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어지는꿈
장인의 천막을 나왔다.
꾸르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배가 고프군. 어제 전투 이후로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인간의 시체를 들고 왔으면 중간에 식사를 할 수 있었겠지만 먹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많은 재료를 장인에게 줘 좋은 무기를 얻는 것이 중요했다. 오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를 위한 도구인 무기니까.
“형제. 먹을 것이 있는 곳은 어디지?”
“저쪽으로 100걸음 정도 가면 된다. 형제.”
“알았다.”
알려주어 고맙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전에 말했듯 오크가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빚을 졌다는 뜻. 쉽게 남발해선 안 되는 말이다.
중구난방으로 쳐져 있는 천막을 지나 80걸음 정도 걸으니 벌레가 잔뜩 꼬여 있는 큰 천막 10동이 보였다. 식량저장용 천막이 10동인 것을 보면 우드록의 부락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모양이다. 식량 천막의 개수와 오면서 본 부락의 크기를 비교하면 암컷과 새끼를 제외하고 전사의 수만 따졌을 때 1,000~2,000정도 될까? 그 이상을 유지하려면 식량 천막이 지금보다 많아야 하고 부락의 크기도 커야 한다.
10동의 천막 중 7개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1개가 반만 열려 있었다. 다른 2개는 닫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검붉은 색의 피가 문에 짙게 발라져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은 식량이 없다는 뜻, 반이 열려 있는 문은 현재 사용 중이란 뜻, 닫혀 있는 것은 가득 차있다는 뜻, 마지막으로 피가 발라져 있는 문은 암컷과 새끼를 위한 식량이란 뜻이다.
사용 중인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먹을 것이 바닥 여기저기 대충 놓여 있고 먼저 와 흩어져 식사 중이던 수십의 형제가 보였다. 먹을 것들을 살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큰 뿔 누의 앞다리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는 큰 뿔 누의 앞다리는 단단한 근육으로 오밀조밀 뭉쳐있다.
단단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질기지만 그것을 뜯어 먹으면 더욱 강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다.
전부 훑어봤지만 없다.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짐승 고기는 고급 식재이기에 직접 수렵을 나가거나, 수렵조가 막 돌아왔을 때가 아니면 구경하기 힘들다.
빈자리 아무데나 가 앉아 인간 팔뚝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살짝 썩어 고릿고릿한 향이 나는 것이 맛나 보인다. 뼈째로 한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인간의 고기는 뼈째 먹어야 그나마 식사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방치해두고 온 인간 300명의 시체는 어떻게 됐을까. 같이 온 형제 중 하나가 부락의 누군가에게 말했겠지? 혹시 모르니 식사 끝내고 가서 말해줘야겠다.
인간 300명의 시체라면 천막 하나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암컷, 새끼의 식량 천막을 제외하고 남는 식량 천막은 2개 반이 되는 건가. 그 정도면 10일정도 버틸 수 있으려나?
아무래도 곧 큰 규모로 수렵을 떠나거나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전투 쪽이 좋겠는데 말이야. 카록께선 전쟁을 좋아하신다. 그 분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받으려면 짐승 쫓아다니는 것보단 목숨과 목숨이 오가는 전쟁이 좋다.
“못 보던 형제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제법 덩치가 큰 형제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비슷.. 아니 더 큰가? 정확히 비교한 게 아니라 모르겠군.
“오늘 온 형제 중 하나인가?”
“그렇다. 형제.”
내가 전에 쓰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도끼를 양 허리에 차고 있다. 쌍도끼를 사용하는 전사군. 몸 곳곳에 상당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얼굴이 잘생겼다. 아랫입술이 반으로 갈라지고 왼쪽 귀가 보이지 않는다. 머리통엔 정수리를 가로지르는 긴 상처도 보였다. 저 상처를 얻을 땐 거의 카록의 곁에 갔겠군.
강한 전사다. 강하고 존경받을만한 전사. 그의 덩치와 전투의 흔적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럼. 자네가 카록의 축복을 받은 그 형제겠군.”
그의 말에 식사 중이던 오크 대부분이 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와 함께 온 형제가 말한 모양이다. 내가 카록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말했을 정도면 인간의 시체가 있는 곳의 위치도 말했겠어. 따로 가서 말할 필요 없겠군.
“맞다.”
이젠 천막 안 오크 모두가 내게 시선을 줬다. 시선이 부담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자랑스럽다. 카록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그것을 받을만큼 전투에서 용맹했다는 뜻이니까. 형제들의 시선은 그런 용맹함에 대한 찬사와 같다.
“케흐...”
그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내 옆에 풀썩 앉았다.
“위대한 전사가 우리 부락에 합류했군. 환영한다. 난 대전사 우드락이라 한다.”
세세하게 나눠져 있는 인간의 직책과 다르게 오크의 직책은 간단하다. 오크가 가진 직책은 딱 세 개. 대족장, 족장, 대전사다.
이 세 직급의 기본이 되는 것이 족장이다. 족장이 먼저 있고 족장에서 파생되는 직책이 대족장과 대전사다.
오크는 덩치가 크고 강한 오크를 따른다. 크고 강한 오크일수록 따르는 전사가 많아지고 그들의 보호를 받기 위해 암컷이 모여든다. 그러다 어느 정도 수가 넘어가면 유랑을 멈추고 정착한다. 그 기준은 1,000 근처라고 들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대족장은 따르는 전사의 수가 10,000이 넘어갔을 때 부르는 호칭이다. 보통 한 족장이 순수하게 10,000명의 오크 전사를 모으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른 족장 몇을 밑으로 들여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전사는 족장이 임명한 부락의 최고 전사다. 500명에 한 명꼴로 뽑으니 우드록의 부락 규모라면 2~3명 정도의 대전사가 있을 것이다.
“난 그락카르다.”
우드락이 팔뚝을 내밀었고 나 역시 팔뚝을 내밀어 강하게 부딪혔다. 쿵 소리가 날 정도였다, 제법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나 나 둘 다 팔뚝을 뒤로 빼지 않았다.
“케흐. 케흐. 케흐흐흐흐. 덩치를 보고 느꼈지만 정말 강하구나. 그락카르.”
“너도 마찬가지다.”
그나 나나 서로의 힘을 확인했고 서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쁘다. 내가 대전사와 인사를 나누며 밀려나지 않을 정도가 됐다니. 축복을 받기 전의 나였다면 적어도 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대전사에게 밀리지 않았다는 기쁨 뒤에 순간적인 욕망이 기름 뿌린 불처럼 일었다. 그와 싸우고 싶다. 강자와 싸우는 것은 기쁨이며 즐거움이다.
“케흐... 자네도 나와 같은 마음인 모양이군. 하지만 참게. 곧 인간과의 전투가 시작된다. 자네나 나 둘 중 하나가 그 전투에서 빠지게 된다면 다른 형제들이 그만큼 더 다치게 되겠지.”
우드락이 인간의 정강이를 물어뜯으며 말했다. 식량 천막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수렵이나 전투 둘 중 하나를 곧 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투를 선택한 모양이다. 확실히 그게 좋지. 전투는 수렵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인간의 시체와 인간의 보급품 그리고 목숨을 건 싸움. 목숨을 건 싸움을 한다는 것은 카록의 시선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에 오크 전사라면 누구나 좋아한다.
“언제지?”
“곧.”
곧이라.. 그렇다면 5일 안에 출발한다는 이야기다.
“나를 빼고 가지 마라.”
“당연하다. 너와 같은 전사를 전장에 데려가지 않음은 멍청한 짓이지.”
오크의 출정은 부락 중앙에 위치한 공터에서 대충 모아서 수만 맞추면 떠나는 방식이기에 소식을 듣지 못하면 합류 못할 수도 있다. 그걸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전사들은 주로 공터 주변에서 모여 있고 나도 그럴 예정이지만 혹시라도 내가 식사하는 시간과 우드락이 전사를 모으는 시간이 겹칠 수도 있으니까.
“우드락, 너와 함께 간다니 흥분되는군.”
그의 덩치와 몸에 아로새겨진 흔적을 보면 얼마나 강한지 짐작된다. 적어도 나보다 약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싸워서 질 생각은 하지 않지만 객관적인 강함이라면 그가 나보다 위겠지. 그런 전사가 쉬운 전장에 나설 리 없으니 얼마나 즐겁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겠는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케흐흐.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이번 전투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나설 것이니.”
“아버지?”
“우드록이 내 아버지다.”
그렇군. 이름이 비슷하다했더니 우드락의 아버지가 이 부락의 족장인 우드록이었군, 그렇다면 더욱 기대된다. 족장이 직접 나서는 전투라니. 어쩌면 이 부락 전사의 대부분이 나설지도 모른다. 수천의 인간과 싸우게 되겠지.
전투의 규모가 클수록 카록께서 지켜볼 가능성이 커진다.
“그럼. 전투를 향해 달릴 때 보자. 형제여.”
“알겠다. 형제.”
식사가 끝나고 우드락이 떠났다. 아마도 큰 전투에 나서기 전에 강한 전사들을 직접 찾아가 전투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거겠지. 족장 우드록이 시켰을 것이다. 강한 전사가 전투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따르는 강한 전사가 많을수록 족장으로서의 위엄이 높아질 테니까. 부락에 정착하려는 오크의 수도 많아질 것이다.
오늘부터 공터 근처에서 살아야겠군. 우드락이 날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오크란 종족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섬세한 종족이 아니다.
이미 소문이 돌았는지 공터 주변에 오크 전사들이 모여 있었다. 대충 보이는 것만 7~800은 되어 보인다. 벌써 이정도면 실제 출정 규모는 1,000이 넘을 것이다.
“크흐...”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대한 기대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
3일이 흘렀다. 하루에 한 번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공터 주변에만 머물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수많은 형제들이 공터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잠자리가 부족해 천막 밖에서 자는 형제들도 있었다.
지금처럼 형제들이 이곳에 몰려 있을 때 암컷 거주지로 가면 예쁜 암컷을 독차지 할 수 있을 테지만 공터를 떠나는 형제는 없었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족장이 직접 나서는 전투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암컷과의 교미보다 전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더 클 테니까.
3일의 기다림이 지루하진 않았다. 내 강함을 느끼고 말을 걸어오는 형제들이 많았고 덕분에 그들에게서 주변 정세라던가 전투 경험담 등 많은 것을 들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늘도 모여든 형제들에 의해 공터가 시끄러웠는데 일순간 조용해졌다. 모든 오크의 시선이 한 쪽을 향했다. 그곳엔 세 명의 오크가 공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아는 오크다. 대전사 우드락. 다른 두 명의 오크 중 하나는 우드락과 비슷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전사로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의 오크는... 우드락보다도 머리 두 개가 더 컸다.
족장 우드록.
분명 그일 것이다. 세 명의 오크는 공터 정중앙에 가 섰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고 그 침묵을 깨며 공터를 뒤흔드는 거대한 고함이 들려왔다.
“나는 이 부락의 족장 우드록이다!”
기다림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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