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크 더 오크-12화 (12/228)

12 스킬-비텔의귀

아우 배때기야. 20살 이후로 한 번도 온 적 없는 배탈이 다시 찾아온 느낌이다. 왜 굶주린 사람들한테 고기 안주고 죽이나 스프를 주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점심으로 죽이 나왔다. 3일간 굶어 상당히 배가 고팠던지라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는데... 곧바로 복통이 찾아왔다. 누가 내 위속에 들어가서 꼬집고 비틀고 있는 것 같다. 위장이 방심하다가 음식 공격을 받아서 털리고 있는 건가.

한창 복통과 씨름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고 상무가 들어왔다.

“아. 상무님.”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괜찮네. 눕게. 어서 누워.”

상사가 누우란다고 진짜 누울 순 없지.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것도 계산된 거다. ‘나 당신을 엄청 신경 쓰고 있습니다.’란 걸 티내기 위한 움직임이지.

“에잉... 쯧. 잘생긴 얼굴이 다 망가졌군.”

딱히 잘생기진 않았었습니다만... 그래도 망가지긴 확실히 망가졌다. 남자는 머리 빨인데 붕대를 칭칭 감고 있어서 스타일이 안 나오는데다가 얼굴은 얼룩덜룩 시꺼먼 멍이 들어 있으니까. 돌아이 놈들. 그락카르 같은 것들. 사람 머리를 그렇게 세게 쳤다가 죽으면 지들 인생 망하는 건데 말이야. 하여간 생각 없는 놈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상무님.”

“아. 맞다. 이거 받게.”

뒤에 조용히 서 있던 기 비서가 고 상무에게 흔한 음료수 박스 같은 걸 건넸다. 그렇다고 음료수는 아니고 박스에 한의원 로고가 박혀 있었다. 한약인가? 공손히 받아들었다.

여전히 배가 아팠지만 최대한 참으며 겉으로 표시내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은 환자가 자신 앞에서 아픈 걸 티내면 자기에게 어필하기 위한 꾀병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거든. 진짜 아프지만 괜한 오해를 남기고 싶지 않다.

“홍삼 엑기스야. 평범한 놈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방식으로 찐 거거든. 매일 아침에 하나씩 하게. 효과 좋을 거야.”

“감사합니다. 매일 아침 하나씩. 꼭 마시겠습니다.”

그냥 돈으로 주지. 돈이 최곤데.

“이것도 받게.”

기 비서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고 상무에게 넘겼다. 봉투라니. 그거겠지? 그거 맞겠지? 두툼한 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제법 액수도 되겠는데?

“회사에서 주는 금일봉이네.”

“아구. 제가 뭘 했다고 금일봉을..”

했지. 아주 많이 했지. 회사 오너 동생 지켜줬잖아. 그러니 금일봉은 당연하지.

“적어. 마음 같아선 더 챙겨주고 싶은데 사규 상 그 이상 주는 건 안 된다고 하더군. 별 쓸데없는 사규가 다 있더군.”

“그럼.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몸을 일으켜 적당한 각도로 숙이며 봉투를 받았다. 역시 내 눈이 틀린 게 아니다. 봉투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두툼함이 남다르다. 이 정도면 기본 1뭉치는 되겠는데?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올려두며 슬쩍 봉투 입구가 내 쪽으로 향하게 하면서 안쪽을 살폈다.

오오. 누래. 누렇다. 신사임당님께서 저 안에 계셔! 신사임당 1뭉치면 얼마지? 5 곱하기 100이니까. 500! 500만원이라니! 거의 내 두 달 월급에 가까운 돈이 금일봉으로 내려왔다. 멋있다. 고 상무. 그래. 재벌이라면 이 정도 씀씀이는 갖고 있어야지.

“사건이 어떻게 됐는지는 들었나?”

“아직 못 들었습니다.”

“그렇군. 기 비서. 이따 한 기사한테 잘 설명해주게.”

“네. 잘 설명해주겠습니다.”

“난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군. 미안하네. 미룰 수 없는 약속이라서 말이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들어보니 다행히도 머리 쪽은 괜찮다고 하더군. 피는 많이 흘렀지만 뇌출혈이 없고 두개골도 양호하다더군. 그런데 팔이 문제야. 부러진 건 아니지만 금이 가서 완치까지 6주 걸린다고 하더라고. 그 동안 다른 사람 차를 타야 한다니 끔찍하구만.”

‘그 동안’이라는 건, 그 이후엔 내가 모는 차를 타겠다는 뜻이겠지? 잘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 같다. 워낙 다이나믹한 세상이나 아주 조금은 걱정했는데 이젠 그 조금도 안 해도 될 것 같다.

“금방 나을 겁니다. 한 달 안에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운전은 한 팔로도 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하하. 그 사람 터프하구만. 됐네. 지금 자네 데려다가 운전시키면 노동법에 걸려. 일자리 걱정은 하지 말고 완치될 때까지 푹 쉬다 오게.”

“감사합니다. 상무님.”

“그럼. 다음에 또 오지.”

다음에 오겠다고 하지만 정말 또 오진 않겠지.

고 상무가 떠난 병실에 기 비서와 단 둘이 남았다. 어색하다. 이 인간이랑 단둘이 만난 적 없는데. 손님 찾아왔다고 자리를 비켜준 간병인이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경찰에 의하면 네가 잡은 그 녀석들 상습범이었다고 한다.”

‘이런 거까지 내가 나서야 하나? 하여튼 내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질 않아. 대충 하고 현지나 따먹으러 가야겠다.’

갑자기 기 비서의 마음이 들려왔다. 깨어난 이후로 하나도 안 들리기에 난 못 쓰는 능력인가 싶었는데 이제 되는 구나. 하긴 정신을 잃을 때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내가 얻은 능력이었는데 그락카르 놈만 쓸 수 있을 리는 없지.

그런데 기판걸씨 지금 점심 조금 지났거든요. 나한테 상황 설명하는 거 얼마 걸리지도 않을 텐데 낮부터 여자한테 가려고 그러는 거야?

이.... 이....... 부러운 놈. 부럽다. ‘여친 없는 기간 = 내 인생’인 나한테 부럽기 그지없는 놈이다.

“아. 그렇군요.”

“경찰 쪽에서 표창장과 상금을 지급할 생각이라고 들었다.”

표창장은 별로지만 상금을 준다니 꼭 받아야겠군.

“미성년자라곤 하지만 정황상 정당방위가 인정될 거다. 문제될 거 없도록 회사에서 처리해줄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놈들 짓이라 생각되는 사건 중 살인 사건도 있다고 하니까. 그 사건이 확정되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아. 기자가 찾아올 수도 있으니 그 때 회사에 대해 좋은 말을 하도록.”

미성년자 퍽치기단, 살인, 일반인에 의한 검거. 이번 일은 이슈가 될만한 요소가 꽤 많다. 큰 이슈는 힘들어도 어느 정도 뉴스의 짧게 소개 될 정도는 되겠지. 금일봉 500만원이 이해됐다. 회사에 좋은 말 하라는 뇌물 같은 거겠지.

에이씨. 그럼 팍팍 좀 쓰지. TV에서 몇 초 나가는 광고 하나에 500만원씩 준다며. 뉴스에 나오면 그 이상의 값어치는 하지 않냐? 그러니 1,000만원 정도 줘도 좋잖아?는 꿈이겠지. 개인기사한테 금일봉으로 1,000만원 주는 회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예상 질문과 답안 정리 해온 것도 있으니까. 외워둬.”

“아. 네...”

기판걸 이놈은 고 상무보다도 더 고압적이다. 고 상무가 움직일 때 자신에게 미리 연락 달라고 했을 때도 부탁이 아닌 명령조로 했었고 말이야. ‘상무님께서 어딜 가시든 나한테 문자해.’라고 말이지.

그 외에 나한테 전달할 게 있으면 바로 옆에 서 있는데도 마치 자기가 상대할 급이 안 된다는 듯 사무실에 있는 비서한테 연락 오게 만들고... 생각해보니 열 받네.

제대로 따지면 내 상사는 고 상무뿐이고 기판걸 이놈이랑은 전혀 연관 없는데 왜 지가 텃세를 부리고 난리야.

확 받아버려?는 참자. 괜히 기판걸이랑 싸워봐야 나만 손해 본다.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 수석비서와 할 줄 아는 게 운전밖에 없는 개인기사. 이미 결말은 정해져 있지. 괜히 객기 부려서 좋은 직장 버리지 말자.

“기자가 왜 상무님이랑 개인기사가 순댓국집에서 술을 먹었냐고 물으면 털털하셔서 평소에도 자주 가시고 운전기사에 불과하지만 가족처럼 대해주신다고 해. 그거 중요하니까 묻지 않아도 어떻게든 건수를 만들어서 말해라. 티나게 말하진 말고 자연스럽게.”

“네. 그렇게 하죠.”

서민적인 재벌이미지를 만들어주려고 그러는 건가? 그런데 그 순댓국집은 난 처음 간 건데 자주 갔다고 거짓말해야 한다니 내 양심이 허락지 않..기는 개뿔, 이미 군대에서 상황병을 하며 거짓말을 수천 번은 했다. 내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가 거짓말이다.

“절대 대본 기자가 못 보게 하고 대답도 기계적으로 하지 말고 상황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해. 기자가 찾아오기 전에 계속 연습하고.”

“알겠습니다.”

자신 있다니까? 나 못 믿는 건지 계속 강조한다. 하긴 기판걸이 보기에 난 그저 운전기사니까. 지금 기판걸은 상급부대 면담 나올 때 이등병을 교육하는 일병의 마음일까?

“그리고 경찰이 사건 개요를 듣기 위해 찾아온다니 말 잘해. 기자를 상대한다고 생각해. 경찰 말은 기자한테 그대로 흘러들어가니까. 대본대로만 하면 문제없을 거다.”

“네.”

그 후에도 기판걸은 대본을 계속 강조했다. 아. 그만 좀 해. 몇 번을 이야기하는 거냐. 이 잔소리쟁이야.

“확실히 준비해라. 괜히 회사에 누를 끼쳤다간 뒷감당하기 힘들 거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말 좀 곱게 하면 덧나냐. 이 썩을 놈아.

“아. 그리고 병원비는 상무님 개인 돈으로 처리했으니 들어놓은 보험이 있다면 네가 병원비를 낸 것처럼 전액 받을 수 있을 거다.”

오오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개쌍놈으로 보이던 기판걸이 천사처럼 보였다. 이 차가운 도시남자 같으니. 나쁜 인상만 주구장창 주다가 막판에 역전 홈런을 날리는구나.

“그럼 들어가십시오.”

“그래. 준비는 확실히하고.”

“네. 확실하게 할 테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갔다. 기판걸도 나갔고 병실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혹시 기판걸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 잠시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 기판걸이 확실히 갔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바로 무심한 듯 서랍장 위에 던져놨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신사임당이다. 깁스는 했지만 손가락은 다치지 않아 움직일 수 있기에 바로 돈을 셌다. 한놈 두식이 석삼... 100! 정말 100장이다.

“아자!”

당장 ATM기로 가서 저금했다. 통장에 찍힌 거금이 죽밖에 먹지 않은 날 배부르게 했다.

***

그렇군. 이 능력은 그런 거였어.

병원 로비에 앉아 사람들의 마음에 귀 기울였다.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하니 연습이 필요한 건가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2시간 정도 앉아 있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듣다보니 이 능력은 연습이 필요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연습 없이도 난 능력을 완벽하게 쓸 수 있었다. 아니 쓰는 게 아니라 그냥 써졌다. 내가 쓰고 싶다고 생각해야 써지는 능력이 아니고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있는 능력도 아니었다. 그냥 항시 발동되어 있는 능력.

그럼에도 마음이 들릴 때가 있고 안 들릴 때가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소리가 한정되어 있어서 그런 것.

내가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소리는 욕망이었다.

‘지겨운 병원밥이 아니라 스테이크 먹고 싶다.’

‘저 간호사 몸매 장난 아닌데. 한따까리 하고 싶다.’

‘보험비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네.’

내가 들은 사람들의 마음 중 일부다. 대부분이 저런 내용이다. 아까 들었던 기판걸의 마음도 그렇고, 사람들이 무언가를 강하게 원할 때 난 그것을 들을 수 있다.

거 비텔이란 신 치사하네. 신 맞겠지? 그락카르한테 축복을 내린 카록이 신이라고 했으니까 나한테 축복을 내린 비텔도 신이겠지. 여하튼 치사하다. 줄 거면 온전하게 모든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지 한정된 마음만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다니.

사람들의 욕망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 점쟁이들의 워너비 같은 능력이지만 난 점쟁이를 할 생각이 없다.

음... 이거로 뭘 하지? 아직은 모르겠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