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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외전 조슈아 카스티요 2 (21/21)

Chapter. 5 외전 조슈아 카스티요 2

종교행사가 치러지는 날마다 시끄러운 새끼들이 그나마 빠져나가 조용했다. 킹은 모든 인간을 닥치게 할 수 있었지만 모두 한꺼번에 입을 다문 채 존재감 또한 지워내게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신이 아닌 인간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 더러운 놈들이 모두 빠져나가 한가로울 때에, 도서관에서 휴식을 취해보려 했건만 누군가 문 앞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벌떡 일어나 문을 여니,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등을 돌린 로터스였다.

“안녕. 릴리.”

마지막으로 보았던, 덜덜 떨던 모습이 꽤나 애처로웠기에 나름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로터스는 예의 없이 답을 해오지 않았다. 로터스의 어깨를 툭 치며 다시금 인사를 건넸다.

“릴리. 광합성 해? 사람이 인사를 하잖아?”

로터스가 등을 돌리는 도중,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탓에 로터스의 손끝이 허벅지를 희미하게 스쳤다. 로터스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킹은 분명하게 느끼며 근육을 움찔댔다. 하지만 너무나 미약한 접촉이라 그 감각은 금방 휘발되었고 바로 앞에서 웃고 있는 로터스의 얼굴이 더 강렬했다.

“안녕, 킹.”

팔짱을 끼고 찬찬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왠지 굳어 있는 듯했다.

“어제 일로 겁먹은 거야?”

교도소에 온 대부분은 협박으로 치기도 힘든 그 말 따위에 주눅 들지 않았다. 물론 그 문장이 킹의 입에서 나온다면 상당히 공포스럽지만 말로는 어떻게 타이르거나 회유할 수 없는 답이 없는 인간들이기에 금방 잊어내고는 했다. 하지만 로터스는 아닌 모양이다. 조개처럼 꽉 다물린 로터스를 바라보았다. 눈을 내리깐 그 꼴이 꽤나 가련해, 결국 아이를 어르듯 작은 목소리로 부드러이 말했다.

“정말. 릴리, 너 참 겁이 많구나? 알았어, 앞으로는 더 좋게좋게 말해줄게.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무슨 말을 하겠어?”

이딴 새끼가 어떻게 횡령은 했지. 돈 앞에선 쉽게 돌아버리는 법이니까, 이 앞에 있는 이놈도 별다를 바 없을 테지. 킹은 그렇게 생각하며 로터스의 대꾸를 기다렸지만,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결국 킹은 항복하듯 다시금 말했다.

“나는 릴리, 너 같이 어리고 여린 애는 처음이라 도무지 모르겠네. 알았어, 내가 용서해 줄게. 그러니까 고개 들어봐.”

킹은 용서는 해도 원한은 반드시 갚아 주는 인간이었다. 한 마디로, 스트레스는 받지 않겠지만 받은 건 되돌려주는 위인이란 말이었다. 로터스는 그런 킹의 인성 따위 아직 모른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킹을 바라보았다. 로터스의 갈색 눈동자가 꽤나 마음에 든다고 킹은 생각했다.

“킹, 고마워……. 나는 이만 가 볼게.”

책을 들고 온 주제에 그 책을 도로 가져가려는지, 로터스가 제 품에 안은 책을 들어 보이며 조용히 말했다. 음, 쉽게 보내줄 수는 없지. 킹은 도서관 안쪽을 손짓했다.

“책 읽으러 온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방해될까 봐.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도서관 내부와 킹을 번갈아 보던 로터스가 조용히 대꾸했다. 이미 방해를 받았지만 이쯤 되니 상관없었다.

“그냥 들어와.”

킹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금 가 앉았다. 로터스는 머뭇대며 들어오더니 책장으로 다가가 대강 훑어보고는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거 재미없어.”

조용한 공간에 혼자 있으려 온 것이지만 왠지 보내주고 싶지 않아 괜히 훈수를 뒀다. 등을 돌리고 자신을 바라본 로터스를 향해 방긋 웃으니 로터스는 책을 도로 꽂고 짧게 답했다.

“고마워.”

킹은 계속해서 로터스가 고르는 책마다 별로라는 말을 덧붙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여기 괜찮은 책은 몇 없었다. 조금 짜증이 난 모양인지 로터스가 킹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꿀꺽. 로터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침과 함께 삼켜지는 그의 감정은 아마 분노일 것이라고 킹은 생각하며 혼자 기꺼워했다.

“여기 있는 책 다 읽어 본 거야?”

“그럼.”

“진짜?”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킹은 꽤나 다독가였다. 독서를 취미로 즐기는 것은 아니었고 책으로 얻어지는 정보를 흡수해 써먹기 위한,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말이다.

“릴리, 너 진짜 사람 말 못 믿네. 그리고 내가 저번에 알려 줬잖아. 말 두 번 하는 거 싫다고.”

책장 대신 로터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단호히 말하자 로터스는 기가 죽었는지 조금 작은 목소리로 대꾸해왔다.

“아, 그랬지……. 그럼 지금 읽는 책은?”

아, 이 책. 여기 있는 것 중 그나마 재미있는 책이었다. 킹은 방긋 웃으며 책을 들어 보였다.

“또 읽는 거지.”

책 제목을 보았는지 로터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것이 웃겨 괜히 은근하게 말을 걸었다.

“여기 있는 책 중에 가장 유용해. 릴리도 읽을래? 써먹으면 좋잖아?”

꽤나 노골적으로 말했으나 로터스는 어느새 차분해져,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재미있게 읽어.”

그냥 보는 평소의 얼굴도 꼴렸지만, 섹스를 하는 저 얼굴은 더 꼴리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쉽네.”

저 얼굴이 꼴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킹은 제 할 일이 바빠, 싫다는 놈을 데리고 그 짓을 할 만큼 한가하지 못했다. 로터스가 나가고 다시금 고요를 만끽하며 책을 읽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이렇게 문을 열 경우는 딱 두 개였다. 불이 났거나, 해일이 몰려오거나. 하지만 지금은 둘 다 아닌 듯했으나 킹은 화를 내지 않았다.

“릴리, 다시 안녕. 역시 나랑 같이 이거 공부하고 싶은 거지?”

등을 돌리고 마주 보자, 로터스의 얼굴엔 큰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뭔 짓을 저질렀나 보다. 옷에 피도 묻어 있었다.

“오. 릴리, 너 고새를 못 참고 사고 쳤구나?”

부드러운 투로 말했으나 로터스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 뭔 짓이 꽤나 크고 덮기 힘든 일인가 보다.

“맞아, 나 사고 쳤어. 아주 큰 사고.”

로터스는 멀쩡했고, 그럼 저건 누군가의 피일 텐데……. 갑자기 돌아 사람을 찌를 인간은 아닌 것 같았기에, 얌전하게 굴던 로터스가 갑자기 인간을 해칠 이유는 뻔했다.

“흠, 누구인데? 마이클 미치? 판?”

어떤 돌아버린 새끼가 강간이라도 하려 했나 보지. 옷이 흐트러져 있는 걸 보아하니 확실했다. 아직 미수에만 그친 듯했다. 더러운 교도관 새끼랑 구멍동서를 하고 싶진 않으니 다행인 일이지.

“판.”

아직까지 굳은 표정인 로터스가 짧게 대꾸했다. 음. 얘 입장에선, 마이클 미치 쪽보다는 판을 건드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네.

“판이라, 찌른 거야? 교도관을 찌르다니, 생각보다 당차구나, 릴리.”

팔짱을 끼고 로터스를 바라보며 나름 칭찬했다. 얌전히 엉덩이를 뚫리는 게 아니라, 반격했으니 칭찬할 만했다. 하지만 로터스가 바라는 것은 그따위 것이 아닌지, 표정은 여전히 다급했다. 그리고 침을 한 번 삼키더니 킹이 들고 있던 책을 가리켰다.

“그거, 같이 공부하고 싶어? 나랑.”

이제껏 킹이 보아온 모습 중 가장 노골적이었다. 킹은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로터스는 그저 얌전한 새끼가 아니라 꽤나 약은 놈인 듯했다. 이제껏 킹이 받아왔던 유혹 중에 가장 투박하고 간접적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넘어가 줄 수 없어 책을 넓게 펴 엉켜 있는 몸이 그려진 페이지를 가리켰다.

“어떻게? 공부도 여러 방법이 있잖아?”

이 순간을 여유롭게 음미하고 싶었지만, 킹의 예상보다 더 상당한 짓을 벌였는지 로터스는 문을 힐끔대다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나랑 떡 치고 싶냐고,”

이제 좀 넘어가 줄 만하네.

“오, 릴리.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하지만 괜히 모른 척, 로터스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어보았다. 꽤나 다급한 모양인지 로터스는 킹에게 가까이 다가와 서며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금 물어왔다.

“킹, 나랑 이 책 몸으로 공부하고 싶어?”

로터스의 코끝이 킹의 코끝에 닿아왔다. 아이나 할 법한 행동 아닌가. 이걸 지금 유혹이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유혹이 됐다. 로터스의 얼굴이 상당했기 때문에. 당장 엎어 높고 박고 싶은 기분을 꾹 참으며, 가까워지는 얼굴을 향해 작게 물었다.

“어딜 찔렀는데?”

궁금했다. 저 흰 손으로 대체 어딜 찔렀을지. 로터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뭐?”라고 되물어 왔으나 킹은 다시금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판의 어딜 찔렀냐고.”

“…눈.”

“아아, 찌르기 좋은 곳이긴 하지. 눈은 운동해도 근육을 만들 수 없으니까. 똑똑하네.”

발칙한 게, 더 마음에 들었다. 상당히 초조한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떠는 로터스를 가만 보고 있던 킹은 이어진 로터스의 말에 불쑥 짜증이 솟구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킹, 나 시간 없어. 빨리 결정해. 너 아니면 딴 놈한테 가야 하니까.”

이제 와 딴 새끼? 나보다 나은 놈이 있을 리 없잖아. 씨발.

“딴 놈 누구? 마이클 미치? 걔는 좆 작아서 릴리, 너 만족 못 시켜줘. 판 눈을 찌른 것보다 더 깊이 찔러야 할 거야. 릴리, 너는 딱 봐도 느끼는 곳이 좀 깊이 있을 것 같거든. 근데 그게 마이클 미치 좆으로 닿겠어? 베개라도 뜯어서 말아 밑에 쑤셔 넣어야 할걸? 그게 그 새끼 좆보다는 낫겠지만, 너 같이 밝히는 애를 솜 따위가 어떻게 채워 주겠어?”

눈썹을 치켜올리며 로터스의 허리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그러자 로터스는 킹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킹, 나도 마이클 미치는 싫어……. 마이클 미치는, 너무 끔찍해. 너만큼 잘생기지도 않았고 너보다 약한 주제에 냄새까지 나. 나는, 그래서 킹……. 네가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응?”

웃음을 지운 채 말없이 로터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영악하네. 하지만 킹이 보기에는 딱 귀여운 수준이었다. 남을 구슬려 이익을 보거나 환심을 사는 딱 그 정도.

“릴리. 구체적으로 뭘 원해?”

그래서 귀여웠기 때문에 충분히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이거, 판이 저기 창고에 있어. 이대로 판이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면 나는 다른 교도소로 가게 될 거야…….”

게다가 얼굴도 귀여우니까. 로터스의 시선을 따라, 그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음, 그 새끼는 어째 피도 더러워 보이네.

“그리고?”

“다른 놈들에게서 날 지켜줘. 킹, 너도 알다시피 여기는 너무 끔찍한 인간들 천지야……. 나는 여기서 오래 버틸 자신이 없어.”

보호받고 싶다면 킹을 찾아오는 것이 가장 현명하긴 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로터스를 내려다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말이야, 한 번 내 것이 된 거는 망가질 때까지도 내 거거든. 난 집착이 심해. 사람도 예외 없이.”

로터스는 말없이 킹을 바라보았다. 싫으면 지금 적당히 도망가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꽤나 절박한지 로터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킹의 얼굴에 손을 가벼이 올려 물어왔다.

“그래서, 난 가질 만한 것 같아?”

“충분히.”

흠, 아주 충분해. 자신의 뺨에 올려진 로터스의 손을 붙잡았다. 부드러웠다. 손등이 이런데, 여린 손바닥 안은 더 부드러울 게 분명했다. 킹은 로터스의 손바닥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대고 입까지 맞춰, 이미 다 아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 혀를 내밀어 그 안을 핥아내니 씨발, 가려진 곳은 어떤지 더 궁금해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일렀다.

대신 로터스의 엄지 아래 살을 치아로 물고 옴폭한 부분을 혀로 박고 비볐다. 로터스는 말없이 그 모든 행위를 견뎌내다 이내 손가락을 킹의 입 안으로 넣어왔다. 처음이 아닌가 보네. 그러나 상관없었다. 로터스의 손가락을 빨며 그의 남는 손을 제 좆으로 갖다 댔다. 도망치려면 지금 쳐야 해. 아니, 한참 전에 달아나야 했지. 로터스의 갈색 눈동자를 보자니, 박는 건 일러도 문득 키스까지는 하고 싶어져 고개를 내렸으나 닿아 온 것은 입술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로터스는 킹을 바라보며 검지 끝으로 킹의 등을 훑어 왔다.

“그런데 말이야, 킹……. 나도 함부로 남에게 날 주고 그러는 사람은 아니야. 내가 이렇게 구는 것도 킹, 상대가 너인 이유도 있지만 내가 지금 많이 급한 이유도 있어. 그래서, 나는 네가 날 가질 만한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 물론 킹, 너 말고 마땅한 사람이 여기 있겠어. 그렇지만 혹시라는 게 있고, 그리고, 나 지금 상황이 급한 거 알잖아. 응?”

꽤나 능숙한 유혹에 킹은 잠시, 로터스가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그간의 태도를 돌아보았을 때 그 의심은 걸맞지 않았다. 그저 밖에서 꽤나 놀아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애초에 잘난 얼굴이니 그럴 법했다. 차분하고 소심한 것처럼 보여도 밖에서 어땠을지는 모르지. 다른 인간과 이따위로 붙어먹는 로터스의 낯을 생각하니 입술 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아.”

허리를 꼿꼿하게 펴, 등에 닿아 있던 로터스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문을 향해 다가가다 등을 돌려 로터스를 향해 짧게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보자. 로터스.”

* * *

로터스가 그 꼴리는 얼굴로 자기, 자기, 거리는 꼴이 꽤나 깜찍했으나, 킹은 그렇게 쉽게 베푸는 쪽은 아니었다. 제 좆이 무슨 왕의 승은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꼴이 퍽 우습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랬다. 지금은 옆에 둔 지 얼마 안 됐으니 다른 놈들이 가만히 있을지라도, 킹이 로터스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다는 게 소문이 나면 그를 하찮게 여기는 이들은 분명히 생겨날 것이다. 로터스가 딴 새끼에게 박히는 걸 상상하니 역시나 유쾌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좀 더 절박한 얼굴이 보고 싶었다.

킹이 아무리 로터스를 귀엽다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판을 그렇게 찌르고 꽤나 차분하게 자신에게 온 것을 보니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그리고 좆 사정보다는 일에 신경을 쏟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의외로 킹은 알고 있었다. 바깥에서 완다가 보내오는 일들과 역겨운 마이클 미치를 치워버리려면 꽤나 집중해야만 했다. 더욱이, 취미 생활에 재밌는 일이 생겨 그곳에 몰두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려 휴 사토가 킹의 취미 생활에 엮어 들었으니 말이다. 멍청한 새끼. 휴 사토를 열심히 비웃으며 오늘도 여지없이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일을 하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 아. 되나? 뭐가 이렇게 어려워? 아, 아. 아, 돼? 돼? 알았어.

소장이었다. 킹이 있는 방 안에는 스피커가 없었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워낙 커, 들어야만 했다.

-큼, 아, 아. 내루 교도소의 소장, 조셉 블랙입니다. 그 태풍 예상 경로를 보니, 지금 우리 홍징 쪽으로 큰 태풍이 상륙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름이 뭐랬지? 뭐, 뭐? 똑바로 얘기해봐. 뭐? 몰라, 하여튼! 유례없이 큰 태풍이라고 하니! 모두들! 동요하지 말고! 조심하도록! 이상!

태풍이 뭐 별거라고. 소장의 걸걸대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대강 파내며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 * *

쿠콰콰쾅!

아, 씨발……. 킹은 나직하게 욕을 중얼거렸다. 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천둥이 울렸다. 외창은 바깥의 소음을 전혀 막아내지 못하고 외려 한기를 전해올 뿐이었다. 겨우 눈을 뜨니 인영이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로터스였다. 로터스는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연약한 표정이었다. 몸을 일으켜도 킹이 깨어난 걸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바깥만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그의 손바닥 쪽을 톡 건드니, 그가 놀라 킹을 돌아보았다. 적은 빛만이 로터스의 얼굴을 비추며 밝혀왔다. 반절이 어둠에 묻힌 그 얼굴이 왠지 마음이 쓰였다.

“비 처음 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로터스의 낯을 킹 역시 침묵하며 바라보았다. 짐짓 심각해 보이는 그 얼굴이 재밌었다.

“허니, 무서워? 안아 줘?”

농담이었다. 로터스가 진짜 다가올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였다. 킹의 생각과 다르게 로터스는 점차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응. 무서워, 안아 줘.”

번쩍하며 다시금 방을 밝혀오는 번개가 로터스의 얼굴의 모든 곳을 잠깐 드러냈다. 조금 이르지 않나 잠시 고민했지만 저 얼굴이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하는 새끼는 바보가 아닌가. 천둥이 울릴 때, 로터스의 얼굴을 손으로 잡고 끌어당겨 그 말랑한 볼을 치아로 꾹 눌렀다. 그리고 앞니로 광대를 살살 긁으니 거슬렸는지 로터스가 고개를 돌려 먼저 입을 맞춰오길래 그 혀를 치아로 꾹꾹 눌렀다.

“흐으…….”

신음을 흘리는 로터스를 침대로 눕혔다. 누워있는 것도 보기 좋네. 다시금 번쩍 번개가 내리쳤고, 로터스의 몸에 드리운 킹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다시금 어두워져 암흑에 덮인 그림자가 희미해지자, 그것이 못내 아쉬워 몸을 점차 내려 제 몸으로 그를 덮었다. 그리고 입술이 맞닿았다. 로터스의 아랫입술을 앞니로 물자, 로터스는 혀를 내밀어 코를 핥아왔다. 개 같았다.

“처음이라며.”

믿어본 적 없는 거짓말을 언급하니, 로터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유혹적으로 대꾸했다.

“처음이 아니면, 싫어?”

“그럴 리가.”

로터스가 자신의 손을 킹의 사타구니로 내려 쭉 눌렀다. 씨발. 처음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꽤나 놀아난 게 분명했다. 당장 옷을 벗어낸 후 로터스의 옷을 벗겨내려 했지만 이것저것 껴입어 있어 꽤나 귀찮았다.

“앞으론 덜 입고 다녀.”

로터스가 맨몸이 되자 다급하게 그의 목과 어깨 사이에 입을 박고 혀로 핥아내는데 성기를 잡아 오는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대담하게도, 킹의 좆을 밖으로 꺼내 귀두를 문질러왔다. 하, 이래 놓고 처음이라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지껄였다는 게 우스웠다.

“크으……. 무섭다는 애치고 너무 대담하잖아, 허니.”

길게 신음을 흘리며 로터스의 순진한 척을 나름 질책하니 로터스는 외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좆을 더 매만지며 말했다.

“자기가 안아 줘서 안 무서워.”

발칙한 태도에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로터스의 엉덩이로 손을 내렸다. 이대로 쑤셔 박고 싶었으나 그 안은 역시나 건조했다. 대강 손을 뻗어 더듬대며 플라스틱 통을 집었다. 바세린이었다. 끈덕하고 덩어리진 기름을 손으로 푹 꺼내고 엉덩이 사이에 넓게 발랐다. 얇은 막이 생긴 듯 미끄러웠다. 로터스 역시 통에 손을 뻗더니 크게 푹 떠 킹의 좆에 발라왔다. 끈적한 바세린 뭉텅이가 예민한 피부에 덩어리로 닿더니, 로터스의 체온에 녹아 흐물하게 변했다. 로터스가 그것을 넓게 문질러 바르며 손을 쥐자 축축하고 뜨거운 내벽 안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윽, 허니는 두 번 무서우면 큰일 나겠어.”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킹의 말을 들은 로터스가 싱긋 웃으며 대꾸해왔다.

“으, 하……. 어떡해, 난 원체 겁이 많아서 자기가 맨날 옆에 있어 줘야겠네.”

발칙한 새끼. 당장 그 잘생긴 몸을 뒤로 밀어 눕혔다.

* * *

천둥과 비바람 소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나 딴 방 새끼들이 딸을 치고도 남을 만큼, 격한 신음을 흘려가며 섹스를 했다. 로터스와의 섹스가 퍽 마음에 들었기에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남은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꽤나 모자랐지만 여기서 더 하기엔 무리였다. 로터스는 당연하다는 듯 킹의 입맞춤을 받아냈다. 꽤나, 경험이 많은 데다가 사랑받는 것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로터스를 따라 시선을 옮겼으나 그곳은 그저 축축하게 젖은 유리일 뿐이었다.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나 봐?”

낮은 목소리로 묻자 로터스는 다시금 킹을 바라보며 킹의 머리칼에 손을 넣었다. 꽤나 부드럽게 아이에게 하듯 쓰다듬는 손짓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아.”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다시금 창문을 힐끗 본 후 로터스를 바라보며 작게 되물었다.

“근데 왜 거기만 봐.”

말하다 보니 로터스의 말캉한 귓불이 끌려, 살짝 물자 로터스는 천장으로 시선을 돌려 멍하니 대꾸했다.

“그냥 여기 와서 보는 첫 비라.”

왠지 감상적으로 들렸다. 귓바퀴을 혀로 문지르며, 킹은 불쑥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여기 온 이튿날 비가 내렸어. 내가 홍징에 온 날에도 비가 내렸는데, 그때가 생각났지.”

타인에게 본인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었다. 결코. 그러나 비와 섹스 때문에 자신도 감상적이게 된 것일까. 말하고도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가만히 듣던 로터스는 뒷목에 손을 올려 피아노를 치듯 두드리며 나긋하게 물어왔다.

“원래 어디에 있었는데?”

“필리핀.”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으나 이제껏 타인의 물음에 직접 답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말하고 싶었다.

로터스는 대꾸하지 않고 킹의 귀 뒤를 엄지로 가만가만 문질렀다. 더 캐물으리라 생각했지만 돌아온 로터스의 말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 태풍이 왔었거든. 그 태풍 있잖아, 십여 년 전에 왔던 태풍 ‘물고기’. 그때 그렇게 크게 올 줄 몰랐고 나는 어렸고, 엄마랑 아빠는 바쁘니까 아무것도 대비를 못 했거든. 그날 집에 혼자 있는데 태풍이 유리창을 모두 깨고 간 거야. 나는 집에 혼자 있고 유리창은 다 깨지고 그래서 엄청 무서웠는데.”

피아노 치듯 등을 두드리는 손짓이 느껴졌다. 무슨 곡일까. 어렵지 않은 걸 보니 동요인 듯했다.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운 모양이었다. 율동 같은 손짓과 로터스의 나직한 목소리와 꽤나 어울렸다. 아이를 두고 나간 엄마와 아빠라니. 꽤나 무책임한 이야기처럼 들려도 평범하고 안락한 가정에 불과했다. 킹이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보통의 그것 말이다.

“그래서 태풍이 무서워?”

로터스의 귀를 꾹꾹 누르며 그때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로터스는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건 아닌데, 그때가 생각나서 불안하기는 해.”

“그게 무서운 거잖아. 이젠 컸으니까 집에 잘 있으면 돼. 그리고, 내가 있잖아?”

안 무섭기는. 무서워하는 게 빤히 보였다. 아이를 어르듯 말하자 로터스가 눈을 마주쳐 왔다. 그리고 킹의 몸을 슬며시 밀어내며 일어났다.

“이제 치워야 해.”

좋다고 안아올 때는 언제고 매정하게 일어나는 꼴이 괘씸했지만 귀여웠기에 봐주기로 했다.

* * *

킹은 자신이 지나치게 로터스에게 빠져간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터스가 지나치게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 얼굴로 자기, 자기, 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꼴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래서 제법 평범한 가정에서 적당히 사랑받은 둘째로 자라나 적당히 눈치 있고 적당히 아양을 떠는 줄 알았지, 근데 그것이 모두 거짓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찔린 킹을 두고 무심하게 눈을 돌리는 모습이 킹을 미치게 했다. 그리고 로터스가 해온 모든 말들이, 이름만 빼고 교묘하게 거짓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꽤나 분했다. 애초에 로터스에 대해 조사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감히, 죄목부터 모든 것을 다 속여왔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수였다. 그 얼굴에 넘어가 꽤나 얕보고 말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킹은 간헐적으로 웃어 댔다. 이 꼴이 난 자신이 우스웠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로터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씨발. 씨발. 씨발. 킹이 조슈아이던 시절도, 킹이 킹인 시절에도 킹을 이렇게까지 엿 먹인 놈은 없었다. 일을 방해받아, 꽤나 큰 손해를 보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다. 킹이 로터스에게 받은 피해라곤 뱃가죽이 찢어진 것뿐이었으나 킹은 그것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듯 분통이 터졌다.

킹은 그전까지 굳이 교도소 밖을 나갈 이유를 느끼지 못했고 로터스가 들어오고도 계속 교도소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이제 나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킹은 손을 써 금세 교도소를 나와 로터스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터스는 참으로 영특해서(이 와중에 로터스가 기특해서 킹은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꽤 치밀하게 몸을 숨겼다. 로터스가 사라졌던 처음에 킹은 내내 분노했고 두 번째론 내내 심란해했으며 세 번째가 되어서야 드디어 인정했다. 자신이 로터스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것은, 이제껏 느낄 수 있을지 몰랐던 감정 탓이라고.

사랑. 웃긴 말이었다. 킹은 사랑을 늘 비웃었다. 사랑 때문에 자길 데려다 키우는 완다가 우습다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완다나 자신이나 우습긴 매한가지였다. 킹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이미 인정해 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 사랑 때문에 본 적 없이 연약하게 굴었던 완다를 떠올렸고 결국 킹은 완다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정신은 좀 차렸냐?”

물을 마시던 완다가 킹의 얼굴에 잔을 모두 쏟아내며 다짜고짜 하는 말이었다. 킹은 말없이 소매로 얼굴을 닦아 냈다. 완다는 물을 한 잔 더 떠 마시면서,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말은 하지 않아도 킹을 조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킹은 화를 내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며 완다 앞에서 내 본 적 없는 연약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속이… 답답해.”

완다는 물 한 잔을 다 비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 유리잔을 그대로 킹을 향해 던지고 지나쳤다. 킹은 유리잔을 받아 옆에 올려 두며 완다를 따라 거실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그래서, 니가 속이 답답한 걸 나보고 어쩌라고. 병원이라도 가든가.”

완다는 관심 없다는 듯, 소파 위에 올려져 있던 신문을 들어 바라보았다. 완다가 신문 내용에 관심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던 킹은, 신문을 낚아채 등 뒤로 던졌다.

“어쭈?”

완다가 그런 킹이 괘씸하다는 표정을 찡그렸지만, 그녀가 위협이 될 리 없었다. 킹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완다를 향해 물었다.

“카야가 떠났을 때 어땠어? 그것도 딴 새끼랑.”

카야의 이름을 꺼내자, 완다는 제 품에서 담배를 꺼내 곧바로 입에 물었다. 그리고 킹을 향해 담뱃갑을 내밀었지만 킹은 고개를 내 저었다.

“왜 끊었냐? 골초 주제에.”

담배의 불을 붙이며 완다가 물어왔다. 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내 천천히 대답했다.

“…걔가 싫어했어.”

담배 연기에 얼굴을 찌푸리던 로터스를 떠올렸다. 씨발. 이제야 사랑을 인정한 게 웃길 정도였다. 이른 10대 때부터 피워오던 습관 같은 담배를 끊어낼 정도이니. 멍청했다. 킹의 낮은 음성에 완다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입 밖으로 빼며 정말로 크게 웃었다.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비웃고 싶다는 듯 말이다. 킹은 그녀의 웃음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으나 완다의 웃음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던 그녀는 이내 눈가를 닦으며, 웃음기를 지워낸 목소리로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걔가 떠날 때, 다 부숴버리고 싶었지. 걔가 살던 집도, 가족도 뭐든.”

완다는 다 타버린 담배를 비벼 끄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테이블에 담뱃불 자국이 생기자 킹은 작게 한숨을 쉬고 손을 뻗어 재떨이를 그녀 앞에 두고는 되물었다.

“그래서 부쉈어?”

“아니.”

완다의 대답은 상쾌했다. 그것이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이.

“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완다의 성질머리라면 이미 모두 부수고도 남아야 하니까. 완다는 킹의 되물음이 무척이나 우습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고는 낮게 답했다.

“그따위 짓 하면 절대는 안 보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래.”

로터스는 킹에게 그런 단호한 말을 해본 적이 없었으나, 말로 하지 않아도 사람을 찌르고 달아날 정도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화가 났다.

“난 그 새끼를 안 보고 살 수가 없어.”

씹듯이 뱉어내는, 호기로운 말에 완다는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제 의붓아들의 얼굴로 후 불어냈다.

“뭐, 가두기라도 하게?”

뿌연 담배 연기가 짙게 퍼져 나가며 킹의 시야를 가렸다. 그 잠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킹이 참아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였다. 다시금 완다의 얼굴이 투명한 공기 사이로 보이자 결심하듯 작게 읊조렸다.

“찾아낸다면, 그래야지.”

소파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완다는 자신이 이제껏 길러온 의붓아들의 멍청한 말에 다시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놈, 그러니까 도망을 가지.”

완다처럼 여유로운 척 굴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킹은 제 건조한 손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처럼 말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우스워?”

제 의붓아들이 괴로워한대도 완다는 위로를 건넬 이가 아니었다.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고는 후 뱉더니, 입 안을 혀로 훑으며 대강 말했다.

“응, 존나게 웃겨. 뒤통수나 맞고 징징대는 꼴이 나 같아서 존나게 웃기네. 걔 핏줄은 넌데 왜 나랑 하는 꼴이 똑같지?”

위로보다는 조언. 이것이 완다의 방식이었다. 완다는 재떨이가 아닌 테이블에 담배를 다시금 비벼 끄며, 제 연인의 멍청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카야도 가뒀어?”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내며 킹이 물어오자 완다는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려다 담뱃갑이 빈 것을 알고 바닥으로 구겨 던졌다.

“가뒀으니까 미친 놈팽이랑 애새끼까지 낳고 달아났지.”

“카야는, 완다를 사랑했어.”

카야는 완다의 사진을 모두 찢어내면서도 한 장을 버리지 못해 지갑에 품고 다닐 만큼 완다를 사랑했다. 하지만 로터스는 아니다. 킹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 믿지 않을 놈이었다.

“나도 알아.”

완다는 손에 끼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대꾸했다.

“그런데도 달아나?”

“…걘 그런 애니까. 그런데 니 뒤통수 친 새끼는, 널 사랑하지도 않는데 네가 가둬 둔다고 얌전히 굴 것 같아? 더 멋대로 굴겠지.”

로터스를 가둔다 하더라도 그놈이 가만히 있을까. 이미 한번 킹의 뒤통수를 쳐 도망간 놈인데, 킹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 더 기겁할지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 완다도 실패했잖아.”

실패했으니 아는 거지. 그럴수록 차라리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비는 게 낫다는 걸.”

“그런다고 안 달아나?”

얼굴을 찌푸리며 물어오는 킹의 질문에, 완다는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리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위험에 몰린 놈들은 도망가기 마련이야. 하지만 네가 배를 드러내고 항복하며 애정을 갈구하면 도망을 왜 가. 오히려 네게 붙어 널 이용하려 들걸?”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고 자신을 바라보는 완다의 얼굴을 보니 기억도 나지 않는 예전, 그녀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너보다 더한 새끼를 만날 거야. 어르고 달래도 답이 없는 그런 새끼 말야. 그리고 결국 그 새끼를 너무나 사랑하게 돼서 네 맘대로 안 돼 울면서 날 찾아오겠지.’

‘넌 카야와 내 아들 새끼니까.’

완다의 말을 비웃어 넘기던 자신이 우스웠다. 완다의 말대로 킹은 카야와 완다의 아들 새끼였고 완다의 저주와 같은 예언을 피해낼 수 없었다. 소파에 등을 깊게 묻으며, 로터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자신을 떠올렸다. 볼품없는 자신의 꼴이 어떻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로터스의 얼굴만이 너무나 매력적이라 킹은 스스로를 조소했다.

* * *

일단 로터스를 찾아야 그를 가두든지 빌든지 할 일이었다. 로터스는 꽤나 영리했으나 킹은 그보다 돈이 많았다. 킹은 로터스의 이름으로 약을 만들었다. 킹이 파는 약은 원가에 비해 한참 뻥튀기가 된 가격이었지만 킹의 신작 ‘로터스 리’의 가격은 상당히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로터스 리’를 흡입했고 로터스의 머그샷을 보았다.

킹은 로터스의 머그샷을 처음 보았을 때 멍청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짜증이 솟구쳤다. 킹은 사진을 크게 출력해 벽에 붙어 두었다. 청소년기 말고 자위를 해본 적이 없던 킹이지만, 그 사진을 보고, 제 성기를 흔들었다. 상당히 자주. 그래서 사진은 수시로 갈아치워졌다.

하늘이 킹의 노력을 알았는지 진짜 로터스의 위치를 알려온 놈이 나타났다. 그간 세계 곳곳에서 로터스를 보았다는 제보를 받았지만 모두 로터스의 발끝에 못 미칠 만큼 못생겼다. 로터스 같은 새끼는 로터스 하나뿐이었다.

몰타에 있다는 로터스의 사진을 보았을 때, 전율이 몸 전체를 스쳤다. 그 사이 살이 내리고 조금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죄수복을 입지 않은 로터스를 직접 본 적이 없던 킹은 당장 몰타로 떠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보내 로터스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담배와 술을 싫어하던 로터스는 골초가 되었고, 쓰디쓴 알코올을 목구멍에 그대로 쏟아 넣는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만족스러웠다. 킹에게서 도망친 로터스의 삶이 마냥 평온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 킹은 담배를 피우는 로터스의 사진을 품고 다녔다.

결국 견딜 수 없어진 킹은 로터스에게 재회의 선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꽃말 따위 유치했지만 그걸 로터스에게 보낸다고 생각하니 청소년기 소년처럼 제법 콩닥거렸다. 메리 골드를 받아 든 로터스는 귀찮다는 표정이었으나 페퍼민트를 받아 들었을 땐, 아니었다.

킹의 몸에서 나는 페퍼민트 냄새를 그리고 킹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로터스는 얼굴이 새하얘졌고 그 모습을 받아 든 킹은 입술을 핥았다. 로터스는 제법 머리를 굴렸지만 킹은 더 이상 로터스에게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덜컹이는 밤 기차에서 3년 만에 로터스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본 로터스는, ‘씨발. 좆같게도 너무 사랑스럽다.’라고 킹은 생각했다. 안경을 쓰고, 죄수복이 아닌 옷을 입은 로터스는 너무 킹의 취향이었고 킹을 꼴리게 만들었다.

“오랜만이야. 허니. 아니, 다니엘이라고 불러 줄까?”

새하얘진 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킹을 향하자 킹은 당장 입술을 박아 비비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아냈다. 킹은 로터스를 찾았고 로터스는 킹의 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로터스는 로터스여서 기차에서 뛰어내리면서까지 킹에게서 달아나려 했다. 골때리는 새끼. 미친 새끼. 로터스는 이상한 놈이었다. 그렇지만 킹은 그런 로터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안됐다. 킹은 잔뜩 초조해졌다. 기차에서 뛰어내려 온몸이 산산이 조각난 로터스를 떠올리자 당장 이 기차 안 모두를 죽이고 죽고 싶어졌다. 킹은 제 큰 손에 얼굴을 묻었고 완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말을 불쑥 내뱉었다.

“결혼하자, 로터스.”

“미친 새끼.”

로터스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욕을 내질렀고 킹은 짜릿함을 느꼈다.

* * *

로터스는 킹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킹은 정말로 로터스와 결혼하고 싶었다. 결혼 따위 우스웠으나 자신과 같은 성을 나눠 쓰고 함께 사는 로터스를 떠올리니 정말이지 바보 같을 정도로 즐거웠다. 제 성질을 죽이며 로터스에게 다정하려 했지만, 로터스는 로터스여서 끊임없이 킹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했다. 로터스를 눈독 들이는 미친 새끼들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미친 검사 새끼가 그렇게나 빨리 접근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루크 림이 로터스에게 접근한 그 순간부터 킹은 이미 루크 림의 존재를 깨닫고 있었다. 로터스는 도청기도 카메라도 사람을 붙이는 것도 싫다고 했지만, 이미 로터스의 휴대폰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난 후에야 이야기한 것이니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킹은 생각했다. 더욱이 망명을 지껄이는 걸 들어버렸는데, 오히려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을 뿐이었다.

킹은 로터스가 그 멍청한 검사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킹이 바라는 최고의 방법은, 로터스가 그 모든 것을 킹에게 털어놓고 킹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검사가 돌아가고 얼마 있지 않아, 전화를 걸어온 로터스가 하는 말이 그것이길 킹은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로터스는 킹에게 혹시 일자리를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무슨 꿍꿍이인지 뻔했으나 킹은 흔쾌히 그 부탁을 승낙했다. 어찌 됐든, 로터스를 자신의 옆에 둘 구실이 생기는 거니까. 물론 전화를 끊고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모든 걸 다 부수고 난 후에 씨근대며 엠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미친 새끼가 로터스에게 접근해 왔네. 조사 좀 해봐.”

* * *

엠마는 수완이 좋았기에 몇 시간 만에 킹에게 연락해왔다. 그 미친 검사가 휴 사토의 끄나풀이라는 사실을 전하며 말이다. 제 외삼촌의 허물이 지나치게 많으니 린 오캄포를 깎아내리는 방법을 쓰는 모양이다. 대선 따위야 어떻게 되든지 관심이 없었으나 로터스를 건드린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킹은 모른 척하며 어쨌든 로터스가 자신의 곁에 스스로 왔다는 것에 기뻐하려 애썼다. 자신과 있지만 앙큼하게도 거짓말로 검사와 통화를 하며 킹을 ‘스토커’라 칭한 것 정도는 봐줄 만큼 즐거웠고 지나친 확신을 지껄일 만큼 기꺼웠다.

“…자신감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직하게 말해오는 로터스의 말은 퍽 옳았으나 그래도 킹은 그 자신감 하나로 살아왔기에, 거짓은 아니었다.

“그래, 맞아. 난 자신감이 과하지. 그래야만 그 모든 것이 내 손에 쉽게 들어오거든. 그 자신감 덕에 네 입술 정도는 지금 얻을 수 있어.”

입을 맞추자 습관적으로 입술을 벌려오는 로터스가 상당히 사랑스러웠다. 로터스는 그것이 못내 분한 듯 보였지만, 그것 따위 상관없었다. 침으로 축축하게 젖은 로터스의 입술을 바라보며 낮게 속살거렸다.

“이러면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나 있을까? 응?”

이렇게 굴면서 또 뒤로는 딴 생각을 하지. 씨발. 짜증을 숨기며 입술을 끌어올리자 로터스가 킹의 멱살을 잡아 몸을 뒤로 밀었다.

“제발 좀 닥쳐.”

화를 내며 욕을 뇌까리는 것이 못내 꼴려 로터스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살이 내려 가늘어진 것이 안쓰러웠다.

“섹시하네.”

로터스는 다시금 킹에게 입을 다물라며 강하게 말하고는 불쑥 낮게 중얼거렸다. 꽤나 음험한 말투였다.

“…너만 아니었다면.”

“나만 아니었다면?”

로터스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부드러웠다. 나만 아니었다면 네가 어땠을 것 같은데? 네가 제대로 살 수는 있을 것 같아? 그래서, 검사 따위의 협박을 받아들인 건가 보네. 좆같게도. 닥치라고 재차 말했음에도 계속 말을 지껄이는 킹이 짜증 났는지 로터스는 거칠게 입을 맞추며 킹의 입을 막았다. 킹은 로터스의 뜻대로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의 입 안을 혀로 헤집었다.

“이편이 더 보기에 낫네.”

흐트러진 차림새로 책상에 누운 킹을 보고, 로터스가 피식 웃음 지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킹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찰싹!

킹이 살며 얼굴을 맞을 일이 있었던가. 조슈아이던 시절에도 못난 놈을 때리다 어쩌다 얼굴에 상처를 입기만 했었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지 않았다. 로터스였으니까. 오히려 뜨끈해진 뺨이 꼴렸다.

“이런 취향이야?”

생각보다 힘이 세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놈은 아니었겠어. 덧붙여 이죽대고 싶었으나 흉흉한 로터스의 낯을 보며 대신 짧게 내뱉었다. 그럼에도 로터스는 불만스러운지, 거칠게 말을 읊조렸다.

“킹, 제발 좀 닥쳐.”

로터스의 닥치라는 말 따위 킹에게 위협 하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치명적이었다.

“닥치지 않으면 네 앞에서 사라질 거야. 영영.”

씨발. 망명을 생각하며 그딴 말을 지껄이면 내가 돌아버리지.

“넌 너무 똑똑해, 알아? 날 미쳐버리게 하는 걸 너무 잘 안다고.”

웃음기를 지운 채, 로터스를 강하게 끌어안고 분명히 속삭였다.

“넌 내게서 못 달아나.”

이것은 킹의 선언이었고 다짐이었다. 하지만 로터스는 킹의 뒷머리를 강하게 잡아당기며 속살댔다.

“그건 킹, 네가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거야. 건방지게 굴지 마.”

건방진 것은 로터스의 쪽이었으나 킹은 그것을 지적할 수 없었다. 외려 배를 내보이며 그것을 이용할 뿐이었다.

“그래, 로터스. 네가 결정하는 것이지. 나는 그래서 네게 끊임없이 구애해야만 하고. 그러니 네가 내 목숨줄을 쥔 걸 똑바로 알고 잊지 마. 잊어서는 안 돼. 네가 말했듯, 너는 내 주인이 된 거잖아. 안 그래?”

그래, 네가 다 결정해. 하지만 선택지는 하나뿐이야.

몸을 일으키며 로터스의 귓가에, 뜨거운 숨과 함께 작게 속삭였다.

“로터스, 너는 내 주인이고 난 네 소유물이야. 넌 절대 날 버릴 수 없어. 넌 날 두 손으로 꽉 쥐고 늘 놓지 않아야만 해. 나는 네 것이니까.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 또한 네 것이지.”

로터스는 굳은 얼굴이었다. 마치 저주를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 킹은 웃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채 그의 말을 기다렸고 로터스는 한참 뒤에나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무엇을 가지든 그건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거고 넌 가만히 기다리기나 해야 해. 킹, 너는 너무 건방지다고. 견디기 힘들 만큼.”

발칙한 쪽은 로터스였다. 또다시 킹의 뒤통수를 칠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맞아요, 당신께서 선택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킹은 그런 로터스를 사랑했고 기꺼이 속아줄 수밖에 없었다.

* * *

절벽에 매달려 있을지라도 킹의 손을 붙잡지 않을 것이란 거짓말로 자신을 화나게 하는 로터스가 못 견디게 힘들었다. 그를 당장 가둬 두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킹은 가까스로 참아 냈고 로터스와의 짧은 드라이브가 꽤나 즐거웠다. 애처럼 로터스의 얼굴이 떠올라 잠을 못 잘 정도였다.

결국 킹은 아침 일찍 로터스의 집에 찾아 가, 그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며 그 시간을 견뎌냈다.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로터스를 출근 시간을 한참 넘길 때까지 보고 있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자고 있는 로터스는 조용하고 얌전해서 말 그대로 천사였다. 이 이쁜 얼굴로 이쁜 짓만 하면 좋을 텐데. 눈을 뜨면 킹을 힘들게 만들었다. 꽤나 다정한 섹스를 하고 나서 킹이 완다와의 대화에서 던진 미끼를 덥석 물고 검사에게 넘겨버릴 정도로, 깨어난 로터스는 킹을 고단하고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 * *

킹은 잠들지 못한 채 로터스의 집 앞에서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린 오캄포, 하이투 대학교 특강 예정. 강연비 1만 완.]

킹에게 보내진 문자가 아님에도, 킹의 휴대폰 화면에 글자 하나 틀리지 않은 채 떠 있었다. 톡, 톡, 톡. 핸들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며 킹은 잠시 생각했다. 또다시 모른 척 굴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을 캐물을 것인지. 더 이상 알아낼 것도 없이 킹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로터스가 순순히 사실을 토해내는 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킹이 알고 있는 걸 로터스가 알아차린다면 또 겁이 나 도망칠 것이 뻔했다. 그 날 잠자리에 들기 힘들었던 것이 킹 혼자만은 아니었는지, 꽤나 이른 새벽에 로터스의 집이 밝아졌다. 킹은 5분도 기다리지 못한 채, 결국 로터스를 향해 전화를 걸었고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보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 여보.”

머리에 까치집을 지어 놓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로터스가 여전히 귀엽긴 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툭 던져진 그의 말조차 견뎌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뭐든 네가 싫어하는 거.”

로터스가 욕실 안으로 떠나 텅 빈 거실 안에서 킹은 잠시간 웃었다. 화를 참아 내려는 시도였지만 꽤나 쉽지는 않았다.

“내가 싫어하는 건 네가 이미 했잖아.”

듣는 이가 없는 공간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 킹은, 로터스가 있을 욕실로 들어가 그의 목을 조를 만큼 정말이지 버텨내기 힘들었다. 헐떡대는 로터스의 꼴은 참으로 애절하고 가련해서 킹을 즐겁게 했다.

“흑…!”

바들바들 떠는 몸이 안쓰러워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숨 쉬어.”

손과 말이 모순되기는 했으나 킹은 정말로 그가 숨을 쉬길 바랐다.

“흐, 윽……. ㄴ, 놔!”

숨을 쉬고 싶으면 차라리 빌어야지.

“숨 쉬라니까?”

그 입으로 모든 걸 다 토해 내.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어. 뭐든 해 줄 테니까. 그러나 늘 그렇듯, 로터스는 킹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손을 잡아 오기는커녕 킹의 머리채를 붙들어 왔다. 피식, 킹의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갔다. 짜증 나, 너무.

* * *

로터스가 나간 사무실 안에서 킹은 로터스의 의자에 몸을 기대, 로터스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멀리서라도 내가 살아 있길 바란다면 앞으로는 내게 다가오지 마. 네 앞에서, 아니 네가 모르는 곳에서 죽을 거야. 내 죽음의 순간을 네가 알 수 없게.’

“씨발, 너무 하네…….”

몇 시간 전에는 거짓으로라도 사랑을 속삭여 놓고 곧바로 죽겠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 하지 않은가. 그런 인간을 사랑해버린 것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했다. 거친 섹스 후에 킹은 간신히 모든 것을 참아 내려 애썼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로터스가 자신의 곁에 머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균열을 드러낸 이상, 돌이킬 수 없었고 로터스는 이미 킹의 곁을 떠난 후였다.

당장 로터스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로터스가, 자신의 죽음을 운운할 만큼 비이성적인 머리를 식힐 동안 로터스에게 접근해 허튼짓을 한 놈들의 싹을 잘라내야만 했다.

그들은 워낙 더러운 데다가 또 치밀하지 못하게 살아왔기에 킹의 손안에는 온갖 치부들이 있었다. 그리고 리암 카야노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휴 사토의 회사인 골든 디거의 주가가 올라가 그들이 희희낙락할 때 터트리는 것이 킹의 계획이었다. 웃는 낯을 일그러뜨리는 꼴을 직접 못 봐 아쉽겠지만 가장 기쁠 때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것만큼 즐거운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킹은, 휴 사토와 리암 카야노가 헛짓거리를 하는 걸 지켜보며 잠시간 기다리려 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이 최적의 때였다.

다양에선 다양 보훈병원의 무연고 사체 중에 속이 텅 빈 것들이 더러 있다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괴담처럼 떠돌았다. 그저 으스스한 공포심을 유발할 도시 괴담에 불과하다고 다들 여겼지만 킹은 그것이 왠지, 꽤나 근거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휴 사토의 카지노에서 빚을 갚지 못한 인간들은, 어떻게든 빚을 갚게 되어 있었고 다양 보훈병원의 원장이 휴 사토의 친척인 리암 카야노였으니, 꽤나 믿을 만한 소문이었다.

다양의 거의 모든 곳까지 그들의 세력이 뻗어 있어 쉽지 않았지만 결국 증거의 실마리를 발견했고 더욱 확실한 자료를 구해 보도를 내보낸 그사이, 휴 사토가 발 빠르게 도망쳐 결국 납치까지 감행한 것은, 나름 합리적인 킹으로서는 예상하지 못 한 일이었다.

* * *

어느새 태풍이 몰아쳐 시야를 어지럽히는 비를 뚫고 도착한 곳은 외진 곳에 세워진 창고였다. 너무 클래식했다. 조금 멀리 차를 세워 두고 입구를 지켜선 놈들의 머리를 쏘는 것쯤이야 손쉬울 정도로 뻔했고 한 놈의 머리통을 겨누며 로터스가 있는 방을 찾는 것은 지나치게 쉬웠다. 이렇게까지 얕보였나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밖에 무슨 일이야?”

멍청한 휴 사토가 남자의 몸 너머에서 지껄였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꾹 참으며 총으로 툭툭 치며 남자의 몸을 앞으로 밀었다.

“내가 무슨 일을 했지, 좀.”

너무나 좆같아서 지나치게 상쾌한 목소리로 말이 새어 나갔다.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채운 이 더러운 공간에 로터스가 잔뜩 젖은 꼴로 구석에 앉아 있는 것이 꽤나 엿 같았다.

“씨, 발…. 킹 미나콤…….”

더러운 중얼거림이 들렸다. 듣기 싫어 당장 총을 쏘고 싶었으나 겨우 꾹 참아내고 밝은 낯으로 웃었다.

“오랜만이네. 못생긴 건 여전하구나?”

“개, 새끼…….”

볼품없는 꼬락서니의 휴 사토가 벌벌 떨며 중얼거렸다. 총이 겨눠졌지만 무섭지 않을 정도로 휴 사토의 꼴은 초라했다. 그리고 휴 사토의 아래에서 일하던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꽤나 나이를 처먹고도 오줌보 하나 참지 못하고 질질 새고 있었으니 말이다. 발치에 퍼져가는 소변 냄새가 불쾌했다.

“대체, 배변 교육도 제대로 안 된 놈을 끌고 다닌 거야? 수준 하곤.”

휴 사토가 몸을 발발 떨다 결국 총을 한 발 발사했다. 탕! 큰 총소리가 공간을 울렸지만 두려울 리 없었다. 외려, 총알을 아끼는 게 좋을 텐데 생각했을 뿐이었다.

“씨발 새끼. 니놈 때문에, 씨발! 내 회사가!”

이빨을 갈며 소리치는 휴 사토 따위 더럽기만 했다. 그리고 오줌 또한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똑바로 살았어야지, 안 그래?”

방아쇠를 당기자 앞에 섰던 남자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휴 사토를 겨누자, 구석에 워낙 꼭꼭 숨어있어 있는 줄도 몰랐던 검사가 로터스의 목에 칼을 겨눈 채 킹을 바라보며 지껄였다.

“킹 미나콤 씨. 거기까지 하세요.”

힘없이 축 늘어진 로터스의 몸에 닿은 칼날이 킹을 참을 수 없이 분노하게 했다. 로터스의 눈을 바라보며 겨우 견뎌내야만 했다.

“검사님, 그냥 나라에서 주는 돈 따박따박 받고 평범하게 사는 편이 나았을 텐데, 씨발 왜 내 화를 돋워?”

로터스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엉망인 꼴에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찡그려버렸다. 하지만 이내, 킹이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으니 차분해지는 로터스의 낯이 꽤나 귀여웠다. 바닥에 있는 엽총을 눈짓하자 알아듣는 것도 아주 영특했다. 로터스가 애를 쓰는 동안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보기 싫은 휴 사토에게로 눈을 돌렸다. 잠시간 시선을 돌렸음에도 차마 총을 쏘지도 못한 채 벌벌 떨어 대는 꼴이 흉했다.

“계속 이렇게 있자는 거야? 대체 원하는 게 뭔데, 말을 해 봐. 불법주차 했다고 견인 당하기 전에 가봐야 한다고.”

감히 누가 킹의 차를 견인하겠냐마는, 농을 지껄여 휴 사토의 성질을 돋우고 싶었다. 그리고 이죽대며 말 몇 개를 떠들어대니 역시나 예상대로 휴 사토는 잔뜩 흥분해 콧김을 쏟아냈다. 말을 더하는 로터스를 향해 손가락을 펼쳐 보여 천천히 숫자를 셌다. 그리고 하나 남은 손가락을 접을 때 로터스가 바닥으로 주저앉았고 동시에 휴 사토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탕!

“악!”

“윽!”

사격에 재능이 있던 킹답게, 그가 쏜 총알은 그대로 휴 사토의 머리통으로 가 박혔다. 크게 비웃고 싶었으나 로터스가 겨누고 있는 장총 아래 검사가 아직까지 바들대고 있었기에 나중으로 미뤄야만 했다. 비굴하게 빌어 대는 검사를 무시하고 로터스가 헐떡대며 킹을 바라보았다.

“하아, 흐윽……. 어떻게 해?”

“네 맘대로.”

그 새끼는 상관없어. 너만 있으면 되니까. 방아쇠를 달칵 이는 소리는 들렸으나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사용법을 모르는 듯했다.

“…이거 어떻게 써?”

“이렇게.”

탕!

시끄러운 숨소리를 내는 검사가 짜증 나 총을 쏘니 금세 조용해졌다. 쿠콰쾅! 거리는 큰바람 소리와 빗소리만이 킹과 로터스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지쳤던 모양인지 로터스가 검사의 죽은 몸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더러운 곳에 앉아 있는 걸 지켜보기 힘들어 손을 내밀었다. 모든 것을 참아내려 했지만, 예상하지 않았던 말이 킹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다.

“…죽을 거야?”

‘다시는 찾아오지 마. 다음에 시체로 보고 싶은 게 아니면.’

로터스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시체가 된 널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해서 상상도 하지 못했어. 내게 다가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너는 시체가 됐을 거잖아. 시체가 된다는 말 따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뭐?”

되물어 오는 로터스가 미웠다.

“내가 네게 다가갔잖아. 죽을 거야?”

로터스가 했던 말을 빌려와 질책하듯 말했다. 지금 네가 죽는다면, 다행인 점 하나는 네 죽음을 알 수 있다는 거네. 네 말과 달리. 그래도 나는 네 죽음 따위 모르고 싶어. 네가 죽는 것 따위는 싫으니까.

로터스는 가만히 킹의 벌린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안은 먼지와 피로 더러울 게 분명했지만, 다물지 않았다. 시체들이 그득한 공간에서 킹과 로터스는 잠시간 침묵했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연 쪽은 로터스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킹이 로터스에게 바라는 것은 무척이나 많았다. 정말이지, 당장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숱했다. 그러나 당장 원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내 손을 잡았으면 좋겠어.”

내게 다가와. 죽지 않고 무사히.

로터스가 머뭇대는 그 잠시 동안 참으로 견뎌 내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내, 기다림에 보상하듯 로터스의 손이 킹의 손바닥 위로 가벼이 올라왔다. 킹은 참지 못하고 손을 움직여, 로터스의 손에 깍지를 끼고 그를 일으켜 끌어안았다.

“그래, 넌 못 죽는다고 했잖아, 로터스.”

지쳤던 모양인지 로터스는 힘없이 몸을 축 늘여 기대왔다. 그것이 뭐라고 너무 기뻤다.

“이번엔 제때 왔지?”

나름 뼈아픈 일을 농으로 던져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으나 로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미 맞고 고문당했잖아. 아파…….”

“늦었어?”

다시금 로터스의 얼굴을 보니…….

“…그러네. 좀 늦었네, 얼굴이…많이…….”

이제껏 본 적 없이 엉망이었다. 전에 납치당했을 때도 이것보다는 나았는데.

“그래도 귀여우니까 걱정하지 마.”

상처가 없는 이마를 살짝 매만지며 가벼이 속삭였다. 그러니 로터스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툴툴대왔다.

“안 귀여워도 돼.”

“여보는 뭘 해도 귀여울 거니까 그건 좀 힘들겠다.”

로터스가 풀어 달라는 듯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붓지 않은 뺨을 살살 문질러 물을 닦아 내고 입을 맞췄다. 입술에도 정체 모를 물이 묻어났지만, 로터스의 몸에 묻어 있는 것이라 상관없었다. 로터스는 킹에게 얼굴이 붙들린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킹은 로터스의 시선 끝에 나올 말이 두려워 자신도 모르게 불쑥 농을 던졌다.

“왜, 반했어?”

“아니.”

조급한 킹의 마음도 모르고 로터스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킹은 견디기 힘들어, 이런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얼굴을 가렸다.

“근데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반한 건 모르겠어. 근데…….”

킹은 로터스의 ‘근데’ 뒤에 지나친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근데, 조금은 근사해 보였어.’ 나 하다못해 ‘근데, 배가 고파.’ 따위를 기대했다. ‘근데, 여전히 싫어.’ 따위는 아니길 바랐다.

“…근데?”

“…평생 볼 얼굴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근데’의 뒷말로 이렇게 과한 말을 듣길 바랐던 건 진심으로 아니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기뻤다. 이제껏 바라왔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듣게 되었으니, 킹은 조금만 더 욕심내 보기로 결심했다.

“…갑자기 날 사랑하게 된 거야?”

이 말에는 ‘근데’ 따위 붙이지 마. 그냥 대답해. 그렇다고. 그러나 로터스는 이번에도 킹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건 아니야.”

“이 와중에 농담하고 싶은 거면 집어치워.”

이런 순간까지, 그런 말로 자신을 흔들어 놓는 로터스가 미웠다. 로터스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원망이나 질책은 아니었다. 애원이었다.

“이따위 상황에 농담하는 인간 아니야. 네가 오기 전엔 물고문도 당했고 얼굴도 맞았고 아프고 지쳐 뒤질 것 같은데 그딴 농담을 어떻게 해.”

“…그럼, 갑자기 왜?”

평생 믿어 본 적 없는 신을 믿어버릴 만큼, 로터스의 태도란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연약한 얼굴 따위 보이기 싫어 로터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킹의 얼굴 뒤로, 로터스의 분명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날 신경 쓰는 이도 날 아끼는 이도 날 구할 사람도 모두 생각해 봤는데 너밖에 없었어. 빌어먹게도 결국 받아 들어야만 했지. 옳고 그름을 떠나 내 선택지는 너만이 유일하다는 걸.”

침묵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쾅쾅대며 유리창을 흔드는 소리에, 로터스를 고쳐 안고 그제야 입을 열어 작게 속삭였다.

“…단 하나만 해주면, 그러면 내 모든 걸 줄게.”

“뭐를?”

“날 사랑한다고 말해. 기꺼이 속아줄게. 그 거짓말 하나면, 평생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해 줄게, 응?”

이미 과한 말을 받았으니, 진심을 바라는 것은 사치였다. 킹은 로터스가 거짓이라도 속삭여 주길, 그래서 자신을 완전히 받아주길 은근한 목소리에 담아 빌었다. 그러나 로터스는 침묵했고 킹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해졌다.

“거짓말 잘하잖아, 제발. 말해…….”

“…사랑해, 킹. 내가 있을 만한 곳은 네 옆인 것 같아.”

이제껏 들어왔던 그 어느 말보다 황홀했다. 섹스 중에 내뱉었던 사랑한다는 말 따위 비교되지 않았다. 둘 다 거짓이었으나, 이쪽이 왠지 조금 더 무겁고 짙다고 킹은 느꼈다. 저 말에 자신이 가진 진심을 섞으면, 충분히 사실에 가까워지리라.

“나도, 사랑해. 로터스.”

로터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제, 제 품 안에 있는 이는 달아날 수 없었다. 쿵쾅거리는 비바람 소리마저 달콤하게 들릴 정도였다.

“사랑해…….”

로터스의 이어진 속살거림이 킹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킹은 그를 더욱더 깊게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아이처럼 칭얼대듯 중얼거렸다.

“이제 갈까? 나 지쳐.”

“병원 데려다줘. 아파…….”

“여보라고 불러 주면. 이제, 그래도 되잖아.”

“병원 데려다주면.”

귓가에 속삭이듯 힘없이 뱉어진 말에, 킹은 결국 당장 차를 몰고 곧장 병원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큰 이상은 없었지만, 타박상과 찰과상 탓에 이곳저곳에 약이 발린 채 잠든 로터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병원에 두고 싶지 않았기에 호텔까지 데려와 킹의 큰 침대에 홀로 누인 로터스의 모습은 참으로 가련했다. 아직 쿵쾅대는 태풍 소리에 창문을 꽉 잠그고 문까지 꽉 밀어 잠가 거실로 나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로터스는 킹이 늘 자신감이 과하다 말했지만 킹이라고 해서 늘 자신하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랑에 빠진 이는 주체할 수 없이 연약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견고해진 듯했다. 마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약을 한 것처럼 말이다. 깜빡하고 치료받지 못한 손바닥의 따끔거리는 감각만이 킹을 현실로 일깨웠다.

쿠콰쾅!

천둥소리가 공간을 울려왔다. 킹마저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였다. 그리고 벌컥, 방의 문이 열리더니 눈을 크게 뜬 로터스가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혼, 자 두면 어떡해…!”

질겁한 채 헐떡대며 로터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팔을 벌리자 비틀대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는 걸 보아하니 꽤나 당황한 듯했다.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앉더니 몸을 끌어안는 게 놀라우면서도 귀여웠다.

“또 거기인 줄 알았어…….”

차분해 보여도 못내 충격이었나 보다. 로터스의 떨림이 가라앉지 않은 몸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있잖아.”

등을 느리게 토닥이자 로터스의 몸 떨림이 점차 잦아들더니 이내 차분히 가라앉았다. 로터스는 킹의 쪽으로 몸을 향하며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리고 등받이에 고개를 기대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집 유리 다 깨졌는데……. 비랑 쓰레기 다 들어갈 텐데…….”

이 와중에 그게 걱정이 된 모양이다. 킹은 입술 새로 웃음을 흘리며 로터스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교도소 또 안 가지?”

가만히 킹의 손길을 받아내던 로터스가 불쑥 몸을 일으키더니 킹을 분명히 응시했다. 짙은 색 눈동자에 자신이 비쳐 있어 즐거움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킹이 대답했다.

“내가 여보를 어떻게 보내.”

“나 말고 너.”

로터스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전 같으면 반색했을 거면서, 걱정을 하는 걸 보니 꽤나 기뻤다.

“널 두고 어떻게 가.”

“그래…….”

킹의 확정적인 답에 로터스는 다시금 소파로 깊게 몸을 묻었다. 그러나 여전히 킹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또 뭐가 궁금해?”

퍽 다정한 목소리로 로터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묻자 로터스는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대꾸했다.

“다이아몬드 해줄 거야?”

“…뭐?”

연약해 보이는 낯에서 나온 말은 킹을 꽤나 당혹스럽게 했다. 로터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분명한 목소리로 다시금 말했다.

“다이아몬드로 해준댔잖아.”

“…네가 원하는 건 모두 다 해줄게. 해주기로 한 거 해주면.”

“…그래, 여보.”

잠시간 침묵한 후 나온 로터스의 짧은 말에 킹은 바보처럼 웃고 싶어졌다. 그러나 대신 살며시 미소만 지으며 로터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속눈썹을 건드렸는지, 눈을 감았다 뜬 로터스는, 제 코앞에 있는 킹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근데, 담배 있어?”

제법 진지한 걸 물어오나 했더니 기껏 찾는 게 담배였다. 완다가 더러 찾아왔기에 그녀가 두고 간 담배 몇 갑이 있긴 했으나 왠지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없어. 여보가 싫다고 해서 끊었잖아.”

“나도 끊지, 뭐…….”

로터스는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이고는 몸을 뒤로 물리며 말을 흘렸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일으켰다. 킹이 당장 손목을 붙잡아 다시금 앉히자, 얼굴을 찌푸리며 킹을 바라보았다. 킹은 로터스의 불만스러운 표정은 못 본 척하며, 다시금 로터스의 뺨을 매만졌다.

“어디 가?”

“씻어야지.”

킹의 물음에 로터스는 대수롭지 않게 욕실을 가리켰다. 그제야 킹은 손목을 잡은 힘을 조금 풀며, 로터스의 뺨을 매만지고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씻겨줄까?”

“될 것 같아?”

“응.”

“안 돼.”

퍽 단호한 대답이었다. 전 같으면 고집을 부려 같이 들어갔겠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대신 로터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미소 띤 얼굴로 속삭였다.

“그럼 금방 나와. 기다리기 힘들어.”

“뭐라고 할 것 같은데?”

끝내 몸을 일으킨 로터스는 킹을 바라보며 무심히 물었다. 킹은 답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웃었다.

“빨리 나온다고.”

“사진이나 봐.”

“너무 해.”

“사랑한다면서. 견뎌.”

전이었다면 고통스럽게 들렸을 말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왠지 기뻤다. 로터스의 손등뼈를 매만지며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견딜게. 그리고 반지 디자인은 어떤 게 좋아?”

“제일 비싼 거.”

로터스는 킹의 손에서 제 손을 부드러이 빼내고는 홀랑 욕실로 들어갔다. 킹은 소파에 홀로 앉아 있어야 했으나, 로터스가 없는 그 시간이 이제는 괴롭지 않았다.

로터스 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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