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19/21)

Chapter. 3

쿵!

쿵!

쿵!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서 더욱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며 큰바람이 창을 두드리며 울려왔다. 이런 날씨는 불쾌했다. 제대로 빨아들이지 못한 채 타버린 담배를 끄며 새것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는 대신 담배를 질겅거리며 무릎을 접고 앉아, 턱을 괴었다. 끊임없이 쿵쿵대는 바람 소리와 거센 빗소리에 점차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런 날은 싫었다. 더욱이 이런 날에 집에 혼자 있는 건, 끔찍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울한 생각에 몸을 일으켜 낡은 라디오를 켰다. 단정한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풍 ‘아이’가 몸집을 키우며 홍징 쪽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외출을 삼가시고 기상청 홈페이지에 올라온 태풍 대비 안내 요령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또박또박한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경고를 알렸다. 어째 날이 흐리더니, 태풍까지 찾아왔다. 태풍이라니, 끔찍했다. 무거운 머리를 겨우 들어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과거에 저 창이 모두 깨진 것이 생각났다. 내가 겨우 10살이던 해 여름이었다.

엄마가 일을 하던 도중이었고 나는 고작 어린애였다. 깨진 유리 조각에 닿지 않게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벽에 붙은 채 엄마가 올 때까지 몸을 떨었었다. 몸은 훌쩍 컸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비슷했다. 왠지, 몸이 떨려왔다. 한기 탓이라 생각하고 싶었으나 아니었다. 태풍이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빨리 뛰는 걸 보면 불안함은 여전했다.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무력했다.

콰쾅!

강한 바람이 거실 유리창을 때렸다. 깨질까 두려웠다. 일단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자세한 유리창 파손 대비 법을 검색해보았지만, 테이프를 붙이는 법은 효과가 없다는 글이 보였다. 그러면 나는 무력하게 저 유리가 또다시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집 안에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일까?

교도소에 있을 때도 큰 태풍이 왔었는데, 그때는 괜찮았는데……. 날 직접적으로 해칠 수 없는 비바람보다 교도소 안에서 날 노리고 위협하는 이들이 더 무서웠던 탓이겠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킹의 옆에서, 킹의 의중을 파악하고 킹의 눈에 들려고 노력했던 것이 힘겨웠다.

태풍으로 인한 비바람, 천둥 번개가 교도소를 가장 강하게 덮치던 날, 킹은 그제야 내가 제 품에 안겨 있길 허락했다. 열대기후답지 않게 내 몸에 한기가 들던 날, 내 몸에 닿던 킹의 온기가 생각났다. 킹은 무척 열이 많았고 그래서 뜨거웠다. 열대기후가 사람이 되면 딱 킹일 것이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키를 키우는 나무들과 몸집을 키워가는 열매들. 그러다 갑자기 변덕스러운 날씨들.

킹은 무서웠지만 동시에 강하고 커서, 비바람에 깨진 유리창 따위는 하찮게 여길 것 같았다. 그리고 태풍 따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강렬한 섹스를 하고 있었다. 내 몸을 붙들고 내 안을 헤집던 좆이 뜨겁고 찌릿해 천둥 번개에 쏟을 신경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나 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혼자였고 저 거실 창은 너무나 컸다. 벽만 한 유리창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게다가 이 익숙한 공간에서 저 익숙한 창이 깨져 버린 것을 이미 겪어 버렸다. 그게 꽤 트라우마로 남았던 모양이다. 유리가 당장 파스슥 깨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자 그때가 더욱 또렷하게 기억났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던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바람 소리, 그리고 내 몸을 적시던 비가 잔뜩 섞인 습한 바람, 바람에 움직여 파스스 소리를 내는 유리 조각들, 내가 잠시 맘을 놓으려고 하면 용납 못 한다는 듯 번쩍여 내 정신을 빼놓던 번개와 아직 정신을 되찾지도 못했는데 큰 소리로 다시 내 혼을 빼앗아 가던 천둥까지.

킹에게 다가오면 죽어버리겠다고 한 주제에, 그 온기마저 그리워졌다. 하지만 어린애같이 굴어 봤자, 걱정된다는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와 날 안아줄 엄마는 없었다. 입에 문 담배를 질겅대며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눈을 감았다.

내 상황과 과거의 기억은 내 몸을 무겁게, 피곤하게 만들었다. 소파에 옆으로 누워 귀를 막았다. 소리를 줄이면 됐지만 몸을 움직이기 귀찮았다. 웅웅대는 아나운서의 말이 귓가를 괴롭혔으나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이 점차 아득해지며 잠에 들 무렵,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에 정신이 깨어났다.

[…긴급 속보입니다. 리암 카야노 현 다양시 시장이 다양 보훈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했던 지난 13년간, 외부로부터 전달받은 불법 장기 적출 피해자의 사체를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확인된 것은 총 13구로 신분확인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콰콰쾅!

공포스럽고 섬뜩한 뉴스가 끝남과 동시에 번개가 내리치더니 이내 큰 소리가 집을 울렸다. 귀를 막았다. 그러나 머릿속을 짧은 단어들이 어지럽혔다. 킹, 루크 림, 리암 카야노, 태풍, 교도소, 사체……. 그리고 다시 태풍.

콰쾅!

집에 들어온 내내 불은 켠 적이 없음에도 집 안이 잠시간 낮처럼 밝아지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았지만 집 안을 울릴 듯 다시금 천둥이 내리쳤다. 큰 유리창을 바르르 떨리며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았다. 일어나 문을 꽉 닫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 창문 역시 걸어 잠그고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다리를 떨었다.

매캐하고 독한 니코틴이 몸을 진정시킬 거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만 했다. 배를 끄고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일들이 해결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세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애초에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새벽녘에 눈을 떠야만 했으니까.

쿵!

다시 유리창이 깨어질 듯 바르르 떨리며 강한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베개로 귀를 막아보았으나 그런다고 태풍이 끝날 리는 없었다. 목이 타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잠깐 새에, 큰 거실 창 너머의 풍경은 폭력적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우리 집 것이 아닌 물건이 밖에서 굴러다녔고 꺾인 나뭇가지와 돌, 나뭇잎들이 바깥을 더럽히며 바람을 따라 돌아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날아온 것인지, 각목이 달린 천이 바람을 받아 떠오르더니 이내 집 안으로 침입하듯 유리창에 몸을 들이박았다.

쨍그랑!

바람이 괴롭혀 가뜩이나 연약해진 유리는 결국 완전히 부서져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쪽 전체가 와장창! 깨져 무너져 내렸다. 창틀에는 깨진 유리 조각만이 부실하게 붙어 있었고 거실은 깨진 유리로 엉망이었다. 그리고 강한 바람은 깨진 유리 조각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스스.

유리 조각들이 귀신이 들린 듯 진동을 내더니 허공으로 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강한 바람은 내 몸에도 와 닿았고 그 바람이 싣고 온 비가 내 옷을 적셨다.

휘이이잉!

강풍이 깨진 유리 사이를 지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앞이 갑작스럽게 잠깐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그래서 깨진 유리 조각들이 갑자기 반짝거렸다가 빛을 잃었다.

콰콰쾅!

큰 천둥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아아. 이제 일을 끝내고 돌아올 엄마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 혼자였다. 쿵쿵!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사람의 발소리 같았다. 쿵! 쿵! 기억 속 엄마의 발소리는 저것보다는 강했고 저것보다는 다정했다. 쿵! 쿵! 찰박! 쿵! 쿵! 사람의 발소리가 맞았다. 멍청하게도 내가 그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했으면서, 킹이길 바랐다. 하지만 인영은 여럿이었고 아주 손쉽게도 문을 부숴내더니 검은 우비를 뒤집어쓴 남자가 여럿 나타났다. 그들은 내 몸을 붙잡았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망이나 가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짓거리입니까, 이게!”

누군가 소리를 쳤다. 꽤나 화가 난 목소리였다. 쿵콰쾅! 이번엔 천둥소리였다. 태풍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점차 정신이 돌아오자, 내 발끝이 축축하다는 것과 누워 있는 바닥이 무척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통 또한 아팠다. 기절하기 직전, 누군가 날 놓쳐 바닥으로 강하게 머리가 떨어져 내린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하려면 똑바로 하든가. 추워 몸을 웅크리고 싶었지만 등 뒤로 묶인 팔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이건 제가 해결해드리지도 못해요! 이번엔 호텔 같은 교도소가 아니라 진짜, 당신 따위 쉽게 발라 먹을 수 있는 놈들이 가득한 그런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사토 씨!”

“…ㅆ발.”

익숙한 이름에 나도 모르게 욕을 뇌까렸다. 작은 소리였으나 약속한 것처럼 천둥소리도, 다른 이의 말소리도 멈춘 순간이었다. 콰쾅! 다시금 천둥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침묵했고 건물이 흔들리는 바람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깼나 봅니다.”

아까까지 화를 내던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크 림.”

루크 림이었다. 내 속삭임이 마치 정답이라는 듯,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누군가 걷어냈다. 다행히 실내였고 밝지는 않았으나, 눈을 덮으며 데워왔던 천이 사라지자 눈꺼풀이 시렸다. 앞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꽉 감았다. 내가 또다시 납치당했다는 것쯤 이미 알아챘으나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큰 손이 내 뺨을 후려쳐오며, 정신 차리라고 외쳤다. 볼이 부어올랐을 게 분명했다. 무척이나 아팠다.

“아……. 좆같네…….”

누군가 강하게 머리채를 잡아 와 눈을 떠 그자를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또다시 마주하기 역겨운 얼굴이었다. 휴 사토는 그 몇 년 새에 더 추해져 있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지, 얼굴에는 심술 같은 살이 그득그득했고 이마와 입가는 부자연스럽게 팽팽했다. 주사를 맞은 모양이었다. 아, 코도 했나 봐. 분필이 박힌 듯한 콧대가 꽤나 볼썽사나웠다. 얼굴의 균형이 더 엉망이 되었다. 내 중얼거림을 저 새끼가 못 들었을 리 없다. 눈썹 피부가 이상하게 구겨지며 한 번 더 내 뺨을 후려쳐 왔으니 말이다.

“씨발, 그래. 오랜만이네. 여전히 남창 노릇 하며 살고 있는 모양인데 예전보다 얼굴이 영… 킹 그 새끼 취향이 꽤나 독특해졌나 봐?”

휴 사토가 여전히 내 머리채를 쥔 채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눈을 부라렸다. 두 번이나 강하게 맞은 뺨이 욱신거렸다. 입안의 여린 내벽은 치아에 긁혀 피를 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감돌자 더욱 불쾌해져 와 나 역시 휴 사토를 노려보았다.

“니가 두 번이나 때렸잖아, 이 개새끼야. 그 얼굴 꼴을 하고 남의 얼굴에 가타부타 말하는 거 수치스럽지 않아? 주변에서 병원 가기 전에 안 말렸어? 얼굴이 왜 그 모양이지? 불법시술인가? 돈도 많으면서 왜 그런 걸 받았어. 의사에게 받은 거면 고소해. 의료사고감이다.”

입매를 비틀며 이죽대자 휴 사토의 뒤에 있던 루크 림이 풉! 웃는 것이 들려왔다. 휴 사토 역시 분명히 들었지만, 듣지 못한 척 굴며 내 머리를 더욱 강하게 틀어잡았다. 두피가 당겨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씨발…. 여전히 입만 살아가지고, 니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돼?”

벌써 저 새끼한테 납치당한 것만 두 번째인데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이렇게 지껄여 대는 것이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정신이 몽롱했고 뺨이 아파 와 이성을 붙잡을 인내 따위 휘발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아직도 여자들한테 뒷구멍 쑤셔 달라 그래? 그쯤 되면 자기일 정도는 스스로 해봐. 요즘 딜도 잘 나온대. 아니면 가짜 좆은 이제 졸업하고 진짜로 갈아타는 거 어때? 너도 알다시피 나도 뒷구멍 쑤셔 대는 거엔 일가견이 있잖아. 나쁘지 않아. 한 놈 알아보든가. 어?”

일부러 휴 사토의 하반신을 눈짓하며 활짝 웃는 낯으로 말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니 볼이 아팠지만 애써 참으며 말이다. 휴 사토는 다시금 팔을 크게 들어 올렸지만 뒤에서 잡아 오는 손에 다시금 팔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합시다. 납치까지 해왔으면 인질 노릇 하려는 거 아니에요? 무사해야 인질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루크 림이 그나마 이성적인 척 굴어왔다. 내게 그렇게 지랄해 놓고서 이제 와 세상 차분한 사람인 양 구는 것이 꽤나 아니꼬웠다. 휴 사토는 여전히 화를 참기는 힘든지, 날 던지듯 놓고는 발을 쿵쿵 구르며 소리를 질러 댔다. 어깨뼈가 딱딱한 바닥에 박혀 뼈를 찌르르 울려오는 통증에 입을 꽉 깨물었다가 입 안에 고이는 침이 불편해 퉤, 뱉어내니 작은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씨발, 침이 아니라 피였다.

“리 씨, 성질 죽이고 조용히 있읍시다, 예?”

본래 반짝거렸을 테지만 흙탕물이 말라붙어 광을 잃은 구두가 내 얼굴 근처로 다가오더니 내 피 웅덩이를 밟았다. 너무나 얕은 웅덩이라 방울이 튀지도 못한 채 루크 림의 신발 밑창을 더럽히는, 내 체액을 바라보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닥에서 바라본 그는 꽤나 위압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쯤 이미 알고 있다.

“영감님이구나?”

“뭘 말입니까.”

볼이 붓지 않은 쪽의 입매를 끌어올리고 루크 림을 향해 말했다. 그는 이 상황이 짜증 난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고 날 바라보지도 않고 머리를 털어 댔다. 그의 머리칼에 남아 있던 빗물이 내 위로 떨어져 볼을 적셔왔다. 불쾌했다.

“저 새끼 뒷구멍 쑤셔준 새끼요.”

루크 림이 손을 멈추고 날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일그러지는 것이 퍽 즐거웠다.

“농담이에요, 농담. 아. 근데 엄연히 말하면 사실일 수도 있겠네요. 비유적으로는. 저 새끼가 영감님의 뒷구멍을 봐주든, 고매하신 검사님의 뒷구멍을 저 새끼가 봐주든 아님 둘 다 봐주든 서로 그딴 구린 짓을 하니까, 직업도 다른 두 분께서 여기 이렇게 함께 있으신 것 아닙니까? 두 분의 접점이라곤, 내게 과하게 추근댄다는 점 말고는 없는 듯한데.”

루크 림이 다리를 접어 쪼그리더니 휴 사토가 그랬던 것처럼 내 뒤통수를 쥐어 왔다.

“이 입 다무는 게 그렇게 힘든가? 아, 킹 그 새끼 믿고 이 지랄을 하는 거야? 근데 어째. 그 새끼는 네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르는데.”

“왜 갑자기 화내요. 진짜 뒷구멍이라도 쑤신 사람처럼.”

방긋 웃자 루크 림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의 미간에 팬 깊은 골이 퍽 기꺼웠지만 그다음 행동은 조금, 아니 많이 짜증 났다.

퍽!

루크 림은 팔을 들어 주먹을 내 얼굴로 내리꽂았다. 나름 최선을 다해 휘두른 것 같았지만, 책상에 앉아 일만 하는 사람의 것이 그렇게 강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미 상처가 난 볼은 꽤나 큰 고통을 호소했다. 얼굴을 감싸 쥐고 싶었지만 손이 묶여 그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입을 다시금 떠들어대는 것으로 고통을 삭이기로 결정했다.

“아, 존나 아파……. 좆같다. 정말. 범죄자 새끼랑 범죄자랑 붙어먹는 부패한 검사 새끼랑 한 공간에 있는 게 여간 씹스러운 게 아니네.”

다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렸다. 루크 림은 바보처럼 씨근댔다. 그의 숨소리가 바람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이제껏 무시당한 적 없이 살아온 모양인지, 나 따위에게 모욕당했다는 것이 여간 견디기 힘든 듯 보였다.

“범죄자 새끼랑 붙어먹는 건 그쪽이겠죠!”

루크림이 소리쳤다. 부패검사 주제에 그런 소리를 들으니 화는 나나 보다. 수치란 게 있기는 한 모양이다.

“난 검사가 아니잖아. 난 딸만 쳐도 범죄자 새끼랑 붙어먹는 건데 어떻게 해. 내가 범죄자 새끼잖아요. 안 그래?”

바닥에 등을 대고 편히 눕고 싶었지만 뒤로 묶인 팔이 걸렸고 옆으로 눕자니 어깨가 아팠다. 결국 배를 바닥에 붙이고 뺨을 찬 바닥에 갖다 댔다. 배가 시렸다.

번개가 공간을 짧게 밝혀오며 천둥의 등장을 예고했다. 귀를 막고 싶었으나 손이 묶여 있었기에 눈을 꼭 감았다. 그렇다고 소리가 막힐 리는 없었기에 나는 여과 없이 공간을 울리는 굉음을 들어야만 했다.

쿵! 쿵! 쿵!

크지 않은 유리창을 두드려오는 비바람 소리 역시 내 귓가를 맴돌았다. 몸이 발발 떨렸다. 가뜩이나 태풍은 끔찍한데, 묶여 이러고 있어야 한다니. 집의 유리창이 깨졌을 땐, 급하게 돌아온 엄마가 날 끌어안아 주었다.

하지만 엄마가 살아 있다고 해도 저 문을 열고 들어와 날 안아 달래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날 달래 안아올 사람은 단 하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 이름을 애써 지워내는 게 무척이나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 알면서도 말이다. 짙은 고동빛 눈동자를 떠올리다 눈을 굳게 감았다. 억울했다.

“…내가 왜 또 이렇게 있어야 하는데?”

내가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중 날 구하러 올 이가 없다는 사실이 퍽 서러웠다. 가령 경찰이나 지나가던 선량한 시민처럼, 내게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허무맹랑한 상상이었다. 내가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조차 날 구하러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경찰 같은 이들이 내게 관심이나 갖겠어.

쿵쿵대는 천둥소리가 초조했고 묶인 몸이 답답했다. 미쳐버리겠다. 길지 않은 인생에 벌써 두 번째 납치였다. 첫 번째 납치에선 손가락이 잘렸다. 지금은 뭐가 잘려나갈까. 팔? 다리? 머리? 뭐가 되었든 다 끔찍했다. 이런 일을 당할 만큼 막 살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모두 킹 때문이다. 킹은 이런 일을 당해도 쌀 만하게 살아왔으니까.

답을 바란 적 없는 내 중얼거림에, 어느새 화가 좀 풀린 휴 사토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후! 불어 넘기고는 내게 다가와 젠체했다. 정말 당연하다는 듯 내 머리채를 붙들고 말이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 킹 그 새끼 때문인 거지.”

웃는 낯에 침을 뱉고 싶었지만 겨우 삼켜냈다. 하지만 말을 삼켜내지는 못했다.

“그럼 그 새끼를 잡아 와야지. 왜 애꿎은 날 잡아와.”

‘씨발 새끼야.’를 덧붙이고 싶었지만 볼이 아파 꾹 눌러 담았다. 휴 사토는 나의 넓은 아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뺨을 손등으로 툭 건드려왔다. 겨우 멈춘 핏물이 다시금 입 안을 채워 가기 시작했다. 비릿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입 안이 꽤나 크게 다친 모양이다. 이, 씨발 새끼가.

“그 새끼는 순순히 잡힐 놈이 아니거든.”

휴 사토가 이죽댔다. 진심으로 빈정거리는 건 아니었다. 제 못남을 숨기려 여유 있는 척 구는 것뿐이었다. 못난 새끼 주제에 덤비니까 그 꼴이 나지.

“그래서, 난 순순히 잡히고?”

조소를 띄우고 싶었으나 볼 아파 와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고 이죽댔다. 고통 탓에 조금 기가 죽은 내 꼴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휴 사토의 얼굴이 더욱 재수 없게 변했다.

“넌 너무 만만하지. 톡 건들면 죽여버릴 수 있을 만큼. 하지만 킹 그 새끼가 죽고 못 사니까 나에게 니 새끼만큼 좋은 선택지가 어디 있겠어?”

킹도 개새끼였지만 저 새끼는 더한 씹쓰레기였다.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나는 뱉고 싶은 말을 참아내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또 뭔 일을 벌였나 했더니, 그 장기 적출 했다던 시체가 너한테서 나온 거구나. 골든 디거가 아니라 바디 디거(Body Digger)네. 이름 바꿔야겠다. 그래서, 내 것도 팔아넘기게? 요즘 술이랑 담배를 좀 해서 폐랑 간이 어떨지 모르겠네. 게다가 껍데기도 네가 보기에 썩어버렸다며. 쓸모가 있을까? 근데 내 시체는 어떻게 하게? 처리해줄 친척 어른도 이젠 없는데. 시체 앞에서 징징 울어봤자 소용없어요, 도련님.”

라디오에서 들었던 속보가 떠올랐다. 너무나 끔찍해서 리암 카야노를 도망칠 수 없게 옭아맸을 그 뉴스. 휴 사토가 미쳐 버려 갑자기 날 납치하는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 짓을 벌일 만큼, 휴 사토 역시 절벽으로 몰아넣었을 일이 그것일 것 같았다. 아픔은 인내심을 짧게 만들어서,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휴 사토를 조소했다. 휴 사토는 내 머리채를 더욱 강하게 틀어쥐었고 문을 향해 소리쳤다.

“씨발, 물 가져와!”

물이 뜻하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내가 마실 물이 아닌 건 분명했다. 영화에서 보던 괴로운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나는 몸을 바둥대며 비굴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나 목 안 말라. 이제 얌전히 있을게. 잠시, 이성을 잃었어.”

하지만 두피를 당기는 힘이 더욱 강해졌을 뿐이었다. 휴 사토는 나직하게 덧붙였다.

“작두도 가져와.”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또 그러면 안 되잖아, 응? 나 손가락이 아직도 아파. 제발.”

작두, 씨발. 그 작두가 잘라 놓을 게 종이나 약재가 아닌 것은 뻔했다. 내 몸 중 하나겠지. 손가락이 덜덜 떨려왔다. 과거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휴 사토는 진정하라는 듯 내 손목을 붙들어 비틀고는 웃으며 환히 미소 지었다.

“이번엔 붙일 일 없이, 잘라 줄 테니 걱정 마. 그래도 상판대기 상한 게 영 가여워서 이쁘게 잘라줄게. 그래도 한솥밥 먹던 사이인데.”

“씨, 발…….”

문을 열리며 웬 덩치 큰 남자 둘이 물이 잔뜩 담긴 수조를 들고 왔다. 남자 둘이 들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그곳에서 찰랑대며 떨어진 물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흘린 물에 코를 박는 데도 죽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머리채를 잡은 휴 사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을 흔들었지만 외려 잡아 오는 힘만 강해졌을 뿐이었다.

남자 중 하나는 다시 문밖으로 나갔고 나머지 하나는 휴 사토를 도와 바둥대는 내 몸을 수조 앞으로 옮겼다. 나는 그 앞에 무릎 꿇린 채 몸을 바들대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숨을 들이쉬려는 동시에 얼굴이 찬물로 처박혔다. 풍덩! 소리를 내며 상당한 양의 물들이 바깥으로 쏟아졌지만, 수조 안에는 내가 괴롭기 충분한 만큼의 양이 남아 있었다.

“이…끼야, ㅆ…다.”

휴 사토가 뭐라 뭐라 떠드는 게 들렸으나 귀가 물 안에 있어 정확한 말은 들리지 않았다. 씨발, 씨발, 씨발……. 놓으라고! 놔! 소리쳤지만 듣는 이는 없었다. 괴로워 머리를 이리저리 흔드니 물이 더욱 코안으로 들어올 뿐이었다. 숨을 쉬고 싶었지만 아가미가 없었기에, 물속에 처박힌 코가 호흡할 방법은 없었다. 다행히 깨끗한 물인지 이상한 맛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얼굴에 난 상처가 따끔거렸지만 다 필요 없었다. 숨을 쉬고 싶었다. 놔! 씨발, 놓으라고! 제발, 제발 놔줘…….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물 안에서 소리쳤지만 들어줄 이는 없었다. 애초에 소리가 새어 나가지도 못했다. 숨 쉬고 싶어, 숨 쉬고 싶어. 숨 쉬고 싶어! 머리가 몽롱했다. 아, 머리, 숨, 쉬고 싶…….

“푸하! 흐,윽…….”

그러나 쉬이 죽게 할 생각은 없는지 휴 사토는 내 머리를 강하게 틀어잡고 물 밖으로 빼냈다. 게걸스럽게 숨을 들이마시고 싶었으나 코와 입에 고인 물 탓에, 양껏 숨 쉴 수 없었다. 답답해 몸을 마구 비틀었지만 풀려나지 못했다. 그리고 침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가 턱 밑으로 뚝, 뚝 떨어지자 휴 사토는 곧바로 내 머리를 다시 물 안으로 집어넣었다.

숨 막혀. 숨 막혀. 숨 막혀! 속으로 마구 소리질렀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살고 싶어, 숨 쉬고 싶어.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 달라고!

내가 어쩌다, 이딴 일까지 당해야 하지? 킹! 킹 때문이야. 내가 애초에 잘 도망 다녔더라면 아니 킹에게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공항에서 남의 가방을 들어주지만 않았어도! 아냐, 여기에 내 탓은 없어. 이건 모두 킹의 잘못이야.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난 잘못한 게 없어. 놔줘, 놓아 달라고. 놔줘……. 하지만, 하지만 누군가 진실이 아닌 죄를 토해내면 이 지옥에서 꺼내 준다고 약속하면 당장 무릎을 꿇고 내 잘못을 고해할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잘못 했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살려줘…….

쿠콰쾅!

굉음이 뭉툭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또다시 천둥이 내려친 것이다. 천둥과 비와 물. 나는 어렸을 때보다 더 무력했다. 그때는 최소한 엄마라도 있었는데. 지금 내게 있는 건 뭐지. 유리창이 깨진 것 정도로는 죽지 않는데 왜 그렇게 무서워했을까. 십몇 년 뒤면 더러운 창고에서 숨이 막혀 죽게 생겼는데 말이야.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살려줘. 제발. 나 좀 살려줘.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찾았지만 죽은 이는 내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아무나, 내 말을 들어 줬음 싶었다. 머리가 점차 무거워져 생각을 하기도 힘들었으니 얼른.

“쿨럭, 큭! 하아…!”

힘이 빠져 축 늘어진 몸을 휴 사토가 다시 끌어냈다. 겨우 입을 크게 벌려 숨을 가득 집어넣으려 했으나 또다시 머리가 물속으로 처박혀, 입 안을 채운 것은 공기가 아닌 물이었다.

쿵! 쿵! 쿵!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내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누가, 살려줘, 제발, 누가 좀……. 누가, 누가……. 제발 날 구하러 오길 염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하늘에서 갑자기 누군가 뚝 떨어질 리 없다. 날 구하러 올 누가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씨발, 씨발, 씨발……. 아니다, 딱 한 명이 있었다. 그것은 모호한 누가가 아닌 확실한 킹이었다. 킹……. 살려줘, 제발, 나 좀 살려줘……. 킹, 킹, 킹!

‘이 섬에서, 네 생사를 신경 쓰고 네 존재를 유일하게 원하는 이는 나뿐이잖아. 아니, 이 지구에서 그래. 너는 인정하기 힘들지 몰라도 네게는 나뿐이야, 로터스.’

낮은 킹의 음성이 들려오며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래, 모두 인정할게. 널 선택할게. 그러니까 제발 날 구하러 와. 뭐든 줄게, 원하는 걸 다 줄게……. 살려줘!

“쿨, 럭. 큭…….”

“이제 좀 조용하네.”

다시금 휴 사토가 물 밖으로 날 꺼내 들었다. 씨발……. 시야가 흐렸다. 휴 사토의 중얼거림 따위 물이 들어간 귀에 제대로 들려올 리 없었다. 씨발, 씨발, 씨발. 나는 끊임없이 욕을 되뇌었다. 그것은 모두 킹을 향한 것이었다.

그것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킹, 씨발 새끼. 개자식. 원망 서린 욕설들이었으나 그걸 모두 킹이 듣길 바랐다. 난 살고 싶어! 날 살리라고 날 구하라고!

열심히 외쳤지만 힘이 없어 음성을 토해낼 수 없었고 그것은 모두 마음속에서 맴도는 것에 불과했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숨을 잘못 들이쉬어 코안으로 들어간 물 탓에 코 내벽이 따끔거렸다. 차분하려 애써도 생존본능 탓에 의도하지 않게 계속 몸을 바둥댔지만 도무지 풀려날 수 없었다. 외려 휴 사토가 더욱 성이 나 날 더 거칠게 물 안으로 처박아 넣었다.

죽을 것 같아……. 죽기 싫어, 난 죽기 싫다고……. 눈가가 시큰해지며 눈물이 났다. 그러나 물속에서 울어봤자 아무도 알아채 주지 않았다. 알아채려는 인간들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는 그냥 킹의 기분을 상하게 할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그래, 킹.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구하러 오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널…….

“크흑, 큭……. 하아, 하, 윽! 하아…….”

다시금 물 밖으로 들어 올려졌고 눈물이 흘렀다. 찬물 사이로 흐르는 뜨거운 액체가 눈물이라는 걸 난 분명히 알았지만 다른 이가 보기엔 그저 흥건한 얼굴일 뿐이겠지. 좆같아, 좆같아. 좆같다고! 성질을 내고 싶어도 힘이 없었다. 휴 사토는 물에 젖은 내 얼굴이 더럽다는 듯 제 소매로 거칠게 닦아 냈다. 따가워 고개를 저었지만 등을 차오는 힘에 결국 몸을 굳혀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코안에 맺힌 물방울 탓에 숨을 들이쉬려 해도 코안만 따가워졌다. 콰쾅! 다시금 천둥이 울렸으나 몸을 움츠리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쾅! 쾅!

천둥과 섞였으나 천둥이 아닌 큰 소리가 들렸지만 나를 포함한 모두가 강한 바람이겠거니 생각했다.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했다. 머리가 멍했다. 그러나 그 잠깐의 휴식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강한 힘이 얼굴을 가격해왔다.

찰싹!

젖은 뺨을 때려오는 감각은 무척이나 날카롭고 아파 놀라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벌써 정신 잃으면 안 되지, 내가 당한 건 더 큰데. 안 그래?”

휴 사토가 입매를 비틀며 이죽댔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꽤나 날이 예리하게 갈린 작두가 놓여 있었다. 등 뒤로 묶인 양손을 꽉 마주 잡았지만, 다른 남자가 손목을 묶은 끈을 풀며 왼손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한참 뒤로 묶였다가 풀리니 어깨가 뻐근하고 아파 왔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있는 작두가,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남자가 내 왼손을 작두 위로 올렸다. 그리고 드러난 손목 안쪽에 휴 사토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크게 웃었다.

“킹, 이 미친 변태 새끼. 하여튼 취향이 더러워, 아주. 너도 이게 꼴 보기 싫을 거 아냐. 내가 예쁘게 없애줄게. 그리고 니 손목은 널 그렇게 사랑하는 킹에게 보내줄 테니 걱정 마. 음, 당장은 아니고 내일쯤 보내면 적당히 잘 굳어서 보내기 좋겠지?”

휴 사토가 이죽대며 지껄였다. 작두날 바로 아래 놓인 손목을 빼내려 버둥댔지만 오히려 잡아오는 힘이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씨발, 킹!

쾅! 쾅! 쾅!

다시금 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으며 찾아올 고통을 감내하려 애썼지만 작두날은 내려오지 않았다. 눈을 슬며시 뜨니, 휴 사토가 내 손을 잡은 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몸을 발발 떠는 내 꼴이 웃기다는 듯 비웃던 휴 사토가 다시금 울리는 소리에 결국 몸을 일으키더니 문을 바라보았다. 휴 사토는 제 옆에 있던 남자를 향해 문을 눈짓했고 그는 품 안에 있는 권총을 꺼내며 몸을 일으켰다. 강하게 내 몸을 잡던 이가 떨어지니 그나마 조금 편해졌다.

쾅!

쾅!

다시금 울렸다.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려오며 분명하게. 닫힌 문이 덜그럭거렸다.

“나가 봐.”

휴 사토가 남자를 향해 말했다. 내 손을 잡은 휴 사토의 손 역시 떨어져 나가, 슬금슬금 멀어지며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괜한 기대가 마음속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달칵.

남자는 권총을 장전하며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고정한 잠금을 한 손으로 풀어내고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녹이 꽤나 슬었는지 끼익 대는 소리가 퍽 컸다. 남자가 몸을 내미는 그 좁은 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별일이 없어 보였다.

“밖에 몇 명 있어요?”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세로 방관하던 루크 림이 나직한 목소리로 휴 사토를 향해 물었다. 휴 사토는 지금 루크 림이 그런 것처럼,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나직이 대꾸했다.

“나간 놈까지 일곱.”

“…너무 적지 않습니까?”

“급하게 모을 수 있는 놈들이 딱 그 정도였다고!”

쾅쾅!

다시금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고 달그락, 문고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등장한 것은 총을 들고 나갔던 남자였다. 휴 사토는 안도했는지 살짝 미소 지었고 좆된 나는 더 멀리 떨어지려 몸을 슬그머니 옮겼다. 손과 다리가 발발 떨려와 온 힘을 다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문밖으로 몸을 반쪽만 내민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총을 잡고 나가던 오른손이 비어 있었지만 그 반대편 몸이 드러나 있지 않았기에, 쪽에 총이 들려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밖에 무슨 일이야?”

휴 사토가 손을 적신 물을 털어내며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점차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의 반대 손에도 총이 들려 있지 않았다. 그의 몸 중 가장 총이 가까이 맞붙은 건, 남자의 뒤통수였다.

“내가 무슨 일을 했지, 좀.”

휴 사토의 물음에 답한 건 남자가 아니었다. 남자의 입은 꽉 다물려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익히 아는 그 목소리였다. 안도감에 몸을 축 늘여 기댔다. 지쳤다. 남자는 점차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 뒤로, 남자보다 한 뼘은 큰 킹이 모습을 드러냈다.

킹이 들고 있는 것은 총부리가 무척 긴 장총이었다. 영화에서 귀족들이 사냥을 할 때나 쓸 법한 그런 총 말이다. 총을 총으로만 쓴 건 아닌지, 그 총구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뚝, 뚝. 바닥으로 고여 떨어질 만큼 말이다.

잘 차려입은 킹의 쓰리피스 양복은 모두 푹 젖어 있었다. 태풍을 뚫고 왔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나름 잘 정리해 올렸을 그의 머리도 물에 푹 젖어 뚝뚝 물을 떨어트렸다. 그의 앞머리에 떨어진 머리카락 몇 올이 거슬려 뒤로 넘겨주고 싶었다. 총구가 뒤통수에 딱 붙은 남자는 다리를 바들대며 방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눈을 치켜올린 그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씨, 발…. 킹 미나콤…….”

휴 사토가 제 품을 뒤지며 중얼거렸다. 휴 사토는 헛손질을 몇 번 한 끝에야 품에서 쓸데없이 화려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총기허용이 금지된 나라인 것은 나만 빼고 모두 잊은 듯했다.

“오랜만이네. 못생긴 건 여전하구나?”

킹이 안부를 묻듯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정없이 얼굴을 구긴 채 킹의 근처에 서 있는 휴 사토의 꼴은 정말이지 볼품없었다.

“개, 새끼…….”

입술을 짓씹으며 휴 사토가 중얼댔다. 총을 킹에게 겨누고 있지만 바들대며 떨리는 팔이 꽤나 애처로웠다. 뒤통수에 총구가 닿은 남자는 걱정될 정도로 몸을 덜덜 떨어 대더니 이내 그의 바지춤이 축축하게 변했다. 뚝, 뚝. 남자의 발치에 웅덩이가 생겨났다. 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대체, 배변 교육도 제대로 안 된 놈을 끌고 다닌 거야? 수준 하곤.”

킹이 남자의 머리통을 총구로 툭툭 밀며 얼굴을 찡그렸다. 긴 장총이 아니라 짧은 권총이었다면 킹의 발에도 오줌이 묻었을 정도로 많은 양을 남자는 아래로 흘려 댔다. 휴 사토는 남자 때문에 자신이 망신당한 것이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운지 남자의 발치에 총을 발사했다.

탕!

큰 총소리가 공간을 울려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다친 이는 없었다.

“씨발 새끼. 니놈 때문에, 씨발! 내 회사가!”

휴 사토는 이빨을 아드득 갈았고 오줌을 흘리던 남자의 다리는 더욱 후들거렸다. 킹은 그런 휴 사토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니까 똑바로 살았어야지, 안 그래?”

푸슉!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통에 총구가 겨눠졌던 남자의 몸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의 머리통에는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생겨 그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들대던 그의 다리도 굳어 멈춰 있었다. 킹은 장총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죽은 남자가 들고 나갔던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킹의 총구는 분명하게 휴 사토를 향했다.

벽 구석에 몸을 붙인 채 나처럼 킹과 휴 사토를 지켜보고 있던 루크 림은 갑자기 허겁지겁 내 쪽으로 달려오더니 내 목을 붙들었다. 아직 기운이 없어 나는 속절없이 루크 림에게 붙들려 있어야만 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루크 림의 팔에 겨우 붙들려 서 있었다. 내 머리칼에 맺힌 물이 속눈썹으로 뚝뚝 떨어져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루크 림이 내 목에 무언가를 갖다 대더니 호기로운 척 지껄였다.

“킹 미나콤 씨. 거기까지 하세요.”

눈을 내리깔아 바라보니 목에 닿아온 것은 맥가이버 칼이었다. 내 목을 베어올 수 있었지만 왠지 겁이 나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킹의 존재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눈을 똑바로 떠 킹을 바라보았다. 그의 고동색 눈동자 역시 날 향하고 있었다.

“검사님, 그냥 나라에서 주는 돈 따박따박 받고 평범하게 사는 편이 나았을 텐데, 씨발 왜 내 화를 돋워?”

휴 사토를 향해 겨눈 총을 고쳐 잡으며 킹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킹이 천천히 발을 움직이자 휴 사토도 루크 림도 몸을 움찔댔다.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킹을 향해 총을 겨눈 휴 사토는 킹에게 멀어지며 뒷걸음질 쳤고 루크 림 역시 날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내 다리 역시 힘이 없어 발발 떨렸으나 루크 림의 다리 역시 덜덜거리고 있어 루크 림과 나는 툭 치면 넘어질 것 같이 간신히 서 있어야만 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니 킹과 눈이 마주쳤다. 킹은 날 보고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꼴이 많이 흉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킹은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더니 바닥을 눈짓했다. 멀지 않은 곳에 킹이 던져 놓은 장총이 떨어져 있었다. 힘이 없는 몸이 휘청거리는 척, 그쪽을 향해 루크 림을 이끌었으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는 데에 바빴던 휴 사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킹은 내게서 시선을 거둬내고 휴 사토를 향해 상쾌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계속 이렇게 있자는 거야? 대체 원하는 게 뭔데, 말을 해 봐. 불법주차 했다고 견인 당하기 전에 가봐야 한다고.”

이 와중에도 농담을 일삼는 킹이 분한지 휴 사토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고 킹은 그 꼴이 우스운 듯 조소했다. 그러자 휴 사토의 입매가 사정없이 비틀렸다.

“하, 원하는 거?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 놓고 이제 와 원하는 거? 넌 씨발, 욕이 나오게 짜증 나. 킹 미나콤!”

“내가 잘생겨서 질투하는 건 이해하지만 성형이라도 하지 그랬어. 아, 이미 한 거였던가. 쟤 이미 한 거 맞지?”

휴 사토를 향해 말하던 킹이 대뜸 루크 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루크 림이 당황한 얼굴로 “예?”라고 소리치며 되물었지만 킹은 대답이나 하라는 듯 다시금 물었다.

“그러니까, 쟤 얼굴 고친 거 맞지? 그동안 크게 아파서 저렇게 됐나 싶었는데, 저게 한 거라는 거지? 의료 사고 소송은 했어? 변호사 소개해줘? 아 이제 돈이 쥐뿔도 없지, 맞다, 맞다……. 안 되겠다, 야. 그 변호사 비싸거든. 실리콘은 빼도 못 파는데 금니로 싹 갈아치우지 그랬어. 요즘 금값 꽤 괜찮던데. 이 다 뽑아서 죽 좀 먹고 사는 게 거렁뱅이로 사는 거보다야 낫지.”

폭력적인 말을 늘어놓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킹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무척이나 얄미웠다. 그 대상이 나라면 미칠 것 같을 듯했다. 하지만 그 대상은 휴 사토였고 날 구하러 온 킹의 존재에 무척이나 안도 되어, 목에 칼이 겨눠진 인질 주제에 이죽대는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푸흡……. 하아, 그치? 의료사고인 줄 알았다니까……. 거렁뱅이 된 김에 소송해서 합의금 받든가. 그럼 낡은 집 하나 구해 보조금 받으며 살 수는 있겠다.”

휴 사토를 향해 최대한 밝게 웃으려 노력했다. 내 목을 잡아오는 힘이 강해지긴 했지만 저 상판을 보고 말을 참기란 퍽 어려웠다.

“…리 씨, 상황 파악 좀 하고 입 좀 다물죠?”

루크 림이 내 목에 칼을 더욱 가까이 갖다 댔다. 피부 끝이 살짝 베어와 따끔거렸다. 고통은 외려 내 정신을 명료하게 깨웠다. 내 목을 붙든 건 루크 림이었지만 외려 여유가 없는 쪽도 루크 림이었다. 아까까지 내 머릿속을 미친 듯이 채우던 불안과 초조가 날아가 버렸다.

“검사님은 이러려고 그 공부했어요? 나 같은 놈 인질 삼아 협박이나 하려고 그 공부를 한 거예요? 진짜 대단하다.”

킹의 허벅지 근처에 놓인 그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섯 개였던 손가락이 하나가 접혀 네 개가 됐고 또 하나가 접혀 세 개가 됐다. 숨을 들이켜며 바들바들 떨려오는 루크 림의 손의 각도를 슬그머니 비껴 바꿔냈다. 루크 림은 당혹스러운 와중에 분노를 느끼는, 꽤나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닥, 쳐…!”

목에 닿아오는 칼이 더욱 깊게 파고들었지만 꾹 참아 내며 떨어진 장총에 가깝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킹의 손가락이 하나로 줄었고 그 손가락마저 접힐 때쯤 다리에 힘을 풀고 주저앉았다.

탕!

“악!”

“윽!”

단 한 번의 총성과 함께 두 명의 짧은 괴성이 들렸다. 나와 킹의 것은 아니었다. 목이 조금 베이긴 했으나 맥가이버 칼 따위는 숨통을 끊어 놓을 만큼 날카롭지 못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내지 못했다. 후들거리는 팔을 얼른 뻗어 장총을 잡고 개머리판으로 루크 림의 머리통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러나 팔에 힘이 없어 살짝 비껴 나간 탓에, 루크 림은 만족스럽게 쓰러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 등 위에 체중을 실어 앉으니 그는 일어나지 못한 채 내 아래에서 버둥대야만 했다. 그리고 총구를 그의 머리에 겨누자 그 움직임은 멈췄다. 루크 림의 뒤통수에서 총을 떼어 내지 않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가 아직 떨려와, 총을 지팡이 삼아 루크 림의 머리를 꾹 누르며 말이다.

겨우 서, 루크 림의 어깨를 꾹 밟으니 깨끗했던 흰 셔츠에 내 더러운 발자국이 생겨났다. 하나로는 부족한 것 같아 고루 밟자 등 전체가 까맣게 변했다. 장총을 고쳐 잡으며 바닥에 누워있는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휴 사토는 몸을 떨지도 못하고 있었다. 머리통 한가운데 구멍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만큼의 구멍에서 피와 정체 모를 액체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죽어 있는 그 새끼의 얼굴은 살아있을 때보다 더 끔찍했지만 저 몸뚱이는 말을 하지 못했기에 저편이 나았다.

“살, 살려주세요…! 뭐든, 할게요! 제, 제가 그동안 모아온 정보들, 모두 넘겨드릴, 게요. 제발…….”

발 아래에서 루크 림이 비굴하게 빌어왔다.

“하아, 흐윽……. 어떻게 해?”

조금 숨이 차 숨을 헐떡대며 킹을 바라보았다. 킹은 루크 림 따위에게 시선을 두기 싫다는 듯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 맘대로.”

달칵, 방아쇠를 당겼지만 빈 소리만 날 뿐 총알이 나가지는 않았다. 소리에 놀라 몸을 굳혔던 루크 림은 안도하고는 몸을 벌벌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총을 떼어 내지 않고 킹을 향해 총을 눈짓했다.

“…이거 어떻게 써?”

총을 쥐어 본 것이 처음이라 쓸 줄은 몰랐다. 영화에서는 쉽게 쓰던데……. 킹은 눈썹 한쪽을 가벼이 올리고 대꾸했다.

“이렇게.”

탕! 경쾌한 총소리가 울리더니 발아래서 덜덜 떨어 대던 몸의 움직임이 멎었다. 피가 흥건하게 발을 적셔왔다. 힘없는 팔에서 무거운 총을 던져내고 루크 림의 등 위에 주저앉았다. 바닥보다는 덜 차고 푹신했다. 킹은 권총을 제 품 안으로 집어넣고는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말없이 킹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늘진 얼굴로 날 말 없이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입술을 열더니 대뜸 말했다.

“…죽을 거야?”

“뭐?”

“내가 네게 다가갔잖아. 죽을 거야?”

시선을 내려 킹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 안엔 긴 상처가 나 있어 피가 흥건했고 먼지가 묻어 있었다. 아파 보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다시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축축한 낯이 비 때문인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우는 것 같아 보였다.

“내 손을 잡았으면 좋겠어.”

머뭇대다가 결국 팔을 뻗어 그 손을 잡았다. 그저 가볍게 올린 접촉에 불과했으나, 킹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를 얽어 들어오더니 강하게 깍지를 끼고는 내 몸을 당겨 일으켰다. 그리고 날 강하게 껴안았다.

“그래, 넌 못 죽는다고 했잖아, 로터스.”

비에 젖긴 했으나 킹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힘없는 몸을 킹에게 축 기댔다.

“이번엔 제때 왔지?”

킹이 중얼거렸고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미 맞고 고문당했잖아. 아파…….”

“늦었어?”

힘없이 대꾸하는 내 말에 놀란 그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들어 왔다. 부은 볼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자 힘을 풀고 다치지 않은 턱을 잡아왔다.

“…그러네. 좀 늦었네, 얼굴이… 많이…….”

킹은 찌푸린 얼굴로 내 얼굴을 훑어보았다. 불쾌해 눈썹을 찡그리자 킹이 피식 웃더니 내 얼굴을 놓고 다시금 끌어안았다.

“그래도 귀여우니까 걱정 마.”

“안 귀여워도 돼.”

“여보는 뭘 해도 귀여울 거니까 그건 좀 힘들겠다.”

고개를 흔들며 놓으라는 뜻을 알렸지만 킹은 놓아주지 않았다. 외려 붓지 않은 뺨 쪽을 살살 문지르더니 더럽지도 않은지 쪽 소리가 나게 가볍게 입까지 맞춰왔다.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얼굴이 붙들린 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마주 보았다. 물에 젖기는 했지만 평소처럼 잘 생겼다. 얼굴은 다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마 위로 떨어진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자 킹은 평소처럼 미소 지으며 능글대는 투로 물어왔다.

“왜, 반했어?”

“아니.”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킹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싶은 듯 보였으나, 그의 표정은 계속 무너져 내렸다. 결국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근데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반한 건 모르겠어. 근데…….”

“…근데?”

“…평생 볼 얼굴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작은 목소리에 킹은 잠시 침묵하다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내 몸을 떨어트리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유로운 미소 따위 킹의 얼굴에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날 사랑하게 된 거야?”

농담을 던지듯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가벼이 말하려고 애쓰는 게 보였으나 킹은 결국 실패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아니야.”

꽤나 절박한 물음이었으나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킹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지며 험악해졌다.

“이 와중에 농담하고 싶은 거면 집어치워.”

킹이 내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의 손등뼈가 희게 불거질 만큼 센 힘이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결국 그의 귓가에 바른 발음으로 분명하게 대꾸했다.

“이따위 상황에 농담하는 인간 아니야. 네가 오기 전엔 물고문도 당했고 얼굴도 맞았고 아프고 지쳐 뒤질 것 같은데 그딴 농담을 어떻게 해.”

“…그럼, 갑자기 왜?”

킹이 얼굴을 보이기 싫은 듯, 내 뒤통수에 손을 올려 날 깊게 끌어안더니 낮고 작은 목소리로 되물어 왔다. 나는 그의 음성보다 더 크고 분명하게 소리를 내 대답했다.

“…네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날 신경 쓰는 이도, 날 아끼는 이도, 날 구할 사람도 모두 생각해 봤는데 너밖에 없었어. 빌어먹게도 결국 받아 들어야만 했지. 옳고 그름을 떠나 내 선택지는 너만이 유일하다는 걸.”

킹은 침묵했고 나 역시 말하지 않았다. 킹의 온기에 그저 몸을 데우며 차분하려 애썼다. 하지만 쾅쾅대며 유리창을 흔드는 소리에 놀라 몸을 움츠리자 킹이 강하게 몸을 붙들어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 하나만 해주면, 그러면 내 모든 걸 줄게.”

은근한 목소리였으나 여유는 없었다. 그 물음에 작은 숨처럼 되물었다.

“뭐를?”

“날 사랑한다고 말해. 기꺼이 속아줄게. 그 거짓말 하나면, 평생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해 줄게, 응?”

킹이 날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 몸 모든 곳에 닿아올 듯이. 그리고 그 음성은 너무나 절박해서 차마 답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벅찬 그 말은 서로가 거짓임을 안다 해도, 그 말 하나로 쇠사슬보다 두껍고 튼튼한 속박이 생겨나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으니까. 킹은 내가 당장이라도 떠나버릴까 불안한 듯, 입술을 달싹이다 초조한 음성을 뱉어냈다.

“거짓말 잘하잖아, 제발. 말해…….”

나는 결국 그 쇠사슬을 손목에 감아야만 했다.

“…사랑해, 킹. 내가 있을 만한 곳은 네 옆인 것 같아.”

“나도, 사랑해. 로터스.”

분명히 소리 내어 말하자 킹은 밝은 말투로 대꾸해왔다. 내뱉은 나의 말 전부가 거짓은 아니었지만 내가 말하는 모든 거짓을 알아챌 수 있다던 킹은 그 말 속에 섞인 진실을 굳이 헤아리지 않았다. 그저 너무나 거대하고 벅찬 거짓말에 기꺼이 웃으며 날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킹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몸에 힘을 뺐다. 진실과 거짓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사랑해…….”

다시금 소리 내 중얼거렸다. 거짓인 게 분명한 말이었으나, 내 평생을 킹에게 주기로 결정한 이상, 나 역시도 이 거짓말에 기꺼이 속기로 결정했다. 내가 내 거짓을 믿으면 진실이 될 수 없는 걸까? 내가 믿어버린 이상, 그것은 진실이 되는 것 아닌가?

철학적이고 머리 아픈 이야기들을 생각하다가, 눈을 꽉 감았다. 결국 지금 내가 확신할 수 있을 사실 하나는 킹의 몸이 추위를 가시게 할 만큼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품으로 더욱 깊이 안기자 킹은 내 몸을 더욱 강하게 안아 왔다. 거짓과 불신으로 시작된 관계의 종식과 함께 모호한 허구로 다시금 시작되는 관계의 서막을, 시끄러운 천둥소리가 온 세상에 알려 댔다. 귀가 아플 정도로 떠들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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