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수건 한 장만 아래에 두른 채 거실로 나오자 킹은 익숙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모두 내 옷이었다. 품이 넉넉한, 찰랑거리는 남색 반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를 뒤집어 입고 머리를 내린 킹은 대학 시절 보았던 또래 친구들 같았다. 내 무릎까지 왔던 바지는 킹이 입으니 바지 끝이 무릎보다 반 뼘 높았다.
“속옷은 뭐 입은 거야.”
옷은 그렇다 쳐도, 몸에 딱 맞는 걸 입는 속옷 중에 킹이 입을 만한 건 없었다. 나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킹은 그것보다 훨씬 컸고, 몸통도 킹이 훨씬 두꺼웠다. 더욱이 킹의 허벅지는 무척이나 굵어, 내 속옷을 입으면 킹의 종아리에서 걸려 올라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킹은 처음 보는 캐주얼한 차림새로 내게 걸어오더니, 내 허리에 두른 수건을 멋대로 풀어냈다. 허술한 매듭은 킹의 손 하나로 쉬이 풀려 떨어졌고 킹은 그 수건을 들어 내 머리에 덮었다. 그리고 젖은 머리칼에 비비며 산뜻하게 웃었다.
“안 입었지. 여보 거는 나한테 너무 작아.”
이제야 킹의 바지 밑으로 빠져나온 킹의 귀두 끄트머리가 보였다. 집에 있으면 몰라, 저런 차림새로 외출을 하자는 건가?
“그러고, 밥 먹어?”
어이가 없어 물으니, 킹은 뭐가 문제냐는 듯 오히려 되물어 왔다.
“차 타고 가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아무도 마주칠 일 없어.”
그리고 가까이 몸을 숙이고는 속삭였다.
“이제 내 좆은 여보한테만 보여줄 테니까 질투하지 마.”
“변태새끼.”
“그 변태한테 박아 달라고 애원한 건 너잖아.”
참지 못하고 중얼대자, 킹이 헝클어진 내 머리를 손으로 대강 빗어 정리하며 대꾸했다. 욕실 안에서의 격한 행위를 떠올리고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셔츠와 긴 바지를 입은 단정한 차림새인 나와 달리 속옷조차 입지 않은 킹과 차를 타고 시내를 달렸다. 아직 출근시간이 시작되기 전이라 도로는 한산했고 평소보다 빨리 달려 도착했다. 킹은 차를 세워 두고 숨어있던 엘리베이터로 날 이끌었다. 그리고 늘 가던 층이 아닌 다른 층의 버튼을 눌렀다.
“저긴 뭔데?”
“옷 입어야지.”
꽤나 고층인 버튼을 눈짓하자 킹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정확히 그걸 물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제대로 된 옷을 입긴 입을 모양인가 보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킹의 허벅지 근처에 튀어나온 성기가 꽤나 거슬렸다.
엘리베이터는 꽤나 빠른 속도로 올라 경쾌한 전자음을 울리며 도착을 알려왔다. 복도는 넓었으나 문은 단 하나였다. 킹은 아무렇지 않게 문을 밀어 열었고 그 안에 보인 것은 아주 커다란 객실이었다. 1박에 꽤나 많은 돈을 낼 게 분명한 방을 킹은 아무렇지 않게 들어서며 파란 하늘을 그대로 내비치는 유리 벽 근처에 서 있는 소파를 손짓했다.
“앉아 있어.”
킹은 그런 소파 따위 하찮은 것이라는 듯 굴었지만 엄마가 아끼던 소파보다 몇 배는 비쌀 게 분명했다. 킹이 돈이 많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교도소를 들어가기 전에도, 엄마가 일하던 호텔 건물을 보며 이 호텔을 가진 이는 어마어마한 부자겠지 생각하며 부러워했으니까.
하지만 교도소에서 그를 만났고, 교도소에선 그나마 금전적인 면에 있어서는 평등했다. 그래서 킹이 얼마나 대단한 부호인지, 이 방을 보고서야 제대로 와닿았다. 킹의 부가 부러운 동시에 킹과 멀어지고 싶어졌다. 웬만큼 돈이 많으면 몰라, 이 정도 부자와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평온한 삶을 살고 싶었다.
큰 유리 벽이 비추는 바깥 하늘이 너무 밝고 맑아 멈춰 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선 저렇게 가까이 하늘이 보이지 않았는데 킹은 하늘마저 독점해낼 수 있는 권력자였다. 하늘에 가까워지듯 소파로 걸어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방 안으로 들어간 킹을 기다렸다. 소파는 무척이나 푹신하고 편안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대신, 벽에 걸린 시계만 바라보았다. 초침이 분명하게 움직이는데도 소리하나 내지 않으며 아주 고요하게 시간의 변화만을 알려 왔다. 그리고 약 5분이 지났을 무렵, 달칵 소리가 나며 킹이 들어갔던 방문이 열렸다.
킹은 내게서 훔쳐간 티셔츠와 반바지 대신, 유리 벽 너머 하늘을 베어온 듯 밝은 푸른빛의 피케셔츠와 흰색의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맨발인 점만 빼면 꽤나 탁월한 테니스 선수 같았다. 캐주얼한 차림새였지만 아까보다는 꽤나 얌전하고 단정했다.
“속옷 입었어?”
끝까지 다 채운 단추가 불편한지 한 손으로 단추를 천천히 풀어내는 킹에게 물었다. 지금 킹이 입은 바지는 좀 전에 입었던 내 것보다 짧았지만 킹의 맨 성기가 빠져나와 보이지 않았다. 길게 갈라진 킹의 허벅지 근육이, 보이는 전부였다. 다행히도. 그렇지만 킹이라, 왠지 불안해 굳이 질문을 던졌다. 방금 입은 셔츠의 단추를 거칠게 풀어내며 내게 다가오는 킹이 왠지 부담스러워 소파에 등을 딱 붙여 앉았다. 또다시, 난잡하고 상스러운 섹스를 하자고 충동질할 것 같았다. 짜증 나게도 나는 또 쉬이 넘어가겠지. 등에 푹신한 소파가 닿아왔다.
하지만 그것 정도로는 킹과 멀어질 수 없었다. 이곳은 결국 킹의 집이었고 내가 킹에게서 달아날 공간은 없었으며, 킹은 어느새 바로 한걸음 앞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 다리를 뻗어, 그 한 걸음을 좁혀 다가온 킹이 내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소파 한쪽이 내려앉았다 다시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킹은 덥석 내 손을 잡아 제 바지 구멍 아래로 집어넣었다.
“이게 싫으면, 벗을까?”
손끝에 건조한 천이 말캉한 살덩이를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말로 하면 되지, 꼭. 잡힌 손이 불편해 손을 꼼지락대자, 손가락에 닿은 성기가 움찔대는 게 느껴졌다. 두꺼운 허벅지 탓에 바지와 다리 사이 틈이 무척 좁아 손바닥에 닿아오는 허벅지의 온기도 손가락 끝에 닿아오는 킹의 성기도, 그리고 좁은 바지 틈도 모두 부담스러웠다. 힘을 줘 빼내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평생 입고 있어.”
“아쉽네.”
킹이 중얼거렸다. 킹의 바지에서 빠져나온 손은 찬 공기를 만나 시원했으나 여전히 킹에게 붙들린 손목은 덥고 뜨거웠다. 킹의 엄지가 손목 안쪽을 꾹, 눌렀다. 그 아래 있는 문신을 손가락으로 훑어 헤아리듯. 하지만 문신은, 분명한 잉크 자국만을 새겼을 뿐 요철을 남기지는 못했다. 두 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결국 킹의 이름이 박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침 식사는?”
내 손목을 붙든 킹의 손과 안쪽을 은근하게 문질러오는 엄지를 모른 척하며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배가 고팠기도 고팠지만, 킹의 신경을 잠시 돌린 틈을 타 손목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킹은 그딴 얕은수 따위 쓰지 말라는 듯, 오히려 내 손목을 강하게 붙든 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킹과 나 사이에 있던 한 뼘 남짓한 거리가, 서로의 허벅지가 닿을 만큼 줄어들었고, 손목을 강하게 눌러오는 힘에 뼈가 아팠다.
“이따 올 거야.”
킹이 문을 눈짓했다. 호텔이니 룸서비스는 당연하겠지. 부럽기는 했으나 딱 그뿐이었다. 허기가 더 급했고, 그것보다 내 손목을 붙든 악력에서 오는 고통이 더 컸다.
“아파.”
손목을 이리저리 흔들며 말하자 그제야 킹은 손목을 붙든 힘을 조금 줄였다. 하지만 놓아주지는 않았다. 떼를 쓴다 해도 놔줄 인간이 아니라, 다시 세게 잡기 전에 그냥 얌전히 굴자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정해진 출근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살아?”
시간 여유가 있다고 해서 킹과 별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수다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방안을 훑어보며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킹은 자신에게서 시선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못내 불만스러운 듯, 내 턱 밑에 손가락을 넣어 자신을 바라보게 끌어당겼다. 킹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제야 킹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하지만 신혼집은 제대로 된 곳으로 잡자. 이런 곳보다 마당 있는 곳이 더 좋겠지? 몇 층이 좋아? 난 계단 같은 거 번거로워서 그냥 넓은 단층이 좋더라. 애들이 뛰어놀기에도 넓은 공간이 좋겠지. 하지만 여보 취향에 맞출게. 전적으로.”
애들은 또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킹은 지겹지도 않은지 또다시 결혼을 이야기했다. 킹에게도 나에게도 결혼이라는 단어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다. 하지만 킹은 꼭 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모양인지 정말 지겹도록, 매번, 끊임없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다 보면 내가 결국 자신과 결혼을 할 것같이.
“…벽 전체가 분홍색으로 발린 넓은 단층은 어때? 저기 있잖아, 내루에. 네가 원하면 가장 넓은 방으로 준비해둘 텐데. 이쁘잖아, 분홍색.”
그렇다고 나 역시 쉬이 넘어가는 인간은 아니었다. 킹을 만났던 교도소가 분홍색 단층 건물이었다.
“네 취향에 딱 맞았으니 거기 계속 있는 건 어때? 감빵 생활에 꽤나 재능이 있었잖아.”
눈을 휘며 웃었다. 교도소와 킹은 딱 어울렸다. 평생 거기에 있는 그림이 상상될 만큼. 내 표정을 따라하듯, 킹 역시 눈을 가늘게 휘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살포시 접혀 속눈썹을 내리깐 킹의 눈이 꽤나 고상하고 섬세해 보였다.
“그치, 분홍색이 이쁘긴 하지. 온몸이 분홍색으로 덮인 우리 허니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난 분홍색이 제일 좋더라. 우리 여보가 구멍 조일 때, 귀도 짙은 분홍색이던데 딱 여보 색이잖아.”
그러나 흘러나온 말은 아니었다. 저질스러운 말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대꾸해 봤자 돌아오는 말은 더욱 상스러울 게 분명했다. 킹은 여전히 내 턱 밑에 검지를 댄 채, 손가락을 당겼다. 나는 순순히 킹에게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입술에 킹의 입이 닿았다. 건조하고 말캉한 입술은 꽤나 가볍게 내려앉았다. 어린아이에게 사랑스럽다고 입을 맞추듯 산뜻한 행위였다. 꽤나 담백한 입맞춤이었기에 별말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자 이번에는 턱과 광대, 뺨에도 입을 맞춰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처럼 여러 번, 가볍게 입술에 쪽쪽 대더니 슬그머니 혀끝을 내밀어 드문드문 얼굴 피부 이곳저곳을 핥아왔다.
“간지러워.”
하지 말라는 뜻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일부러 나 들으라는 듯 쪽, 쪽 소리를 내는 것 또한 거슬렸다. 하지만 돌려 말하지 않고 분명히 내 뜻을 전해도 다 씹어 먹고 제멋대로 해석하는 킹이 그런 말을 알아 처먹을 리 없었다. 아니, 이미 알아듣긴 했으나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리가 없지.
“간지러우면 긁어 줘야지.”
킹이 이번에는 이로 내 피부를 살살 문질렀다. 간지러움이 해소되기는커녕 볼이 축축이 젖어와 오히려 더 거슬렸다.
“또 씻기 귀찮으니까 그만해.”
고개를 저으며 떨쳐내고 싶었지만, 킹이 아예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든 터라 벗어나기 힘들었다. 킹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더니 이내 혀 전체로 넓게 핥아왔다.
“맛있게 생겨서는 맛없네.”
킹이 중얼댔다. 보습제를 바른 지 얼마 안 된 피부에선 인공적이고 쓴맛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킹은 그런 것 따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외려 보습제를 모두 닦아 내려는지 넓게 혀로 핥기 시작했다. 개 같았다. 하지만 개는 날 박으려 하지 않는다.
“또 씻기 싫다고.”
결국 단호한 말투로 도리질을 치며 킹을 떨쳐내려 애썼다. 하지만 킹은 끈질겼다. 내 양 뺨을 양손으로 눌러 잡더니, 입꼬리에서부터 광대까지 길게 핥아 올렸다. 그리고 내 눈꺼풀에 입을 맞추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린애처럼 웃었다.
“내가 씻겨줄게.”
동의 뜻이 아닌, 어이없음의 시선으로 킹을 바라보았지만 킹은 역시나 제멋대로 해석하고는 내 얼굴을 살짝 기울여, 볼을 입 안으로 빨아들여 씹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여기가 포동포동해서 귀여웠는데.”
확실히 지금보다 예전이 젖살이 올라있었을 테지만 킹의 말대로 포동포동했던 것은 아주 어릴 적 말고 없었다.
“지금은 안 그러니까 이제 놔.”
씹고 빨아대는 통에 자국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안 보이는 목덜미나 옷에 가려지는 몸이면 몰라 얼굴에 잇자국이 나면 숨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킹은 외려 질겅질겅 내 볼을 씹어 왔다. 내 볼이 개들이 갖고 노는 고무공이 된 듯했다. 물론 개는 킹이었고. 킹의 단단한 치아에 피부가 짓물러 상처를 입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킹의 입이 떨어져 나갔다. 킹이 알아서 그만둘 리는 없었고, 방을 울리는 벨 소리 때문이었다.
벨 소리는 꽤나 심플하게 방을 울렸다 끊겼고 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겨우 풀려난, 아린 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거침없이 문을 향해 걸어가는 킹의 등을 바라보았다. 열린 문 사이로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보였다. 본래 룸서비스라면 직원이 테이블 세팅까지 끝 내주겠지만, 킹은 직원에게서 카트를 멋대로 빼앗아 왔다. 그리고 안쪽으로 카트를 옮기고는 쿵!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 것으로 직원에게 인사를 대신했다. 킹이 몸을 돌려 날 바라보더니 방긋 웃고는 카트를 앞으로 밀며 자신의 근처에 있는 탁자를 눈짓했다.
“이리 와.”
나는 순종적인 개처럼 킹의 말을 따라 탁자 앞에 앉았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킹은 트레이를 가볍게 들어 내 앞으로 음식을 옮겨 놓고는 잘 닦인 공처럼 빛이 나는 반구 모양 덮개를 열었다. 안에는 완벽하게 익힌, 써니 사이드 업 모양의 계란 프라이와 소시지 등이 담겨 있었다. 킹은 제 앞에도 접시를 똑같이 옮겨 놓고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음식을 먼저 받은 것은 나였지만 먼저 포크를 든 것은 킹이었다. 킹은 말없이 소시지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입에 넣었고 나 역시 킹처럼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킹과 나 사이의 소란은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섹스 중에 목이 강하게 조인 탓에 음식물을 넘기는 것이 살짝 불편했다. 나는 촉촉하게 익은 계란 흰자를 잘라 입에 넣으며 그 폭력적인 행위를 곱씹었다. 킹은 애초에 폭력적인 인간이 맞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일 만큼.
그러나 내게는 퍽 다정한 편이라는 말은 꽤나 옳았다. 오로지 킹의 기준에서 말이다. 내게 화를 낸 적은 있었지만 폭력을 휘두른 적은 없었다. 지 딴에는 사랑의 말이라는 이상한 단어들로 날 희롱하긴 했지만. 하지만 새벽의 섹스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호전적이었다. 킹이 내게 화를 낼 이유야 꽤나 많았다. 킹의 정보를 검사에게 냅다 넘겼으니.
섬뜩해졌다. 하지만 식사를 하며 드문드문 나와 시선을 맞춰오는 그 눈은 꽤나 얌전했고 심지어 산뜻하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킹이 그나마 숨겨왔던 파괴적 면모를 드러내며 새로운 성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가장 안전하고 어리석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킹과 나는 출근 시간을 3분 남기고서야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야 할 일이 없었지만 킹은 기어코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니 빠질 수 없다며 내 손목을 붙들었다. 매번 이런 걸로 말다툼하기도 피곤해 그냥 순순히 끌려갔다. 킹은 평소와 다른 새벽의 태도를 보인 적 없는 척 굴었다. 나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킹에게서 나올 말이 왠지 두려웠다.
킹의 사무실은 킹이 지내던 방의 딱 위층이라 굳이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는 없었지만 킹은 엘리베이터로 날 이끌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고 약 5초 뒤에 곧바로 문이 열렸다. 킹은 정장을 챙겨 입는 대신 아까 입은 캐주얼한 차림새로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런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킹이 낯설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차림새의 킹을 처음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내 감상을 말하지 않았다. 킹이 또 이상한 말을 붙여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킹이 지내는 방과 비슷하게, 한쪽 벽이 통유리로 된 이곳 또한 파란 하늘을 그대로 비추었다. 이곳 한복판에 서 있는 킹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사람 같았다. 절대자처럼. 그러나 킹이 절대자였던 것은 과거로 끝난 일이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킹은 크고 세련된 책상과 의자에, 마치 당장이라도 테니스 게임을 나가도 될 것 같은 차림새로 가 앉았고 나는 그냥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매번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나 스스로도 모르겠다. 킹의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다 가고 가끔 섹스를 하는 것은……. 그냥 정부情婦 아닌가? 내가 애초에 킹의 옆에 있기로 결정한 그 근본부터 따져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진짜 정부 노릇과 별다를 게 없었기에.
그러고 보니 내가 루크 림에게 넘긴 정보는 어떻게 됐더라. 연락하지 말라고 한 이후로는 정말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놓친 연락이 있나 확인해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톡, 톡 책상을 두드리며 가만 생각했다. 애초에 루크 림이 왜 린 오캄포와 미나콤을 조사하는지.
어쩌면 억측일지 모르겠으나, 루크 림이 린 오캄포의 대선 라이벌이자 휴 사토의 외삼촌인 리암 카야노와 손을 잡은 건 아닌가 싶었다. 일단, 린 오캄포와 미나콤 둘을 타겟팅 할 쪽으론 제일 유력했으니까. 휴 사토를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손가락을 자른 사람을 떠올리는 건 역시 최악이었다.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책상만 두드리고 있는 것이 수상할까 봐 다시 책을 들어 몇 장 넘기다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데, 문밖으로 꽤나 큰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킹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기다리듯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크 없이 누군가 문을 열었다.
그 사람은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으로, 끝으로 향할수록 넓게 퍼지는 바지 정장과 검정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키가 170cm를 훌쩍 넘겼는데 높은 힐까지 신으니 나와 비슷하거나 더 커 보였다. 그리고 채도가 낮은 분홍빛을 입술에 발라 곱게 화장을 한 미인이었다.
“엠마, 왜 점점 완다랑 닮아가?”
킹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엠마라고 불린 여자는 킹을 향해 곧바로 걸어갔다.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가 꽤나 당당하게 울렸다.
“어울리는 시간이 많은데 어떡하라고.”
그녀, 엠마는 긴 머리를 귀 뒤로 대강 쓸어 넘기며 대꾸했다. 그녀의 광이 나는 저채도의 분홍빛 손톱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엠마는 시선을 돌리다 그제야 날 발견했는지 잠시 눈을 크게 뜨고는 날 곧게 응시했다.
“아, 그… 네가 말했던 그 ‘새끼’?”
“완다랑 그만 어울려.”
완다 미나콤이 내게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말투로 엠마가 말했다. 킹 역시 느꼈는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네가 ‘그 새끼’라며. 별 온갖 욕을 다 해 놓고서는. 살면서 뒤통수 맞은 게 처음이라 그렇게 열을 내나 했지, 그게 다……. 좆이 시키는 거였구나. 케이크 갖다 바칠 때부터 다 알아봤어. 눈 훽 돌아간 거.”
킹이나 완다 미나콤이나 저 엠마라는 사람이나 다 말투가 비슷했다. 꽤나 오랫동안 함께한 사이인 듯했다. 케이크를 갖다 바쳤다는 게 뭐지? 아, 교도소에 있을 적 킹에게 면회 온 사람이 저 사람이었구나. 킹이 입 안에 고문처럼 욱여넣었던 비싸고 작고 이쁜 케이크가 이제야 생각났다.
“그건 그렇고, 홍보 기사 뜬 거 봤어? 꽤 그림 괜찮더라.”
엠마가 큰 태블릿 PC를 들고 킹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하이힐이 딱딱한 나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킹과 같은 방향에 서 있었고 태블릿 PC가 워낙 큰 탓에 화면이 내게도 보였다.
[린 오캄포, 하이투 대학교에서 꿈을 이야기하다]
-현 하이투 시장 린 오캄포(52)가 오늘 X월 X일 하이투 대학을 방문해, 학생들을 위한 특별 강연을 펼쳤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기사와 함께 안경을 쓰고 짧게 머리를 자른 린 오캄포가 마이크를 잡고 웃고 있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1만 완을 받았다는 그 특강인가 보다. 왠지, 긴장됐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림 괜찮네. 적당히 사람 좋아 보이고 그러면서 적당히 카리스마 있어 보이고.”
킹이 사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니 엠마도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그치, 저 사진이 가장 괜찮더라. 저걸로 초이스해서, 대대적으로 뿌렸어.”
엠마가 태블릿의 화면을 옆으로 넘기며 다른 기사들을 킹에게 보여주었다. 모두 비슷한 내용이었다. 오캄포의 홍보 기사가 순조롭게 퍼져 나가는 중인가 보다. 오캄포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준 강연에 사실 거액의 강연비가 있었다는 폭로 기사라도 터뜨리려나. 뭐든, 나와 관계없이 조용히 흘러가길 바랐다.
가만히 있다가는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이 티가 날까, 다시 책을 들어 바라보았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간호사에게서 말은 받아냈어?”
킹이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은 엠마를 슬며시 밀어내며 물었다. 엠마는 외려 엉덩이를 딱 붙여 앉아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아는 척은 꽤나 하던데 캐 보니 쥐뿔도 아는 게 없더라고. 대신 의사들한테서도 캐 보려고 했는데, 카야노 그 늙은이가 무서운지 입 꽉 다물던데.”
카야노…라면 휴 사토의 외삼촌이자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설치는 다양시의 시장 리암 카야노였다. 야쿠자 집안인 주제에 의사 출신으로, 과거 다양 보훈병원에 원장직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비리라도 캐는 모양인가? 대형병원은 꽤나 복잡한 권력 구조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킹은 가만히 엠마의 말을 듣다가 그녀를 밀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엠마는 허공에서 넘어지지 않게 겨우 버텨 서고는 킹을 노려보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이들의 행동이라기엔 상당히 유치했다.
“그래서, 소득이 없다는 말이야?”
킹이 그녀를 나직한 목소리로 질책하자 엠마가 다시금 태블릿 피씨를 킹에게 내밀며 대꾸했다.
“날 뭘로 아는 거야? 원무과 직원이랑 청소부들에게서 확실한 걸로 얻어냈으니 여기 왔지.”
태블릿 피씨의 화면은 내게 보이지 않았다. 킹은 액정을 대강 바라보며 화면을 손가락으로 넘기더니 다시 엠마에게로 건넸다.
“믿을 만해?”
“작년 봄에 갑자기 해고당한 사람들이라 다들 아주 앙심이 깊어. 직접 확인도 했고.”
톡, 톡, 톡. 킹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하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엠마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래, 잘했네.”
“나 없음 어쩔 뻔했어.”
엠마가 한 손을 제 허리에 올린 오만한 자세로 킹의 어깨를 툭 쳤다. 킹의 옷에 살짝 주름이 갔으나 킹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피식 웃었다.
“이 정도는 쉽잖아.”
늘 킹을 망나니라고 생각했지만, 킹은 어쩌면 나보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갖고 있는 듯했다. 완다 미나콤과 저 엠마와 어울리는 태도는 꼭 오랫동안 함께 해온 가족들과 같은 태도였다. 나는 주변에 단 한 명도 없었지만 킹에게는 아니었다. 괜히 분해 책을 꽉 쥐자 책장에 주름이 생겼지만 그 희미한 실선들을 알아챌 이는 나뿐이었다.
“말을 해도 꼭.”
엠마는 킹의 입을 때리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렇지만 진짜 때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킹의 책상에 올려 둔 쟁반만 한 태블릿 PC를 옆구리에 끼더니 킹을 향해 말했다.
“나 이제 간다.”
“그래, 잘 가.”
킹은 무심히 답했고 엠마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날 쳐다보고 나를 향해 웃었다
“잘 지내요. 그쪽도.”
그렇게 말하며 내 얼굴 전체를 훑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와 킹, 둘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녀가 있던 시간은 짧았지만 기운만큼은 대단했다. 책을 내려놓고 닫힌 문을 바라보던 나는 킹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뭐 하는 사람이야?”
“완다 옆에서 오랫동안 이것저것 했던 사람.”
고동색 눈동자가 날 향해오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것저것?”
“일도 처리하고 그러다가 붙어도 먹고…….”
남의 성생활을 알고 싶었던 건 아닌데, 킹은 제멋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완다의 뭐, 애인 비슷한 거니까 새엄마냐 그러면 또 그건 아니야. 엠마는 이미 결혼을 했거든. 중혼은 안 되잖아.”
“…….”
“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완다가 엠마의 내연녀네.”
킹은 전혀 산뜻하지 않은 말을 산뜻하게 지껄였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 그냥 섹스 파트너 정도려나? 완다는 애인이 엄청 많거든.”
“…그만 말해.”
“그렇지만 나는 여보 하나뿐이야.”
킹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진지하게 말해왔다. 웃겼다. 킹은 그만둘 생각이 없는지 날 똑바로 응시하며 덧붙였다.
“여보, 나는 오픈 릴레이션십 Open Relationship(한 명의 애인만 만나는 것이 아닌, 합의하에 동시에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거는 싫어. 나는 우리 여보가 내 밑에서만 앙앙댔음 좋겠어.”
가라앉은 고동빛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킹은 ‘앙앙’ 따위의 어휘를 입에 올렸다. 내가 섹스할 때 ‘앙앙’ 댔던가. 내가 섹스할 때 어떻게 소리 내는지 알게 뭐람.
“난 그냥 문 자체가 없으니까 열 생각 하지 마.”
제법 단호한 투로 말하자 킹이 피식, 웃었다.
“나한테만 문 좀 만들어주면 안 돼?”
“…….”
무시하며 책을 펼쳤다. 너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바른 방향을 몸을 돌렸지만 킹은 역시나 그것 정도로 기가 죽을 인간은 아니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문을 달아야겠네.”
킹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킹의 긴 팔이, 많이 과장해서 천장에 닿을 정도로 위를 향해 뻗어 있었다. 그리고 팔을 내려 몸을 푸는 폼이, 당장 나무를 잘라다 문을 달 기세였다.
“문을 달아도 통하는 구멍이 없으면 못 지나가지.”
입술을 비틀며 조소했으나 킹은 맑은 웃음으로 날 마주 보았다.
“우리 여보가 구멍이 왜 없어. 쑤셔 주면 물 질질 흘리며 조여대는 구멍이 있으면서.”
킹이 날 향해 잘생긴 눈을 휘었다. 얼굴만 멀쩡한 변태 새끼.
“또 하자는 거야?”
눈썹을 찡그리며 묻자 킹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거절 안 하지.”
“난 거절할 거야.”
“새벽엔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계속 쑤셔 달라고 했잖아.”
킹의 난잡한 이야기를 끊어오는 휴대폰 진동이 반가웠다. 잠금을 풀고 화면을 바라보자 일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문자가 떠 있었다.
[로터스 리 고객님, 안녕하세요. Pd 택배입니다. 지난 X월 X일에 반품 신청하신 상품 수령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상품 품질의 이상으로 반품 처리가 불가하다는 안내 말씀드립니다. 아래 있는 번호로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상담원과의 통화를 통해, 자세한 사항 안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230 – 0312]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했더니, 문자를 보내왔다. 문자의 내용 따위 중요치 않게 생각하며, 좀 전 킹과 엠마가 나눈 대화들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떠올렸다. 카야노의 병원, 원무과 직원……. 전해야겠지. 그게 내가 킹의 옆에 있는 이유니까 그래야만 한다. 휴대폰을 한 손에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킹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로 향했다.
“어디 가?”
“화장실도 못 가?”
“화장실 간다고 했다가 다쳐온 적이 있으니 말이지.”
“여기서도 그 꼴 나면 넌 진짜 무능력한 쓰레기인 거네.”
왼손 새끼손가락을 들어 달랑대며 날카로운 말투로 대꾸하니 킹은 눈썹 한쪽을 치켜올리고는 그냥 나가 보라는 듯 문을 눈짓했다. 킹의 허락이 없어도 나갈 생각이었기에 못 본 척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닫고 그 앞에 서서 잠깐 한숨을 내 쉬었다. 피곤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급했는지, 휴대폰 진동이 울리며 손을 희미하게 간지럽혀 왔다. CCTV가 없을 화장실로 가 그사이 끊긴 전화를 다시금 걸었다. 저번에 들려왔던 안내 멘트를 집어치운 채, 루크 림이 곧바로 전화를 받아왔다.
“여보세요.”
[…….]
상대에게서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은 아니었다. 씨근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이거 뭐 음란 전화 그런 겁니까?”
어이없어 농담조로 따져 물으니, “씹.” 따위의 작고 낮은 욕설 소리가 들려왔다.
[…리 씨, 로터스 리 씨.]
“네, 말씀하세요.”
[잠시 생각해봤어요. 어디서부터가 실수인가.]
“무슨, 뜻이죠?”
무슨 개소리냐고 대꾸하고 싶지만 겨우 참았다. 그래도 검사이니까.
[버러지 같은 범죄자에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해달라 청한 것이 실수였을까요?]
“…청이 아니라 협박이었지 않습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나 루크 림은 상관하지 않고 멋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도 킹 미나콤을 상대로 뒤통수를 쳤다기에 좀 쓸 만한 줄 알았죠. 더욱이 그 킹 미나콤이 당신에게 죽고 못 산다고 하길래, 가장 나은 선택지일지 알았지 뭡니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그냥 똑바로 이야기하세요.”
[아, 하고 싶은 이야기요? 당신이 정말 무능력하다는 이야기겠죠. 그 기간 동안 붙어먹느라 바빴는지 기껏 물어온 정보는 하나인데, 그것도 가짜이고. 잘 붙어먹지도 못했나 봐요. 베갯머리송사가 이따위인 거 보면 남창 짓으로 벌어먹지도 못하시겠어요, 리 씨.]
“…영감님의 말에는 교양과 예의가 흘러넘쳐서 저 따위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겠네요. 가짜라니요.”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고 싶으신 걸 제가 이제야 알았네요. 거기서는 또 어떤 놈에게 구멍이 돌려질까, 벌써부터 기다리시나 봐요.]
이죽대는 말투가 꽤나 볼품없었다. 전화기에서 입을 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사님, 가짜라는 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설명해주시겠어요?”
완다 미나콤과 킹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들은 분명히 강연을 빌미로 오가는 돈을 이야기했었다. 1만 완.
[붙어먹다 보니 떡정이라도 들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절 파괴할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었네요. 그저 제 손이 더러워지고 피곤해졌다는 것뿐이지만. 오캄포의 계좌는 물론 그의 친족들의 재산까지 싹 깨끗합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쓸모 있는 정보도 아니었지만, 무능력한 남창이 물어다 준 정보가 딱 그거인 걸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지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위에서 깨지고 린 오캄포는 좋은 기사가 뜨고……. 사는 게 영 쉽지 않아요, 그쵸?]
루크 림이 그나마 차분해진 투로 말해왔으나 그 말에 담긴 내용은 역시나 분노가 그득했다. 입을 다물었다. 킹과 엠마에게서 얻어낸 조각 정보들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루크 림이나 킹을 걱정해서는 물론 아니었다. 내가 걱정됐다. 갑자기, 강연비 정도야 없던 일이 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 말을 들은 게 바로 어제였고 강연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것도 오늘 오전. 그 짧은 새, 정해졌던 강연비가 사라진다고?
왠지 불안했다. 그리고 이내 새벽의 폭력적인 섹스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킹이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날 떠본 것일 수도 있다. 강연비 따위 원래 없었던 일이지만 내가 진짜 정보를 흘리는지 아닌지 시험해본 것일 수도 있다. 확신이 들었다. 오늘만 해도, 지나치게 허술할 정도로 조각조각 정보를 흘리는 것이 수상했다.
전화기 너머로 루크 림이 떠들어 대는 말소리들은 들리지 않았다. 루크 림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강하게 진동이 울려오며 루크 림이 제 불만을 알려 와 딱딱한 바닥을 향해 휴대폰을 던졌다.
콰직!
단단한 전자기기가 그보다 단단한 돌바닥을 만나 부서지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화가 났기도 했으나 저 휴대폰이 해킹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거미줄처럼 액정에 금이 간 휴대폰이 잘게 진동하며 화면을 밝혀왔다.
[1230 – 0312]
루크 림이었다. 딱딱한 신발 밑창으로 휴대폰을 내리찍어 밟았다. 그럼에도 진동을 계속 울려왔고 더러워진 휴대폰을 집어 다시금 바닥을 향해 던졌다. 그 짓을 네 번 반복하고 나서도 잘게 진동해, 세면대에 물을 받고 휴대폰을 담갔다. 그제야 화면을 밝혀오던 빛이 사라져, 검은 화면에 폭력적인 실금만이 가득했다.
바스락.
깨진 액정의 유리 조각들이 내 손을 간지럽혀 왔다. 곧바로 휴지통에 휴대폰을 던져 버리고 손을 씻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건조한 종이 냅킨으로 손을 닦고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한 후에 문을 밀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킹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로 향해 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아까 바라보았던 책을 펼쳐 읽는 척을 시작했다. 나에게서 별다른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인지, 킹 역시 평소처럼 일을 했다. 킹을 힐끗 바라보자, 그의 등 뒤 넓게 비친 하늘에서 조금씩 구름이 뭉쳐가는 게 보였다.
나는 아무런 일이 있지 않았던 것처럼 평소와 같이 앉아 책을 뒤적댔고 킹의 허튼소리를 받아주니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유리창 너머로 구름이 더욱 두꺼워지며 하늘이 뿌옇게 변한 것이 보였다.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킹 대신 킹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부터는 안 나와.”
“무슨 말이야?”
킹이 몸을 일으키더니 등 뒤 잿빛 구름에서 멀어지며 내게로 다가왔다. 차분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킹의 걸음이 보다 빨랐다.
“말 그대로 안 나온다고. 이제 일은 필요하지 않아. 사실 제대로 된 일도 아니었잖아?”
킹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계속 뒤를 향해 걸었고 결국 등에 문이 닿았다. 이제 문을 열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킹의 손이 문손잡이를 꾹 누르며 날 막아섰기에 달아날 수 없었다.
“그니까 그 일 같지도 않은 일을 이제껏 하다가 왜 갑자기 그러는 거지, 응?”
아이를 어르는 투로 킹이 내게 물어오며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건조한 피부끼리 마찰하는 감각은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피하고 싶었으나 내게 허락된 공간이 없었다.
“네가 날 갖고 노는 거에 더 이상 어울리기 싫거든.”
겨우 고개를 비틀어 빼내 킹의 손에서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손은 보다 끈질겨서 다시금 얼굴에 닿아왔다. 킹은 엄지로 턱을 꾹 누르며 단단히 잡더니 자신을 향해 고정했다. 나는 여과 없이 킹에게 내 얼굴을 모두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내게 허락된 유일한 도망은 킹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눈을 내리깔며 짙은 고동빛 눈동자를 피해냈다. 턱을 당겨 올려 목의 피부가 팽팽히 땅기는 것이 느껴졌지만 여전히 킹을 바라보지 않았다. 킹은 잠시 포기한 듯 내 턱을 편하게 내려주었지만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퍽 간질대는 목소리로 속살댔다.
“갖고 논 적 없어.”
우스웠다. 킹은 날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날 유희거리로 여겼다. 그때와 달리 날 사랑한다며 애절한 표정을 지어와도, 그 본성이 바뀔 수 있을까?
“날 옆에 두고 정부 노릇한 것은 그래. 내가 자청했다고 칠 수 있지만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날 이용하는 건 갖고 논 거지. 안 그래?”
이대로 가다간 킹에게 말려들 것 같았다. 얼굴을 붙든 손을 피해낼 수 없다면 당당한 척 굴어야 했다. 어깨를 펴고 눈을 치켜떠 킹을 마주 보았다. 같은 위치에서 보고 싶었으나 그는 나보다 커, 내가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킹의 짙은 고동빛 눈동자가 날 훑더니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로터스. 그건 네가 날 갖고 논 거잖아. 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을 구걸하는 내 뒤통수를 다시 치려 다가왔으면서. 그래서 나는 그 장단에 어울려 준 것뿐이야.”
킹의 엄지가 은근하게 내 턱을 문질러 왔다. 킹의 가슴을 양손으로 밀며 벗어나려 했지만 킹의 양손이 내 손목을 단단히 붙들어 벽으로 붙였다.
“애초에 그딴 인간이 내 옆에 붙은 게 너 때문이야. 나는 그냥, 평온하게 살고 싶었다고. 그런데 너 때문에, 너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협박당한 거지, 내가 널 갖고 논 게 아니라. 나도 그따위 짓 피곤하다고.”
말을 하다 보니 화가 났다. 난 잘못이 없었다. 애초에 나는 킹과 배신하고 말고 할 관계도 아니었고 킹의 감정도 일방적이었는데 내 얼굴을 퍼트리고 검사 같은 인간이 붙고 당시 교도소를 가게 할 수 있다며 협박당하고. 애초에 모두 킹 때문이었다.
킹은 벽에 고정했던 내 왼쪽 손을 천천히 내리더니, 그 안쪽에 있는 문신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저딴 게 몸에 박힌 것도 모두 킹 때문이었다. 모두 다.
“그래, 내가 네 인생을 꼬아 놓는 데에 좀 일조하긴 했지. 하지만, 선택한 건 너였어. 로터스.”
“난 이딴 거 선택한 적 없어.”
손목을 비틀어 킹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하지만 도무지 빠지지 않았다. 킹은 우습다는 듯 작게 웃더니 내 손목 안쪽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넌 날 선택했어. 내게 먼저 다가온 것도 너였고, 널 내게 준다고 한 것도 너였지. 모두 네 선택이야.”
“…다른 선택지가 없었는데 어떻게 선택이야.”
지쳤다. 이 모든 상황이. 손목에 힘을 빼자 잡아오는 악력도 점차 약해져 그나마 편했다. 하지만 완전히 풀려날 수는 없었다.
“네겐 다른 선택지가 있었어. 그대로 죽거나 강간당하는 거. 그렇지만 내게 왔고 내게서 보호받았잖아. 넌 그걸 배신으로 돌려줬지만.”
죽거나 강간당하는 것이, 선택이라는 그 말은 꽤나 무심했다. 그것이 그저 사실이라는 듯 킹의 말투엔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선택했어야만 이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거란 말인가. 킹은 그따위 말을 지껄이면서, 내 손끝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쪽,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사랑스럽다는 듯한 그 행위가 무척이나 모순적이었다.
“애초에, 우리 사이에 배신이라는 말이 성립했던가? 하극상 정도는 되겠네. 그래, 강간과 죽음에서 도망쳐, 내가 네게 간 것이 우리의 사이지. 그 사이에 믿음은 당연하게도 없어.”
킹은 꿍꿍이를 보이지 않았고 나는 늘 킹의 생각을 추측하고 의심해내야 했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킹은 과한 것을 원했고 지금도 역시 그랬다. 손을 강하게 당기자 드디어 손목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날 풀어준 건 아니었다. 딱 두 개뿐인 손을 쓰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했을 뿐이다. 그 손으로 킹은 내 얼굴을 만져왔다. 유리 인형을 대하는 듯 꽤나 부드럽고 섬세한 손짓이었다.
“그래, 내가 널 조금이라도 믿은 내가 멍청했지. 그래도 난 네가, 내게서 도망치는 그 순간까지도 널 믿고 싶더라고. 우습지, 참.”
“당연히 넌 날 믿을 수 있었겠지. 내가 감히 널 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잖아. 안 그래?”
얼굴을 매만지는 손을 뿌리쳤으나 끈질기게도 달라붙어 와 내 뺨에 딱 붙었다. 볼을 데우는 온기가 짜증 났다.
“그래, 네가 날 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어. 멍청했지. 얌전한 고양이도 할퀴는 법인데 말이야. 하지만 지금도 그때처럼 널 믿고 싶어. 솔직히 말해 과거에 널 얕봤었지. 하지만 지금은 널 곁에 두고 싶으니 믿는 거야. 네가 날 해치려고 하는 생각 따위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그냥 믿고 싶었어. 네가 그냥 이대로 모른 척 내 곁에 있기를 바랐어. 그렇지만 넌 늘 내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아. 좆같게도.”
꽤나 부드러운 말씨로 시작했던 말은 거친 욕설과 함께 끝이 났다. 비틀린 킹의 입매가 웃겼다.
“이제는 그 대단하신 사랑이 좀 식었나?”
킹의 손목을 붙잡아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러나 킹은 늘 그렇듯 나보다 강했다. 내 손아귀에서 쉬이 빠져나오더니, 이번에는 내 목덜미를 문질러 왔다. 또다시 목줄기를 틀어 잡힐까 무서웠다. 내 공포심과는 다르게 킹의 표정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아니. 씹스럽게도 여전히 사랑스럽네. 니가 뭘 해도 사랑스러워.”
엄지로 울대를 문지르는 손짓은 꽤나 다정했지만 이대로 꾹, 기도를 눌러 막아버릴 것 같았다. 몸이 굳어 왔지만 긴장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번에도 날 선택해. 넌 그래야만 하니까.”
킹이 내게 얼굴을 가까이 내리며 속삭거렸다. 마치, 내가 진 의무를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단호한 투였다. 킹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려 애썼다. 내가 초조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겨우 내뱉은 목소리는 약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내가 왜?”
“날 선택하지 않으면, 넌 또 교도소에 가게 되겠지. 그리고 또 같은 위기에 빠질 테고. 그렇지만 이번엔 난 거기에 없어. 교도소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네가 내게서 달아날 수 있을까? 망명 따위는 현명한 선택지가 아니었어. 로터스. 네게 유일하게 옳은 선택은 나뿐인데.”
손은 쇄골 근처까지 내려가, 셔츠 사이를 헤집듯 쇄골의 옴폭한 부분을 꾹 눌렀다. 연약한 뼈가 깨어질까 두려웠다.
“개소리 하지 마.”
겨우 목소리를 꾹 눌러, 단단한 소리를 내려 애썼다. 차분하게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문장 그 자체는 미숙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이 섬에서, 네 생사를 신경 쓰고 네 존재를 유일하게 원하는 이는 나뿐이잖아. 아니, 이 지구에서 그래. 너는 인정하기 힘들지 몰라도 네게는 나뿐이야, 로터스.”
“허튼소리 하지 말라니까!”
문득 공포스러웠다. 사실이었으니까. 이 섬에서 내가 죽으면 내 장례를 치러줄 사람을 헤아리면 킹뿐이었다. 씹스럽게도 말이다. 하지만 애써 부정했다. 사실이 아니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킹의 입가에 걸려 있는 여유로운 미소와 초조한 듯 내리누른 내 입술에서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이미 드러나 있었다.
“사실인 걸 알고 있잖아. 네게는 나뿐이야.”
살짝 튀어나온 긴 쇄골 뼈를 킹의 엄지가 모양을 헤아릴 듯 살살 문질러왔다. 입술이 내게 닿을 듯, 킹은 더욱 가까이 얼굴을 맞붙여왔다. 그는 날 제 시선에서 놓치지 않으며 강렬하게 응시해왔고 나 역시 지지 않고 마주 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멍청하게도 먼저 시선을 피하며 작은 음성을 겨우 뱉어 냈다.
“…나 혼자라도 상관없어. 내게 다가오지 마. 또다시 접근하면…….”
“그래, 네게 접근하면.”
여유롭게 되물어오는 킹의 말투가 화가 났다. 부단히 생각했다. 그러면, 킹이 또 접근한다면 킹에게 가장, 가장 효과적으로 먹혀들 게 뭘까. 그간 보아왔던 킹의 모습 중에서 그가 가장 절박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입꼬리를 위로 당기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킹과 나의 시선이 맞부딪히며 서로의 숨이 섞일 듯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거야.”
“…….”
킹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그의 여유로운 미소를 내가 모두 빼앗아온 듯했다.
“네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기차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는데 뭘 못해. 그래, 죽을 거야. 넌 날 사랑한다며. 네가 가장 상처받고 끔찍해할 방법으로 죽을 거야. 그래, 네 말대로 과거엔 죽음을 피해 널 선택했다면 이제는 널 피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거야.”
죽을 리 없었다. 나는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킹에게 가장 유효한 말이라는 것을, 킹의 표정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큰 손이 목을 감싸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는다는 말, 장난으로라도 하지 마.”
당장 조를 듯, 목을 잡은 힘은 점차 강해졌다. 숨이 막혀왔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킹은 이 손으로 내 숨을 끊을 수 없다. 찡그린 표정이 꽤나 절박했으니 말이다.
“죽을 거야. 목을 매달든 차에 뛰어들든, 기차에서 뛰어내리든.”
킹의 손에서 목을 천천히 빼냈다. 그 손은 목을 강하게 붙들며 놓을 수 없다는 듯 뒤따라왔지만, 표정을 찡그리고 과장되게 숨 막힌 척을 하니 금방 놓아주었다. 킹의 손은 금방 비워졌으나 그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그득했다.
“넌 못 죽어.”
입매를 비틀며 킹이 나직하게 말했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듯이.
“내가 왜 못 죽어? 킹, 네 말 대로 내가 널 선택한 것이라면, 이번에도 죽는 걸 선택할 수 있어.”
“말장난하지 말고.”
“내 말이, 그저 장난으로 들려? 안타깝네. 킹.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인간이 곧 죽는다는데.”
뒷걸음질 치고 싶었으나 등이 문으로 막혀 있어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초조하지는 않았다. 초조한 쪽은 킹이었다.
“넌 못 죽어.”
“내 목숨은 내 거야. 네 게 아니라.”
“넌 죽을 수 없어.”
단호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건 킹의 의지로 될 수 없는 문제였다. 나 역시 단호하게 대꾸했다.
“멀리서라도 내가 살아 있길 바란다면 앞으로는 내게 다가오지 마. 네 앞에서, 아니 네가 모르는 곳에서 죽을 거야. 내 죽음의 순간을 네가 알 수 없게.”
옆으로 슬그머니 비켜서며 킹의 품 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킹은 보내주는 듯 날 내버려 두더니, 다시금 강하게 잡아 와 폭력적으로 입술을 갖다 댔다. 킹의 치아에 입술이 부딪혀 아팠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입을 꽉 다물려 했으나 턱을 강하게 붙잡아 오는 힘에 하는 수 없이 크게 입을 벌려야만 했다. 킹의 두툼한 혀가 입 안으로 들어오더니, 안을 헤집었다. 키스라기보다 폭력에 가까웠다.
축축한 살덩이는 그 어떤 성감도 남기지 못한 채 입 안에 불쾌하게 침입했고 나는 참지 못하고 턱을 강하게 다물었다. 다시금 피 맛이 느껴졌다. 내 것은 아니었다. 킹은 아이처럼 혀를 내밀고 손등으로 제 혀를 눌렀다. 피가 그의 손등에 맺히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 다음에 시체로 보고 싶은 게 아니면.”
문을 천천히 열어 바깥으로 몸을 내밀었다. 다시금 느리게 문을 닫을 때까지도 킹은 날 잡지 못했다. 쿵. 무거운 문이 둔탁한 소릴 내며 닫혀 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킹이 날 잡으러 나올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초조하게 떨려오는 다리가 무색하게, 나는 꽤나 평화롭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수 있었다. 건물 바깥으로 나가니 어느새 비가 한두 방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비릿한 물 냄새가 코를 스쳤고 구름은 더욱 짙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손바닥으로 비를 막아내며 차도를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택시들은 모두 바삐 나를 지나쳤다. 그리고 어깨가 축축이 젖었을 쯤에야 겨우 택시 하나를 잡아 올라탔다. 퇴근 시간이 시작되기 전인 평일의 늦은 오후이건만, 갑작스러운 비에 모두 차를 탔는지 도로 위는 꽤나 붐비고 있었다. 멈춰선 택시의 뒷좌석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았다. 가방이나 신문지 따위로 몸을 가리거나 우산을 쓴 사람들의 모습은 다들 초조하고 불쾌해 보여,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아 잠시 맘이 편했다. 정말 성격 나쁘게도 말이다.
도로에 멈춰 있는 동안 비는 더욱 거세졌고 느릿하게 집에 도착했을 때쯤, 꽤나 많은 양의 비가 쏟아 내리고 있었다. 대문의 좁은 지붕의 몸을 붙여 비를 피하며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03031230] 꽤나 허술한 번호를 바꿔야 한다고 늘 생각했지만, 바꾼다 하더라도 문을 열고 들어온 인간이 킹인 터라 굳이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 번호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고 나니 이 번호를 쓰기 싫어졌다. 등을 비로 적시며 추하게 암호를 바꿨다. 이런다고 해서 킹이 들어오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손을 적신 비릿한 비를 털어내며 대문을 꽉 밀어 닫으며 들어가자 집 안 마당에선 초록색 풀들이 쏟아지는 비를 기꺼이 맞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개중 주름진 이파리의 민트가 거슬려 괜히 시선을 돌렸다. 현관문 도어 록의 번호 또한 바꾸고 비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나오니 거실 창 너머로 폭우가 쏟아지는 풍경이 비쳐왔다. 비를 내리는 신처럼 말리지 않은 머리칼에서 뚝뚝 물방울을 흘려 대며 소파에 가 주저앉았다. 내 발이 닿았던 모든 곳이 흥건해져 있었으나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덜덜 다리가 떨려왔으며 손톱을 초조하게 물어뜯었다. 좆됐다. 진심으로 좆됐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해외로 튀는 수밖에 없나? 큰일 났다. 내 목숨을 갖고 협박하는 것 따위 킹에게나 잠시 통하는 멍청한 방법이었다. 오로지 킹에게만. 루크 림은 가뜩이나 성이 났는데, 거기다가 킹 역시 도발하고 말았으니 난 진짜 망한 거다. 킹은 내가 자살하지 않을 거란 것쯤 알고 있을 거다. 내가 강하게 나가니 잠시 내버려 둔 것뿐이겠지.
루크 림은 내가 킹의 곁을 떠난 걸 알면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당장 구속영장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도소에 또 가야 하나? 킹은 진짜 또 날 찾아오지 않을까? 이대로 가둬 놓으면 어쩌지. 킹에게 강하게 나갔던 아까의 태도는 이미 다 버린 지 오래다. 나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지만 영 답이 없었다. 좀 더 계산적으로 행동할걸. 너무 홧김에 저질러 버렸다. 젖은 머리 그대로 소파 위에 누웠다. 젖은 머리칼이 만들어 낸 얕은 물웅덩이 때문에 소파가 축축이 젖어가며 다시금 내 몸을 적셔왔다.
“어떻게 하지…….”
킹에겐 다가오면 죽어버릴 것이라 엄포를 놓았고 루크 림은 내게 화가 났으니 어쩌면 날 구속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맨살에 차가운 나무 바닥이 닿아와 슬슬 차분해졌다. 킹이 이미 알고 있는 걸 모른 척하며 루크 림에게 정보를 뒤로 넘기며 어떻게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게 현명했을지 모른다고, 이제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줄타기를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 킹은 애매한 상태가 유지되는 걸 원하지 않을 테고 루크 림도 성과 없는 날들이 지속되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결국 그 사이에서 좆되는 건, 지금처럼 나뿐이겠지.
눈을 감았다. 차라리 킹의 옆에 있는 것이, 교도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짓을 속삭이며 붙어있는 편이 내게 편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그랬더라면. 모르겠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남은 대마초와 약이 있나 싶어 집 안을 열심히 뒤져 봤지만 나오는 것이 없었다. 오랜만에 담배를 입에 물곤 집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