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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더 오크-4화 (4/228)

4 능력전이

이 차의 주인이 저 더럽게 비싼 한정식 집으로 들어간 지 2시간하고도 15분. 이제 곧 나올 때가 됐는데... 왜 점심을 2시간이 넘도록 먹는지 이해를 못하겠지만 이곳에 올 때면 항상 2시간 이상은 안에 머문다. 도대체 안에서 뭘 하기에 2시간이나 밥을 먹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내가 갑자기 로또 당첨되어 200억쯤 받지 않는 한 그 궁금증은 평생 간직할 예정이다. 저 안에서 한 끼 먹으려면 내 월급의 5분의 1은 써야 할 테니까.

“어. 나온다.”

잽싸게 밖으로 나가 뒷문을 열고 그 앞에 섰다. 차의 주인이 얼큰하게 취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한국에서 제법 잘나가는 대기업의 상무 고영찬. 그가 바로 이 멋진지 안 멋진지는 모르겠지만 비싼 건 확실한 자동차의 주인이다. 영혼의 색은 연한 붉은색, 그리고 약간 탁하다. 조금 성급한 성격에 적당히 나쁜 짓도 한 인간이란 뜻이다.

고영찬이 자동차의 근처에 왔을 때 적당히 허리를 숙였다. 90도 숙여 인사하는 것은 아마추어다. 너무 숙이면 오히려 싫어한다. 적당히.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적당히 숙이는 것이 포인트다. 그 포인트는 대략 30도에서 45도 사이, 대신 절도가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각은 살아 있어야 한다.

“아. 기비서는 이만 들어가 봐. 오늘은 너무 취해서 더 이상 일하는 건 무리겠어. 집에 가서 쉬어야지.”

역시 높은 분. 자기 퇴근시간은 자기가 정한다. 젠장. 엄청 부럽다. 옆에서 그를 수행하던 기비서라 불린 남자가 고영찬의 말에 나처럼 적당히 허리를 숙였다. 훗. 자식. 넌 아직 모자라. 내 예리한 눈썰미에 의하면 기비서의 인사 각도는 약 50도였다. 과했어. 임마. 후훗.

“네. 알겠습니다. 상무님. 그럼.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말로는 인사를 끝내고 갈 것처럼 말하지만 말을 끝내고나서도 허리를 피지 않았다. 아마 고영찬이 차에 타고 차문을 닫을 때까지 저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잠깐 허리를 폈다가 차가 떠날 때 다시 허리를 숙일 테지. 물론 나도 고영찬이 차에 탈 때까지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는다.

고영찬의 성격이 고약하거나 오만하지는 않지만 누가 떠받들어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보통 회사의 고위급 임원들은 대부분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내가 약 반 년 간 고영찬과 다니면서 본 장면들도 대부분 그렇고 말이다. 오히려 나와 기비서가 고영찬에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기비서. 풀네임은 기판걸. 과거 반짝 유명했던 tv 스타를 떠오르게 하는 이름을 가진 그는 고영찬의 수석비서인 만큼 항상 고영찬과 함께 다니며 그의 스케쥴을 관리한다. 덕분에 그와 나의 근무시간은 거의 겹친다. 나도 고영찬의 개인기사로서 항상 같이 다니니까.

기판걸의 영혼의 색은 살짝 짙은 빨강, 그리고 고영찬보다 약간 더 탁하다. 평소 보여주는 겉모습만 봐선 냉정함을 상징하는 파랑색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뭔가 야심을 갖고 자신을 숨기고 있는 걸까?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고영찬이 차에 탔다. 나는 조심스럽게 차문을 닫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서 운전석에 탔다. 임원을 수행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품위다. 돈 많이 벌고 높은 곳에 올라갔으니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모시는 수행원들도 항상 품위를 잊지 않아야 한다. 바깥엔 이제야 허리를 펴 뒷좌석에 앉은 고영찬을 사랑하는 여인 보듯 쳐다보는 기판걸이 보였다.

“자택으로 모실까요?”

원래대로라면 ‘회사로 모실까요?’가 대사였겠지만 방금 퇴근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집으로 바꿔 말했다.

“부탁하네.”

“네. 그럼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복명복창. 기본이다. 이미 쟤도 알고 나도 아는 거라도 한 번 더 확인시켜준다. ‘당신의 명령을 당신의 부하가 확실히 알아들었습니다.’라는 표시다. 처음엔 자존심도 상하고 했는데 계속하다보니까 습관이 됐다. 어쩔 때는 편의점이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나도 모르게 주인아줌마나 알바의 말을 복명복창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부끄러워서 어디 숨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 직업병이란...

개인기사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마치 차가 정지해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운전하는 것이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덜컹거림이나 불편함은 조금도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어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곳에 보면 차에 물이 가득 찬 컵을 올려놓고 그 물이 넘치지 않도록 연습하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엔 정말 그런 연습을 했었다.

고영찬의 집에 도착했다. 완벽했다. 나의 재능이 무섭다. 운전경력 20년 넘은 베테랑 운전기사들이나 습득할 만한 운전기술을 내 나이 28살, 운전 경력 군 포함 9년 만에 습득하다니. 정말 두려운 재능이 아닐 수 없다. 개인기사 올림픽이 있다면 나가서 금메달이라도 땄을 텐데. 만약 이 재능이 운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그 꽃을 피웠다면 세계를 뒤흔들었을 테지. 아쉬운 일이다.

“도착했습니다.”

“음.”

잽싸게 내려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곤 역시나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각을 잡아 허리를 숙였다.

“수고했네. 자네도 이만 퇴근해. 오늘은 더 이상 일이 없을 테니까.”

고영찬이 차에서 내리며 말한다.

“네. 알겠습니다.”

아직 허리를 피면 안 된다. 고영찬이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갈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한다.

“아. 맞다.”

대문에 거의 근접했던 고영찬이 뭔가 잊은 거라도 있는지 몸을 돌려 다시 돌아온다. 뭘 놓고 갔나?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살폈다. 아무 것도 없다.

“내가 깜빡했네. 자. 이거 받게.”

고영찬이 지갑에서 5만원권 지폐 4장을 꺼내 나에게 건넨다.

“아.. 감사합니다.”

왜 주는지 영문 모르겠지만 거절은 없다. 주면 무조건 받아야지.

“오늘 나랑 기비서만 맛있는 거 먹어 미안해서 말이야. 그럼 수고하게.”

다시 몸을 돌려 집으로 가는 고영찬. 20만원씩이나 주면서 딱히 생색을 내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할 말만 하고는 사라지는 저 품격. 마치 빛이 나는 것 같구나. 내가 절대 20만원을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저런 사람이 왜 영혼색이 탁한 거야. 부처님처럼 밝게 빛나야 하느 거 아닌가?

뭐, 장난이고 오늘 식당에서 일이 잘 풀렸나보다.

반 년 간 고영찬의 개인기사로 지내며 오늘처럼 혼자 밥 못 먹고 기다린게 수십 번이지만 용돈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동안은 그냥 신경 쓰지 않던 고영찬이 오늘은 특별히 보너스까지 주는 것을 보니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손에 들어온 20만원이니까.

고영찬을 태우고 왔던 차를 그대로 타고 집으로 퇴근했다. ‘이 차는 내 차니까 우리 집 차고에 넣어두고 넌 걸어서 퇴근해라.’라는 것은 없다. 난 퇴근 할 때도 출근 할 때도 이 차를 타고 움직인다. 대신 관리는 확실히 해야 하지만 말이야.

집은 멀지 않다. 홀몸인데다가 짐도 별로 없어 고영찬의 개인기사가 되었을 때 이 근처로 옮겼다. 물론 고영찬의 집은 부자동네인지라 감히 가까운 곳에서 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충분히 가깝다. 대충 15분 거리?

차는 혹시나 누가 흠집을 내거나 할까봐 근처 경비가 지키고 있는 유료주차장에 주차한다. 어차피 주차비를 내가 내는 것도 아니니까. 주차장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갔다. 별로 멀지 않다. 근처에 있는 작은 오피스텔인데 천에 35짜리다. 가격에서 느껴지다시피 별로 좋은 곳은 아니지만 나 혼자 지내기엔 적당한 곳이다. 월세 35만원이 아깝기도 했지만 개인기사라는 것이 언제 잘릴지 알 수 없는 파리 목숨 같은 위치인지라 전세를 구하는 것은 무리다.

전세는 보통 2년 단위로 계약하는데 혹시나 1년만에 해고당한다고 생각해 봐라. 남은 1년은 어떡해야 하는가. 그 다음에 구해질 일자리가 가까운 곳일지 먼 곳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까운 돈 내면서 월세로 살고 있다.

“학생. 203호 학생.”

건물로 들어가는 데 경비아저씨가 불렀다.

“네. 무슨 일이라도.”

“택배 왔어요. 여기 사인하고 가져가요.”

“아. 감사합니다.”

무슨 택배가 온 거지? 혼자 살다보니 거의 인터넷 쇼핑 중독 비슷한 것이 걸려서 하도 택배 올 것이 많아 뭐가 온 건지 모르겠다. 상자가 크지 않고 작은 것을 보아하니 음식은 아니다. 옷이네. 젠장. 만두 시킨 거 오늘 퇴근했을 때 도착해 있기를 그렇게 빌었건만. 이 나쁜 놈들 칼배송이라고 하더니.

아직 오후 3시다. 오랜만에 일찍 들어왔네. 오늘이 끝나려면 9시간이나 남았고 내일 아침 출근하기까지는 15시간이나 남았다. 졸음운전 방지를 위해 잠은 충분히 자야 하니 7시간을 수면시간으로 빼면 남는 시간은 8시간.

들어가자마자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부팅이 이루어지는 동안 옷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고급시계의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늘은 점수 좀 올려보자. 100점 만점에 40점이 뭐야. 40점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점수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50점은 넘기고 만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게임을 열심히 했지만 점수를 올리긴 커녕 오히려 떨어져서 39점이 되어버렸다. 된장. 내일 출근만 아니었어도 밤새서 했을 텐데. 조금 처진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우니 애써 잊고 있었던 꿈이 생각났다. 내게 영혼의 색을 보는 이상한 능력을 준 꿈. 오늘도 이어서 꾸게 될까? 아니면 어제 꿨던 것이 끝인 걸까. ... 모르겠다. 자면 알겠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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