 것을 나약한 인간이 아무리 두셋 뭉쳐서 막았어도 피해 없이 막는 것은 불가능하지.
전신갑옷을 입고 있기에 겉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쇳덩어리 안쪽에 있는 인간의 육신은 내 공격을 막을 때마다 망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투는 내가 불리했다.. 나 또한 공격을 할 때마다 이어지는 인간들의 반격에 상처를 입고 있으니까. 이미 내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99%가 내 피다.
나와 인간들의 싸움을 보는 제 3자가 있다면 인간들의 절대적인 우세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나와 싸우는 인간들의 표정을 봐라. 하나같이 얼굴을 찡그린 채 긴장하고 있다. 반은 얼굴에 고통이 드러나 있다. 그에 반해 나는?
“크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환하게 웃고 있는 표정이겠지. 그래서 인간이 나약한 것이다. 전투를 즐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니 안 그래도 나약한 육체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지.
오크는, 나는 다르다. 전투 중에는 고통도 즐거움, 탈력도 즐거움, 부상도 즐거움. 모든 것을 즐겁게 느끼며 오로지 전투만을 생각한다.
그런 마음가짐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불리했을 상황을 어느 정도 평형에 가깝게 맞춰주고 있다.
“크흐아!”
다시 내가 휘두른 양손도끼를 막은 인간 셋이 땅을 나뒹굴었다. 이어서 공격하려 했지만 역시나 다른 인간 몇이 그 앞을 막았고 나머지 인간들이 날 공격해왔다.
인간의 양손검 두 개가 팔과 다리를 베며 지나갔고 몸에 새로운 훈장이 새겨졌다. 카록께 축복받기 전의 육체라면 치명상을 입었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지만 지금의 내 육체는 이정도 공격에 깊은 상처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위험해. 이대로는 패배할 것이다.
전투가 평형에 가깝다고 판단하긴 했으나 인간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평형이다. 기울기는 점점 커질 것이고 종국엔 인간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버릴 것이다. 11명의 인간 중 반 이상을 죽음의 길 동행으로 삼을 자신이 있지만 결국 내가 죽는 것은 확실 할 것이다.
죽는 것이 무섭지는 않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전투 중 죽어 카록께 가는 것은 영광이다. 다만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카록께 바치는 것이 더욱 큰 영광이기에 살고 싶고 이기고 싶은 것이다.
죽어도 되는 것은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 후다. 최선을 다한다함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크워!”
도끼로 땅을 강하게 올려쳤다. 인간들에게 흙과 풀이 섞여 날아갔다. 저마다 검을 들어 투구를 가렸다. 경험 많은 인간들이다. 흙과 풀은 투구사이로 들어가 눈을 가리지 않는 이상 데미지 0이다.
“패턴이 변했어! 2단계다! 다들 변칙 공격에 대비하도록!”
가장 강한 인간이 소리쳤고 그에 따라 인간들이 간격을 좁혀 방어를 굳건히 했다. 패턴이니 2단계니 뭘 말하는 지 잘 모르겠지만 변칙 공격에 대비하라는 걸 보면 우리 오크의 습성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는 자들이다.
오크는 우선 정면공격 일변도로 싸운다. 그러다가 질 것 같으면 여러 가지 기교를 섞어 싸운다. 그것은 일종의 죽음에 대비다. 카록께 가서 모든 힘을 다해 싸웠노라 당당하게 말하기 위한 준비 말이다.
“크흐.”
방어를 굳건히 하는 인간들을 보니 죽음이 더욱 가까이 왔음이 느껴졌다.
오크가 기교를 쓴다 함은 지쳤다는 말도 된다. 지쳐서 곧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기 전에 발악하는 것이다. 발악은 받아주지 않으면 발악하는 자가 먼저 지쳐 쓰러지는 법이다. 위대한 전사인 오크는 전사의 마지막 발악을 당연히 정면으로 받아주지만 나약한 인간은 나약한 인간답게 회피하는구나.
기교는 상대가 받아줄 때 먹히는 법이다. 상대가 굳히고 피한다면 기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크흐.”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이 느껴질수록 온몸을 간질이는 쾌락이 느껴졌다.
기교는 버린다. 다시 정면으로 가자.
“다시 1단계! 혹시 모르니 적절한 간격을 유지한다!”
인간들이 내가 다시 정면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간격을 다시 벌렸다. 정말 능숙하고 강한 인간들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어!”
카록께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모든 것을 다해 저들에게 부딪히는 것.
***
“크흐... 크흐...”
크흐흐흐흐. 익숙한 장면이군. 얼마 전 카록께 축복을 받았던 그 때의 상황과 비슷해. 다른 점은 그때는 적을 전부 죽인 후였다는 거고 지금은 여섯의 인간에 의해 목숨이 끊기기 직전이란 거지.
상처도 그때만큼 심하지는 않다. 그때는 무조건 죽을 상처였지만 지금의 내 상태는 이대로 전투가 끝난다면 당분간 고생하겠지만 분명 살아남을 수 있는 상처다. 하지만 날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는 저 인간들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 않겠지.
형제들의 구원을 바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처음엔 우리가 유리했다. 인간 양손검병이 강하긴 했지만 우리가 더 강하고 수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곧 겸병대가 우리를 포위했고 검병대의 뒤에서 볼트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볼트는 우드록이나 나 같으면 몰라도 일반 형제들에겐 치명적인 무기다. 당연히 형제들은 볼트를 날리는 석궁병을 공격하러 갔고 석궁병 앞에 위치한 검병들과 얽혀 싸우기 시작했다.
검병대의 방어는 견고했고 볼트는 쉬지 않고 날아왔다. 우리의 형세는 나와 눈앞의 인간들의 싸움과 같이 조금씩 불리해졌다. 즉, 형제들도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다. 날 도우러 와줄 형제는 없지.
잠깐의 소강상태가 끝나고 인간들이 움직였다. 온다. 숨을 고르고 있던 인간들이 양손검을 치켜들고 내 목숨을 끊기 위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이제 당당히 카록께 갈 수 있겠구... 아니지. 난 다른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능력까지 사용해보지 않는 이상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고 카록 앞에서 당당할 수 없다.
‘...수 있어!’
‘...할 것이다.’
강하게 들려오는 인간들의 소리. 형제들의 소리는 들어봐야 별 소용이 없기에 완전히 무시했다. 며칠간 계속 무시했더니 인간들의 소리까지 무시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들어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집중했다.
“동료의 복수를 해주자. 마지막 공격이다! 죽여!”
여섯 개의 양손검이 날아온다. 그리고 나는 이번 전투에서 처음으로 방어에 집중했다.
텅. 터텅.
방어에 집중하니 공격을 막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인간들이 들고 있는 양손검은 크고 파괴력이 강해 내 신체에도 어렵지 않게 부상을 입히지만 그걸 들고 있는 인간의 힘에 한계가 있기에 느렸다.
비록 여섯 개지만 무겁고 둔하게 움직이는 양손검을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는 내 양손도끼가 쳐냈다.
그 사이 인간들의 마음에 집중했다. 간간히 몇 가지 들려왔지만 딱히 지금 사용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둘씩 흩어져!”
공격이 계속 막히자 인간 우두머리가 수를 썼고 여섯의 인간은 둘 씩 세 개로 나뉘어 나를 포위해 왔다.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치욕적인 뒷걸음질도 쳤지만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는 여섯 개의 양손검을 막으며 이동하는 것이기에 조금씩 둘러싸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포위가 완성되갈수록 손이 바빠졌고 가끔 놓치는 공격에 상처가 하나 둘 늘어갔다. ‘인간의 마음을 들으려는 걸 그만두고 당당하게 싸우다 죽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
‘이 오크 대전사는 내가 잡는다. 이번에 공을 세우면 나도 트리세인에 갈 수 있어.’
날 잡아끄는 인간의 마음이 들려왔다. 그런 생각을 한 인간에게 시선을 던지자 인간이 움찔하며 흐트러졌지만 곧 자세를 다잡고 공격을 가해왔다.
강한 인간이다. 남아있는 여섯 중 2번째로 강한 자다. 가장 강한 우두머리가 방어를 담당했고 이 자가 공격을 주도해왔다. 날카로운 공격으로 내 몸에 가장 많은 상처를 남긴 자이기도 하다.
그런 자가 갑자기 저들의 약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목을 자른다. 목을 잘라 검 끝에 꽂아 내 공을 널리 알리는 거다. 그러면 울프람 경께서 날 트리세인에 보내주실 거야. 그러면 나도 간부가 될 수 있어.’
목을 노리고 있군. 그럼 목을 내줘야지.
다리를 살짝 굽혀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 척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양손검과 내 목이 가까워졌다.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이 날아왔다.
‘성공이다! 이제 나도 출세를!’
그가 성공을 확신할 정도의 완벽한 공격.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공격이라 할지라도 어디로 날아올지 미리 알고 있다면 막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양손검은 내 목을 자르기 위한 최단거리를 날아왔고 그 경로는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턱.
“큭.”
왼손으로 양손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꽉 잡고 있는 그의 양손까지 함께 잡혔다.
강하게 쥐었다.
우드득.
“크아악!”
그의 양손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그의 옆에 있던 다른 인간에게 양손검을 휘둘렀다.
“카아악! 놔! 놔줘!”
인간이 마치 검에 달린 장식처럼 매달려서 내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렸다.
캉!
막혔다. 하지만...
서걱.
뒤이어 날아온 양손도끼까지 막진 못했다. 도끼는 왼쪽 어깨로 들어가 오른쪽 옆구리로 나왔다. 인간은 둘로 나뉘었다.
푹.
등에 양손검 하나가 박혔다. 남은 세 개도 연이어 박히겠지. 이 기회를 놓칠 자들이 아니다. 급히 몸을 던져 앞으로 굴렀다.
부욱.
“크아아악!”
하나의 검이 더 등을 베고 지나갔다. 그래도 두 개는 피한 모양이군.
양손검을 잡고 있는 그대로 몸을 던졌기에 거기에 매달려 있는 인간이 고통을 느꼈는지 비명을 질렀다. 양손검을 놓자 그 자도 땅에 떨어졌다. 그대로 발로 밟아주었다.
부드득.
머리를 밟았기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완전 무방비 상태였기에 제법 큰 상처를 입은 듯하지만 이미 온 몸에 난도질당한 상태인데 상처 한둘 늘어나는 게 대수겠는가.
몸을 돌렸다. 남은 인간 넷이 잔뜩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미친 괴물 같으니. 그렇게 피를 흘렸는데 아직도 저런 힘을...”
겁먹었구나. 인간. 역시 나약하다. 오크라면 강한 자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기뻐했을 것을.
“크흐.”
인간 쪽으로 기울었던 저울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쿠워어어억!”
양손도끼를 들고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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