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셔츠와 검은 바지를 껴입었다. 그리고 현관문의 문단속을 한 뒤 대문을 나서니 일전에 보았던 검은 차가 서 있었다.
“굿 모닝.”
“과하네.”
정말 여러모로 과했다. 내가 어제저녁 킹에게 부탁했던 것은 킹이 일하는 호텔에 혹시 일거리가 없냐는 것이었다. 킹과 같은 건물에서 일하다 보면 킹은 분명 내게 몇 번이나 찾아올 테고 그 과정에서 뭐라도 얻어내려는 목적이었다. 킹은 마침 내게 딱 맞는 일이 있다며 불안할 정도로 기껍게 응했다. 그리고 지금, 지나치게 마중까지 나왔네. 몸을 돌린다 하더라도 따라올 위인이라 그냥 차 안에 올라탔다. 차 안은 에어컨을 틀어 둬서 시원했다. 희미한 페퍼민트 냄새가 코밑을 스쳤다.
“가자.”
킹은 검정 셔츠에 검정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열이 많은 사람인데 답답하지 않나 싶었다. 잘 정리해 올린 머리 덕에 잘생긴 이목구비 전체가 드러나 있었다. 머리를 내려 아이 같고 천진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랐다. 말없이 얼굴을 바라보자 킹이 짧게 웃었다.
“왜, 너무 잘생겨서?”
“응, 잘생겼네.”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킹이 잘생긴 건 내가 킹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사실이었다. 킹의 귀가 약간 빨개졌다. 설마 부끄러운 건가. 내가 아는 킹은 그렇지 않았는데. 우스워 피식, 웃음을 흘리자 킹이 몸을 뒤로 물리면서도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도 나 잘생긴 거 나도 알아.”
킹을 바라보지 않고 대강 말했으나 킹은 내 턱을 잡아 나와 억지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응. 너무 귀여워. 당장 엎어 놓고 박고 싶을 정도로.”
“아침부터 열렬해.”
놓아 달라는 뜻으로 턱을 흔들었지만 도무지 놓아주질 않았다. 가만히 노려보자, 킹은 그제야 손을 떼어 냈다. 그러나 입은 여전히 방정맞았다.
“우리 여보를 보기만 해도 좋아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네. 로터스, 사랑해.”
킹은 무거운 말을 참 가볍게도 말했다.
“세뇌라도 시킬 생각이야?”
“여보가 영 들어먹질 않으면 그런 방법도 고려해 볼게.”
다정한 목소리로 개소리를 지껄이며 킹이 대답했다. 킹에게 더 이상 말을 거는 대신 앞 좌석으로 몸을 갖다 대며 기사에게 말했다.
“출발해 주세요.”
기사는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차를 출발했다. 차가 부드럽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자세를 똑바로 고친 킹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시킬 속셈이야?”
“글쎄, 자기가 기대하는 건 뭔데?”
“적당히 농땡이 피우면서 적당히 일하고 돈은 제대로 받아가는 거.”
“양아치 같다.”
킹이 말했다. 어이가 없었다.
“사랑한다는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야?”
“난 양아치 좋아해.”
“킹, 네 취향은 이제 그만 알고 싶은데.”
“거울만 봐도 알 테니 더 알 필요는 없어.”
더 이상 대꾸하기 싫어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이제껏 타왔던 차라면 머리를 흔들 정도로 덜컹거릴 텐데 킹의 차는 참으로 편안하고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창문에 비친 킹의 옆얼굴을 보며 작게 웅얼댔다.
“근데 출근 첫날인데 이렇게 사장 차를 타고 가도 돼? 낙하산이라고 동네방네 떠드는 거잖아.”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킹은 분명히 듣고는 날 똑바로 응시하며 대꾸했다.
“내 약혼자인데 뭐 어때.”
“…….”
멋대로 약혼하고 멋대로 약혼자다. 약혼의 뜻을 모른다, 킹은. 날 사랑한다고 할 때도 그러지 않을 때도 늘 제멋대로였다. 지금은 그나마 봐주고 있긴 했지만. 전에는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을 만큼 쓰레기였지. 양심도 없지. 그래 놓고 사랑을 이야기하다니.
괜히 차 문을 꾹꾹 눌렀다. 망가트려 복수하고 싶었다. 유치하고 허무맹랑하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킹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행동을 본 모양이다. 재수 없어, 남은 어떤 곤경에 빠졌는지도 모르면서. 정말로 너무, 재수 없다.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그 음성도 날 비웃는 걸로 느껴질 만큼 삐뚤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말의 내용 때문에 허튼 데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이미 모두 널 알고 있어.”
“어떻게?”
내가 모르는 이들이 날 안다는 것은 꽤나 불편했다. 거칠게 말해 역겨울 정도였다. 내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킹은 산뜻하게 웃었다.
“’로터스 리’ 때문에.”
씨발놈. 풀려면 은밀하게 풀든가. 게다가 내 얼굴이 박힌 마약으로 잔뜩 쾌락을 느꼈을 이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특히 얼굴을 아는 빌이 눈을 까집은 채 그러고 있었을 걸 떠올리자, 당장 몰타로 가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곳에 여전히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아. 그건 다 수거했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묻자, 킹이 주름진 내 미간을 문질러 펴며 답했다.
“응, 딴 새끼들이 네 얼굴 보고 허억 대며 딸 치는 꼴은 내가 못 보지.”
“혼자 다 끌어안고 싸지르게?”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그만큼 기분이 더러웠다.
“진짜한테는 못 하게 하니까 사진한테라도 해야지. 포장지 비싼 거로 선명하게 뽑았어. 어제 몇 개 썼거든. 그래서 금방 동날 것 같네.”
킹이 당장이라도 쌀 수 있다는 듯 내 얼굴을 훑어봤다. 바지춤이 부풀어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지겹다, 진짜.
어제 사진을 몇 개나 썼다면서 킹은 벌떡벌떡 잘도 세웠다. 킹은 참으로 파렴치한 호색한이어서, 베갯머리송사 쪽을 택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추태를 부리는 상사를 둔 부하직원이 안타까워 기사를 룸미러로 바라보자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열심히 연기하고 있었다. 어찌나 훌륭한지 칸에 나가 상을 받아도 될 것 같았다.
“사장님, 출근하셔야죠.”
니 본분을 알고 좆 좀 쪼그라뜨려 보라는 의미로 말했지만 바지품은 외려 부풀어 올랐다. 당장 바지를 풀어헤치고 딸이라도 칠 것 같은 표정으로 킹이 날 뜨겁게 노려보았다.
“그렇게 말하지 마. 더 꼴리니까.”
징그러워.
“미친놈.”
“맞아, 너한테 미쳤어.”
출근하기 전부터 퇴사가 하고 싶어졌다.
* * *
버스로 몇 번 킹의 호텔에 간 적이 있다. 물론 킹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던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다. 집에서 호텔까지는 직선거리로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걷기엔 애매해 버스를 타야만 했다. 환승하지 않고 곧바로 갈 수 있으나 여러 곳을 돌고 정차를 하는 바람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하지만 킹의 자동차로 가니 무척이나 빨리 도착해 그간의 통근시간은 아둔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나라도 면허를 따서 중고차라도 살 걸 그랬다. 엄마는 면허가 있었지만 운전하는 걸 무서워했다. 밤눈이 어두워 그런 거라고 늘 말했지만, 그게 거짓말인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어 운전을 피해왔던 것뿐이다. 엄마에게 거짓말만 일삼다가 결혼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남자는, 죽은 후에도 일상에서 엄마를 귀찮게 했다.
엄마는 내게 남자애가 운전면허가 없으면 직업을 구하기도 쉽지 않으니 면허를 따라 자주 말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쉬는 기간 없이 학교에 다니며 일을 했고 졸업을 하자마자 취직을 했다. 따로 시간을 내 면허를 따기엔, 세상은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호텔 입구를 지나친 차는 부드럽게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조명이 밝게 켜져 어둡지는 않았다. 볕이 들지 않는 곳으로 오자 괜히 몸에 한기가 도는 듯했다. 기사는 지하 주차장 가장 외진 곳에 완벽한 실력으로 주차했다. 운전을 잘 몰라도 그의 솜씨는 너무나 훌륭해서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는 내려 킹의 차 문을 열어주려 했으나 킹이 제멋대로 먼저 내려 그의 뻗은 손을 무안하게 했다. 킹은 내 쪽으로 다가와, 문을 반쯤 열어 내리고 있던 날 억지로 집어넣어 문까지 닫더니 얄밉게 웃으면서 차 문을 열었다.
“내려. 여보.”
웃음이 지나칠 정도로 산뜻했다. 어이없다.
“이미 내리고 있었거든?”
그리고 무슨 여보야. 차를 내리며 킹에게 항의했지만 킹은 기사에게 저리 가라며 손을 휘젓고 날 어딘가로 데려갔다. 잠자코 킹을 따라갔으나 제대로 된 출구나 문이 아닌 외진 벽에 달린, 누가 봐도 수상한 곳으로 날 이끌었다. 설마, 이상한 짓을 하진 않겠지. 눈을 돌려 CCTV의 위치를 체크했다. 다행히도 문을 바로 바라보는 곳에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킹 지문인식기에 지문을 갖다 대자 문이 열렸고 그 안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와.”
신기해서 작게 감탄을 흘리자 킹이 새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신나 했다. 유치하게.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킹 먼저 올라타길 기다렸다. 역시 조금 수상했던 탓이다. 무사한지 킹은 멀쩡하게 내게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피해 엘리베이터 안에 올랐다. 문이 닫혔고 킹이 내게 속삭였다.
“여기는 CCTV 없어.”
“와, 흥미롭네.”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 투로 대꾸했다. 킹은 지지 않고 내게 다시 말을 붙였다.
“이게 여보랑 내가 처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탄 거 알아?”
“그러네.”
남과 엘리베이터에 처음 타는 것도 일일이 기억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엘리베이터 바에 엉덩이를 걸치고 벽에 몸을 기대며 감흥 없이 대꾸했다. 킹은 구석에 있는 내 앞에 똑바로 서 몸으로 날 막으며 내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 몸이 다 덮일 만큼 희미하고 큰 어둠이었다.
“우리 여보는 참, 무심하네.”
바에서 내려오자 킹은 더욱 내게 가까이 맞붙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을 알리는 게 들렸다.
“…안 내려?”
“내게 관심을 조금 두는 건 어때? 그러는 게 좋을 텐데. 내가 많이 참고 봐주고 있다는 것쯤 여보도 알 테지. 나는 인내심이 짧아.”
“언제는 길다며.”
이제껏 했던 말과 모순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지적하자 킹이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내가 이제껏 했던 말 기억하고 있네.”
이 와중에 웃는 그 꼴이 웃기고 짜증 나, 킹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킹의 얼굴이 순식간에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와 날 바라보았지만 킹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울컥했다.
“예쁘게 굴어야 관심을 두든지 말든지 하지. 지금 하는 꼴이 영……. 흥미를 돋우지 못하네?”
입매를 비틀며 노려보자 킹이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피식, 숨을 터트렸다.
“씨발, 꼴리네.”
“난 아니야.”
눈썹을 더욱 찡그렸지만 킹의 미소는 외려 더 깊어졌다. 재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내게 관심을 둘 수 있을까……. 방법이라도 알려주는 건 어때? 너그럽게 말이야.”
킹이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쌌다. 데일 듯 뜨거운 온기가 거슬렸다. 얼굴을 떼어 냈지만 손은 내 얼굴을 따라와, 오히려 턱을 붙들어 끌어당겼다. 킹과 나의 입술이 거의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킹이 숨을 쏟아냈다.
“난 제법 눈이 높은데, 우리 여보 앞에서만 이리 약해진단 말이지. 여보는 눈이 엄청 귀여운 거 알아? 고양이 같아.”
눈으로 손가락을 뻗어와 놀라 눈을 감자, 킹은 작게 웃으며 내 눈꺼풀을 문질렀다. 안구를 만지듯, 얇은 피부를 만지작대던 킹은 내 왼쪽 손을 들어, 손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촉, 하는 젖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눈 높은 거 하나는 인정해 줄게. 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으니까.”
손목을 틀어 킹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욱신거렸다.
“뻔뻔한 말 따위를 지껄여도 허세가 아니라는 점이 역시 귀여워,”
“근데 나는 너보다 더 눈이 높아. 아니 어쩌면 그런 면에서는 취향이 없을지도 모르지.”
이제 그만하라는 뜻이었지만, 킹은 얼굴을 굳히는 대신 정말 재밌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의 두꺼운 흉통이 부풀고 쪼그라드는 게 보일 만큼 즐거워 보였다.
“네가 취향이 왜 없어. 쑤셔 주면 질질 흘리면서 좋아하잖아.”
“그럼 나보다 잘 느끼는 남창한테 가든가.”
킹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었지만 벽처럼 밀려나지 않았다. 킹은 제 가슴팍에 올라온 내 손을 쥐어, 손바닥 안쪽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미소 지었다.
“질투하는구나. 나는 여보 뿐이니까 걱정 마.”
정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킹에게서 어떻게 정보를 빼낼지 막막했다. 킹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는 멱살을 틀어잡고 아무거나 아는 것을 말하라며 윽박지를 정도로 이성의 끈이 가늘어진 터라, 킹의 팔을 거칠게 밀어 그 사이로 빠져나왔다. 킹은 날 막는 대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날 잠자코 지켜보았다. 도망가기 위해 발을 뻗었지만 킹이 문을 손으로 막아 내리는 탓에, 금세 붙잡혔다. 킹은 내 왼손에 깍지를 껴 잡고는 앞장서서 나를 이끌고 걸어갔다.
엄마가 일하던 곳이라 이곳에 종종 온 적이 있었지만 물론, 1층 로비 정도를 말하는 것이었지 초고층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어릴 적에는 이 건물 가장 높은 곳에 공룡이 있을지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했지만, 실상은 꽤나 평범했다. 벽 한쪽은 하이투 시내가 내다보이는 통유리로, 그 앞엔 비싸 보이는 원목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 최근에 가져다 놓았는지, 철저하게 계획된 공간구성을 조금 흐트러뜨리는 책걸상과 책장이 놓여 있었다. 분명 내 자리일 그곳으로 걸어갔다. 책장 안에는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나 무슨 일 하면 돼?”
자신의 자리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날 꼬시듯 웃는 킹에게 물었다. 킹은 몸을 앞으로 젖혀 허리를 똑바로 세우더니 다른 책상을 가리켰다.
“거기 앉아 있어.”
“그니까 여기서 뭘 하는데.”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의자는 꽤나 편했다. 돈, 역시 돈이 좋았다. 킹이 널따란 책상 상판에 팔꿈치를 올리고는 턱을 괴어 날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내 사기진작.”
“양아치 좋아한다더니 양아치 같은 일을 줬네.”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중얼댔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똑바로 된 일을 줘야지. 어느새 다가온 킹이 내 의자를 멈춰 세우고는 팔걸이를 잡아 날 내려다보았다.
“3년 동안 못 봤더니 일 분 일 초라도 못 보면 죽을 것 같거든.”
우습네.
“그러면 지금 죽었어야 마땅한데, 안 죽었잖아.”
킹의 눈을 가리고 2초를 셌다. 그리고 킹은 당연하게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정말 아쉽게도 말이다. 킹이 제 눈을 가린 내 손을 잡더니 손바닥 안쪽을 핥으며 지껄였다.
“아침부터 사장님과 비서로 역할극이라도 하며 박히고 싶은 거야?”
머릿속에 씹질 생각뿐인 것 같았다.
“네가 말하는 사랑은 다 좆이 시키나 봐. 만약 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의 연적은 오나홀이겠는걸.”
킹의 허벅지 안쪽에 손을 올리고 꾹 눌렀다. 맥박이 느껴지는 듯했다. 킹은 몸을 움찔댔지만 손을 떼어 내지 않고 외려 내 손에 몸을 비볐다.
“그딴 거랑 자기 구멍이랑 비교나 되겠어?”
“정말 아침부터 상스럽다.”
“신혼이잖아.”
킹이 제 허벅지에 놓인 내 손을 덮어 깍지를 꼈다. 아래로 끌어당기듯 손을 잡아당겨, 킹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누구랑 결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하고, 백년해로해.”
“그래, 우리 여보랑 오래오래 살아야지.”
귀를 만지는 손이 거슬려 고개를 젓자 킹은 그제야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나는 의자를 뒤로 밀어 킹에게서 떨어졌다.
“좆대가리 놀리면서 사랑 타령하고 싶은 거면 그냥 자리로 돌아가 일이나 하는 게 어때?”
킹은 두 발 짝 정도 멀어진 날 그냥 잠자코 바라보았다. 이미 자신의 공간 안에 있기에 상관없다는 뜻인 걸까. 킹은 재수 없게도 미소를 지으며 즐겁다는 듯 말했다.
“여보는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 알았어.”
킹 옆에 있는 것보다 교도소를 한 번 더 가는 게 어쩌면 편할 수도 있겠다.
교도소에서도 느꼈지만 킹은 일을 진지하게, 잔뜩 집중한 채 했다. 날 진짜 날 눈요깃거리로만 쓰는 건지 일거리를 단 하나도 주지 않았다. 교도소에 있을 때와 다른 게 없었다. 컴퓨터로 대강 뉴스들을 훑어보다 껐다. 영 재밌는 게 없었다.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다가 근처에 있는 책장을 들여다봤다. 책장 안에는 판타지 소설이 가득했다.
킹의 취향일 리 없었다. 분명 내가 교도소에서 판타지 소설을 주로 읽었기 때문이겠지. 그중에서 전에 자주 들어봤고 가장 긴 시리즈인 책의 1권을 뽑아 들었다. 영국 백인 고아 소년이 본인이 마법사인 걸 난생처음 알게 되고 마법 학교에 들어가는 내용이었다. 너무 유명했지만 나는 책을 읽은 적도, 이걸 원작으로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를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 표지엔 안경을 쓴 소년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나도 죽었던 아빠가 사실 어느 외국의 왕자이거나 부자였고 그래서 내 인생이 한순간에 뒤바뀌고 엄마도 부자가 되는 꿈을 꾼 적은 있었다. 유치한 미국 영화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어린이용 미국 영화에 맞지 않게 마약을 파는 돈 많은 놈이 붙기는 했다. 킹을 힐끔 쳐다봤다. 킹은 곧은 자세로 잔뜩 집중한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할리퀸 로맨스에 큰 관심이 없다.
책을 읽는데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무음모드로 돌린 줄 알았는데. 깜짝 놀라 휴대폰을 당장 무음모드로 바꾸고 킹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킹은 집중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켜보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로터스 리 고객님, 안녕하세요. Pd 택배입니다. 지난 X월 X일에 수령하신 물품의 반품 처리를 도와 드릴 링크를 보내 드리오니, 아래 링크를 눌러 접속하신 페이지를 따라 접수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반품 처리는 수령 1주 이내에 가능하며, 1주가 지나면 불가능하다는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 단순 변심, 주문 실수로 인한 반품과 이미 개봉한 상품의 반품은 불가합니다.
<반품 처리 접수> http://PdEcpress.co.kr/account/returns/?adfjsdfglsdf=1sdfjklsjdlf
☎ 1230 – 0312 ]
택배? 최근에 저 날짜로 온 택배는 몰염치한 검사가 들고 온, 박스 크기에 맞지 않게 과하게 초라했던 판촉용 볼펜과 수첩이었다. 볼펜 세 개 중에 두 개는 잉크가 닳아 있던. 내가 킹의 곁에서 일을 하게 된 걸 알아챈 모양이지. 그래서 제 쪽에 붙었다고 확신했나 보다. 혹시 모를 해킹일까 두려워 링크를 누르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동 소리에는 꿈쩍하지 않던 킹이 기민하게 반응하며 날 바라보았다.
“어디 가?”
휴대폰을 들어 흔들었다.
“통화. 반품할 게 있는데 그거 문의하려고.”
“뭘 샀는데?”
캐묻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일반 컵인 줄 알고 샀는데 일회용 컵이더라. 우리 엄마가 일회용품 쓰는 거 엄청 싫어했거든. 그래서 그 컵은 못 쓰겠더라고.”
거짓말이다. 엄마는 일회용품을 엄청 좋아했다. 가뜩이나 밖에서 일하느라 힘든데 집에서도 설거지하느라 힘들어야 하냐는 주의였다. 그래도 나는 학교에서 일회용품을 아끼자는 교육을 받았던 터라 엄마 대신 설거지를 했다.
그래도 엄마의 일회용품 사랑은 줄지 않았다. 일회용품에서 환경호르몬이 나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엄마는 일회용품을 너무나 사랑했고 우리 집에서 배출되는 쓰레기양은 성인 여성 한 명과 어린이 한 명이 사는 집이라기에는 과하게 많았다.
킹은 내 말을 듣고 짧게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다녀와. 멀리 가지는 말고.”
멀리 가면 쫓아올 거면서, 선심 쓰는 척 말하는 것이 기만적이었다.
문자창에 있던 번호를 따라 휴대폰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그러다 액정이 깨질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힘이었다. 꽤 정교하게 준비했는지, 일반 통화연결음이 아닌 기업체에서 쓰는 안내음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Pd 택배입니다. 택배 조회를 원하시면 1번, 반품 처리를 원하시면 2번, 기타 문의 및 상담원 통화를 원하시면 3번을 눌러주십시오.]
“아, 귀찮게 하네.”
지들끼리 잔뜩 신나 만든 게 눈에 선했다. 나는 2번을 누를까 3번을 누를까 고민하다가 어딜 눌러도 상관없을 것 같아 1번을 눌렀다. 그러자 단정하고 정확한 발음인,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객님, 현재 통화량이 많아 바로 연결이 어렵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말해 놓고 3초 만에 사람의 목소리로 연결됐다. 나는 이제 슬슬 귀찮아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감님께서는 꽤나 번거로운 걸 좋아하시나 보군요.”
[고객님, 치밀한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치밀하지 못하게 택배원으로 왔던 루크 림이 말했다. 나 참, 웃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문자는 뭐죠?”
[무슨 정보 없습니까?]
정말 대뜸 뻔뻔하게도 상대가 물어왔다. 나는 이제 겨우 킹과 이곳에 있은 지 세 시간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것이라곤 킹의 상스러운 음담패설을 듣는 것뿐이었다.
“성격이 꽤나 급하시네, 그 짧은 시간 안에 알아내는 게 더 수상한 거 아시죠.”
[어젠 안 잤습니까?]
“사람이 안자고 어떻게 삽니까.”
[킹 미나콤이랑 떡 안쳤냐고.]
“…고매하신 검사님께서 입 밖으로 뱉으시기엔 많이 천박한 어휘네요.”
[그것보다 더한 짓거리들 이미 한 거 다 압니다. 교도소 같은 곳에서 비밀은 없어요. 아, 교도소가 떠나갈 정도로 신음을 내질렀다는데 애초에 숨길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죠? 얌전하게 생겨서는 꽤나 취향이… 격하네요. 리 씨.]
“제 성생활에 쓸데없이 관심이 많으시네요. 이것저것 알아보신 거 보니…. 교도소에서 있던 일들을 전해 듣고 자위라도 하셨나 봐요. 그런 취향이셔서 검사까지 되셨구나. 대단하십니다.”
얌전히 굴어야 했지만 빡이 쳤다. 이자는 킹처럼 무섭지 않았다. 이 검사라는 자가 날 교도소로 다시 보낼 권력이 두렵긴 했으나, 개소리들을 일일이 참아줄 정도까진 아니었다. 킹은 킹이라는 사람 자체가 무서웠다. 그의 힘도 권력도 머리도.
그리고 유독 그가 교도소에서 공포스러웠던 이유는, 나는 킹이 필요했지만 킹은 내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부단히 애를 쓴 덕에 킹은 날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검사는 내가 필요했다. 내가 털어내도 다시 붙잡아 올 만큼, 나는 그에게 중요했다. 자존심 좀 긁혔다고 소중한 정보원을 놓쳐버리면 바보 아닌가. 내게서 쓸 만한 걸 얻고 싶으면 이 정도는 참아 내야지. 검사는 침묵했다. 화를 삭이는 쪽이어야 옳을 거다. 그러나 이제껏 나처럼 고고한 자존심을 할퀸 이는 없었는지 지나치게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결국 티 나게 한숨을 내쉬고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킹이랑 같은 공간에 있어요.”
[…정말입니까?]
다급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소리를 질러올 만큼. 귀가 아파 전화기를 멀리 떼어 낸 후에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아니고. 일자리 좀 달라 그랬더니 본인 사무실 안에 제 자리를 만들어 놨네요.”
[본인 사무실 안에요?]
“예. 영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무실 안에서 떡이라도 칠 모양인가 보죠.”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리 씨의 무례함을 참는 것이 퍽 힘들군요.]
루크 림이 말을 씹어 뱉어냈다. 너무 설쳤나 보다.
“그런데도 전화를 끊지 않으시는 거 보면 저보다 예의 바른 정보원은 없었나 봅니다. 전 예절교육을 꽤 잘 받은 편인데 영감님의 기준에 한참 모자라다니 그거참 안타깝네요.”
루크 림이 뭔 짓을 할까 걱정은 됐지만 성질 긁는 걸 그만둔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런 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이따위 인간이랑 통화를 하겠는가?
[당신보다 예의 바른 인간은 널리고 널렸지만 킹 미나콤은 예의 따위 중요하게 보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당신처럼 발칙한 인간이 킹 미나콤의 연인인 건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연인이라뇨.”
잠시 멈추고 힘겹게 입을 열자 루크 림이 뭔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신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휴 사토를 이용해 킹 미나콤의 뒤통수를 쳤다는 이야기 또한 들었습니다만, 그런데도 킹 미나콤이 당신을 죽이기는커녕 살려 두고 심지어 가두지도 않았다는 것은……. 아주 열렬한 사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미나콤 일가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 당신에게 접근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가장 빨랐죠.]
내가 자기랑 통화를 하고 있는 이따위 일이 모두 자기가 잘났고 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우쭐함이 말 속에 담겨있었다.
“법 공부도 좋지만 영어 공부도 다시 하시는 건 어떨까요? ‘연인’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를 이르는 말이고 일방적으로 한쪽만 열렬해서 미치는 것은 스토커라고 합니다. 난 피해자고요. 피해자에게 관심이 있으셨으면 제게 찾아올 리는 없었겠지만요. 하여튼 검사들이란.”
[하, 리 씨, 그리…….]
뚜.
뚜.
뚜.
루크 림이 또 협박을 지껄이기 전에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 화가 났는지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오기에 전원을 꺼버렸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
까만 화면만 내비치는 휴대폰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화장실로 가 손을 씻었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감정의 동요 따위 없었다. 다시 킹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책상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 일하던 킹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날 바라보았다.
“왜 짜증이 났어?”
휴대폰으로 얼굴을 비춰 보았다. 평소랑 비슷한데. 뭐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러 한숨을 쉬며 답했다.
“상담 전화가 안 되네. 바쁜가 봐. 내일까지만 반품이 가능한데 얼마 안 하니까 그냥 쓰지. 뭐.”
“그래서 늦은 거야?”
킹이 마우스와 키보드에서 손을 떼어 내고 물었다. 캐묻는 것일까? 킹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응. 다섯 번은 걸었는데 안 받잖아. 그래서 너무 짜증 나서 바람 좀 쐬다 왔어.”
어깨를 으쓱대고 아무렇지 않게 자리로 돌아갔다. 킹은 그런 내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은 채 열렬히 시선을 쫓아왔다. 화제를 옮길 겸 한쪽 입술만 끌어 올리고는 말했다.
“왜, 또 꼴려?”
킹이 작게 웃었다. 성적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산뜻한 웃음이었다. 웃음만은 참 아름다웠다. 킹은 아무렇지 않게, 어젯밤에 꾼 꿈을 이야기하는 듯한 일상적인 투로 답했다.
“난 널 볼 때마다 그런걸. 사진만 봐도 그런데 살아 움직이는 걸 볼 때는 더 어떻겠어?”
사진을 지겹게 봤으면 내 얼굴을 이미 외우고도 남았을 텐데, 그것으로는 모자란다는 듯 날 샅샅이 훑어보았다. 이제껏 날 저렇게 열심히 보는 이는 이제껏 없었을 게 분명했다. 부담스러웠지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먼저 달아나, 져버리는 것이라는 멍청하고 호기로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자 킹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지구는 둥글다고 이야기하는 게 더 새삼스럽지 않을까?”
그가 덧붙였다. 허튼소리.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아 결국 먼저 시선을 돌렸다. 뒤집어 둔 책을 다시 들어 페이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무심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그러다 죽겠네.”
“널 생각하다 죽는 것은 꽤나 기쁜 일이지. 하지만 우리 여보가 나 죽었다고 바람이라도 피우면 어떡해? 그러니 오래 살아야 하지 않겠어?”
“살아도 내가 네 여보가 될 일은 없을 거야.”
책에 집중하려 했지만 도무지 내용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글에 빠져든 척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킹이 작게 웃는 것이 들렸다. 씨발. 욕을 오천 번은 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한 줄도 읽지 못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 상태로 다음 페이지를 보니 역시 내용을 알 턱이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킹이 무겁고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였다.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못 들은 척 책에 시선을 박고 무시했다. 하지만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 큰 손으로 책을 빼앗아 가더니 내 턱을 감싸 잡았다. 머리를 올려 드러난 킹의 반듯한 이마와 그 아래 자리하는 결 따라 난 짙은 눈썹, 그리고 높고 단단한 코와 입꼬리가 올라간 입술까지. 그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킹은 촉촉한 갈색 눈으로 나를 훑어 내려갔다.
그가 내 앞을 완전히 막아섰기에 나는 도망갈 수 없었다. 덫에 걸린 소동물처럼 몸을 잘게 떨고 싶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몸에 힘을 줘 버텼다. 하지만 날 녹여버릴 듯 응시하는 뜨거운 시선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았다. 킹이 입을 열었다. 그의 흰 치아와 그림자가 섞여 검붉은 혀, 그리고 뜨겁고 축축한 내벽이 보였다.
“네가 내 여보가 되는 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그 미래는 꽤나 가까울 거야.”
“…자신감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 맞아. 난 자신감이 과하지. 그래야만 그 모든 것이 내 손에 쉽게 들어오거든. 그 자신감 덕에 네 입술 정도는 지금 얻을 수 있어.”
턱을 잡아당기는 힘과 허리에 둘린 팔이 느껴졌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킹은 몸을 내려 내 입술에 제 것을 갖다 댔다. 습관적으로 입술을 벌려 킹을 맞이했다. 내가 이제껏 겪어온 성적인 행위는 모두 킹에 의한 것이었고 나는 의도치 않게, 킹의 행동에 모든 것을 맞춰줬다. 내 실수를 깨달아 입을 도로 다물었지만,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내가 입술을 벌린 걸 칭찬하는 것처럼, 킹이 턱 아래를 간지럽혔다. 킹의 혀가 내 입 안 전체를 쓸더니 내 혀를 휘감았다. 멍하니 눈을 뜬 채, 그 모든 행위를 받아내며 무의식적으로 마주 혀를 움직였다. 씨발, 거부하려 해도 너무 익숙했다. 짜증 나게도.
킹의 목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킹이 웃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꽤나 강하게. 잇자국이 났을 게 분명한 제 입술을 킹이 혀로 훑었다. 그러자 킹의 아랫입술이 온통 침으로 젖어 축축하게 변했다.
“이러면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나 있을까? 응?”
아이를 어르는 듯한 투였다. 짜증 났다. 의자에서 일어나 킹의 멱살을 잡아당기고 그의 몸을 밀었다. 책상에 앉은 킹의 다리 사이에 내가 갇혀 서 있는 꼴이 되었다.
“제발, 좀 닥쳐.”
늘 킹을 볼 때마다 닥치라고 하고 싶었다. 교도소에서는 늘 못 그랬지만.
“섹시하네.”
킹이 내 허리를 감싸왔다. 그 입을 또 놀리면서 말이다.
“닥치랬잖아.”
내 주변을 맴도는 인간 모두가 제발 좀 닥쳐줬으면 싶었다. 제발, 제발 좀. 닥치고 날 내버려 뒀음 좋겠어. 특히 이 미친 새끼가 날 가만뒀으면 이따위 상황에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내 발로 이 새끼의 곁에 다시 온 거나 검사 따위랑 얽히게 된 거나. 아니 킹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해외로 나돌 일도 없었을 거다. 아니, 이 새끼만 아니었다면, 킹만 아니었다면 내 손가락도 멀쩡했을 거야.
“…너만 아니었다면.”
속으로 되뇌던 말이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만 아니었다면?”
크고 뜨거운 손이 내 뺨 전체를 감싸왔다. 제발 닥치라고 했잖아, 제발. 그렇지만 킹은 내 요청을 도무지 들어주지 않았다. 멱살을 잡고 얼굴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킹은 그제야 닥쳤다. 킹 미나콤, 너만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 이딴 곳에서 키스를 하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잡아당긴 킹의 넥타이는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고 내 재킷이 그 위를 덮었다. 씨발,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지만 입술을 떼어 내지는 않았다.
킹이 내 얼굴을 단단하게 붙들고 두꺼운 혀로 내 입 안을 쑤셨다. 다물지 못한 턱에서 뚝뚝 침이 흘러 킹의 바지 천을 적셨고, 킹의 허벅지에선 자유롭지 못한 성기가 꿈틀댔다. 고개를 꺾자 코끝에 킹의 코뼈가 문질러 스쳤다. 입술을 더 깊이 묻으니 킹의 몸이 뒤로 밀려나, 킹은 어울리지도 않게 작은 책상에 누운 꼴이 되었다. 단정히 정리했던 머리는 흐트러져, 몇 올이 그의 이마를 덮었고 옷 또한 구겨지고 주름이 마구 가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새로 킹이 내 책상에 누운 것이다.
“이편이 더 보기에 낫네.”
너무나 반듯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킹은 그 같지 않았고 또한 양지의 킹이 가진 막강한 권력을 매 순간 주지시켜주었다. 하지만 킹은, 아무리 신사인 척해도 막돼먹은 양아치고 무뢰한이었다. 그게 킹의 본 모습이었고 이편이 킹에게 더 어울렸다. 킹이 손을 뻗어 내 배를 문질러 왔으나, 그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끈질기게 잡아 와 팔을 들어 킹의 뺨을 내리쳤다.
찰싹!
날카로운 감각이 손을 찌르르 울려왔다. 내가 킹 미나콤을 때리다니. 공포가 불쑥 솟아났다. 하지만 킹은 여전히 내 책상 위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새에 뺨까지 부어올라서는 이제껏 본 킹의 모습 중에 가장 연약해 보였다. 그리고 그 꼴을 보자니 왠지, 즐거웠다. 킹 미나콤을 아래에서 깔아 보며 때리기까지 하는 이 짓을 그전에는 꿈도 못 꿨으니까. 다른 이였다면 킹의 뺨에 손이 가 닿기도 전에 손이 잘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킹은, 뺨이 붉어졌음에도 내게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날 마주 때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미소 지었다. 흥미롭다는 듯이.
“이런 취향이야?”
“킹, 제발 좀 닥쳐.”
하지만 뺨을 맞아도 킹은 킹이었다. 그는 닥치지 않았다. 때려도 소용이 없으면 난 대체 뭘 해야 킹을 이겨 먹을 수 있지. 아, 나는 미소 지었다. 내가 가진 것은 딱 하나였지만 그것은 킹이 가지고 싶어 가장 안달 난 것이었다.
“닥치지 않으면 네 앞에서 사라질 거야. 영영.”
거짓이었고 허세였다. 쌔빠지게 도망 다녀도 날 찾아낸 게 킹이었다. 하지만 그 공허한 말에도 킹의 얼굴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억누르며 뒷걸음질 쳐 킹에게서 멀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이 되기 전에 날 붙잡아온 손 때문에, 순식간에 내 모든 발걸음은 물거품이 됐다. 킹이 날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넌 너무 똑똑해, 알아? 날 미쳐버리게 하는 걸 너무 잘 안다고.”
귓가에 킹의 말이 맴돌았다. 내 어깨에 턱을 올린 킹은 내 뇌에 곧장 새겨 박을 듯, 귀에 입을 붙이고 분명한 발음으로 속삭였다.
“넌 내게서 못 달아나.”
“그건 킹, 네가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거야. 건방지게 굴지 마.”
킹의 뒷머리를 강하게 잡아 아래로 당겼다. 순식간의 킹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두피가 당겨 아플 텐데도, 킹은 날 바라보며 기껍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교묘하게 속살댔다.
“그래, 로터스. 네가 결정하는 것이지. 나는 그래서 네게 끊임없이 구애해야만 하고. 그러니 네가 내 목숨줄을 쥔 걸 똑바로 알고 잊지 마. 잊어서는 안 돼. 네가 말했듯, 너는 내 주인이 된 거잖아. 안 그래?”
내가 원한 적 없는 것을, 내가 원해왔다고 킹은 날 속이듯 말했다. 그것은 모두 허튼소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왼쪽 손이 무거워져 가는 것 같았다. 그곳에 보이지 않는 두껍고 단단한 목줄이 내 손목을 감싸고는 킹의 목까지 연결된 것 같았다. 이미 예전에 다 나아 흉터 또한 남지 못한 손목 안쪽이 욱신거렸다. 누가 킹의 이름을 날카로운 펜으로 다시 새겨 박듯이.
킹이 몸을 일으키며 다시금 내 귓가에서 숨을 터트리듯 말을 내뱉었다. 뜨거운 킹의 호흡이 귓가를 데우며 축축이 적셔왔다.
“로터스, 너는 내 주인이고 난 네 소유물이야. 넌 절대 날 버릴 수 없어. 넌 날 두 손으로 꽉 쥐고 늘 놓지 않아야만 해. 나는 네 것이니까.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 또한 네 것이지.”
바라본 적 없는 거대한 것들이 내게 달려오며 날 덮쳐왔다. 나는 그따위 것을 바라지 않아. 넌 내 것이 아니야. 분명히 말을 해야만 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목을 틀어막는 듯했다.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다리와 손에 달린, 강제로 주어진 내 것들이 너무나 무거워서 날 방해할 것만 같았다. 굳어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을 겨우 움직여, 대꾸했다.
“…내가 무엇을 가지든 그건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거고 넌 가만히 기다리기나 해야 해. 킹, 너는 너무 건방지다고. 견디기 힘들 만큼.”
내가 이 관계의 우위를 점한 것처럼 당당하고 분명히 말해야 했지만 내 목소리는 작았고 발음은 뭉개져 있었다. 그러나 킹은 기꺼이 속아주겠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정중한 투로 답했다.
“맞아요, 당신께서 선택하시는 겁니다.”
그 꾸며진 예의가 그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날 조롱하며 날 비웃었다. 가져 달라고 애원하는 처지임에도 킹은 강했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천성인 탓에. 나약함이 천성인 나는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교활했고 킹은 날 사랑하기에 속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미소 지었고 킹은 웃을 수 없었다.
* * *
“5시야.”
“뻐꾸기야?”
짧게 말했다. 퇴근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킹은 웃으며 허튼소리로 대꾸해왔다. 내가 애교라도 부렸다는 듯이 귀엽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무시하며 다시 무심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5시라고.”
맞다. 5시였다. 홍징의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퇴근을 할 시간이란 소리였다. 킹을 노려보았지만 킹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일을 하고 있었다. 킹의 모습을 찍어 보건소나 병원에 붙여 바른 자세의 표본으로 써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진짜 그럴 생각은 없고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킹을 방해하려 애썼다.
톡.
톡.
톡.
거슬릴 소리일 텐데 킹은 날 쳐다보지 않았다. 아무리 양아치처럼 일한다고 해도 상사의 허락 없이 퇴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멍하니 킹의 쪽을 바라보며 피아노 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톡, 톡, 톡.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던 손가락을 갑자기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즐거운 나의 집>이네.”
내가 피아노 치듯 움직인다는 걸 킹이 깨우쳐 줬기 때문이다. 킹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날 바라보았다. 짙은 고동색 눈동자에 지레 놀라 손을 허벅지 위로 내려놓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여보가 자주 쳤잖아. 내 몸 위에서.”
킹이 펜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가와 내 책상에서 내가 쳤던 것과 같은 박자와 모양으로 손을 움직였다.
톡톡톡.
“그럼 이제. 즐거운 우리 집에 가자.”
킹이 날 보며 상쾌하게 웃었다. 반응하고 싶지 않아 킹을 피해 의자를 밀어 멀어져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문을 향해 가려 했지만 내 손목을 붙들어오는 손을 뿌리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라 일찍 안 나가면 밀려. 놔.”
“데려다줄게.”
자꾸만 잡아당기는 손목을 무시할 수 없어 킹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잡힌 손목을 들어 분명히 말했다.
“이거 놔. 집 갈 테니까.”
“내 집 가자는 것도 아니고 여보 집 데려다준다니까.”
하지만 킹은 내 손목을 놓지 않고 제멋대로 날 끌고 갔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날 당기는 힘이 더 강해서 결국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킹은 나보다 다리가 길어 보폭을 따라잡는 게 힘들었다. 그는 겉옷을 챙기지도 않고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문이 열렸다. 킹은 날 안쪽 깊이 밀어 넣더니 몸으로 날 막아서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문이 닫혔다.
“바로 앞에 있는데 도망을 어떻게 가.”
그러니까 적당히 좀 해.
“내가 뭘?”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듯 킹은 무해하게 웃었다. 엘리베이터의 인공 불빛이 자신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데도 부끄럼 하나 없이 말이다. 그 몰염치에 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고 킹은 끝까지 미소 지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을 알려왔다. 여전히 손목을 붙잡힌 채, 킹의 차에 얌전히 올라야 할 수밖에 없었다. 킹이 날 태운 차는 아침의 그것과 달랐다. 차체가 높아 무릎을 꽤나 꺾어 올라타야 하는 몸집이 무척 큰 자동차였다. 흡사 탱크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정장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킹과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기종이었다. 내가 올라타자마자 킹은 차 문을 밀어 잠갔다. 정말로 치밀하고 치졸하게 말이다. 노려보니 킹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다치면 어떻게 해. 손목도 가늘면서.”
난 딱 평균의 손목이었고 킹의 몸이 너무 컸을 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두 무시해내며 내게 미소 짓더니 운전석에 올라타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킹은 겨우 한 마디를 사이에 둔 가까운 곳에서,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하지만 코 사이로 바람이 새어 나오는 걸 막기엔 힘겨웠다. 콧바람이 킹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간지럽혔고, 그 머리칼은 킹의 이마를 건드렸다. 킹은 즐겁다는 듯 웃음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내 코와 킹의 코끝이 겨우 손가락 두 마디만큼 벌어져 있었다. 나는 차 손잡이를 꽉 붙들었고 킹은 내게 숨을 불어넣듯 작게 속삭였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잖아.”
킹과 나는 그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 버린 쪽은 역시나 나였다.
“나도 내 목숨 중요한 건 알아.”
흔적을 남기듯 내 뺨에 숨을 후, 불고는 드디어 킹이 몸을 물렸다. 간지러웠다. 킹 역시 벨트를 매더니 핸들을 붙잡았다. 그리고 시동을 켜며 그가 대꾸했다.
“아는 애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해?”
“그땐 죽는 게 나았을 것 같았으니까.”
벨트를 양손으로 꽉 붙들고 대답했다. 그러자 킹은 입을 다물었다. 룸 미러로 킹의 무표정한 얼굴이 비쳤다. 자연스레, 킹이 내게 했던 절절한 고백이 떠올랐다.
‘여기서 뛰어내리면서까지 날 떠나려는 네가 화가 나면서도 슬퍼.’
“난 킹, 네가 즐거운 편보다 슬픈 편이 좋아.”
“…….”
킹은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멋대로 말을 지껄여 나갔다.
“네 손을 잡는 게 살길이래도, 네 손을 잡고 싶지 않을 정도야. 절벽이래도 기꺼이 뛰어내릴 만큼.”
거짓이었다. 절벽이라면 난 킹의 손을 잡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목숨이었다. 교도소에서 킹에게 나를 넘겼을 만큼, 나는 내 신변안전이 중요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킹에게 흠집을 내고 싶었다. 어떻게든 상처를 입히고 싶었다. 내가 킹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검사의 협박을 받아들인 것도 어쩌면 그런 마음의 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킹의 손을 잡는 게, 킹의 연애 놀음에 어울리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란 걸 알았지만 어쩐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교도소에선 그렇게나 쉬이 킹의 소꿉놀이에 어울려줄 생각을 했으나, 지금은 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인지 나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를, 킹이 내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머릿속이라도 복잡하게 만들어주려는 그런 유치한 복수심일 것이라 생각했다.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었으니. 내 말을 듣는 내내 킹은 말이 없었다. 표정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집으로 통하는 길이 보였다. 나는 킹이 그곳에 들어서 날 얼른 집에 데려다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킹은 갑자기 핸들을 틀어, 차 몇 대가 당황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게 보였다. 관성을 이기지 못한 몸이 차 벽에 박혀 차 손잡이를 강하게 붙들었다. 다급히 킹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미쳤어?”
“그딴 말을 하는데 안 미치고 배겨!”
킹이 핸들을 꽉 붙들자 킹의 손등에 하얗게 뼈가 불거졌다.
“그딴 것도 못 참으면 놔주든가.”
놔. 날 놓아. 제발, 너와 관련된 그 복잡한 일에서 날 자유롭게 해줘. 그 빌어먹을 감정들도 지긋지긋해. 킹은 내 마음속 말을 들은 듯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킹의 흉통이 크게 부풀었다 쪼그라들었다. 킹은 말을 크게 터트려 내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그 입 밖으론 짧은 음성 한 자락도 나오지 않았다. 킹은 화를 삭이려는 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온 목소리는 연약할 정도로 작고, 떨리는 상태였다.
“내가 널 어떻게 놔? 네가 없으면 미칠 것 같은데…….”
보통 사람이라면 애처롭게 생각했을 만큼, 가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단단히 미쳤어! 그래서, 납치라도 하려고? 사랑은 개뿔, 그냥 날 구속하고 싶은 거잖아. 내가 네 뒤통수를 치고 도망치니까 화가 나서 내 인생을 망치고 싶은 것뿐이잖아!”
실제 마음보다 더 과장되게 말을 쏟아냈다. 킹의 얼굴엔 더 많은 균열이 생겨났다. 킹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 지을수록 난 웃음 지었다. 고통스럽다면 그만둬. 때려치우란 말이야.
“…그딴 짓 따위 안 하니까 제발 조용히 좀 있어, 로터스. 제발.”
하지만 킹은 본인의 말대로 인내심이 대단한지 언성을 높이는 대신 차분한 투로 말했다. 킹이 안정을 되찾았으니 이번 판은 끝났다.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적당히 딱딱했고 적당히 푹신했다. 킹에게서 등져 창밖으로 시선을 뒀다. 해안도로로 빠졌는지, 저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창문을 내리자 비릿하고 짠 바다 냄새가 코를 스쳤다. 킹은 날 힐끗 보더니 다시금 시선을 거뒀다. 내가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차창 밖으로 뛰어내리진 않을 것 같은 모양이다. 아픈 건 지독하게 싫었고 지금 도망친대도 킹은 날 쉽게 잡을 수 있으니 굳이 뛰어내릴 필요는 없었다. 그 기대에 배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는 했다. 그래도 내 안전이 더 중해서 생각으로 끝났지만.
“…그래서 어디 가는데.”
차창에 비친 옆얼굴을 보며 물으니 킹이 날 힐끔 바라보고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소매를 걷어붙인 팔 근육이 움찔대는 게 보였다.
“몰라.”
그딴 답을 내뱉고 웃기까지 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럼 집 좀 데려다 줘. 오랜만에 출근해서 힘들단 말야.”
한 일은 없었지만 피곤했다. 출근이란 늘 그런 법이니까. 의자에 더욱 깊게 몸을 묻었다. 킹이 손으로 내 목덜미를 만지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만큼.
“오늘 내로 데려다줄게.”
“지금이 6시도 안 된 시간인데 언제 데려다주려고. 밥은 먹이고 끌고 다니든가. 사랑한다면서 굶기고 납치하는데 누가 받아줘? 모두 싫다고 그러지.”
불만을 이기지 못하고 투덜댔다. 킹은 정말 즐겁다는 듯 웃어 내 속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밥 먹이면 결혼이라도 해줄 것처럼 얘기하네?”
결혼, 결혼. 그놈의 결혼! 결혼보다는 밥이 중요했다.
“밥 먹는다고 결혼했으면 내 부인이랑 남편만 몇천 명이야.”
“음, 역시 굶자.”
킹이 산뜻하게 대꾸했다. 씨발.
“개새끼.”
“그런 애칭도 좋지. 상스러워서 더 꼴리잖아.”
“씨발놈.”
“역시 자기는 귀여워.”
5세 아동이었을 때도 귀엽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자주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너무 지쳐 그냥 대강 손을 휘저으며 대꾸했다.
“그래, 그렇게 다아 너 원하는 대로 살아.”
“야외 결혼식으로 할게, 그럼.”
이미 원하는 대로 지껄이고 사는 인간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내 실수다.
“한 마디만 더하면 진짜 뛰어내릴 거야.”
내 쪽 차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기에 허풍에 불과했지만 그딴 수를 쓴 후에야 킹은 겨우 입을 다물었다. 차는 해안도로를 계속 달렸다. 호텔과 내 집이 있는 시내와 멀어지는 중이란 뜻이었다. 차창에 머리를 기댔지만 이 비싼 차는 내 머리통을 덜덜 흔들어 놓지 않았다. 저녁노을을 받은 바다가 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예전에 먹었던 중국식 면 요리를 떠올랐다. 배고팠다.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킹의 목을 조를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딱 직전에 음식점이 보였다.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어느 나라에 가도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그곳 말이다. 킹은 그곳에 들어가야만 했다. 내가 죽는 걸 원치 않으면 말이다. 이대로 차에 갇혀 있다가는 굶어 죽든 아니면 미쳐서 뛰어내려 죽든 결말은 죽음뿐이었다.
그 큰 몸을 유지하려면 뭘 먹어야 할 텐데 배고프지도 않은지, 킹은 그저 날 보며 피식 웃었지만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매장 입구로 차를 돌렸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심정이면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냥 하는 말이다. 킹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게 아니라 드라이브 쓰루 통로로 들어갔다.
“그냥 안에서 먹으면 되잖아.”
“거기 있는 다른 새끼들이랑도 결혼하게?”
“배고픈 중에 화나게 좀 하지 마.”
“그래서 뭐 먹을래?”
진심으로 얼굴을 찌푸리자 킹은 메뉴판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윗줄에 있는 거, 다. 라지 세트로.”
“다 먹을 수 있어?”
“아니.”
“욕심쟁이구나.”
마이크를 귀에 단 직원이 서 있는 창문으로 킹이 차를 가까이 댔다. 킹은 진짜 시키냐는 듯 날 바라보며 왼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제발 아무 말 말고 시켜줘. 애원해야 시킬 거야?”
킹이랑 한 공간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검사까지 귀찮게 굴어서 점심을 도저히 많이 먹을 수 없었다. 메뉴판을 열심히 가리킨 후에야 킹은 기다리던 직원에게 주문을 넣었다.
“메뉴판 윗줄에 있는 거 라지 세트로 다 주세요.”
“…다 말씀이십니까?”
직원은 당황한 표정으로 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킹은 계속 날 보며 직원에게 말을 걸었기에 직원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손님의 뒤통수와 마주한 직원이 불쌍해, 결국 내가 직원을 눈을 마주하고 대꾸했다.
“네. 다 주시는데 라지 세트 말고 그냥 세트로 주세요. 피클은 다 빼 주시고 냅킨 넉넉히 넣어 주시겠어요? 그리고 빨대는 두 개만. 계산은 지금 하나요?”
“계산은 수령하실 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쿼터 파운드 치즈버거 세트, 더블 베이컨 버거 세트, 스파이시 치킨버거 세트, 더블 비비큐 버거 세트 이렇게 주문하시는 거 맞으실까요? 음료나 사이드 변경은 없으신가요?”
직원은 꽤나 일을 잘하는지 금세 표정을 수습하고 사무적인 얼굴로 주문을 확인했다. 킹에게 뭐 시킬 것 없냐고 바라보았지만 킹은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멋대로 대꾸했다.
“반은 제로 코크, 반은 콜라로 주세요.”
주문을 끝내자 킹은 곧바로 차를 움직였다. 안전벨트를 풀고 직원을 향해 있던 몸이, 급발진 때문에 쿵! 의자에 박혔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듯했지만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킹의 기분을 헤아리고 풀어주는 건 교도소에서 끝난 일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킹과 나는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앞유리창 너머로 밤바다가 보였기에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바다에 떠 있는 불빛이 보였다.
배일까? 배라면 무엇을 잡는 것일까? 오징어는 빛을 좋아해서 오징어잡이 배는 아주 밝게 빛을 낸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오징어려나. 근데 여기에서 오징어가 잡히나? 별 쓰잘데없는 생각을 굳은 표정으로 이어 나가는데 탁, 소리가 나며 차 안이 환해졌다. 킹이 조명을 켠 것이다.
힐끗 옆을 바라보니 킹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대놓고 킹을 쳐다보았지만 킹은 내 시선 따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았다. 킹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텅텅 빈 속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글러브 박스로 곧바로 머리를 내렸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큰 손이 내 머리를 받쳐 주고 있었다. 체온이 머리카락을 지나 두피까지 느껴질 정도로 킹의 손은 뜨거웠다. 희미한 페퍼민트 향기와 데일 듯 더운 온기. 이게 킹이었지.
그 손에 계속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하지만 주문한 음식이 드디어 나왔기에 잠들 수 없었다. 황토색의 거슬거슬한 종이 가방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워 보였다. 킹은 그걸 한 손으로 받고는 카드를 내밀어, 종이가방을 내 무릎 위에 올려 주었다. 얇은 종이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가 무릎을 데웠다. 계산을 끝낸 킹은 내 안전벨트를 다시금 매어 주더니 차를 출발했다. 그리고 차는 멀지 않은 곳에서 멈췄다. 바닷가 근처의 공터였다.
봉투 안에서 버거를 집어 하나를 킹에게 내밀고 하나는 내가 쥐었다. 포장을 까니 느끼하고 고소한 치즈 냄새가 풍겼다. 한입 베어 물자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킹은 내가 반을 거의 다 먹어 치울 때까지 포장을 까지 않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외려 봉투에서 음료를 꺼내 빨대를 꽂고 내게 내밀었다.
“천천히 먹어.”
킹의 손에 들린 채로 빨대를 빨았다. 마른 입에 찬 음료가 들어오니 살 것 같았다.
“배고팠단 말야.”
다시 버거를 물었고 하나를 다 먹어 치우니, 슬슬 정신이 돌아왔다. 냅킨으로 기름기를 닦아 내며 물었다.
“근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지금?”
대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지금 햄버거를 먹고 있는 거지. 킹은 내가 마셨던 빨대로 음료 컵 하나를 몽땅 비워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안에 있던 얼음을 입 안으로 털어 씹어 먹었다. 아그작, 아그작. 폭력적인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내가 너랑 있고 싶으니까.”
잘은 얼음 조각을 꿀꺽 삼켜낸 킹이 답했다. 무표정했다.
“참 뭐든 쉽네.”
킹에게 건넸던 버거를 빼앗아 손에 집었다. 그사이 식어 아까 만큼 뜨겁진 않았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뭐든 쉬웠으면 너랑 여기 있는 게 아니라 내 집에 있었겠지.”
킹이 음료 하나를 더 꺼내 빨대를 꽂았다. 내 침과 킹의 침이 모두 묻어 있는 그 빨대를 말이다. 어차피 침 정도야 지겹게 섞었으니 별 상관은 없었다.
“진짜로 어려웠으면 나는 내 집에 있었겠지.”
버거를 한입 베어 물었지만 아까처럼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사이 배가 조금 찼던 탓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버거를 반쯤 먹으며, 별 감흥 없이 입에서 음식물을 씹고 삼켰다. 앞 유리창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바다는 어둠에 묻혀 까맸다. 그리고 바람에 요동치며 쉴 새 없이 모양을 바꿨다. 달빛이 수면의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짠 바다 냄새가 풍겨왔다.
하이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이 냄새가 뼈에 박혀 있다. 하이투의 짠 바다 냄새는 왠지 다른 곳과 달랐다. 실제로 성분이 다른지는 모른다. 그저 달랐다. 하이투의 바다 냄새는 내 기억이 섞였고 내 경험이 섞였고 내 추억이 섞였기 때문에.
이 바다 냄새도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이 언제더라. 엄마가 죽은 후로 굳이 바다를 갈 일이 없었다. 집은 해일의 위험이 적도록 바다와 조금 떨어져 있어 바다는 가깝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멀지도 않았다. 엄마가 쉬는 날 저녁, 산책을 나오기도 했고 놀이터 대신 바다에 나와 뒹군 적도 있다. 그래서 수영은 제법 잘했다. 엄마가 야매로 가르쳐 준 것이지만. 물에 떠 있고 앞으로 나아갈 줄 알면 되는 것 아닌가.
엄마가 생각나니 맘이 푹 가라앉아 먹던 버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지럽고 복잡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엄마 외에는 내게 아무도 없었다. 엄마만이 가족이었고 엄마만이 친구였다. 건강하지 못한 관계에, 내 세계가 비정상적으로 좁은 것은 안다. 그러나 내 뇌는 이미 비정상인 데다가 건강하지 않았다.
차라리 남에게 해를 입힐 바엔 좁은 관계를 가지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엄마도 나도 무의식중에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엄마는 죽었고 내 세계에는 나뿐이다. 이 넓은 섬에서 나 혼자. 엄마가 물려준 성을 가진 이도 나 혼자고 엄마와 피를 이은 이도 나 혼자였다. 혼자라는 사실을 새삼 마주하고 나니 왠지 외로워졌다. 외로움일까? 외로움이란 감정을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들이 모두 가짜일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기름에 절어 너덜거리는 감자튀김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감자튀김이 가득 머금고 있던 기름이 입 안을 미끄럽게 만들었다.
어느새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에서, 킹이 먹다 만 햄버거를 가져가더니 치우기 시작했다. 굳이 말리지 않았다. 킹은 봉투를 뒷좌석 바닥에 올려 두고는 핸들에 머리를 기대 날 바라보았다. 어느새 재킷을 벗은 킹의 몸을 감싼 셔츠가 팽팽히 늘어나 긴장되어 보였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차 안을 밝혔다고 하나, 차에 있는 조명은 그리 밝지 않았다. 킹의 짙은 고동빛 눈동자가 더 어두워 보여 그것이 내 얼굴을 향한다는 사실이 못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킹의 시선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피하려 노력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이 덮인 그곳엔 딱히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없었지만 그 무엇을 보는 것보다 재밌다는 듯 굴었다. 숨소리가 들렸다. 길고 낮은. 그리고 한탄과 은근한 즐거움을 담고 있는 복잡한 소리였다.
“또 거짓말하는구나.”
“뭐?”
당황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킹을 바라보았다. 씨발. 이걸로 더 표를 내고 말았다. 킹이 날 향해 몸을 숙였다. 그의 몸을 가로지르던 안전벨트가, 잔뜩 긴장하며 팽팽해졌다.
“나는 이제 네가 무언가를 숨길 때 어떤 얼굴인지 알고 있어.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
꽤나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환하게 미소 짓는 그 얼굴이 두려웠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킹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입을 열면 내 긴장이 들켜버릴 것 같았다.
“지금은 모른 척해줄 수 있지만 나중에 가서는 모두 토해내야 할 거야.”
귀를 매만지는 손이 느껴졌다. 뜨거웠고 건조했다. 내가 지금도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걸 알고서 하는 이야기일까? 섬찟했다. 하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고 입술을 다물었다.
“로터스, 네가 모르는 네 감정까지도 난 알 것 같거든.”
날 그렇게까지 잘 안다고? 내 엄마도 모르던 것들을? 너는 날 잘 알지 못해, 그래야만 하니까.
“내 모든 걸 다 안다고? 허튼소리 하지 마.”
“허튼소리일 리 없잖아. 난 널 사랑하니까. 널 사랑하는 걸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걸. 심지어, 로터스 너 자신도 이길 수 있어.”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겠다고 생각해 놓고 나는 심기가 불편한 걸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비틀었다. 내 감정이 모두 드러난 내 얼굴을 킹은 정말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내가 말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알아낸다는 듯, 아니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이 가득 찬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싫었다. 이 감정은, 교도소에서 느꼈던 것과 흡사했다. 그러면 안 됐다. 그러면, 난 또다시 약자가 되는 것이니까. 근육을 움직여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거울이 없어 어떤 표정인지 알지 못했지만 분명 비틀린 웃음일 게 확실했다.
“그래, 내 심기를 파악하려면 내 모든 걸 다 알아야 하지 않겠어? 너는 내 발밑에 있잖아.”
깔아뭉개려는 의도가 확실히 담겨있는 말이었지만 킹은 그저 즐겁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재수 없었다.
“맞아. 내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려면 연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어야지.”
킹의 이마를 덮은 머리칼이 짙고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킹의 높은 코에 가로막힌 빛 또한 그의 얼굴의 반쪽을 어둠으로 스며들게 만들어 마치 현실의 것 같지 않았다. 가령 악마나 사탄 따위처럼 느껴졌지.
“네 맘대로 날 부르지 마.”
씹듯 말을 내뱉었다. 이제껏 아무렇지 않게 견뎌 온 게 왠지 화가 났다. 왜 분노를 느끼는지 나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이제껏 늘 그래 왔잖아.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그랬으면서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럼?”
킹이 날 향해 손을 뻗어 왔다. 하지만 내 얼굴이 와 닿지 못했다. 내가 킹의 손목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킹의 피부는 늘 그렇듯 뜨겁고 건조했다. 손을 당장 떼어 내고 싶을 만큼. 위를 향해 뻗느라 걷힌 소매와 아래로 내려간 시곗줄 때문에 내 손목 안쪽에 박힌 문신이 보였다.
[King]
손목 안쪽은 날 향해 있었기에 킹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새긴 이름을 그가 다시 볼까 왠지 두려워 소매를 끌어올렸으나 옷은 다시금 아래로 내려갔다. 이 이름을 꼭 드러내야만 한다는 듯이.
“날 부르지 마. 그냥 날 부르지 말라고.”
문신에 계속 신경을 쓰는 걸 알아챘는지 킹은 내 손에서 쉬이 자신의 손목을 빼내더니, 내 손목을 붙들었다. 킹의 이름 위로 인두를 지지듯 뜨거운 피부가 내려앉았다. 놀라 몸을 움찔대자 킹은 짙게 웃었다. 마치 무지한 인간을 꾀어낸 악마와 같은 음습하고 교묘한 얼굴이었다.
“넌 정말 남을 깔고 앉는 것 따위에 재주가 없어.”
문신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킹이 손을 떼어 낸 것은 아니다. 그 뜨거움을 내 손바닥으로 옮겼을 뿐이었다. 킹은 내 손과 깍지를 끼곤, 날 끌어당겼다. 덜컹. 안전벨트 탓에 얼마 당겨지지 못하고 몸이 애매하게 킹의 앞에서 멈췄다. 잡힌 손을 끌어당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 안에 있는 사람 중 약자처럼 바닥을 내보인 것은 나뿐이었다. 나만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구 아래에서 교활한 수를 쓰는 데에는 꽤나 천재적이었지만, 모든 것이 다 드러날 정도로 높은 곳에서 술수를 쓰는 건 네 영역의 일이 아니지.”
“내가, 바닥이나 기어 다니는 버러지 같다는 소리야?”
손목을 아무리 끌어당겨도 이대로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씨발, 씨발, 씨발. 킹과 잡은 손을 꽉 쥐었다. 손등뼈가 하얗게 불거진 것이 내 분노와 초조, 공포를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킹은 진정하라는 듯 엄지로 내 손등을 가만가만 문질렀다. 그 교묘한 간지러움과 뇌를 뜨겁게 채운 감정 탓에 왠지 발정 난 것처럼 굴 것 같았다. 그 자극적인 감각을 소화해낼 방법은 그것밖에 알지 못했다. 더욱이 킹이 내게서 갈구하는, 그래서 킹이 갖지 못한 것이 그것이니까. 그것으로라도 우위를 점하고 싶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버러지도 있어?”
험악한 얼굴인 내게 킹이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어느 누가 이 얼굴을 사랑스럽다고 말하겠어. 킹 같은 미친놈은 빼고 모두 얼굴을 찌푸리겠지.
“날 깔보고 있잖아.”
“넌 남 위에 있는 것에 영 젬병이니 내 옆에 있으라는 거지. 허니에게 어려운 건, 내가 모두 해치워줄 테니 말이야.”
“니가 없으면 내 인생은 쉬웠어.”
“여보는 자기 객관화가 안 돼. 내가 없다고 해서 너는 결코 평범하거나 쉬운 삶을 살 수는 없어. 내가 없으면 오히려 복잡해질 뿐이지. 내가 여보의 삶을 윤택하고 재밌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인 걸 알아 뒀음 하네.”
“개소리하지 마.”
‘윤택하고 재밌다고’? 너 때문에, 날 협박하는 인간까지 붙었는데 뭐가 재미고 윤택이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꼭꼭 씹어 속으로 참아 냈다. 왜 킹 앞에서 도무지 차분할 수 없는 걸까. 교도소에서는 그렇게 모든 것들 것 참고 견뎌왔는데. 지금은 대체 왜, 이따위로 미숙하게 굴게 되는 것인지. 감정의 균열로 복잡해진 내 얼굴을 킹이 안쓰럽다는 듯 마주 보았다. 가증스러웠다.
“로터스, 이 섬에서 널 돌볼 사람은 나뿐인 걸 너도 알잖아. 아주 기꺼이 널 받아들이고 평생 보호할 사람이 나인 것도 이미 알고 있겠지. 그 삶이 네게 재미없을지는 몰라도 확실히 편안하고 윤택할 거야. 네가 살아온 그 모든 삶보다. 네가 선택했던 그 거지 같은 경험들 보다.”
빌어먹게도 사실이었다. 친구도 혈육도 없었다. 내게 붙어오는 인간이라곤 킹뿐이었다. 하지만 고독하다고 최악의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다. 최대한, 웃으려고 노력했다. 비틀린 웃음 말고 승자가 지을 법한 여유 있는 그 웃음을 말이다.
“그걸 선택할지 말지는 내 결정이야. 차 돌려. 집 가야 하니까.”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킹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냈다. 한참 잡힌 손목은 저릿하고 찌릿했다. 킹은 빈손을 잠시 보더니 곧바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꽤나 담백한 태도로 안전벨트를 쥔 킹이 내 코앞에서 날 응시했다.
“안전이 최우선이잖아. 지금 길바닥에 나뒹굴면 너덜너덜해져서 아침이 되어서야 발견되겠지. 여긴 외지니까 내일 오후일 수도 있겠네.”
킹은 꽤나 달콤한 말을 한다는 얼굴로 섬뜩한 말을 지껄였다. 킹의 손에서 안전벨트를 빼앗아 곧바로 꽂아 넣었다. 킹은 왼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다시 제 자리로 몸을 물렸다. 제 안전벨트 또한 매고는 드디어 시동을 걸었다. 표백된 듯 하얀 인공 빛을 맞은 모랫바닥이 제 몸에 빛을 묻히며 잘게 빛이 났다. 차가 출발했고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벌써 9시를 넘긴 지 한참이었다. 고단했다.
* * *
밤길은 뻥 뚫려 있었지만 차가 나아가는 속도는 굼벵이 같았다.
“더 밟아.”
여전히 비스듬하게 머리를 기댄 채 웅얼댔다. 킹이 날 힐끔 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시선과 마주해주지는 않았다.
“안전이 중요하다니까.”
이제껏 안전하고 바른, 준법 시민의 삶을 살아온 것처럼 킹이 지껄였다. 참으로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인간이었다.
“밟아.”
이번에는 또박또박하게, 단호히 말하니 킹이 다 들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스피드광이야?”
“어, 빠른 게 좋으니까 밟아.”
“그럼 스포츠카 사줄까?”
킹이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 틈은 내가 벌린 것이 아니라 킹이 억지로 구멍을 내 비집고 들어온 것뿐이다.
“면허 없어. 밟아.”
“운전이야 내가 해줄게.”
“밟.아.”
몸을 일으켜 분명히 킹을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그제야 킹은 속도를 올렸다. 같은 말을 네 번 하게 하는데, 내가 아무리 미쳐 돌았다고 해도 킹의 옆에 있을 리 없지. 좀 전의 느린 속도는 거짓말인 것처럼, 차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야 차는 집 앞에 도착했다. 어둠에 묻힌 하늘색 대문이 뭐라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창밖만 바라보며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티를 냈다. 킹은 피식 소리를 내며 웃더니 정말 일상적인 말을 하듯 불쑥 말했다.
“나랑 결혼할까?”
“어.”
말의 내용을 듣지 않고 적당히 대답해 넘긴 것이었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킹 앞에선 잠깐의 틈도 보여서는 안 됐다. 킹이 내 몸을 잡아 자신의 쪽을 바라보게 하더니 방긋 웃었다.
“날짜는 언제가 좋아? 요즘 작게 하는 게 유행이라던데, 아무도 부르지 말고 우리 둘이서만 할까? 난 신혼여행은 어디든 좋아. 여보만 있다면.”
그래서 마주 웃어줬다.
“네 비혼식이라면 모든 스케줄 빼고 당장 갈게. 내일로 하자.”
킹은 입 새로 웃음을 작게 흘리며 한숨처럼 속삭였다.
“한 번을 넘어와 주지 않네.”
“넘어가길 뭘 넘어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지만 덜컥대기만 할 뿐 굳게 닫혀 있었다.
“열어.”
“아직 보내고 싶지 않아.”
제법 로맨틱한 말투로 킹이 말했다. 상대가 나만 아니었다면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겠지. 킹과 달리 내 얼굴은 험악했다. 시계를 보니 몇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짜증 났다.
“벌써 10시가 넘었는데 야근 수당 안 줄 거면 열어.”
“주면 같이 있어 줄 거야?”
“아니.”
깜깜한 어둠에 묻힌 집 대문이 보였다. 굳게 닫힌 그곳으로 제발 좀 들어가고 싶었다. 다시 차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문 열어.”
“음, 키스해주면.”
킹이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킹의 통통한 입술이 그의 손가락에 눌려 쪼그라들었다 다시 부풀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곧바로 팔을 뻗어 킹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킹의 입술이 가볍게 닿아 떨어졌다.
“부족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혀를 몇 번 섞은 후에 던지듯 놓았다.
“이제 됐지. 열어.”
“뭐가 그렇게 쉬워?”
킹의 미간에 얕은 골이 팼다. 불만스러운 모양이다. 내가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도 기대했던 건가.
“이제껏 너랑 했던 게 다 이런 건데 이제 와 어려울 게 뭐가 있어?”
철컥철컥! 강한 힘으로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더 하면 부서질 것 같이 계속적으로 철컥거렸다. 킹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달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곧바로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킹이 먼저 문손잡이를 잡아 왔다. 내 쪽을 향해 몸을 숙인 킹의 온기와 페퍼민트 냄새가 내게로 옮겨왔다.
바로 내 코앞에서 킹이 속삭였다.
“잘 가. 내 꿈 꾸고.”
다정한 얼굴로 지껄이는 악담이었다.
“전자만 받아들일게.”
허벅지를 꾹 누른 손을 떼어 내고 드디어 열린 문으로 내리며 대강 답했다. 쾅, 힘을 줘 차 문을 닫자 짙게 선팅된 검은 차는 금세 어둠에 묻혔다. 여덟 자리 버튼을 누르고 들어서자,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을 닫고 현관문까지 걸어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어둠 속에 마주한 밝은 빛이 눈이 부셨지만 익숙하게 앱을 눌렀다.
[<반품 처리 접수> http://PdEcpress.co.kr/account/returns/?adfjsdfglsdf=1sdfjklsjdlf ]
낮에 보았던 문자창을 띄우고 링크를 눌렀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쇼핑몰 반품 페이지가 휴대폰을 채웠다. 멈춰 서 양손으로 조작하며 반품 사유란에 글을 적어 나갔다.
[아침부터 밤까지 있었지만 손님 없었고 특별한 연락도 없었음. 그래서 소득도 없어요. 매일매일 쓸 테니 먼저 연락하지 마세요. 절대로.]
‘확인’ 버튼을 누르자마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낯선 번호였지만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곧바로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르고 현관문 도어 록을 눌렀다. 습관이 된 킹의 생일과 내 생일을 이어 누르고 다시금 온 전화를 또 한 번 거절했다. 하지만 다시 전화가 걸려와 결국 초록색 통화 수락 버튼을 눌렀다.
[리 ㅆ…….]
전화기 너머로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신발을 벗으며 그의 말을 끊고 내 할 말을 했다.
“제가 요즘 스토커가 고민인데 검사님도 아시겠지만, 스토커란 게 무척 흉악하잖아요. 근데 전 건장한 남자이기도 하고 경찰에서 딱히 신경을 안 써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말을 무시하자 자존심이 꺾였는지 씨익대는 숨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점차 차분해졌다. 그는 기가 죽은 듯 잠시 말을 하지 않다가 겨우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요.]
신발에 갇혀 있던 발이 답답해 곧바로 양말을 벗어내며 대충 말을 이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담을 해보려고요. 가령 직장 동료 같은 사람이요. 하루 종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 정도면, 이 정도 고민은 진지하게 들어주겠죠?”
[…앞으로 이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일은 삼가도록 하죠.]
겁을 먹었는지 꽤나 얌전히 루크 림이 대답했다. 전화는 금세 끊겨, 소파 위로 휴대폰을 던졌다. 협박의 근원이 킹이었지만 결국 협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것도 킹인가. 내가 새삼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