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인간침공
강하다. 강함이 눈에 보였다. 카록께 받은 눈이 우드록의 강함을 보여줬다. 그의 영혼은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도 진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검붉은 색. 쌓인 업보의 양이 그가 그간 전장에서 얼마나 용맹했는지, 얼마나 많은 적을 부쉈는지 증명했다.
우드록이 자신을 소개한 후 공터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나를 비롯한 공터의 모든 형제가 그를 주목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한마디를 기다렸다. 우드록은 말없이 공터를 에워싼 오크들을 둘러봤다. 천천히.. 천천히 몸을 돌리며 주변 모두에게 한 번씩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이 조금씩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시선엔 나를 고양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얼마 전 300명의 인간과 맞부딪쳤을 때 느꼈던 것처럼 날 고취시킬 강렬한 전투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주변 형제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들도 나와 같겠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을 것이다. 우드록의 몸은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들어왔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가자. 형제들.”
“쿠오오오오오오오!”
구워어어어어어어!
나를 비롯한 공터의 형제들 전부가 함성을 질렀다.
우드록이 앞장서 걸었고 모든 형제가 그 뒤를 따랐다.
***
‘대단하다. 이게 족장의 위엄인가?’
아까 공터에서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난 마치... 그래. 제압. 우드록에게 제압이라도 당한 듯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형제들과 함성만 지르며 우드록의 뒤를 따랐다. 제정신을 차린 것은 부락을 나선지 반나절이나 지난 후였다.
사실 우드록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다. 여전히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가 가는 곳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뒤따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니까.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뒤따르기만 하는 거에선 벗어났다.
쿠우우오오오오!
케으하아아아아!
주변의 형제들은 여전히 끊임없이 함성을 지르며 우드록의 등만 보며 걷고 있다. 살펴보니 1,000이 넘는 형제들 중 나처럼 우드록의 제압에서 풀려난 사람은 몇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대전사 급은 되어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겠지.
‘나도 우드록처럼 될 수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얼마전 장인에게 양손도끼를 받을 때 자신 있게 대족장이 될 거라 말을 내뱉었지만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갈 수만 있다면 입을 열기 전에 주먹을 날려서 말을 못하게 하고 싶다.
이번의 카록의 축복을 받으며 제법 강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대전사인 우드락과 만난 후 그 생각은 확신이 되었고 말이다. 난 대전사급의 힘을 갖게 되었다. 대전사가 되었으니 그 다음 단계인 족장은 얼마 멀지 않은 듯했다.
그런 어설픈 생각이나 하다니. 멍청한 놈.
택도 없다. 다음 단계가 아니라 100단계쯤 위에 있는 느낌이다. 만약 우리가 인간처럼 직책 만들기 좋아하는 종족이었다면 족장과 대전사 사이에 2~30개는 되는 직책이 만들어져 있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후 계속 생각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난 이제 겨우 대전사에 발을 들이민, 아니 대전사가 되는 경계에 발을 걸친 애송이 전사라는 것. 그리고 내가 해야할 일은 까마득해 보이지도 않는 우드록을 목표로 삼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대전사인 우드락과 그의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이름 모를 대전사를 따라잡는 것이다.
물론... 그 뒤엔 우드록이다. 현실을 깨닫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당장이라도 잡을 것처럼 가깝게만 보였던 목표가 멀고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오크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나도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걷고 걸어서 도착하고 만다.
우드록을 주시했다. 가까운 목표는 우드락과 다른 대전사. 하지만 진정한 목표는 우드록이다. 우드락과 다른 대전사는 지나치는 목표, 물론 우드록도 지나쳐 대족장을 향해 나아갈 생각이지만 그건 일단 우드록에게 도달한 후 생각하자. 지금 그것까지 생각하기엔 너무 머니까.
우연인지 우드록이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눈싸움이 잠깐 이어졌고 우드록이 웃으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겼는데 진 느낌이다.
***
“케흐흐흐흐.”
갑자기 들리는 웃음소리에 우드락이 시선을 돌렸다. 우드록이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아버지.”
“케흐. 뒤에 처음 보는 괜찮은 형제 하나가 있구나.”
우드락이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누굴 이야기하는지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머리 하나 반은 더 크기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그락카르군.”
“아는 형제인가.”
“저번에 만나봤지.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대전사급의 힘을 가졌더군.”
“그렇군. 케흐. 기대되는구나.”
“또 싸워서 불구로 만들지 마라. 아버지. 말했듯 아직 어리다.”
우드록은 싸움을 너무 좋아했다. 인간이나 드워프와 전쟁이라도 하면 잠잠했지만 전쟁이 없는 시기엔 아직 친분이 없는 제법 강하다 싶은 전사에게 싸움을 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친분을 다지기 위한 행동이라고 말했지만 그 때문에 불구가 되어 부락을 떠난 대전사급 오크가 둘이나 된다. 우드락은 미래가 기대되는 아직 어린 전사인 그락카르가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사에게 나이는 없다. 우드락.”
우드록이 잔뜩 분위기 잡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드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아하니 전쟁이 끝나고 심심해지면 그락카르를 찾아가 싸움을 걸 듯 했다. 그락카르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오크가 싸움을 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우드락은 다른 오크와 달리 온순한 편에 머리도 제법 쓰는 오크였다. 그는 미래에 오크족의 위대한 전사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있는 그락카르가 떠보지도 못하고 어린나이에 저버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다른 부락으로 가게 만들어야겠군.’
우드락은 걸으며 어떤 핑계를 대서 그를 다른 부락으로 가게 만들지 고민했다.
***
부락을 떠나 4일이 지났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끊임없이 걸었다. 지나다가 보이는 짐승이 있으면 사냥하기도 했지만 1,000이 넘는 오크가 먹을 식량을 사냥으로 구할 수 있을 리 없다. 현재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형제가 부락을 떠난 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
배고프다. 과거 일주일 이상 아무 것도 못 먹었던 적도 있었지만 굶주림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다.
“크후.. 크후..”
배고픔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숨도 거칠어졌다. 지금 누군가 날 건드리면 바로 도끼를 날릴 것이다.
쿠어어!
캬아아!
마음만 먹고 있는 나와 달리 행동으로 실천한 형제들이 곳곳에 보였다. 벌써 쓸데없는 싸움으로 목숨을 잃은 형제가 10명이 넘었다.
익숙한 광경이다. 살던 부락을 나와 3년간 떠돌며 참여한 전투만 수십. 그 전투의 대부분이 이런 굶주림으로 시작됐다. 오크 부락 근처에 인간이나 드워프의 마을이 있을 리 없으니 가까운 곳이 3일, 먼 곳은 일주일 이상 걸어야 한 적도 있다.
굶주림은 숫돌 질이다. 큰 전투를 앞두고 전사들이 최고의 전투력을 낼 수 있도록 날을 갈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이다.
도끼를 꽉 잡았다. 이 도끼로 인간을 가르고 싶다. 단단한 몸을 가진 인간 전사의 몸을 찢어 삼키고 싶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겠지.
어제부터 조금씩 진영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동과 굶주림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이동의 끝은 전투다. 점점 느낌이 강해지고 있다. 전투가 멀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난 전투가 시작될 때 앞에서 달리고 싶다.
툭. 툭.
형제들을 밀쳐 길을 만들어 앞으로 향했다. 밀침 당한 형제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내가 밀었음을 깨닫곤 별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우드록의 등이 점점 가까워진다. 최선두에서 우드록과 함께 걷던 우드락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자신의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는 목적지를 알 터. 자신의 옆으로 오라고 하는 것은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걸음을 좀 더 빨리 했다.
***
사마르랜드에 속한 우란 장원의 마을 중 하나인 외들 마을은 최근에 세워진 정착지다. 6년 전 사마르 백에게 우란 장원을 수여받은 울프람 우란은 제법 능력 있는 지배자였고 그 덕에 우란 장원은 발전했다. 그 소문에 정착민이 모여들었고 외들 마을은 정착민에 의해 7개월 전에 세워진 두 번째 정착지였다.
외들 마을에 파견 나온 수비대의 대장 트라우고프는 목책 위에서 외들 마을의 전경을 감상했다. 뿌듯했다. 그는 7개월 전 울프람의 명령을 받고 100명의 검병을 이끌고 500의 정착민과 함께 이곳에 왔다.
그 때 이곳은 잡초와 두꺼운 나무가 무성한 산등성이였다. 그런 것을 정착민들과 함께 나무와 풀을 베고 땅을 다지고 집을 지어 지금처럼 완전하진 않지만 어엿한 마을을 만들어냈다. 시선을 목책 바깥으로 향했다. 그곳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초원엔 밭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정착민과 그들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은 우란 장원의 지배자인 울프람 우란경에게 지원을 받고 있지만 내년부터는 마을 자체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할 것이고 그 후년부터는 자랑스런 우란 장원의 일원으로서 세금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대단한 분이다.’
울프람 우란은 다른 귀족과 달랐다. 전장에서 활약한 위대한 전사이며서도 영지를 다스리는데 능력이 뛰어난 진정한 지도자였다.
‘더욱 높은 곳으로 나아가 크게 될 분이다.’
트라우고프는 울프람이 아직 상급기사에 불과하지만 곧 높은 작위를 받을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만큼 울프람은 대단했으니까. 장원은 순조롭게 확장, 발전하고 있다. 곧 안정적으로 군을 충원할 수 있을 것이고 울프람이라면 그 병력을 이용해 전장에서 공을 세울 것이다.
‘그 분께서 공을 세울 때 옆에 있고 싶다...’
트라우고프의 희망은 울프람이 전장을 누빌 때 그 옆에서 영광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명감을 가지고 외들 마을 건설에 최선을 다했고 적극적으로 병력을 활용해 외들 마을 건설을 가속화했다.
‘내년 안에 외들 마을을 안정화시키면 울프람 경께 부름을 받을 수 있... 뭐지?’
초원을 살피던 트라우고프의 눈에 초원 너머 숲속의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숲이... 움직였다. 자연스런 움직임 아니라 인위적이었다.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짐승 몇 마리가 숲에서 뛰쳐나왔다.
‘오크? 아니면 위험한 짐승인가?“
뭐든지 바깥에 나가 일하고 있는 정착민과 병사들이 위험할 수 있다.
“사람들을 불러들여라.”
외들 마을은 우란 장원 최외곽. 가끔 오크나 늑대가 나타나곤 했다. 바깥에 나가 있는 병사들로도 충분히 대처가 가능하겠지만 트라우고프는 단 한 명의 희생 없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다.
뿌우우우우.
트라우고프의 명령을 들은 병사가 나팔을 불었고 나가있던 정착민과 병사들이 급히 마을로 돌아왔다.
트라우고프는 숲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 별일 없다. 그리고 계속 별일 없을 수 있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 한다. 막상 준비하지 않았다가 일이 일어나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곧 트라우고프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숲에서 4마리의 오크가 튀어나온 것이다.
“4마리다! 접근전 없이 석궁으로만 잡는다! 석궁수 준비하도록!”
울프람은 전략에도 뛰어나다. 그는 검병 부대라고 해서 전부 검병으로만 채우면 능동적인 수비를 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해 10명의 석궁수를 검병 부대에 배치했다. 그의 판단은 옳은 것으로 외들 마을의 7개월간 석궁수의 활약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트라우고프는 이제껏 그랬듯 이번에도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맙소사.”
곧 그의 생각이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거대한 오크 크라이와 함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오크가 숲에서 튀어나왔으니까.
“몰란이시여.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트라우고프는 주신 몰란에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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