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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14/21)

Chapter. 3

내가 우위를 점했다고는 하나, 킹을 이기기엔 너무나 미천해서 나는 킹과 함께 해야만 했다. 킹과 나는 중간역에서 내린 후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내 ‘로터스 리’로서의 여권은 킹이 만들어 갖고 있어, 그것을 사용해 난생처음 퍼스트 클래스 좌석을 탔다. 편했고 비쌌다. 역시 돈이 최고란 생각이 들었다. 잠깐 비행기에서 다시 자고 나니 하이투였다. 3년 반 만에 돌아오는 고향이었다. 덥고 습하며 짠 바다 냄새가 나는 곳. 내 엄마가 나고 자라고 죽은 곳이자 내가 나고 자란 곳. 하이투.

킹도 나도 짐이 없어서, 저마다 수하물을 찾아 드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곧바로 공항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출입구를 걸어 나가는 킹에 맞춰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 자동차 브랜드를 잘 모른다 할지라도, 저 차는 누가 봐도 집 몇 채 값은 되어 보였다. 킹은 그런 자동차의 문을 자연스럽게 열고 나를 바라보았다.

“타.”

킹은 답지 않게 신사적인 얼굴로 점잖은 태도를 취했다. 그냥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나는 수중에 가진 홍징의 화폐가 없었다. 빚을 지는 꼴이지만 채권자가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 빚이 맞는지 잠시 생각했다. 그렇지만 답은 나오지 않고 괜히 머리만 아파, 기름값을 내놓으라는 놈은 아니겠지 싶어 곧바로 차 안에 올라탔다.

차 안은 깔끔했다. 누가 봐도 신경 써서 관리한 티가 났고 미약한 페퍼민트 냄새가 났다. 늘 킹의 몸에서 풍기던 그거 말이다. 그리고 더욱 냄새가 강해졌다. 킹이 차 안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그 청량하고 매운 냄새는 교도소와 공포를 떠올리게 해 내게는 기껍지 못했다.

킹을 바라보는 대신 운전석으로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곳에는 단정히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나와 키가 엇비슷하거나 더 커 보였고 다부진 체격에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킹과 함께 다닌다면 그 흐릿한 인상이 기억 속에서 더욱 쉬이 휘발될 것 같았다. 킹은 무심한 투로 그를 향해 말했다.

“출발해.”

킹의 옆얼굴을 바라보자, 킹이 그 남자에게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운전석을 볼 때와 달리 날 바라보는 킹의 시선에는 꽤나 열렬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우스웠고 그래서 웃었다. 더 이상 비웃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불만스러움을 표해야 마땅하건만, 그는 더욱 미소 지었고 그 몸에 다시 칼을 꽂아 넣는데도 웃음이 여전할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다시 교도소를 가기는 너무나 싫었기에 스쳐 지나는 차창풍경을 눈짓하며 물었다.

“어디 가?”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이투 시내로 가는 길이란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킹의 등 너머에 서 있는 키가 큰 야자수들의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낮은 음성에 킹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우리 집.”

킹이 미소와 함께 짧게 답했다. 마치, 여행 끝에 귀가하는 가족들이 집을 향해 간다는 듯한 말투였다. 어이없다. ‘우리’ 집이라니.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룸미러로 비치는 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집 갈래.”

킹에게 거는 말이지만, 기사에게 허튼짓 말고 우리 집에나 가라는 압박을 보냈다. 눈 한 번 감지 않고 말이다. 기사는 킹을 흘낏대며 눈치를 보았지만 킹은 모른 척하며, 은근슬쩍 내 손을 잡아 가져갔다. 그리고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헛소리를 했다.

“그래, ‘우리’ 집에 가고 있어.”

킹에게서 손을 끌어 빼냈다. 힘을 주어 잡지 않았는지 손은 막힘없이 빠져나왔다. 나는 킹이 만졌던 부분을 긁으며 단호한 투로 대꾸했다.

“엄마 집 갈 거라니까.”

“우리 집도 우리 엄마 집이야.”

완다 미나콤이 킹에게 준 것이니 ‘엄마’에게 받은 건 맞겠지. 그렇지만 말도 안 되는 생떼였다.

“엄마라고 안 부른다며.”

“호적상은 맞아.”

허튼소리.

“고집부리지 말고, 나 집 가 봐야 해. 안 간 지 너무 오래됐어.”

킹의 턱밑을 살살 긁으며 문질렀다. 간지러울 게 분명한 그 감각에도 킹은 내색하지 않으며 오히려 얼굴을 가까이 붙어왔다. 짙은 눈은 내 눈동자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시선이 가 닿는 모든 곳을 따라왔다.

“내. 집.”

음절을 끊어 분명히 발음했다. 킹은 말없이 제 턱밑을 꾹꾹 누르는 내 손길을 만끽하다가, 손을 떼어 내자 다급히 손목을 붙잡아 왔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집으로 가.”

누구의 집인지 분명히 하지 않는 것이나 내 집으로 간다는 것쯤 알 수 있었다. 속도를 높인 차가 들어선 길은 일상처럼 익숙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이 확실했다. 역시나 우리 집을 익숙하게 드나들었나 보다.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고 곧바로 길을 찾아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놀랍진 않다. 모든 걸 알아냈을 것이란 건 짐작하고도 남았다. 내가 모르는 내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디까지 알아봤어?”

최대한 차분한 척하며 물었다. 조금 목소리가 떨려 나올 뻔했다. 내 정보를 쉬이 캐낼 수 있는 사람과 악연을 맺는다는 건 퍽 공포스러운 일이니까. 킹은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나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몸을 돌리면 그와 시선이 바로 마주칠 것이란 건 안 봐도 뻔했다. 그래서 꿋꿋이 창밖 풍경에만 시선을 뒀다. 그러나 짙게 선팅이 된 유리창엔 그의 얼굴이 비쳤다. 검은 유리창 속의 킹은 잠시 텀을 둔 후에 입을 열었다.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

허술한 연기였다. 굳이 숨기려는 의지도 없지만 그저 체면 차리기 용으로 내뱉은 말에 불과했다.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헤집은 탓에, 잘 정리된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근사했다. 내가 세 번 눈을 깜빡하는 동안 그는 겨우 한 번을 깜빡였다. 날 제 시선에 오랫동안 잡아 두고 싶다는 뜻 같았다.

“나에 대한 거 말이야.”

돌리지 않고 곧바로 직구를 날렸다. 킹은 작은 숨을 내뱉으며 피식 웃더니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그리고 길고 작은,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킹은 잠시 말을 고르듯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고개를 비틀어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한 얘기 중 이름 말고 모든 것이 거짓인 걸 알지. 그리고 네가 기록을 남긴 모든 행적들, 그리고 ‘로터스 리’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남긴 모든 것들.”

킹이 내 머리를 턱짓했다. ‘머리 바꿨잖아.’의 뜻 같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너무나 부담스러워 그의 어깨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 무엇에도 벅차 하지 않는 듯 평온한 말투를 내려 애썼다.

“소름 끼치네.”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

킹의 물음은 이상했다. 싫어질 리 없다. 최근에 그를 향해 품은 감정은 두려움이었지만, 그가 내 앞에 무릎 꿇은 이상 무상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내 일상을 모두 헤집어 놓은 상태 아닌가. 과거가 된 내 정보를 파헤쳤다고 해서 그가 특별히 더 싫어질 이유도 없었다.

“딱히.”

고개를 젓자 킹은 우습게도 안도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내 말에 그는 얼굴을 구겼다.

“별 감정이 없어.”

킹이 거칠게 내 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그의 코끝과 내 이마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이를 악문 듯한 말투로 따져 물어왔다.

“그럼 난 네게 뭔데? 그렇게 열심히 달아나 놓고서, 이제 와 내게 아무 마음이 없다고?”

눈을 치켜 올려 킹을 바라보니, 그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차라리 증오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의 마음에 들지도 몰랐다.

“공포였지. 네가 날 죽일지도 모른다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난 너 때문에 손가락이 잘렸고 교도소 안에 있는 내내 네 눈치를 봐야만 했어. 그렇지만 네가 내게 배를 드러냈는데, 널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잖아, 킹.”

킹은 말없이 날 노려보았다. 그 눈빛만 보면, 이대로 차를 돌려 날 가둘 것 같았다. 스멀스멀 소름이 돋아왔지만 차분한 척하며 대꾸했다. 내게 원하는 것이 그 정도였다면 애초에 내 소재지를 바로 안 그때 눈과 입을 가린 채, 날 납치하는 게 맞았다.

차는 멈춘 지 오래지만 나는 킹에게 한참 시선을 붙잡혀 있어야만 했다. 킹의 등 뒤로 익숙한 하늘색 대문이 보였으나 그 앞에 선 킹이라는 벽이 더 존재감이 컸다. 그렇지만 마음이 끌리는 것은 하늘색 쪽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분노를 풀어줄 필요가 없었다. 그가 제멋대로 내뱉은 화는 스스로가 삭여야 하는 것이다.

몸을 비틀어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다시금 손목을 붙잡아 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흔들어 뿌리치니 더 이상 막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하늘색 대문 앞에 서자, 향수鄕愁가 벅찰 정도로 내 몸을 덮쳐왔다. 금속으로 된 손잡이를 잡아 열려다, 문득 생각나 다시 차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숙여 차창을 똑똑 두드리니 킹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엔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가 숨김없이 드러났지만 내가 상관할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 이미 뒤졌지?”

“우리 여보가 어떤 곳에서 자라났는지는 약혼자로서 알아 둬야지.”

“카메라 같은 건 설치 안 했지?”

“날 변태 새끼로 아나 보네. 아, 사실 여보는 그런 취향이었어?”

맞으면서, 아니야? 되묻고 싶었지만 말이 길어질까 그만두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걸 헤아려 보며 다시 물었다.

“뭐 훔쳐 갔어? 속옷? 딸 칠 때 쓰라고 교도소에 있는 건 다 두고 갔는데.”

그제야 킹은 웃었다. 두꺼운 흉통이 한 번 부풀었다 본래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강하게 숨을 터트리고는 입꼬리를 비틀고 이죽대며 말을 쏟아냈다.

“네가 놓고 간 물건들은 빵 안에서 이미 다 쓰고 버렸지. 부족하더라. 3년 넘게 그것만 가지고 딸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너도 알잖아. 좆이 크니까 잘 서고 많이 싸는 거. 왜, 돌려줘? 나야 상관없어. 그걸 네가 다시 가져갔다는 것만으로도 10번은 더 칠 수 있으니까.”

음담패설을 씹어 뱉어내듯 말하는 그의 미간엔 골이 깊게 패어 있었다. 꽤나 성이 나 보였다. 더 이상 말을 붙이다가는 더한 말도 나올 것 같아 허리를 펴 대강 마무리할 말을 쏟아냈다.

“바쁜 와중에 참 기운 넘치네. 청소만 해 뒀으면 됐어. 어차피 다 예상했으니까. 복사한 열쇠 있어도 함부로 들어오지 말고 올 거면 연락하고 와. 오지 말래도 어차피 올 거잖아. 그리고 사람 붙이지 말고 도청기나 카메라도 안 돼.”

“내가 왜 그딴 걸 다 지켜야 해?”

킹이 입꼬리 한쪽을 끌어올려 비웃듯 웃음을 터트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니,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의 손등만이 시야에 걸렸다. 그 손등을 손끝으로 약하게 문지르자, 그 손 근육이 움찔댔다. 킹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게 미소 짓고는 대답했다.

“날 사랑한다며.”

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그 무엇보다, 그가 내게 애정을 갈구한다는 걸 드러내고 있었다.

“알았어. 도청기나 카메라 같은 추잡한 짓은 안 해. 사람도 안 붙일게. 그래도 연락을 하려면 네 전화번호를 알려 줘야지. 응?”

킹이 내숭을 부리며 아양을 떨었다. 남의 위에 서 있는 것이란 생각보다 기꺼웠다. 특히 그가 킹이고 킹이 내게 어떻게든 예쁨 받으려고 구는 건 아주 흥미로웠다.

“이미 다 알잖아.”

무심히 대꾸했으나 킹은 지지 않고 내 손을 제 볼에 갖다 대고는 내 손바닥 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약한 바람이 손바닥 안쪽을 간질였다.

“그러면, 당장 너무 보고 싶어 돌아버릴 거 같은데, 로터스, 네가 오지 말라고 하면 난 어떻게 해? 이미 3년 넘게 나는 너무 힘들었어. 칼에 찔렸던 배가 아직도 아파와 움찔거려. 가엾게 여겨 줘야지.”

참으로 애절했다.

“그럼 그냥 내 사진 보고 딸 쳐.”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킹에게서 손을 빼낸 뒤 문을 닫았다. 짙게 선팅된 차라 킹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고 내가 몇 걸음 물러서자 차는 곧바로 부드럽게 출발했다. 매연을 쏟아내며 출발한 차가 사라지길 기다린 나는 오랜만에 집 열쇠를 꺼내 들었다.

누군가(아마 킹이겠지.) 자주 집을 드나들었는지 열쇠는 부드럽게 들어갔고 녹슨 쇠문도 끼익거리는 소리 없이 매끈하게 열렸다. 기름을 쳤나 보다. 마당 한구석에 있는 텃밭을 보니 아직 페퍼민트가 살아 있었다. 아니, 킹이 다시 심은 것일까? 그런 것 같았다. 오랫동안 집을 비웠으니, 저기엔 잡초가 무성해야 할 텐데, 잡초가 없이 페퍼민트만이 우뚝 서 있었다. 낡은 자전거와 오래된 종이박스들을 지나쳐 가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는데 내가 애초에 열고 나간 것인지 아니면 킹이 드나들다 연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관문 키는 없었기에 다행인 일이었다. 현관문과 대문에 도어 록을 달아야겠다. 열쇠를 들고 다니는 건 상당히 귀찮으니까.

안에 들어서자 낯선 냄새가 풍겨왔다. 내가 그동안 너무 익숙해 맡지 못했던, 집의 냄새였다. 천천히 안을 둘러보니 눈에 익은 나무 천장과 바닥이 보였다. 오래된 집을 엄마가 사서 갈고 닦은 공간이었다. 곳곳에 엄마의 손길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안에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들을 이가 아무도 없는데도 나는 허공에 공허한 말을 외쳤다. 최근에도 드나들며 청소를 했는지, 몇 년 만에 오는 집이건만 먼지 하나 없었다. 그렇지만 모든 물건은 제 자리에 있었다. 기이했다.

엄마의 방부터 열어 봤다. 엄마 방에는 주인 없는 침대와 화장대, 옷장이 전부였다. 엄마가 생전에 쓰던 이불이 잘 개어져 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엄마의 화장대로 다가가니, 오래된 화장품 위에는 먼지가 쌓여 있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향수를 허공에 뿌리자 강한 알코올 냄새가 풍겨왔다. 잠시간 숨을 참고 기다린 후에야,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향수병엔 딱 두어 번 뿌릴 양만이 남아 있어, 뚜껑을 잘 닫고 깨지지 않게 안쪽 깊이 집어넣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부드럽고 천천히 그 방문을 닫고 내 방문을 열었다. 낡은 나무 책상과 의자, 옷장, 그리고 침대까지. 내가 쓰던 것 전부였다.

너무 지쳐 침대에 털썩 누웠다. 침대에서 희미한 페퍼민트 향이 났다. 아아. 킹이 여기 눕고 갔구나. 일부러 제 흔적을 지우지 않은 것인지 실수인지 모르겠다. 이대로 잠들 뻔하다 몸을 일으켜 입던 옷을 다 벗어버렸다. 킹이 이미 설치해둔 카메라가 있나 불안했는데 카메라가 있다 하더라도 킹에게 맨몸은 이미 지겹게 보인 상태였다. 아, 그러고 보니 수도세랑 전기세를 내가 냈던가. 전깃불은 들어왔고, 따뜻한 물마저 나오고 있었다. 킹이 처리한 것 같았다.

헐벗은 채로 욕실에 가니 쓰던 제품들이 바뀌어 있었다. 아니, 제품은 같았지만 내가 쓰던 것이 아닌 새것이었다. 참나. 욕조 안을 확인하니 욕조도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져 그 안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가지러 방 안에 들어오자, 시끄러운 벨 소리가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거절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종료 화면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다시금 전화가 걸려 왔기에, 한숨을 깊게 내쉬고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익숙한 목소리가 인사도 없이 불쑥 흘러나와 질문을 던졌다.

[깨끗하지?]

칭찬받고 싶어 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집을 다시 대강 둘러보며 답했다.

“아아, 깨끗하네. 근데 내 침대에 누워서 뭐 했어? 좆이라도 흔들었어?”

그는 누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냄새가 밸 정도라면 꽤나 오래 누워 있었겠지.

[그냥 잠깐 누워 있었지. 여보가 이런 곳에서 잤겠구나 싶어서.]

“그래서 감상은 어땠는데?”

[집은 평범한데 어쩌다 여보처럼 너무할 정도로 깜찍한 새끼가 나왔을까 생각했지.]

“그래, 난 평범한 게 좋아.”

[너는 절대 평범하지 않아, 로터스.]

킹이 내 말을 대놓고 비웃어 왔다. 전화기 너머로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난 평범한 게 좋다고.”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말을 뱉어냈다. 평범한 게 좋으니 그만 꺼져 달라는 뜻을 담아서 말이다. 킹은 마저 웃었고 짜증이 나 전화를 끊으려 빨간 원을 누르려는데, 불쑥 킹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로터스, 너는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어. 내 눈에 띄었잖아. 넌 특별하고 재밌는 삶을 살아야만 할 거야. 나와 함께.]

미안함조차 담고 있지 않은 뻔뻔스러운 말이었다. 나는 결국 전화를 끊었다. 다시금 통화가 걸려오지는 않았다. 학습된 두려움이 솟아났으나 고개를 흔들어 지워냈다. 그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자, 욕조 안에 가득 받은 뜨거운 물 때문에 욕실 안엔 습한 김이 가득했다. 물이 넘치려 하고 있었다. 얼른 수도꼭지를 잠그고 발을 담갔지만 너무 뜨거워 한참을 서성이며 물이 식기까지 기다린 후에야 그 안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따뜻하고 나른했다. 며칠 동안 비행기만 몇 번을 탔는지. 비행기에선 잠을 자도 도무지 편하지가 않았다. 온기는 권태를 불러와, 눈을 감으면 안 되는 장소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눈꺼풀의 무게를 이겨내지 않았다.

* * *

“아.”

잠깐 잠에 들었는지 물은 어느새 식어 있었다. 몸이 찼다. 슬며시 눈을 뜨자 욕실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거구의 그는 날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덥지근한 인공의 냄새 사이로 차가운 민트의 향이 끼어들었다. 그 향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연락하고 오라고 했잖아.”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시야가 제법 또렷해지자 옅은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는 킹이 보였다. 처음 보는 편안한 차림새였다.

“여보를 안 보니 영 힘들어서 말이지.”

킹이 샤워기를 들더니, 물을 틀어 욕조 안으로 집어넣었다. 제 물줄기를 이기지 못한 샤워기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다가, 드디어 자리를 잡고 가만히 뜨거운 물을 뿜어 냈다. 무릎 아래가 따뜻했다.

“들어오기 전에 이미 깼어.”

몸이 뻐근해 크게 기지개를 켰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시선이 내 몸 곳곳을 빠짐없이 훑고 있었다. 저 옷 안에 갇힌 몸 또한 숱하게 보아왔던 터라 이제 와 부끄럽다고 몸을 가릴 일은 없었다. 투명한 물에 몸을 담근 채로 말없이 킹을 올려다보았다. 내 다리를 바라보고 있던 킹은 나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교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과거의 것과 보기엔 똑같았지만 승자의 것이 아닌 배를 드러내고 제 무해함을 드러나는 것에 불과했다. 우습게도. 그 웃음을 무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손으로 물을 가득 떠 얼굴에 끼얹었다. 아직 식어 있던 물 온도는 얼굴 피부를 시리게도, 덥게도 하지 않고 적당히 적셔왔다.

“씻겨줄까?”

약한 기대를 담은 음성이었다. 손에 얼굴을 파묻고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나가 있어. 씻고 나갈 테니까. 그 사이에 집에 가면 더 좋고.”

더 귀찮게 할 줄 알았건만, 그는 꽤나 순종적으로 욕실 밖으로 나갔다. 물에 오랫동안 담가진 손끝은 퉁퉁 불어 마구 주름이 져 있었다. 드디어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샤워기를 벽에 걸었다. 그리고 샴푸를 짜 머리를 비비는데 엄마가 자주 썼던 제품이라 익숙하고 그리운 향이 풍겼다. 그리웠다.

엄마가 해주었던 것처럼 몸을 깨끗이 씻고, 수건 하나를 허리춤에 둘러 나갔다. 킹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소파는 교도소의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나 너무 아늑하고 평온해 교도소의 딱딱한 침대가 그에게 더 어울렸다. 쭉, 어울리는 장소에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왜 왔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킹을 비켜 지나갔다. 이대로 방에 들어가려 했지만 어느새 일어난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채 날 단단히 붙잡아 왔다.

젖은 피부에 닿아 오는 그의 손이 뜨겁고 축축하게 느껴졌다. 킹은 짙은 눈동자로 날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움직였다.

“보고 싶어서.”

킹의 말은 마치 너무나 일상적인 말, 가령 밥을 먹었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날 보고 싶은 게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과 관련 있다는 듯이.

“내 사진 보라니까. 그거 말고도 딸 칠 거 많다며.”

손을 풀어내려 손목을 비틀며 짜증스레 대꾸했다. 그러나 외려 손목을 더욱 강하게 쥐어 올 뿐이었다.

“네 좆물 맛을 오랜만에 봤는데 어떻게 그래?”

눌린 손목뼈가 아렸고 나를 내려다보며 빛을 등진 그의 얼굴은 그림자가 져 무겁고 험악하게 느껴졌다. 잡힌 손목을 들어 짧게 말했다.

“놔.”

킹이 작게 웃었다. 그딴 것으론 자신을 밀어낼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싫어.”

나 역시 마주 웃으며 입술을 비틀고 이죽거렸다.

“사랑받고 싶다며. 무릎을 꿇어야지, 이따위로 건방지게 굴면 누가 이뻐해 줘?”

킹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을 터트렸다. 내가 발칙한 모양이지. 그리고 무언가를 참아 내듯, 침을 삼켰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으면서 천천히 손목을 쥔 손을 풀어냈다.

“내가 생각해도 멍청하지.”

부엌으로 향하는 날 따르며 킹이 중얼거렸으나 묻지 않고 냉장고를 열었다. 벗은 몸으로 쏟아지는 한기가 꽤나 시려 와 몸을 잘게 떨었다가 뒤에서 덮쳐온 온기에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킹은 내 등을 제 몸으로 모두 덮으며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너 따위에게 빠져 이제껏 해본 적 없는 멍청한 짓을 벌이는 내가 정말로 우습네. 1년만 빨리 널 찾아냈더라면 당장 가둬 놨을 텐데 이제야 널 찾은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어.”

거짓말을 일삼고 다른 이의 아픔 따위 모르는 나 따위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킹에게는 꽤나 불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불행은 내게는 기회였다. 그 바보 같은 감정 때문에 내가 무사히 집으로 와, 그에게서 무사할 수 있는 거니까. 손을 뻗어 생수병을 하나 집어 올렸다. 차가웠다. 냉장고를 닫고 몸을 돌렸다. 킹의 큰 몸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내 몸을 모두 덮어 와 내 피부는 본래의 것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그럼 바보짓 그만두지그래?”

병을 까 물을 들이켰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겠다고 외쳐야 옳았지만 킹은 얼굴을 가득 찌푸려 놓고도 움직이는 내 목울대에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빈 페트병을 바닥으로 던졌다. 통! 소리를 내며 떨어진 병이 남아 있는 물을 내 다리와 킹의 바지를 작게 적셔 왔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난 말이야, 제법 끈질겨. 그리고 보고 자란 게 완다와 내 엄마라서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멍청한지도 알지만, 그깟 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벌이는 아둔한 짓거리들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도 알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킹의 손가락이 복부를 스쳤다. 그리고 가슴과 쇄골을 문지르다 이내 손 전체로 목을 감쌌다. 그의 손은 컸고 내 목은 가늘었다. 목이 틀어 막히는 건 순식간일 거다. 나는 잊고 있던 공포가 돋아오는 걸 느끼며 침을 삼켰다. 꿀꺽, 움직인 울대를 느낀 킹이 작게 웃었다.

“로터스, 넌 정말 귀여워. 당장 씹어 먹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널 사랑하는 걸 인정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어.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씹스러울 정도로 꼴린다고 생각했지. 어쩌면 네게 첫눈에 반한 걸까? 어떻게 생각해?”

내게 향한 질문이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킹 역시 답을 바란 건 아니어서 제멋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넌 늘 꼴렸지만 나는 역시 네가 피를 묻히고 와서 내게 매달릴 때, 그때가 제일이 아닐까 싶어. 그때의 널 떠올리기만 해도 물을 질질 흘릴 수 있을 것 같거든. 처음엔 널 가둘 생각을 했지. 하지만, 가련한 내 사랑에게 어찌 그런 짓을 하겠어? 허니도 알다시피 난 꽤나 다정하잖아. 게다가 우리 여보는 꽤나 겁이 많아서, 이 작은 머리통으로 또 도망갈 궁리를 하겠지. 그리고 허니가 괴로운 걸 보면 내 마음이 아프니까. 그래서 말이야, 나는 꽤나 로맨틱하고 정통적인 방법으로 네게 구애하는 거야.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방법인 것 같거든.”

손이 올라와 내 턱을 쥐었다. 그리고 엄지로 내 뺨을 넓게 문질렀다. 킹의 표정만 보아선 당장 날 가두려는 사람 같았다. 킹의 건조한 손가락이 내 입술에 닿더니, 축축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무서웠지만 또다시 이자의 손아귀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성이 났다. 두꺼운 손가락을 이로 제법 강하게 물었으나 킹은 귀엽다는 듯 웃었을 뿐이었다.

“역시 다이아 반지를 가져와야 완성이겠지? 내가 생각이 짧았어. 곧 가져올게.”

킹은 사랑을 속삭이는 얼굴로 내 목을 쥐어 왔다. 조금만 힘을 주면 곧바로 목을 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끝까지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못된 짓을 벌일지도 몰라. 네 손에 다이아 반지가 아니라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수갑을 걸어 줄 수도 있겠지. 사랑에 상처 입은 남자는 미쳐버리는 법이잖아.”

킹이 웃었다. 내게 순순히 무릎을 꿇는 듯 굴어도 결국 킹은 킹이었다. 제 본색을 드러내며 협박을 해 오는 것이 화가 났다. 공포심을 이길 정도로 말이다. 나는 차분하게 굴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아둔했고 멍청했다. 킹의 멱살을 틀어잡고, 흥분을 숨기지 못한 음성으로 지껄였으니까.

“아아, 그래. 킹 미나콤이 나 따위를 너무나 사랑해서 기꺼이 남창까지 되어 준다는데, 실력이 여전한지는 한 번 알아봐야겠어. 안 그래?”

우위를 가진 건 나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얻길 원하는 내 사랑을 포기하고 돌변한다면 바닥에 처박히게 되는 것은 나였다. 나는 킹과 교묘하게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낀 나는 미숙했다. 벗은 다리를 킹의 다리 사이에 넣어 그의 성기를 은근하게 자극했다. 그리고 킹의 뒷머리를 잡아 뒤로 당기며 떨림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그 훌륭한 좆 말고, 손가락만으로 날 자지러지게 해봐.”

킹은 그 큰 손으로 내 엉덩이 한쪽 전체를 터트릴 듯 꽉 쥐었다. 내 엉덩이 살이 킹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킹은 내 턱에 입을 맞춘 후 농담처럼 대꾸했다.

“그럼 울 준비해 둬.”

작게 웃었다. 기꺼워서가 아니었다. 조금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터져 나온 내 숨이 킹의 머리칼을 건드려 그의 앞머리가 팔락거렸다. 킹의 이마를 덮은 곱슬머리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내리니 예전처럼 어려 보였다.

나는 잠시 머뭇대다가, 킹의 머리칼을 살짝 매만지며 호기롭게 대꾸했다.

“어디로?”

“어디든.”

어디로든 울게 할 수 있다는 과한 자신감이 담긴 대답이었다. 아니, 과한 것은 아니겠지. 나는 킹과의 섹스에서 자주 울곤 했으니까. 눈으로 또 다른 곳으로. 하지만 그때처럼 킹에게 우위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이 관계에서 위를 점하는 것은 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나는 순식간의 그의 손아귀로 떨어질지 모른다. 킹의 멱살을 잡아당기니 그는 순순히 끌려왔다. 얼굴에 초조를 드러낸 것은 나뿐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자 킹의 손이 입을 벌려왔다.

“다쳐.”

그 느긋한 말투가 짜증이 났다. 사랑을 토해낼 땐 그리 급박하던 표정이 어느새 변해 나를 또다시 점해 버릴까 봐 두려웠다.

“박기나 해.”

긴장을 숨기며 제법 배짱 있게 말하려 애썼다. 킹이 내 얼굴을 모두 훑어보더니, 내 시선과 마주하며 눈을 휘었다. 킹은 쉬이 알아챘다. 내 행동이 모두 허세라는 걸. 그렇지만 킹은 굳이 꼬집어 내거나 승기를 낚아채려 하지 않았다. 내 태도를 그저 묵과했다. 그가 말했듯, 킹은 날 사랑하고 여유만만한 태도보다 이편이 그에겐 마음에 들었을 거다. 씨발.

킹의 가운뎃손가락이 내 몸에 남아 있는 물기를 모두 훔쳐 가져가더니 엉덩이 가운데를 헤집고 들어갔다. 물에 젖은 손가락은 생각보다 쉬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그의 손가락을 길고 굵어 겨우 손가락 하나가 들어 왔는데도 이물감이 강했다.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자 시선을 피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가 내 턱을 들어 올리더니 속살댔다.

“그동안 수절했나 봐? 생각보다 더 조이네.”

킹의 손가락이 빠듯한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마른 내벽이 킹의 마른 손가락에 마찰 되어 열이 올라왔다.

“너무 건조해…….”

내가 도발한 행위를 이만 끝내고 싶다는 중얼거림을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킹이 피식 웃고는 대꾸했다.

“그러니까 물 좀 잔뜩 흘려 봐. 흥건해지게.”

그만둘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시작한 행위를 내가 멈출 수 없다면 최대한의 쾌락이라도 느껴 얻을 수 있는 모든 이익을 얻어야만 했다. 남은 그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 중지 끝을 핥았다. 킹이 잠시 손을 움찔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아야만 했다. 페퍼민트 오일을 발랐는지, 그의 손가락에선 화한 냄새가 풍겼고 혀는 살짝 쓰리고 매웠다. 콧속으로도 냄새가 들어와 뇌로 박혀, 머리가 시렸다.

그러나 킹의 몸만큼은 무척이나 뜨거워 한기는 금세 달궈져 사라졌다. 잘 손질된 그의 손톱 밑을 혀로 문지르고 그대로 손가락 기둥을 입 안으로 넣었다. 손가락을 깊게 머금고, 손가락 사이의 여린 살을 핥으려 했지만 갑자기 입 안에 다른 손가락이 처박혀와 거친 숨과 함께 손가락 모두를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컥, 크윽……. 아프잖아…!”

목구멍을 붙잡고 기침을 쏟아내는데도 킹은 젖은 손가락으로 꿀렁대는 목을 훑어 내려갔다.

“얼른 빨아 적셔야지. 구멍 간지럽잖아. 얼른 쑤셔 주고 싶은데 내 손에선 물이 안 나와서.”

킹이 턱밑을 검지로 찔러왔다. 몸을 굳히자 그는 손가락을 떼어 내고 도로 입 안으로 처박았다. 나는 다시금 그의 중지와 검지를 열심히 핥으며 적셨다. 다물지 못한 입에서 침이 떨어져, 킹의 베이지색 바지에 짙은 갈색 얼룩이 생겼다. 킹의 손가락 끝이 쪼그라들기 직전까지 빨아낸 후에야 입을 떼어 낼 수 있었다.

“흐으, 윽, 하아…….”

“로터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헐떡대면 어떻게 해?”

킹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번 너무나 낯설어 딱딱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했다.

“내 이름, 부르지 마.”

침으로 푹 젖어 축축 해진 자신의 손가락을 만족스레 바라보던 킹이 내 눈을 마주 보며 깊게 미소 지었다.

“알겠어, 여보. 말하지 말고 뒤나 쑤셔 박으라는 거지? 나는 제법 좋은 남편이 될 것 같아.”

킹은 내 턱을 적신 침을 닦아 내더니 반대 손으로 내 엉덩이 사이를 벌려 축축이 젖은 손가락을 곧바로 쑤셔 박았다.

“흐윽!”

여린 살을 거칠게 파고들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등 뒤로 손을 돌려 냉장고 손잡이를 붙잡았으나 금세 미끄러져 결국 킹의 목을 붙들어야만 했다. 맨살에 닿아 오는 그의 피부는 참으로 뜨겁고 습했다. 구멍은 침으로 푹 젖은 킹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삼켰고 킹은 천천히 안을 비집고 들어가더니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구멍은 오랜만에 침입하는 존재를 거부하는 듯했지만 이내 눈에 띄게 기꺼워하며 반가워했다. 씨발, 짜릿했다.

“하아, 더, 더… 움직여 봐.”

달아오른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내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킹에게도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다. 킹은 기쁘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기고는 뿌리 끝까지 손가락을 처박았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좆질 하나는 정말 잘했다.

“흐윽…! 그거 말고, 더. 다른 손가락도.”

교도소에서 킹과 보낸 시간 동안 숱한 섹스를 했다. 나는 그 행위들이 모두 괴로웠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꽤나 과하게 느끼고는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민감하게 느껴졌다. 과거는 내가 컨트롤하기 힘든 쾌락을 견뎌내고 킹의 사정을 기다리며, 그가 날 내리누르는 행위를 끝내길 바랐으나 지금의 나는 그의 아래에 있지 않았다.

예민한 구멍이 민감하게 느껴졌다. 3년 동안 도망친 대상이 뒷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셔 박는데도 몸을 떨며 허리를 비틀 정도로 말이다. 더 뜨겁고 날카로운 감각이 나를 휩쓸기를 바랐다. 킹은 거절하지 않고 검지를 천천히 집어넣었다. 검지는 중지를 넣을 때보다 더욱 부드럽게 들어가, 킹은 천천히 위아래로 씹질하듯 박아 올렸다. 그리고 두 손가락을 안에서 벌렸다. 좁고 탄력 있는 내벽은 킹의 손가락 때문에 빠듯하게 늘어나 나는 어깨에 팔을 올린 채 신음을 흘렸다.

“흐윽, 윽. 손가락 안에서 휘저어.”

이미 바닥을 다 드러낸 이상 이제 와 오리발을 내밀어봤자 내 손해였다. 몇 년 동안 성적 행위와 거리를 두고 살아온 주제에, 오랜만에 느낀 감각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이제껏 킹에게 써본 적 없는 어투로 명령했고 그는 거역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잠시 내가 우위를 점했을 것이라는 얄팍한 생각은 날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우리 여보는 참, 정숙하질 못해. 근데 난 그런 거 안 따지니까 원하는 대로 해줄게. 아 조이는 거 봐. 존나게 박고 싶게. 그편이 더 좋잖아, 어때? 응?”

날 살살 꾀어내는 그 말투에 넘어가고 싶지 않아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거부했다. 강제로 할 생각은 없는지 킹은 제법 부드럽게 내벽을 휘젓고 위아래로 쑤셔 박았다. 약지까지 구멍에 박아 망치로 못을 박듯 팔을 움직였다. 구멍에서 질척하고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하윽, 윽! 음, 으응. 빨라. 윽!”

“뭐가 빨라, 지금 엄청 좋아 죽으면서. 응?”

킹은 내 투정을 웃어 흘려 넘기고는 더 강한 힘으로 내 안을 쑤셨다. 마치 내 안을 뚫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킹의 목을 더욱 강하게 끌어당기고 허벅지를 팽팽하게 조이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비명처럼 외쳤다.

“하아, 씨발. 더, 더 해. 응?”

킹은 남는 손으로 내 엉덩이를 소리 나게 때렸다. 아파서 그 손을 피하다가 손가락이 내 내벽 기분 좋은 곳을 스쳐 신음을 터트렸다.

“하윽! 윽! 흡, 하아.”

“이렇게 밝히면서 손으로 돼? 좆 물려줬으면 좋겠지? 응? 좆으로 안을 사정없이 긁어 줄게. 물 질질 흘릴 만큼. 그런 거 좋아하잖아.”

솔직히, 더 길고 굵은 것이 안을 휘저어 줬으면 했다. 킹의 손가락이 아무리 굵고 기다랗다 하더라도 부족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쉬워 뒤를 움찔대며 조이면서도 애원하지 않았다. 그러 킹의 손가락으로 최대한 쾌감을 느끼려 했다.

“흐윽, 싫, 싫어…. 윽…! 손가락, 손가락 그냥, 응, 응! 거기!”

“좋아 죽으면서 죽자고 거부하는 게 엄청 짜증 나는데 귀엽네.”

입을 다물고 손가락에나 집중해 줬음 싶었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입술로 킹의 입을 틀어막았다. 킹이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이 느껴져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킹은 남은 손으로 내 뒤통수를 강하게 쥐더니, 깊게 입을 맞춰왔다. 나는 고개를 꺾어 킹의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킹은 쓰지 못해 아쉬운 좆 대신 혀와 손가락이 좆이라는 듯 내 위와 아래 구멍을 강하고 빠르게 쑤셔 댔다.

“으흑…! 거기, 윽!”

깊은 곳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손가락에 견딜 수 없어 뒤를 강하게 조이자 킹은 더욱 그곳을 쑤셔 댔고 나는 참지 못해 킹의 배에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킹의 비싸고 질 좋은 셔츠는 내 흰 정액이 얼룩져 엉망이 되었으나 그걸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한참 남아있는 쾌감에 몸을 떨며 킹의 머리통을 붙잡아 입을 박았다. 그의 입술을 긁고 깨물고 혀로 안을 쑤셔 박으며 과한 자극을 소화해내려 애썼다.

킹은 내게 마주 입 맞추며 제 바지춤을 풀어냈다. 그러나 앞서 내가 거절했듯 내게 박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제 배를 적신 내 정액을 훔쳐 제 것에 묻히더니 날 끌어안고 손을 움직였다. 뜨거운 물에 몸을 한참 담근 후 이딴 짓까지 벌이니 점차 피곤해졌던 나는 그에게서 입술을 떼어 내고 킹의 어깨에 이마를 박았다. 나와 엇갈려 얼굴을 기댄 킹은 뜨거운 숨을, 짧고 거칠게 내 목에 쏟아냈다. 목이 뜨겁고 습해졌다.

얼른 눕고 싶었다. 킹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려 함께 흔들었고 엄지로 킹의 귀두 끝을 몇 번 문지르자, 킹의 것은 어이없게도 정액을 쏟아냈다. 그것은 진하고 끈적거렸다.

“못 본 새 조루가 된 거야? 못 써먹겠네.”

손을 적신 정액을 킹의 셔츠에 닦아 내며 작게 말하자, 킹은 내 볼을 혀로 길게 핥아 올리며 대꾸했다.

“3년 동안 상상으로만 했는데, 진짜 여보가 만져 주잖아. 어떻게 참아.”

킹은 아직 한참 부족해 보였지만 내게 더 손대지 않았다. 대신 내 목에 입을 맞추고 날 안아 올렸다. 킹은 키가 큰 나를 가볍게 들더니 내 방 안 침대에 날 눕혀주었다. 그리고 내가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내 몸에 묻은 정액을 닦고는 이불을 덮어주고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 자.”

침대에 누우니 갑자기 졸려졌다. 그럴 만했다. 뜨거운 물에 한참 몸을 담그고 사정까지 했으니 말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대다가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 *

“으음…….”

눈이 부셔 눈을 떴다. 방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문을 열고 자다니. 이불을 몸에 둘러 종종걸음으로 창문가로 걸어간 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리고 이불을 침대 위로 던졌다.

어제 일찍 잠든 탓에 이른 시간임에도 제법 개운했다. 킹이 닦아 내기는 했지만 내 배엔 아직 정액이 굳어 있었다. 뻐근한 어깨로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머리를 감으며 동시에 이를 닦았고 몸과 발, 얼굴을 씻고 다시 깨끗해진 후에야 욕실을 나왔다. 뚝뚝 떨어지는 물을 대강 발로 훔치며 부엌으로 향했다. 배가 고팠다. 식사를 할까 싶었지만 냉장고를 여니 생수만 가득했다. 입이 심심해 담배라도 피울까 싶었으나 담뱃갑도 텅텅 비어 있었다. 귀찮지만 외출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옷장 서랍을 열어 속옷을 하나 꺼냈다. 오래된 옷들이긴 했지만 빨아 정리해 둔 것이라 깨끗했다. 다행히 약 4년 전 나는 얌전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중 검은색 속옷을 입었다. 그리고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검정 반팔 티셔츠와 검은색 진을 꺼내 입었다. 예전보다 살이 빠졌는지 바지의 허리가 헐렁했다. 그러나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갑과 휴대폰, 열쇠를 챙겨 가장 근처 큰 몰로 향하기로 했다. 옷가지를 좀 사야 했고 담배도 사야 했으며 먹을 것도 사야 했다. 다 들고 올 수 있으려나. 일단 식사를 하고 천천히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여서 몰에 도착해 지하 1층으로 가 일본식 덮밥을 시켰다. 튀김과 간장소스가 올라간 덮밥은 금방 나왔고 배가 고파 금세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바로 옆 주스 전문점에서 멜론 생과일주스를 산 후 남성복 매장이 있는 5층으로 향했다.

남성복 층에서 가장 가까운 SPA매장을 들어간 나는 적당히 입을 티셔츠 5장과 셔츠 2장, 그리고 슬랙스 2장과 청바지 1장, 조거 팬츠 여러 장을 샀다. 키가 큰 편이라 옷들도 커서 무게가 꽤 나갔다. 장도 볼 수 있을까? 그냥 점심거리로 삼을 걸 사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집에 가는 길에, 미국식 샌드위치를 파는 곳에서 칠리소스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하나 샀고 근처 편의점에서 내가 피우는 담배를 두 갑 구매했다. 이른 오전에 나갔지만, 집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집은 조금 낯설었다. 집 대문에 못 보던 것이 달려 있었다. 도어 록이었다. 휴대폰을 확인해 봐도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0000인가 싶어 눌러봤지만 틀렸다는 날카로운 알림음만 울렸다.

휴대전화를 뒤져 가장 최근 통화 기록에 남아있는 킹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저장하면 편한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바쁜지 길게 통화연결음이 이어졌다. 그냥 근처 카페에 갈까 생각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여보.]

전화를 받자마자 으레 하는 인사도 없이 대답부터 했다. 여보라니. 여보란 호칭은 일방적으로 쓸 수 없는 거다. 킹의 목소리가 퍽 다정하고 간질거렸다.

“도어 록 번호 뭐야?”

[확인했어? 가장 보안 성능 좋은 거로 내가 직접 골랐어.]

킹이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아이같이, 기대가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귀찮았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번호는?”

[수고했으니 칭찬이라도 해줘야지.]

그러나 킹은 순순히 답하지 않았다. 아이처럼 서운해 툴툴거리는 투로 대꾸해오니 어이없었다.

“멋대로 한 거잖아.”

[아아, 어제는 물 질질 흘러가며 잔뜩 좋아하더니 이제는 매정하네. 남창으로 안 쓴다면서 취급은 남창이잖아.]

어제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대낮에 떠올리기엔 너무한 광경이었다.

“…그래, 잘했네. 그러니까 번호. 나 손 무거워서 피곤해.”

엎드려 절하듯 칭찬해주니 킹이 기꺼운 듯 웃었다. 그리고 숫자 여덟 자리를 발음했다.

[03031230]

킹이 부르는 대로 차근차근 번호를 눌렀다. 03031230. 그러자 띠리릭 소리를 내며 도어 록이 열렸고 전화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놓고 양손으로 짐을 들었다. 아무 연관성 없는 여덟 자리를 되뇌었지만 도무지 입에 익지를 않았다.

“그게 뭔 뜻이야. 대체. 안 외워지잖아.”

짜증 섞인 투로 말했지만 킹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 호적상 생일이랑 여보 생일.]

“…너무 허술하네.”

강제로 킹의 생일을 외운 나는 현관문의 도어 록에도 똑같은 번호를 눌렀다.

[그렇지? 여보랑 내 생일을 합쳐 놓은 건 신혼부부 집 번호로 너무 쉬운 것 같기는 해.]

띠리링.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킹의 말을 못 들은 척 짧게 말했다.

“일해.”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위해서 뽀뽀 한 번만 해줘.]

“장난해?”

[내가 언제 장난친 적 있어?]

“지금 하고 있네.”

킹이 다시 허튼소리를 하기 전에 얼른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는 정도로는 킹이 날 괴롭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에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다시 전화가 걸려 왔지만 무음모드로 바꾼 후 식사 거리로 사 온 샌드위치를 냉장고에 넣었고 새 옷들을 빨아 널었다.

아직 깨끗하긴 했지만, 집안일을 하는 김에 청소도 했고 땀이 흐르는 몸을 씻어내니 어느새 어두워져 저녁이 됐다. 아직 와이파이나 인터넷이 집에 설치되지는 않아 인터넷을 할 수는 없었고 나는 거실에 있던 책장에서 적당한 책을 꺼냈다. 예전에 읽겠다고 사뒀지만 읽지 않은 소설책이었다. 몇 년이 지나긴 했지만 결국 읽으면 된 거지. 나는 책을 읽으면서 조금 이따 일을 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과가 있는 늦된 나이의 남자로서 일을 구하는 것이 퍽 쉽지 않았다. 전과기록 삭제를 요청할 기준이 될까? 그래도 그건 시간이 제법 걸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날 심사하다가 가짜 여권과 가짜 신분으로 여러 나라에 밀입국해 일한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었다. 그건 꽤나 중범죄고 홍징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와 얽힌 복잡한 문제가 될 게 뻔했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다.

홍징에 온 이후로 보고 연락한 사람이라곤 킹뿐이었고 날 기꺼이 도울 사람도 킹뿐이었다. 킹은 외려 무척 기뻐하겠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킹에게 손을 뻗는 건 그의 손아귀로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아직 모아둔 돈이 조금 있었지만,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현대 사회에서 복권에 당첨되지도 못한 인간이 백수로 사는 것은 일종의 수동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아무리 구직의욕이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일을 구하는 건 내 의지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허튼 생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어 결국 일어나 일거리를 찾아내려 애썼다. 이미 청소가 끝낸 집에선 더 손을 댈 게 없었다. 한숨을 내쉬다 왠지 들어오는 볕이 흐릿하다는 생각에 창문을 바라보았다.

사실 무척이나 깨끗했지만 손자국과 먼지가 그득하다고 속으로 우기며 걸레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역시 닦여 나오는 것이 없어 바닥이라도 다시 문지르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즐거운 나의 집’의 전자음이 모두 흘러나오기 전에, 걸레를 내려놓고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화질 나쁜 모니터를 통해 보였다.

“누구세요?”

[로터스 리 씨 계십니까?]

택배원인 모양인지 상자에 붙은 종이를 보며 남자가 물어왔다. 나는 주문한 것이 없었고 킹은 택배보단 직접 가져다주는 걸 선호할 게 뻔했다. 더욱이 선물일 리는 없다. 내가 홍징으로 돌아온 걸 알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 된 이때에. 수상했다.

“누구세요.”

가라앉은 목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같은 질문을 재차 던졌다.

[택배입니다만, 직접 수령 하셔야 하는 물건이라서요. 문 좀 열어 주시겠습니까?]

“거짓말 치지 말고 누구시냐고요.”

이래 봬도 교도소에서 킹 눈치를 보며 몇 개월은 살았던 사람이었다. 화질이 나빠 남자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얼굴을 굳히는 것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단, 얼굴 보고 이야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뭘 믿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남자에 어이가 없어 날카롭게 되물었다. 남자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입술을 비틀게 끌어올렸다.

[리 씨, 당신이 수년간 해외 각국에서 저질러온 범법행위로 다시금 교도소로 가기에 충분하다는 그 사실을 믿으시는 건 어떠신가요? 물론 증거들로 신빙성을 더해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요.]

정중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명한 협박이었다. 씨발. 잘게 떨려오는 왼손을 반대 손을 꽉 붙잡고 누그러진 투로 되물었다.

“…소속이 어디시죠?”

현관에 걸어 둔 거울에 비굴한 미소를 짓는 내가 비쳤다. 그가 내 표정을 알 방법은 없지만 최대한 납작 엎드려야 맞았다. 조금 기세등등해진 남자는 인터폰 너머에 있을 날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하이투 지방검찰청에서 왔습니다.]

좆됐다. 검찰 사람이라면 날 교도소로 다시 처박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킹은 무력으로 날 제압할 수 있다면 이들은 제도권 안에서 날 찍어 누를 수 있는 인간들이었다. 더욱이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떠드는 것은 공연한 허세가 아닐 게 분명했다.

“검찰에서 저를, 왜…….”

최대한 태연한 척 되묻고 싶었지만, 긴장 탓에 입이 굳어 말을 흐리고 말았다. 우위를 점한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얘기할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하는 수 없이 버튼을 누르자, 대문을 넘어 남자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똑똑 현관문을 두드렸다.

“로터스 리 씨.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죠.”

문을 열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모자를 벗어 땀에 젖은 머리를 흩어 정리했으나 더 엉키기만 할 뿐이었다. 단정치 못한 차림새에도 그는 우위를 점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여유로운 미소로 날 응시했다. 그리고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우습다는 듯한 태도로 그가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하이투 지방검찰청 검사 루크 림]

검사가 씨발, 나를 왜. 사실 걸리는 것은 많았다. 하지만 옆에 있는 놈이 킹 같은 자라, 나 정도는 준법 시민이었다. 초조함에 가만히 작은 종이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는 작게 헛기침을 두 번 해 내 시선을 끌더니 자못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대선 유력 주자인 린 오캄포와 미나콤 가의 결탁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전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요.”

루크 림이 얕은수 쓰지 말라는 듯 비틀게 웃었다.

“정치는 몰라도 미나콤은 알잖아요. 적어도 킹 미나콤은.”

“같이 교도소에서 지내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막역한 사이는 아닙니다.”

이미 다 알고 왔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킹이 너무 설쳐 댔다. 내 이름과 얼굴로 약을 팔아 대며 날 찾았다고 하니 범죄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자들은 날 모두 알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킹 미나콤과 친밀해서 검사가 직접 찾아오는 그런 사이 따위 거부하고 싶었다.

“요즘 교도소에선 붙어먹는 사이도 그저 같이 지낸 사이라고 하나 봅니다? 교정국에 요즘 교도소의 성 윤리 해이에 대해 건의해 봐야겠군요. 특히, 동성애 금지 규칙이 특히 쓸모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

개소리 말라는 뜻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자와 가까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출소해 제 살길을 찾아 나가는 준법 시민이고 그자는 알다시피, 흉악한 마약범 아닙니까. 저는 진실로 킹 미나콤, 그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요. 영감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몸을 섞은 일은 있었지만 그건 모두… 반강제에 가까웠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검사님의 말을 들으니 즐겁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킹을 마구 폄훼하며 가련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나는 정말 검사도 킹 미나콤도 모르고 싶었다. 그저 아주아주 평범하고 법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구해 적당히 먹고 살고 싶을 뿐이었다.

“말장난하지 말고, 그놈이 네게 열렬한 것쯤은 이미 다 알고 있어. 아주 그냥, 미쳐 있던데?”

짜증이 난 모양인지 루크 림이 거친 말투로 대꾸했다. 씨발, 아주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킹이 제게 잠시 열심인 것은 맞죠. 하지만 그것은 길지 않을 것이란 거 저도 검사님도 예상하고 있지 않나요. 저에게서 정보를 원하시는 듯한데, 만약 제가 정보를 물어다 드리면 저는 어떻게 살죠? 미나콤은 물론 대선 후보의 뒤통수를 쳐놓고 이 하이투, 아니 홍징에 제가 발붙이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도 제 살길은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딱딱한 말투는 꽤나 단호하게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절벽 끝에 선 상태였다. 저자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고 더 이상 모른 척 뒷걸음질 치다가는 죽기 십상이었다. 일단 살아야 했다. 킹이고 뭐고 난 또다시 그 끔찍한 교도소로 갈 생각이 없었다. 루크 림은 잠시 입을 다물고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결론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범죄 기록 말소와 그간의 위법행위들을 묵과해드리도록 하죠.”

평소라면 유혹적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킹 미나콤을 상대하는 데에는 부족했다. 턱없이 말이다.

“범죄기록이 말소된다고 해서, 그들이 절 가만두겠어요? 무려 킹 미나콤이 말이죠. 아, 부둣가 변사체로 발견되기에는 적절하네요.”

초조함에 입매를 비틀며 비꼬듯 말하자, 기분이 상했는지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난 내 목숨줄이 달렸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는 쪽이 그래서는 안 됐다. 루크 림은 턱을 손으로 감싸 길게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망명 어떻습니까.”

“망명이요?”

꽤나 솔깃했다. 반색하자 루크 림은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해외로의 망명은 물론, 초기정착지원도 해드리죠. 증인 보호 또한 철저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이제야 좀 비교해 볼 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응할 수는 없다. 내가 결국 원하는 건 킹과 철저히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것이지 또 다른 더러운 인연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킹이 아니어도 내게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러 생각이 뇌 안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마땅한 결론을 내릴 수 없어진 나는, 루크 림이 안고 있던 커다란 박스를 턱짓하며 화제를 돌렸다.

“제게 주시는 거겠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멋대로 품 안에서 빼앗아 왔다. 상자의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웠다. 빈 건가? 흔들어 보니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루크 림은 제 빈손이 머쓱한지 몇 번 가볍게 쥐었다 펴더니 날 바라보았다. 알아서 가지, 좀. 왜 지키고 서 있대. 맘 같아선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정말 마음으로만 그랬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세요. 꽤나 어려운 문제이지 않습니까.”

눈을 내리깔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루크 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드디어 떠났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곧장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씨, 발…….”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욕뿐이었다. 상자에 팔을 올려 한참 앉아 있다 상자를 봉한 테이프를 뜯어 안을 살펴보았다. 그곳엔 ‘하이투지방검찰청’ 로고가 박힌 볼펜 두 개와 메모지 하나가 들어가 있었다. 씹, 양심도 없지.

수첩과 볼펜, 그리고 박스를 분리수거 해 버렸다. 검찰청 로고가 박힌 걸 미쳤다고 쓰라고 준 건가. 빈 박스를 들고 오기 면구스러우니 아무거나 처박은 게 맞는 거겠지. 볼펜 하나는 심지어 잉크가 바닥난 상태였다. 정말이지 고위직들의 몰염치는 나 따위 일개 서민으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 * *

샤워까지 끝마친 후 담배를 물었다. 니코틴이 내 몸을 이완시켰으나 나는 핏발이 설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날 미치게 하는 초조함을 겨우 억누르려 애썼다. 씨발, 씨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냐고. 킹, 검사, 교도소. 씨발……. 머리가 아팠다. 검사의 협박을 모른 척하자니 교도소에 가게 생겼다. 킹이 막아설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렇다면 나는 킹의 손아귀로 굴러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검사가 원하는 대로 하자니 킹과 끈질기고도 더러운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었다.

“아, 나보고 어쩌라고!”

화가 나 한참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꺾었다. 내가 검사의 협박을 받아들인다고 한들, 내가 킹에게서 어떻게 정보를 캐낼 수 있겠는가. 뭐 베갯머리송사라도 하라는 말인가? 너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되냐고? 그렇게나 허술한 수색이 어디 있냐고. 그냥 나 수상하다 티 내는 거잖아. 그리고 그딴 멍청한 짓이라도 하려면 결국 킹이랑 계속 만나 자야 한다는 뜻이었다. 진짜 남창이 된 기분이다. 살기 위해 몸을 파는 것 따위, 교도소로 끝이 날 거라 생각했는데.

끊임없이 생각과 생각을 하다 보니 그 방향은 검사의 협박에 응해 킹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것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적절한 방법이 뭔지를 정해야만 했다. 킹과 연애 놀음을 하는 것도 너무나 수상했고, 어쩌지. 손톱 거스러미를 뜯어가며 방법을 떠올리는 것에 몰두하다 건조한 피부가 따끔거려 생각을 방해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연고를 바르고 보습제를 발랐다.

교도소 밖으로 나왔을 땐 거스러미가 일어나지 않게 꽤 관리해 주었는데 고단한 일의 연속이라 또 이 모양이 됐다. 킹과 교도소 안에 있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킹의 옆에서 뭘 했더라. 일이라는 명목으로 하는 일 없이 앉아 있었지. 일……. 휴대폰을 들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들렸을 즈음, 전화기 너머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무나 익숙한 그 목소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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