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외전 조슈아 카스티요 1
조슈아는 아빠가 없다는 말쯤엔 화내지 않았다. 사실이었고 아빠 따위 필요 없었으니까. 아빠가 있다며 젠체하는 놈들은 다 조슈아보다 못생겼고 키도 작았고 멍청했기에 아빠가 있는 것 따위 더 나쁜 일이라고 조슈아는 생각했다. 가끔 제 아빠가 사줬다며 캐러멜을 자랑하는 못난 놈들의 웃는 낯을 볼 때면 속이 꼬이는 듯 불편해져 그놈들을 흠씬 패고 캐러멜을 독차지했으니, 아빠는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슈아의 엄마가 손도 못 쓸 약쟁이라, 몸까지 팔아가며 약을 한다고 떠들 때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조슈아를 향해 엄마의 ‘엄’만 지껄여도 총알같이 당장 주먹이 튀어 나갈 만큼. 아빠 얘기처럼, 그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거짓인 것도 아니다. 조슈아의 엄마인 카야는 몸을 팔지는 않았다. 정기적인 일을 할 수 없어 일용직을 전전해야 했지만 모두 합법적인 일에 불과했다. 그래도 손도 못 쓸 약쟁이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카야의 젊을 적을 볼 때마다 조슈아는 제 엄마의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추측한다. 그 사이엔 분명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빠가 있을 것이라,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임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조슈아가 태어나기 전의 카야는 길을 걸으면 남녀노소가 돌아볼 만큼 미인이었다. 그 미모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 조슈아가 직접 보아온 카야 역시 빼어난 미모를 갖고 있었으나 그때만큼은 아니었다.
조슈아는 카야의 사진에서 단 한 번도 아빠를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잘려나간 듯, 거칠게 찢긴 사진을 볼 때마다 그 자리에 아빠가 있었을 것이라 조슈아는 늘 생각했다. 하지만 올해 봄, 대마초를 피우고 단잠에 빠진 카야를 옆에서 돌보던 조슈아는 카야의 지갑에서 꼬깃꼬깃 접힌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그 사진은 어디에서 찢겨 나온 듯, 조슈아가 보아온 카야의 사진이 늘 그런 것처럼 거친 표면을 갖고 있었다. 그 사진 속에는 짙은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카메라를 향하게 온화하게 미소 짓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이제껏 보아온 적이 없었다. 드문드문 조슈아의 집을 찾아오는 손님 중에서도 본 적 없던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카야의 엄마인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조슈아의 외할머니 말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카야와 전혀 닮지 않았으며 카야의 또래였다. 카야의 자매일지 모른다는 두 번째 추측이 떠올랐지만 역시나 닮지 않았기에 탈락이었다.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며 그 여자의 정체를 생각해보았으나, 카야가 몸을 뒤척거리자 조슈아는 놀라 사진을 얼른 도로 집어넣었다. 몽롱한 정신에서 깨어난 카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고는 조슈아로 시선을 옮겨 또 한 번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금 건조한 종이에 말린 대마초를 집어 불을 붙였다.
조슈아는 그 냄새가 끔찍하게도 싫었지만, 대마초 연기가 사라질까 늘 두려워했다. 카야는 늘, 픽 죽어버릴 것처럼 불안했으니까. 집에서 대마초 연기가 새어 나오지 않는다면 카야가 죽었다는 뜻이니까.
여느 날처럼 콧물을 질질 흘리는 못난 놈에게서 그놈의 아빠가 사줬다는 초콜릿을 빼앗아 돌아온 날, 허름한 집에서 익숙하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조슈아는 들고 있던 초콜릿을 당장 떨어트릴 만큼 놀라 껑충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꽤 곱게 차려입은 카야와 카야의 지갑에서 본 그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사진 속보다 머리가 더 길다는 점만 빼면 그대로였다. 사진에 찍힌 카야가 지금의 모습과 다른 것과 달리 말이다. 그 여자는, 마르고 긴 다리를 후들거릴 정도로 놀라 들어온 조슈아를 돌아보더니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즐거워 보이는 낯이 아니라는 것쯤은 지나가는 개도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표정이었다.
“…쟤가 그 새끼 씨인가 보지?”
시선은 조슈아를 향해오고 있었지만 분명 카야에게 묻는 말이었다. 카야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다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인간 아이야.”
“낯짝이 번지르르한 게, 꽤나 닮았네.”
“난 너랑 닮았다고 생각했어, 완다.”
여자의 중얼거림에 카야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여자, 완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마구 찌푸려 대며 크게 웃었다. 그녀의 눈썹과 입가가 잔뜩 비틀릴 만큼.
“떨을 너무 오래 했나 봐? 너랑 그 새끼 사이에서 난 자식이 어떻게 날 닮아? 너랑 나랑 아무리 자 댄다고 해도 애새끼가 생겨?”
“…말조심해. 그래도 애 앞이야.”
“애 앞에서 대마 피워 댄 거는 참 좋은 교육이지, 안 그래?”
완다는 카야의 질책이 우습다는 듯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구석에 몸을 웅크리며 완다의 시선을 피해내려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집요했다. 조슈아는 허름하고 더러운 욕실에 앉아 귀를 틀어막고 그녀들의 대화를 듣지 않으려 했다. 왠지, 듣고 싶지 않았다. 초콜릿 말고 사탕도 더 빼앗아올걸. 볼을 가득 채울 만큼 큰 사탕을 먹으면 이 정체 모를 울렁거림 따위 가라앉을 텐데. 벽을 기어 다니는 작은 도마뱀을 바라보며 조슈아는 큰 사탕을 떠올렸다.
턱이 나가 버릴지 모를 만큼 아주아주 큰 사탕을 말이다. 그러나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도마뱀이 거슬려 상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결국 욕실 밖으로 나가 구석진 응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곳이 그나마 서늘하고 시원했다. 무릎을 모아 앉아 턱을 괴며 해가 지기를 바랐다. 해가 지면 손님이 돌아갈 테지. 끔뻑끔뻑 감겨오는 눈꺼풀을 거부하지 않으며 조슈아는 결국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을 방해하는 매캐한 냄새에 얼마 잠들지 못하고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마초의 냄새와는 달랐다. 고개를 들어 보니, 완다가 긴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조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는 연기가 길게 피어오르는 담배가 걸쳐 있었다.
“깼네.”
완다가 작게 중얼거리며 조슈아의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았다. 조슈아는 큰 눈을 부릅뜨며 완다에게 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완다는 그저 우습다는 듯 피식 웃으며 어린 조슈아를 비웃었을 뿐이었다.
“성깔 있네.”
폐 안에 담아 넣었던 희고 매캐한 연기를 조슈아의 얼굴에 내뿜으며 함께 내뱉어진 말이었다. 뒤늦게 눈을 감아 보았지만 안구가 따끔거렸다. 콜록대며 완다를 노려보았지만 완다는 우습다는 듯 조슈아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쳤다. 골이 울릴 만큼 강하게 말이다.
“애새끼가 성질머리가 더럽단 말이지.”
정작 맞은 것은 조슈아 자신이건만 성질이 더럽다고 욕을 먹어야 하는 것도 조슈아였다. 억울했다. 조슈아는 고통에 맺힌 눈물이 흐르지 않게 애써 참아 내며 완다를 바라보았다. 완다는 더 이상 그런 조슈아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조슈아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일으켰을 뿐이었다.
“가자.”
“어디로?”
해가 막 져가는 습하고 더운 거리로 완다가 조슈아를 이끌었다. 허름한 집을 돌아보았다. 엄마가 그리운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손을 잡은 여자가 자신을 팔려고 하는 것인지, 그리고 제 엄마가 자신을 팔아넘긴 것인지 헤아렸을 뿐이었다. 제 엄마인 카야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나 좋은 양육자는 아니었으니 카야에게 집착할 이유가 조슈아에게는 없었다.
완다는 조슈아를 비싸 보이는 검은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춥기까지 한 차 안으로 들어서며 조슈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을 팔아버릴 것이라면 이렇게 비싼 차 안에 태우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차가 이것뿐이래도 트렁크에 태우면 태웠지 멀쩡한 좌석에 태워 안전벨트를 매라며 윽박지르진 않았을 거다.
조슈아는 난생처음 비행기에 타, 이제껏 본 적 없는 크고 깔끔한 집으로 옮겨져 왔다. 급변한 자신의 상황이 얼떨떨하지 했으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완다가 자신에게 별다른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슈아는 이제껏 입어 본 적 없는 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비싼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어떤 노인과 한 방에 앉게 되었다. 조슈아는 제 앞에 있는 노인보다 제 앞에 놓인 값비싼 쿠키가 더 신경 쓰였지만 망신시키면 큰일 날 줄 알라는 완다의 겁박에 입을 꾹 다물며 얌전한 척 앉아 있었다.
“그래서, 데려와 키운다고? 네가, 애를?”
꽤나 온화하게 생긴 노인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완다를 향해 우습다는 듯 되물었다. 완다는 조슈아를 눈짓하고는 대꾸했다.
“내가 키우진 않겠지. 근데 내 호적에는 올린다고.”
다리를 꼬며 머리를 쓸어 넘기는 제 딸의 모습에 노인, 닉은 꽤나 분통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애 앞이었기에 꾹 성질을 내리누르고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결혼 안 할 거면 애라도 낳으라고 했었지. 누가 애를 데려오래.”
참지 못하고 쿠키가 먹고 싶어진 조슈아는 결국 닉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뻗어 쿠키를 집었다. 부녀의 대립에도 조슈아는 눈치 없이 바삭대며 쿠키를 씹어 우물댔다. 이제껏 먹어 본 적 없는 놀라운 맛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등받이에 팔을 걸친 완다는 그런 조슈아를 보며 피식 웃더니 제 아빠를 향해 짐짓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나 애 못 낳아.”
사실을 말하는 듯한 단정적인 말투였다. 아무리 제 맘대로 안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완다는 닉에게 금지옥엽 키운 소중한 딸이었다. 걱정되어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병원에서 뭐라는데.”
“건강하대. 자궁이랑 난소랑 다 아주, 건강해 미치겠대. 근데 나는 남자랑 섹스를 못 하겠거든.”
돌아온 완다의 답은 상당히 산뜻했다. 완다는 쿠키 두 개를 더 집어 조슈아에게 내밀어 주고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으며 제 부친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옛말을 떠올리며 말이다. 하지만 닉 미나콤이, 사람이 웃고 있다고 침을 뱉지 못할 성품의 인간이었다면 홍징을 주름잡는 마피아가 됐을 리 없다. 완다는 찻물에 옷과 머리가 홀딱 젖은 채로 털레털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린 조슈아만큼은 뽀송뽀송했다. 그것이 닉 미나콤이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아량이었다.
깨끗한 옷을 입고 넓은 방에서 푹 자고 일어난 조슈아는 그제야 여기까지 오게 된 연유가 궁금했다. 이곳은 지나칠 정도로 컸고 깔끔했으며 침대도 무척이나 푹신했다. 이제껏 조슈아의 삶을 채워온 것들과는 너무나 달라 어리벙벙할 정도였다.
광이 날 정도로 깔끔한 바닥에 신발을 신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거실로 뛰쳐나갔다. 역시나 광활한 그곳에는, 완다가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아니, 보는 것이 아닌 찢어 던진다는 표현이 옳았다.
“일어났네.”
신문 낱장을 길게 반으로 찢어내며 완다가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머뭇대다가 완다를 향해 다가갔다.
“나 여기 왜 데려온 거야?”
완다는 나머지 신문을 마저 던지더니 옆에 놓인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들었다. 아침부터 아이를 앞에 두고 거리낌 없이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완다는 입매 한쪽을 끌어올리고 씩 웃었다.
“그냥.”
‘그냥’이란 말이 틀려먹었다는 건 어린 조슈아도 알았다. 그냥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 땐 카야가 길거리에서 받은 판촉용 싸구려 사탕을 조슈아에게 주었을 때나 그냥이 옳았다. 조슈아는 결심한 듯 숨을 흐! 하고 들이 내쉬고는 완다의 맞은 편에 가 주저앉았다. 소파는 푹신하게 조슈아의 몸을 부드러이 받아냈다.
“나 왜 데려왔어? 카야 때문이야?”
카야는 완다의 사진을 소중한 것처럼 지갑 속에 보관했다. 하지만 앨범 속 사진은 카야만 남겨진 채 모두 뜯겨 나가 있었다. 조슈아는 너무 어려 카야와 완다의 관계가 도대체 무엇인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지만, 완다와 카야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건 깨달을 만큼은 컸다.
“니가 알아서 뭐 할 건데?”
완다는 조슈아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금 깊게 담배를 빨더니 후, 연기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뿌연 연기가 완다의 얼굴을 가리며 조슈아의 시야를 어지럽혔으나 조슈아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완다를 마주 보았다. 그런 조슈아가 재밌다는 듯, 완다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담배를 값비싼 소파에 아무렇지 않게 비벼 끈 그녀는, 다시 신문을 집어 올리고는 찢어내며 대꾸했다.
“조금 더 대가리가 커지면 알려 줄게.”
“이미 충분히 커!”
조슈아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애들을 덩치로 이길 만큼 키도 몸도 컸다. 완다의 명치쯤에 정수리가 닿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완다는 그런 조슈아가 우습다는 듯 신문을 구겨 조슈아에게로 던졌다.
“크긴 뭐가 커. 새대가리보다 작은데.”
톡. 종이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조슈아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완다는 이제 지겹다는 듯 신문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아주 일상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투로 조슈아를 향해 물었다.
“너 이름 뭐 할 거냐.”
“이름?”
구겨진 신문을 펴, 안을 살펴보던 조슈아가 고개를 치켜들고 완다를 바라보았다. 완다는 귀 한쪽을 후비며 미간을 찌푸렸다.
“귀 안 좋아? 이름 뭐 할 거냐고. 이제 나랑 살아야 해, 너. 지금 쓰는 이름은 안 돼, 짜증 나니까.”
어린 조슈아가 미래의 자신이 가졌을 걸 상상했을 때는 사탕으로 가득 찬 유리병이나 튼튼한 집이었지, 이름은 아니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고른 이름을 말이다. 조슈아는 구겨진 신문지를 손바닥으로 펴 종이를 바라보다가, 익숙한 글자 하나를 느릿하게 발음했다.
“키, 잉.”
왕이 등장하는 영화의 줄거리를 써 놓은 페이지에서 조슈아가 읽을 수 있는 단어는 오로지 ‘왕 KING’뿐이었다. 왕. 꽤 괜찮았다.
“킹으로 할래.”
글자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조슈아가 그 단어를 알고 있었던 건, 최고라는 뜻을 표현할 때마다 늘 쓰이는 그 단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에서 비롯되었다는 신성한 조슈아 보다, 어디에서나 최고인 킹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키도 외모도 힘도 조슈아가 살던 동네에선 조슈아가 일등이었기 때문에.
“킹, 킹 미나콤?”
완다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대강 되묻자 조슈아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응, 킹.”
완다는 그런 조슈아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알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바닥을 가리켰다.
“그래, 킹. 여기 좀 치워 봐.”
킹이 된 조슈아는 손에 쥐었던 신문지를 완다를 따라 찢어 던지며 대꾸했다.
“싫어.”
조슈아가 들고 있던 신문 조각은 완다가 들고 있던 것의 일부이기에, 완다가 찢어 놓은 조각보다 훨씬 작았지만, 더 지저분하게 바닥을 더럽혔다. 완다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불만을 표했지만 킹을 질책하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완다가 어질러 놓은 집을 치우는 건 다른 이의 몫이었고 킹은 완다처럼 소파에 앉아 치워지길 기다리는 쪽이었기에. 그리고 완다도 킹도 치우지 않은 신문은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졌다.
* * *
완다의 키를 넘긴 지 한참 되었던 시기의 킹은, 완다와 카야의 관계를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일단 완다는, 자신이 여자를 만나는 걸 숨길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에 갔다 돌아가면 란제리 차림의 여성들이 킹에게 인사를 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 엄마의 로맨스와 과거의 성생활을 마주했음에도 킹은 불쾌해한다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대마를 피워 대던 카야의 모습보다 여자와 연애하는 카야의 모습이 나았고, 다른 이들처럼 제 엄마를 애틋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야는 카야였고, 조슈아는 이제 킹이었다. 가운을 대강 동여 묶은 채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완다를 말없이 바라보던 킹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대뜸 그녀를 향해 물었다.
“카야를 사랑했어?”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고 곧바로 새것을 꺼내던 완다가 킹을 힐끔 바라보았다.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아직 젖어 있는 완다의 머리가 거슬려 수건을 가져다 덮어주었건만 완다는 제 머리를 닦아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긴 머리를 짜내는 건 킹의 몫이었다. 완다는 제 호적상 아들인 남자가 머리를 닦아 내는 걸 가만 내버려 두며 담배를 깊이 들이마시더니 담뱃갑을 열어 킹에게 내밀었다.
“피워.”
킹은 아직 십 대였지만 제 의붓엄마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완다가 물고 있는 담배 끝에 붙여 물을 옮겨 붙이고는 제 입에 담배를 물었다. 후. 매캐한 담배 연기가 킹의 몸 안을 채웠다. 젖은 수건을 바닥에 던지고 소파 등받이에 대강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그제야 완다는 입을 열었다.
“사랑하지.”
“현재형이네.”
킹이 웃음과 함께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두 사람분의 담배 연기가 구름을 만들 듯 소파 위를 떠 다녔다.
“카야를 생각하면 어떤데?”
킹의 물음에 완다는 등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작았던 아이가 어느새 커, 벽처럼 완다의 등 뒤를 막아오고 있었다. 완다가 다 탄 담배 끝을 등 뒤로 건네자 킹이 건네받아 바닥으로 던지더니 구둣발로 밟아 짓이겼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결국 옆으로 소파에 길게 누운 완다가 중얼대듯 답했다.
“속이 답답해. 속이……. 미칠 것 같아. 너만 보면, 그 애를 데려간 그 새끼가 생각나서 죽고 싶고 죽이고 싶어져.”
‘그 애’가 카야고 ‘그 새끼’가 킹의 부친임 분명했다. 킹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제 부친과 마지막으로 보았던 제 모친을 생각하다, 입 밖으로 내뿜은 담배 연기와 함께 모두 흩어냈다. 완다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분명하게 킹에게 와 닿아, 담배를 바닥으로 버려 짓이기고는 등받이에 팔을 올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럼 왜 데리고 왔어? 딴 놈이랑 가버린 여자 따위 못나게 살라며 저주를 해도 모자랄 판에. 나였으면 당장 고아원에 데려갔을 텐데.”
킹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하! 완다가 가슴이 크게 부풀 정도로 숨을 터트렸다.
“그게 맘대로 되는 줄 알아? 그 애가 우는 얼굴만 생각해도 속이 미어지는데. 걔만 생각하면 내가 너무 무력하고 약해진 기분이야……. 걔가 싫어하는 짓은 못 해……. 절대로…….”
완다가 양손을 얼굴에 덮었다. 분명하고 똑바른 음성으로 시작되었던 말은 미약한 중얼거림으로 끝나 제대로 맺어지지 못한 채 공간을 떠돌았다. 킹이 이제껏 본 적 없던 연약한 모습이었다. 킹은 다시금 소파 등받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팔짱을 낀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시선을 벽으로 돌렸다. 완다의 약한 부분 따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애절하네. 그러니까 사랑 같은 걸 왜 해?”
그리고 조소했다. 완다는 벌떡 일어나 손에 잡히는 것을 킹을 향해 던졌다. 그것은 화병이었고 날아가며 물과 꽃을 여기저기 흩뿌리더니 킹의 넓은 등에 가 박았다. 킹의 등에서 소파로 떨어진 자기는 깨지지 않았지만, 안에 있던 것이 쏟아져 엉망이었다.
“쿨럭!”
등을 강하게 쳐온 탓에 킹은 기침을 쏟아냈다. 분명 피해낼 수 있었으나 굳이 맞아주었던 게 후회가 되었다. 등에 큰 멍이 들었을 게 분명했다.
“너무 하네.”
킹이 몸을 일으켜 완다를 바라보자 완다는 더러워진 소파를 눈짓했다.
“치워.”
명령조에도 킹은 움직이지 않았고 완다 역시 두 번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 다리를 적신 물을 짜증스럽게 털어내며 제 의붓아들을 뚫을 듯 노려보았다.
“너는 너보다 더한 새끼를 만날 거야. 어르고 달래도 답이 없는 그런 새끼 말이야. 그리고 결국 그 새끼를 너무나 사랑하게 돼, 네 맘대로 안 돼 울면서 날 찾아오겠지.”
킹은 자신의 우는 얼굴을 상상하다 우스워져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지막으로 운 것이라곤, 기억도 안 나는 어릴 적뿐이니까. 완다가 벅찬 양의 공부와 운동을 시켜도 킹은 이를 악물었지 울던 인간이 아니었다. 발끝으로 널브러진 꽃을 짓이기며 킹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조소했다.
“그걸 완다가 어떻게 알아?”
홍징에서 아무리 완다 미나콤이 신처럼 산다고 해도 그녀는 신이 아니었다. 허무맹랑한 미래를 말한다고 해서 이뤄질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일어날 일의 계획을 이야기하듯 확신하는 투로 대답했다.
“넌 카야와 내 아들 새끼니까.”
너와 나 사이에서 애가 어떻게 생기겠냐며, 카야를 조소하던 완다의 첫 모습이 킹의 머릿속을 잠시간 스쳤다. 넌 내 아들이 아니라며 거듭해 말하던 완다가 결국 자신을 아들이라 칭하는 그 말이 퍽 놀라워 킹은 완다의 예언을 쉬이 잊고 말았다. 그리고 킹은 그것이 신화 속 신탁보다 강한 미래의 예고이자 저주임을 나중에 가서야 깨달았다.
* * *
완다는 킹을 꽤나 혹독하게 가르쳤다. 킹 역시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쓰레기 같던 조슈아의 집보다야 튼튼하고 값비싼 킹의 집이 더 낫다는 것쯤은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었었으니까. 킹은 대체로 완다를 존중했지만, 완다가 멍청하다고는 늘 생각했다. 과거의 애인을 못 잊는다고 그 애인의 애를 데려다 키우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둔한 짓이었기에.
완다가 킹을 카야와 자신 사이의 아들이라 칭한 적이 있다고 해서, 킹은 완다를 진정한 엄마나 가족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완다는 킹에게 베푸는 쪽이었고 킹은 그것에 감사해야만 한다는 걸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깨끗한 집과 옷을 입으며 질 좋은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한 대가로 늘 완다에게 성과를 내보여야만 한다고 킹은 생각했다. 그래서 갑자기 교도소에 가게 되었을 때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간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들에 길들었다고는 하나, 킹은 결국 다 무너져가는 집에서 나고 자란 조슈아이기에 교도소 생활이 불편할지라도 고생스럽지는 않았다. 더욱이 멍청하고 못난 놈들을 이용해먹고 해를 가한데도 뭐라 할 사람이 없어 소소하게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쭉 평생 살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형기를 채우는 동안은 나쁘지 않을 만큼 살 만했다. 조금 무료해지면 담뱃값으로 폭리를 취해 자신의 앞에 설설 기는 놈들을 보는 것도 꽤나 재밌었고 약을 들여올 구멍을 점차 조이며 약 장사하는 놈들을 애타게 만드는 것도 꽤나 할 만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분홍 옷을 입은 신입들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골려 줄 놈을 찾으러 식당에 들어갔을 때, 킹은 평소와 다른 이를 하나 발견했다.
땅딸막한 놈들 사이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키는 큰데 구부정한 자세가 우습다.
로터스를 처음 보았던 킹의 감상이었다. 킹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점차 습관처럼 바르게 변하는 몸을 보고 또 한 번 작게 웃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이 꽤나 애처로웠지만 그게 더 눈에 띈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새끼들이 자신에 대해 떠드는 것을 들으면서 킹은 그 목덜미만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가 점차 고개를 돌리자 킹은 그제야 목덜미 주인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적당히 보기 좋게 올라온 이마와 높은 코, 섬세한 입술이 꽤나 훌륭했다. 앞 얼굴은 더 좋을 게 분명해 킹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고 그의 시선이 킹을 향해 곧바로 꽂혀 왔다. 갈색 눈동자와 섬세한 이목구비, 굳세게 닫힌 입까지 누가 봐도 미남이라 칭할 얼굴이었다. 킹이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치자 떠올린 것은, 꽤나 짧고 간결했다. 꼴린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고 화들짝 놀란 로터스와 마주 보며 킹이 처음 한 생각이었다.
멋모르는 새끼들이 가끔, 킹의 담배 시간을 방해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킹은 굳이 손을 더럽히지 않고 옆에 두던 제이제이와 투에게 맡기곤 했다. 킹은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고 싶은 것이지 괜한 싸움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애초에, 싸울 만한 놈들이 없었지만 말이다.
차가운 화장실 벽에 등을 기대고 최근 킹을 귀찮게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킹은 교도소에 와서도 완다가 주는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래도 바깥보다는 여유시간이 많아 조그만 취미를 시작했는데, 그건 바로 돈세탁이었다. 얻는 돈은 꽤나 적었지만(일반적인 기준에선 거금이나 킹의 기준에선 용돈에 불과했다.) 귀찮은 일들까지 따라와 그만둘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 재미없는 교도소에서 그런 취미라도 있지 않으면 버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 킹은 이번 일까지는 하자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다시금 담배를 빨며 복잡한 머릿속을 지워내려는데 누군가 불쑥 들어와 킹의 휴식을 방해했다. 씨발.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그렇게 반갑지 않은 손님은 아니었다. 식당에서 보았던 꼴리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또다시 눈이 마주쳐 놀라 바들대는 눈동자를 보자니, 갑자기 즐거워지는 걸 느끼며 연기를 후 뱉어냈다. 그리고 뿌연 연기가 그 얼굴을 감상하는 걸 방해하는 것이 퍽 짜증 난다고 생각했다. 연기는 금세 사라졌고 다시금 그놈이 보였다. 칫솔을 물어, 볼 한쪽이 부푼 꼴이 꽤나 귀여웠다.
이제껏 보아왔던 인간 중에 손에 꼽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어릴 적부터 집에 드나드는 완다의 애인들과 숱하게 마주쳤던 킹은, 이른 10대부터 성에 눈뜰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섹스했던 대상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고 대여섯 살 많은 여자란 것만 생각이 났다. 첫 대상이 여자였다고 해서, 남자를 꺼리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완다의 집에서 자라났는데 거부감을 가질 리 없었다. 취향을 헤아릴 만큼 충분한 경험을 가진 후에는, 임신 가능성이 없고 체력이 좋은 남자 쪽이 편하다고 킹은 생각했다. 킹은 성욕이 강한 편이었지만 까다로웠다. 적당히 봐줄 만한 얼굴과 몸 정도로는 섹스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교도소에 들어온 기간 동안 킹은 강제 금욕 기간을 가져야만 했다. 뭐, 섹스가 아니어도 끓어오르는 욕구를 분출할 방법은 더러 있었다. 폭력과 마약 등 위법이 넘쳐나는 공간이니 말이다. 하지만 저 얼굴을 보고 나니, 오랜만에 마음이 동했다. 밖에서 보아왔던 얼굴과 몸보다, 이 볼품없고 초라한 교도소에서 본 그 얼굴이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했다.
킹의 작은 욕지거리를 놓치지 않은 제이제이가 그 얼굴을 향해 으르렁댔다. 그러자 기죽은 그 얼굴이 꽤 애처로워 보였다.
“미안해. 여기 사람이 있는 줄 몰랐네…….”
아, 목소리도 괜찮네.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벌벌 떠는 저 얼굴이 흥미로워 결국 그 얼굴을 향해 손짓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거기 핑크. 여기로 와 볼래?”
킹이 말한 ‘여기’는 자신의 앞이었지만 그 얼굴은 겨우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왔다. 딴 놈 같았으면 화가 났겠지만 볼만한 얼굴 탓인지 웃음만 나왔다.
“더 가까이.”
재차 말했건만 그 얼굴은 만족스러울 만큼 가까워지지 않았다. 결국 킹이 몸을 움직인 후에야 충분히 가까워졌다. 지척에서 본 얼굴은 더 잘 보기 괜찮았다.
“뭐로 들어왔어?”
“횡령…….”
나름 다정하게 물었지만 돌아온 목소리는 기가 죽어 시무룩했다. 횡령이라. 생각했던 죄목은 아니었지만 뭐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려 보이는데? 뭐, 집이 회사를 운영하나? 아빠 돈 훔쳤다가 잡혀 왔어?”
“…대학교에서 장학금 관련 일 하다가.”
대학교에서 일을 했다. 음, 어울렸다. 꽤 넉넉한 집에서 자라난 놈들도 큰돈을 만지기 시작하면 도는 법이니까. 하지만 킹이 궁금한 건, 앞에 선 죄목보다는 다른 것이었다.
“이름은 뭐야?”
“로터스 리…….”
로터스, 로터스……. 꽃이라니 퍽 잘 어울렸다.
“로터스? 연꽃? 아니면, 옛날 그리스 신들이 먹었다던 과일? 예전에 책에서 봤는데, 그거, 먹고 싶더라고. 근데 뭐, 나는 약은 팔아도 약은 안 하니까.”
킹이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하자, 그 얼굴은 눈을 내리깔고 눈치만 보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 혹시 불교 쪽이라 막, 서양 신들은 불쾌하고 그런가? 내가 또 배려가 없었네, 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더 했다가는 울 것 같아 결국 놀리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 쓰레기장에서 쓸 만한 얼굴을 만난 것을 기념하며 선물을 하나 주기로 결정했다.
“제이제이, 하나 줘봐. 내가 또 그러면 공양을 올려야지?”
제이제이를 향해 손을 흔들자, 늦게서야 담배 한 개비가 손끝에 걸렸다. 그리고 로터스의 앞주머니에 담배를 꽂고 툭툭 두드렸다. 운동을 한 모양인지, 손바닥 아래로 닿아 오는 가슴이 제법 판판했다.
“자, 공양 겸 입소 선물이야.”
그리고 말이 없는 로터스를 상대로 퍽 다정하게 말했다.
“편하게 화장실 써.”
* * *
미인은 고생한다더니 로터스는 볼 때마다 피로해 보였고 킹은 그런 로터스를 골리는 것이 퍽 즐거웠다. 꽃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차마 불만을 표하지 못하고 씰룩대는 입술이 너무 웃겼다. 로터스의 얼굴이 웃겨 깔깔대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벌써 두 번이나 휴식을 방해받다니. 그간 자신이 너무 만만해 보였던 것인가 생각해보았으나, 저번에 족쳐 놓은 새끼의 멍이 가시기도 전이니 벌써부터 이러는 것은 퍽 발칙한 짓이었다. 곧 조져 놓을 상판대기가 무엇인가 확인하기 위해 킹은 천천히 눈을 떴고, 킹의 앞에는 빛을 등진 로터스가 서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속눈썹이 딱…….
“어? 데이지네.”
데이지 같았다. 손을 까딱거리니 당장 도망가고 싶은 얼굴로 머뭇거리는 것이 퍽 웃겨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 몸은 꽤나 쉬이 끌려와 킹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로터스의 몸이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갔더라면, 허벅지에 놓인 킹의 성기 끝이 그 고운 손에 닿았을지도 모른다.
“야, 데이지. 너 변태야? 사람 자는 걸 왜 봐.”
킹은 괜히 수상하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럼 담배 사러 온 거야? 담배 시작했어? 교도소가 제2의 학교이긴 하지.”
은근한 목소리에도 대답이 없다. 조금 재미없어져, 로터스의 몸을 잡은 힘을 살짝 푸니 긴장되어 굳었던 그의 근육이 본래대로 돌아갔다.
“그럼 왜 왔어?”
킹은 다시금 짧게 물었다. 그럼 여기 왜 왔는데? 벌써 내 좆 빨아주러? 머릿속으로는 덧붙였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로터스는 눈을 잠시 굴리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도서관 갔다가 방 가는 길에 길 잃었어.”
바보인가? 그 짧고 분명한 길을 잃어 여기까지 왔다는 뜻인가?
“대졸이라면서 멍청하네. 대학 졸업은 어떻게 했어?”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바라보자 로터스의 얼굴이 성이 난 듯 조금 붉어지더니 이내 짧고 거칠게 되물어 왔다.
“너는?”
“그런 질문도 할 줄 아네?”
살짝 골이 팬 로터스의 미간이 제법 발칙해, 킹은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뒤 상쾌하게 대꾸했다.
“중퇴.”
킹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꽤나 비싼 사립국제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명문대에 진학해,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거쳤으나 한 학기만 다니고 때려치웠다. 일이 바빴고 일이나 하는 게 완다에게나 자신에게나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학교고 나발이고, 슬금슬금 뒤로 멀어지는 로터스가 신경 쓰였기에 다시금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킹과 로터스의 거리가 다시금 좁혀졌다.
“나 몰래 어딜 가? 난 나 몰래 그러는 거 진짜 싫어해. 알아 둬.”
나직하게 속삭이자, 로터스가 조금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옷 바뀌었네.”
분홍색 옷을 입었었는데 지금은 자신과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연보라색 옷이 이제껏 보아왔던 어떤 새끼들보다 잘 어울렸다.
“본 방도 받았겠네?”
“응.”
“룸메이트 누구야?”
“윈.”
“누구더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윈, 윈……. 굳이 알 필요가 없으니 기억나지 않는 거겠지. 그럼, 딱히 신경 쓸 놈은 아니었다.
“그 매점에…….”
“아. 그 꼬마.”
로터스가 말끝을 흐리며 문밖을 가리켰다. 아, 아. 그놈. 뭐로 들어왔다고 했더라, 좀도둑질이었나 폭행이었나…….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굳이 생각해내려 하지 않았다. 신경을 꺼도 되는 놈이었으니 말이다.
“내 방은 1층 맨 끝이야.”
미소지으며 킹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살짝 굳는 얼굴이 너무 웃겼다. 로터스와 킹은 대화를 하는 대신, 좁고 어두운 방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로터스의 진갈색 눈동자가 그림자로 덮여 짙은 고동빛으로 변한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킹은, 로터스의 콧잔등에 희미한 주름이 지며 살짝살짝 움직이는 그 모습을 발견할 만큼 로터스의 얼굴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냄새나나? 씻었는데.”
“아니, 페퍼민트 냄새가 나서.”
더위를 싫어하는 킹은 몸을 화하게 만드는 페퍼민트 오일을 자주 바르곤 했다. 로터스가 말하는 페퍼민트 냄새란 그것이리라.
“아. 싫어해?”
싫어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말하며 로터스의 손목에 코를 박았다. 볕을 잘 받지 못한 그의 손목 안쪽은 희고 부드러웠다. 이를 박고 싶었지만 겨우 꾹 참으며 다른 말을 뱉어냈다.
“싫어하냐고.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세 번 말하게 하지는 마.”
“아니, 좋아해. 상쾌하잖아.”
“좋아해?”
좋아한다는 그 말이 왜 기분 좋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싱긋 웃으며 되묻자 로터스는 여전히 미간에 희미한 주름을 단 채 또다시 답했다.
“좋아한다니까.”
“그럼 맡아.”
손목을 로터스에게 갖다 대니, 그의 말랑한 코끝이 손목 안쪽에 닿아왔다. 두근두근. 맥박이 요동치는 그곳에 숨을 내뱉는 그 행위는, 그것이 뭐라고 갑자기 설 것 같았다.
“변태처럼 구네?”
눈알을 굴리는 로터스를 가만히 보다가 결국 킹은 짧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로즈. 이제 가봐.”
* * *
혼자 쓰는 제 방에 딸린 세면대에서 이를 닦고 씻었지만, 오늘은 왠지 더러운 새끼들이 득실거리는 화장실로 향하고 싶었다. 갑자기 로터스의 얼굴이 생각난 탓이리라. 아, 그러고 보니 이 정도 됐으면 도둑맞을 때가 됐다. 킹은 자신의 것과 새 칫솔 하나를 들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꼴 보기 싫은 새끼들이 알아서 등을 돌리며 길을 비켜내, 킹의 기분은 계속 상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터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킹을 발견한 모양인지 고개를 든 로터스와 눈이 마주치자, 킹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방긋 웃었다.
“아아. 너도 당했구나?”
킹은 당한 적이 없었지만, 괜히 로터스와 같은 상황에 처했던 척 굴고 싶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로터스가 꽤나 깜찍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 변태 새끼가 있거든. 다 변태 새끼이긴 하지만 하여튼. 좀 생긴 애 들어오면 두고 보는 거야. 걔 침이 흥건하게 묻을 때까지. 그리고 쓴 칫솔을 훔쳐선 그걸로 이를 닦고 뒤집어서 뒷구멍에 쑤시는 거지.”
킹은 방긋 웃으며, 손가락을 입 안에 처박는 시늉을 보였다. 로터스의 찌푸려지는 낯이 꽤나 재밌었기 때문이다. 작게 입을 벌리고는 이해했다는 듯 눈을 내리까는 그 모습이 정말이지 너무나 가련했다. 한 마디로 꼴린다는 말이었다. 치약만 말없이 바라보는 그 모습이 애처로워, 챙겨온 것을 내밀었다. 로터스가 새 칫솔을 바라보다가 킹을 바라보며 머뭇대기에 도로 가져가는 척 구니, 얼른 칫솔을 붙잡아 왔다.
“고마워.”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천만에.”
킹은 로터스의 옆에서 이를 닦으며 저 입에 칫솔 대신 좆을 처박을 미래를 떠올렸다.
* * *
취미 생활에 차질이 생겨 킹은 흉통을 크게 부풀릴 만큼, 견디기 힘든 화를 참아 내려 애썼다. 씹. 씹……. 옆에 있던 제이제이가 눈치를 볼 정도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킹은 갑자기 카트를 끌며 들어온 로터스를 발견하고 겨우 표정을 풀었다. 아아, 마이클 미치 그 새끼가 손 썼나 보네. 이상한 쪽에서만 부지런한 새끼.
“라일락, 안녕. 점심 인사하러 왔어? 인사는 하루에 한 번만 해도 되는데, 참 예의가 발라”
기분이 좋지 않아 시비를 거는 투로 말하니 로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짜증 나, 말투를 풀지 않고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인사는 말로 해야지? 대학에선 그런 거 안 가르치나?”
“그래, 안녕. 미나콤.”
로터스의 웃는 낯이 꽤나 씩씩하다. 킹은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끼며 볼 안쪽을 혀로 훑었다.
“그거 말고 킹이라 불러. 난 그게 좋거든.”
그리고 아직 길게 남은 담배를 벽에 비벼 끄고는, 바닥으로 던지고 방긋 웃었다.
“어머, 미안해라. 청소하러 왔는데, 내가 실수를 했네. 허 참. 제이제이, 이를 어째!”
로터스의 얼굴에 미약한 균열이 생겨났다. 씨발, 역시 재밌어. 눈치 없이 꽁초를 주워내려고 하는 제이제이를 바깥으로 쫓아내고 청소 카트 위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거, 마이클 미치가 손썼나 보네?”
그리고 분무기 하나를 꺼내 로터스의 얼굴에 뿌리는 듯한 시늉을 취했다.
“라일락. 너 어떻게 하냐. 조만간 그 새끼한테 박혀야겠네. 근데 좆이 워낙 작아서, 뭐 느끼려고 해도 느낄 수나 있을지 몰라. 대신 아프지는 않겠다. 그치?”
분무기 머리끝을 둥글게 만 손가락에 넣었다 빼길 반복하니 로터스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져 갔다. 킹은 큰 숨을 터트리듯 환하게 웃었다.
“라일락! 너 표정 되게 재밌다. 여기 들어와서 본 것 중에 제일 재밌어. 그래도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아. 내가 여기 들어와서 본 얼굴 중에 니가 제일 볼만하거든.”
제일 볼만해서 꼴리지, 아주. 짧게 생각한 킹은 분무기를 카트 위로 강하게 던졌다. 쿠당탕! 큰 소리를 내며 물건들이 딱딱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라일락. 앞으로도 재밌자?”
로터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킹은 밖으로 나갔다.
* * *
정말이지 킹은 교도소에서 만난 그나마 볼만한 얼굴인 로터스에게 꽤 친절했다. 그러나 그 새끼는 배은망덕했다. 나름 마음을 깊이 담은 선물을 줬더니 그걸 홀랑, 그것도 꽤나 비싼 값에 팔아 치운 것이다. 처음엔 그 발칙함이 깜찍하고 웃겨 웃었고 그다음은 솟구치는 분노를 참아 낼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그리고 로터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를 견뎌내며 밝게 웃었다.
“안녕. 민들레.”
제 죄를 모르는 로터스는 조용히 킹을 지나치려 했지만, 킹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해 줄 수 없었다. 로터스의 팔을 강하게 붙들어 식당 바깥으로 끌고 갔다. 구석에 로터스를 가두고 내려보고 있자니 긴 속눈썹 하며 높은 코가 꽤나 보기 좋아 침을 한 번 삼키고 겨우 가벼이 말을 뱉어냈다.
“민들레, 너 내 장사에 손을 댔더라?”
눈을 내리깔고 있던 로터스가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제 죄를 모르는 배은망덕함에 크게 코웃음을 치고 로터스를 향해 더욱 몸을 숙이고 얼굴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네가, 씹. 내 선물을 팔아 치웠다는 얘기를 들었지. 내가 담배를 판 적이 없는 새끼가 담배를 샀다더라고?. 그래서, 아 씨발, 민들레는 사람 마음을 개똥으로 아는구나. 그래서 내가 친히 선물까지 줬는데도 그걸 팔아 치워 먹었구나. 그래서 내가 마음이 좀 아프더라?”
로터스가 몸을 바들대며 눈을 내리까니, 그 꼴이 제법 애처로워 킹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로터스는 입술을 달싹대더니 겨우 작은 음성을 흘렸다.
“미안해……. 교도관들이 발견할까 봐 무섭기도 하고 같이 방 쓰던 사람이 제발 팔아 달라고 윽박지르더라고……. 킹,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나는 누가 내 거 뺏는 것도 엄청 좆같은데, 씹. 내가 준 걸 좆같이 취급하는 것도 좆같아. 근데 민들레는, 둘 다 해버렸네.”
밑을 바라보며 덜덜 떨리는 듯한 음성에, 킹은 결국 분노를 조금 푸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정적인 인간은 아니었으나, 로터스의 얼굴이 너무 마음에 든 탓이었다. 평소라면 손을 들어 뺨을 강하게 후려쳤겠지만, 대신 가볍게 로터스의 볼을 톡톡 두 번 건드렸다. 애처로운 표정 때문에 결국 마음이 약해져, 크게 한숨을 내쉬고 로터스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의 귀로 입을 바짝 붙였다.
“여기 빵에 와서 니가 제일 재밌거든? 그래서 신났는데 다시 재미없어지기 싫다. 로터스, 그건 너도 싫지?”
그러자 알았다는 듯 로터스가 강하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가 끄덕인 횟수만큼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돌렸다. 얼굴 때문에 너무 물렀나 잠시 생각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