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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13/21)

Chapter. 2

몰타는 작은 섬이었기에 공항도 작았다. 마치 터미널 같았다. 살짝 길치인 터라, 표지판만 똑바로 보며 걸어가 겨우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티켓을 빠르게 구매할 수 있었다. 50분 뒤에 출발하는 비행 편이었다. 여기는 섬이라 달아나기에 한계가 있었다. 일단 내륙으로 빠져, 아시아를 가든 또 다른 곳을 가든 해야 했다. 다른 곳. 어딜 가지? 씨발. 지구는 너무 좆만 했다.

공항을 둘러보았지만 킹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다. 킹은 키가 무척 커서 어디를 가든 눈에 띄었기에 지금 보이지 않는다면 여기에 킹은 없는 거다. 조금 안도해 접수원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고 늘 가방에 챙겨 다니는 다니엘 왕의 여권을 꺼냈다. 여권 사진 속 다니엘 왕은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다니엘 왕. 이제 너도 이제 안녕, 해야겠다. 이 여권은 이제 일회용이 되었다.

공항은 내게 무서운 공간이었다. 공항에서 남의 짐을 들어줬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으니 올 때마다 몸이 굳었다. 그러나 최대한 수상해 보이지 않게 굴려 노력했다. 몰타를 떠나는 유학생처럼, 미소를 지으며 여권과 티켓을 공항 직원에게 내밀었다. 직원 역시 내게 마주 웃어 부었다. 하지만 여권을 왠지 오래 보아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여권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걸 알면서도 이럴 때마다 매번 불안했다. 직원은 여권 속 다니엘 왕과 날 비교해 보더니 내게 웃으며 여권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몇 없는 짐을 바구니에 올려 둬 검사를 받았다. 저기 있는 가짜 여권들을 들킬 이유가 없을 텐데 괜히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마약 탐지견들이 날 덮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데자뷔처럼. 아니, 데자뷔가 아닌 예전의 기억이지.

그리고 내 몸에 수상한 것이 없는지 검사받은 후에 게이트를 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왠지 이상한 시선이 날 따라붙는 것 같았다. 기우일 수 있었으나, 누군가 날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름이 끼쳤다.

킹이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걸 과하게 의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에이미로 날 갖고 놀던 킹이 내게 미행 하나 붙이지 않았을까? 공항을 구경하는 척 안을 둘러보았다. 작은 공항은 다른 곳보다 별 볼 일 없었으나, 최대한 수상하게 보이지 않게 주변을 살펴봐야 했다. 그렇지만 킹처럼 키가 큰 이는 여전히 없었다. 아니다. 킹은 바쁘니 킹이 직접 올 리는 없다. 아시아인들을 찾아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내게 무심한 것처럼 보였다. 몇이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왜 그렇게 보냐는 눈빛이었다.

씨발. 존나 초조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화장실을 향했다. 떨려오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똑바로 걷는 것은 여간 쉽지 않았지만 꾹 힘을 줘 앞으로 나아갔고, 다행히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칸을 열어보며 다시금 확인한 뒤 가장 구석 칸에 들어가 가방 안을 뒤졌다. 분명 전에 쑤셔 둔 게 있을 텐데.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가방을 몇 번 떨어트릴 뻔한 후에야 원하던 걸 찾을 수 있었다. 전에 박아 뒀던 볼 캡과 하얀 티셔츠 하나였다. M이라는 자수가 박힌 남색 볼 캡과 I ♥ Malta 티셔츠는 가방 안에 굴러 먼지가 가득 묻었고 주름이 잔뜩 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것이라도 너무 반가웠다. 가방 안에 버려두길 잘했다.

입고 있던 검정 티셔츠를 벗어 쓰레기통에 던지고 가방에서 휴대폰과 지갑, 여권들을 챙긴 채 가방도 버렸다. 그리고 머리를 모두 캡 안에 넣어 썼다. 거울에 비춰 보자 아까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손목에 걸린 손목시계를 보자 비행까지 40분이 남아 있었다. 최대한 팔자걸음으로 걸으려고 노력하며 화장실을 빠져나와 그대로 입국 수속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로 30분 뒤에 베를린으로 가는 항공편을 끊었다. 싱가포르 국적의 다니엘 왕이 아닌 캐나다 국적의 사이먼 이츠하로.

사이먼 이츠하의 여권으로 다시 입국 수속을 마치자 비행까지 13분이 남아 있었고 게이트로 여유로운 척, 조급함을 숨기며 걸어갔다. 비행기는 슬슬 비행준비를 마치고 있었고 나는 늦은 손님 중 한 명이었다. 비행기 안을 바라보자 모두 비非 아시안이었다. 킹이 아시안만 쓴다는 법은 없지만, 괜히 안심이 되었다.

곧 비행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울려왔고 배터리를 아껴야 하기에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연락할 사람도, 내게 정보를 줄 사람도 없는데 통신기기를 끄자 외딴 섬에 홀로 버려진 듯 외로웠다. 비행기는 천천히 활주로를 달렸고, 읽을거리도 없이 비행기 안에 갇히게 된 나는 승무원에게 안대를 부탁한 후 쪽잠을 청했다.

약 3시간 동안 하늘에 떠 있던 비행기가 천천히 하강하자, 아래로 향하는 비행기에 맞춰 나도 잠에서 깨어났다. 창밖을 바라보니 구름 사이로 블록처럼 작은 건물들이 보였다.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기차역에 가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차 편을 산 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으로 가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비행기가 더 빠를지는 몰라도, 바깥이 허공인 비행기 안에 갇혀 있는 건 심적으로 불편했다. 그리고 기차에선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었고 티켓도 더욱 저렴했다.

몰타와 베를린은 시차가 없어서, 굳이 손목시계의 시간을 고칠 필요가 없었다. 오후 5시의 베를린 공항은 몰타의 것보다 훨씬 컸고 비교도 안 되게 붐볐다. 그 덕에 나는 인파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일단 가장 가까운 몰로 향했다.

몰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모두들 밝은 낯으로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가 너무나 수상해 보였다. 겨우 표정을 풀어 깔끔한 흰 셔츠, 검은 바지와 재킷, 그리고 안경을 사 착용했다. 유리가 조금 뿌옇고 무게가 가볍지는 않아 불편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미용실로 들어갔다. 독일어를 못했지만, 직원은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알았기에 영어로 직원에게 부탁했다.

“새까맣게 염색해주세요. 그리고 머리도 좀 펴 주시고요.”

직원은 내 요청대로 염색약을 가져다 내 머리에 발랐다. 코 밑으로 독한 염색약 냄새가 풍겨와 눈을 감고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직원의 손길대로 머리를 감고 말린 후 뜨거운 판이 내 머리에 닿는 게 느껴졌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얼굴이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낯설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발려, 베를린에 출장을 왔거나 또는 이곳에 근무하는 평범한 아시안 직장인 같았다. 적당히 바쁜 척을 하며 지나다니면 이곳 사람들과 융화되어 섞일지 모른다. 바쁘게 외양을 바꿨는데도, 어느새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하게 변했다.

슬슬 배가 고팠지만, 식사를 할 시간은 없었다. 다행히 베를린에서는 몰타처럼 누군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따돌린 걸까? 그렇지만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은 어차피 같은 나라이고 날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다. 몰타 공항에 몇 없는 항공편 중에 비행기를 탄 아시안을 찾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계획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가는 대신, 비행기를 타 어서 빨리 도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서 빨리 이 대륙을 벗어나고 싶었다. 입국했을 때와 다른 차림새로 다시 공항을 찾았고 공항 서점에서 영어로 쓰인 얇고 가벼운 페이퍼 백 책을 하나 구입했다.

수속까지 마쳤지만, 비행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큰 유리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검었고, 전등을 켠 공항 내부의 인공빛이 나를 내리쬐고 있었다. 옅은 잿빛의 거친 페이퍼 백 종이는 빛을 제대로 반사하지 못해 눈이 아프지 않았다. 그렇지만 좀처럼 책을 읽고 있지 못했다. 온갖 생각이 이미 내 머리를 채우고 있었기에.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로 약 3시간이 걸린다. 무사히 도착한다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야 했다. 만약 야간열차가 있다면 그걸 잡아타 잠을 자고, 없다면 공항 근처 숙소에서 잠시 묵은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해야 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 본 적은 없지만,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약 7일이 걸린다는 얘기는 들었다. 중간에 내릴 수 없는 비행기와 달리 기차는 여차하면 중간에 내리면 된다. 이참에 짧은 기차 여행을 해도 좋겠지.

몰에서 옷을 더 사 올 걸 그랬다. 지금 있는 옷가지는 지금 입고 있는 옷과 그 전에 입은 흰 티셔츠뿐이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일단 휴대폰 충전기를 산 뒤 휴대폰을 충전하자. 휴대폰 배터리를 확인하니 46%가 남아 있었다. 하. 그렇지만 일단 모스크바의 기차를 미리 예매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홈페이지에서 영어를 제공했기에 새벽에 출발하는 기차를 예매한 후,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휴대폰을 껐다. 지루함은 손에 들고 있는 책으로 달래면 됐다. 형편없는 책을 읽는 건 교도소에서 이골이 났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15분이 지나 있었다. 사실 책을 읽지 못했다. 겨우 한 줄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옷과 함께 구입한 가방에 책을 넣고 탑승을 알리는 직원을 향해 걸어갔다. 직원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내 여권과 티켓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한 그에게 습관적으로 마주 웃어주고는 비행기 안으로 탑승했다.

자리는 이번에도 창가였다. 이미 베를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잠을 잤는데 더 잠을 잘 수 있을까? 잠을 비행기에서 보충하면 오늘 밤은 잘 필요가 없기에 억지로라도 잠을 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승무원에게 안대를 부탁했다.

비행시간은 약 3시간이었지만,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베를린보다 약 4시간이 빨랐다. 모스크바와 베를린은 한 시간의 시차가 났기 때문에. 급한 와중에 한 시간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공항 벽에 걸린 큰 시계에 맞춰 손목시계를 조정했다. 모스크바는 벌써 자정이었다. 다행히 예매한 기차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기차역까지 가는 방법을 몰랐다. 러시아어는 전혀 할 줄 몰랐고 그래서 어느 정도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공항 직원에게 물어봐야 했다.

모스크바는 베를린보다 더 추워 입고 있던 재킷을 더욱 여미며 직원에게 다가갔다. 밤 12시에 귀찮다는 표정으로 카운터에 앉아 있던 직원은 내가 다가가자 허리를 펴긴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여기서 야로슬라브스키 역까지 어떻게 가나요?”

“지금은 없어요.”

직원이 무심하게 답했다. 대중교통이 없다는 건가? 잠시 생각하다 중요한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러시아 돈인 루블이 없었다. 환전소는 문을 닫을 시간이었고 나는 유로와 달러만 갖고 있어, 직원에게 곤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달러나 유로를 받는 택시 기사는 있나요?”

그러자 직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미국이랑 EU인 줄 알아요?”

하. 이런 사소한 걸 간과하고 있었다니. 여러 나라를 거쳐 살아왔음에도 너무 맘이 급해 잊고 있었다. 신용 카드는 쓰지 않았다. 추적이 쉬웠고, 가짜 신분으로 만들기에 여러 가지로 귀찮았다. 하지만 아침까지 기다리면 늦을 것 같았다.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

“러시아 물가보다 더 쳐줄 테니 혹시 운전 가능한 사람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물론 당신에게도 감사의 뜻을 잊지는 않겠습니다.”

다행히 지금 지갑에 있는 달러가 제법 되었다. 러시아 돈인 루블보다는 달러의 가치가 안정적이고, 요즘 달러의 가치가 강세인 것에 비해 루블의 가치는 약세였다. 다른 나라에서 조금 웃돈 붙인 정도가 러시아에서는 큰돈이 될 수 있었다. 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150달러 줘요. 그러면 전화 걸어 줄게요. 그쪽에도 다 얘기해 주고.”

러시아 억양이 섞인 영어로 그가 이야기했다. 미심쩍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 이래서 아쉬운 처지일 때가 너무 싫었다. 내가 아쉬우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고 여러 가지로 피곤하고 힘드니까. 나는 지갑을 꺼내기 전에 그에게 하나를 더 부탁했다.

“300달러를 줄 테니, 루블로 조금만 바꿔줘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300달러를 내밀었다. 그리고 내게 돌아온 돈은 8,000루블이었다. 분명히 현재 환율을 따졌을 때 150달러는 8,000루블보다 더 되었을 것 같지만, 나는 현재 이것이라도 아쉬웠다. 오히려 직원이 8,000루블 정도 되는 현금을 갖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도 직원의 일 처리는 빨라서, 공항 근처로 택시 한 대가 금방 도착했다. 그게 맞냐고 손가락질하니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를 올라타며 짧게 인사를 건넸지만, 러시아 말로 돌아왔다. 그리고 별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택시는 멋대로 출발했다. 직원이 맞는 목적지를 알려준 것인지 의심되었으나 믿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열차 시간까지 대충 30분이 남아 있었다. 언제 도착하는지 기사에게 묻고 싶었지만, 러시아 말만 구사할 줄 아는 기사와 영어와 한어만 구사할 줄 아는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창밖으로 멀리 기차역으로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러시아 말을 할 줄 몰라도, 저곳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발점인 야로슬라브스키 역이 맞는 것 같았다.

기차역에 도착하자 기사에게 달러와 유로를 합쳐 꽤 많은 돈을 지불해 급하게 내렸으나 아직 출발까지는 20분이 남아 있었다. 다리가 떨리고 초조해져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탔던 터라 한참 동안 피울 수 없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씨발. 이게 뭔 고생이지?

담배에 불을 붙이자 온통 어두운 공간에 미약하게 빛이 생겼으나 그 빛을 옅은 잿빛에 가까운 흰색 연기가 뿌옇게 가렸다. 마치, 지금 달을 가린 구름처럼.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다. 하, 피곤하다. 그래도 니코틴 연기가 폐 안으로 돌아와 뇌를 포함한 몸 곳곳을 스치며 돌자 조급함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 씨발. 개고생이네.

손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오늘 염색한 머리에선 기분 나쁜 화약 약품 냄새가 났고, 머리는 뻣뻣했다. 속으로 욕을 끊임없이 되뇌며 담배 한 개비를 알뜰히 피워낸 후, 하나를 더 피우고 싶었으나 이만 들어가 보는 게 좋을 듯했다. 코 밑으로 내려간 안경을 올려 쓰고, 무표정한 얼굴로 역 안으로 들어섰다.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기차는 승객을 받고 있었고 나는 홀로 짐 없이 가벼운 몸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의 좌석은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내가 구입한 건 2인 1실인 좌석이었다. 그것이 가장 비쌌으나 다른 사람이랑 있고 싶지 않아 골랐다. 만약 1인실이 있었더라면 그걸 골랐겠지. 기차의 모든 좌석은 침대칸으로, 내가 고른 좌석은 나 혼자뿐이었다. 갑작스레 승객이 추가되지 않았으면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도 없길 바랐다.

배가 고파 일단 기차 안 매점에서 초콜릿 바를 하나 구입해 물었다. 초콜릿 바는 잔뜩 달고 찐득했지만 배 속에 뭔가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우고 싶었으나, 차내에서 그럴 수는 없어 다리를 발발 떨어 대는 것으로 초조함을 억누르려 애썼다. 손에 묻은 초콜릿을 씻어내는데 기차가 천천히 출발하는 게 느껴졌다. 손에 물을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거울 속에 비친 꼴이 꽤나 볼품없었다. 피곤한 얼굴은 물에 젖어 초라했고 오늘 염색한 머리는 뻣뻣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휴지를 뜯어 대강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고 좌석을 향해 걸어갔다. 한숨을 푹 내쉬며 걷다 문득 발을 멈춰 섰다. 또다시 실체 없는 공포가 날 덮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크게 아가리를 벌린 고래 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고래의 입 안은 너무 크고 빛 한 점 없어 날 평생 그 큰 공간에 가둬 물에 잠기게 할 듯했다. 좌석에 도착했으나 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대다 결국 뒷걸음질을 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점차 멀어지려 했으나 열려서는 안 됐을 문이 등 뒤에서 벌컥 열렸다. 복도는 전등이 적어 어두웠다. 그러나 칸 안의 밝은 빛이 내 등을 향해 쏟아져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내 긴 그림자 위로 더 크고 짙은 것이 그 모든 것을 덮으며 드리워졌다. 익숙한 냄새가 스쳤다. 코가 싸한 페퍼민트 향. 청량한 그 냄새가 코를 통해 뇌로 들어와 박히더니, 뇌를 차갑고 뜨겁게 달궜다.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고, 뜨거운 손이 내 허리를 감아, 내 등에 더운 몸을 붙여왔다. 그 몸에서 풍겨오는 상쾌한 페퍼민트 냄새와 내 몸이 퍼트리는 담배 냄새가 섞여 너무나 낯익어 다시금 맡고 싶지 않은 향이 두 명을 감쌌다. 그리고 듣고 싶지 않았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와 귀에 박혀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허니. 아니, 다니엘이라고 불러 줄까?”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내가 쓴 안경을 부드럽게 벗겨 복도로 던졌다.

톡.

가벼운 플라스틱 쪼가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저것을 걸치고 있다 해도 날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크고 긴 팔은 내 몸을 빛이 가득한 칸 안으로 낚아채 가더니.

탁-.

문이 닫혔다. 복도에는 안경과 어둠, 그리고 담배와 페퍼민트가 섞인 향만이 나를 대신해 남아 있었다.

방 안에는 침대가 양옆 벽에 붙어 있었고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교도소의 방이 생각났다. 그리고 킹이 있기에는 그 방보다 훨씬 좁았다. 오랜만에 보는 킹은 여전히 잘생겼지만, 얼굴 살이 조금 내려 전보다 날카로운 분위기가 났다. 또한 전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전엔 내 또래 같았다면 이젠 나보다 2, 3살 위처럼 보였다. 그래도 킹은 나와 6~8살이 차이 났으니 본래 나이보다는 어려 보이는 것이다.

킹이 연보라색 점프 슈트를 입은 것만 보았지만, 지금의 킹은 몸 전체를 감싸는 검은색 슈트에 갈색 코트를 입고 머리를 정리해 위로 올려 넘긴 모습이었다. 성숙한 분위기의 사업가 같았고 그게 맞기도 했다. 킹이 내 몸을 놓아줘 킹과 나는 각자 침대에 앉아 마주 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킹은 내 손을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 손목에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내 왼쪽 손을 말이다. 킹이 제 이름을 가리던 내 손목시계를 풀어냈다.

툭.

가볍지 않은 메탈 시계가 테이블 위로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킹은 그것에 가려졌던, 제 이름에 입술을 박았다. 킹의 말캉한 입술이 근래 차가운 메탈 시곗줄만 닿았던 여린 손목 안쪽에 닿아 오며, 핏줄이 지나가는 곳을 물어뜯듯 앞니로 살살 긁어냈다. 소름이 돋아났다. 그리고 킹은 수갑처럼 내 손목을 제 손으로 강하게 붙든 뒤 날 끌어당겼고, 강한 힘에 일으켜진 나는 테이블에 몸을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시계가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도망 못 친다고 했잖아.”

킹이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킹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내려고 애썼지만 킹의 손 힘은 너무 강했다. 여유로운 척 미소 지었다.

“그런 것치곤 많이 늦었네.”

그러자 킹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처럼 비틀린 웃음이 아닌, 완전한 웃음이었다. 킹의 잘생긴 눈이 휘었고 입꼬리가 올라가 치아가 드러났다. 다른 이보다 조금 큰, 귀여운 인상을 주어 킹과 모순되지만, 또한 킹과 너무 잘 어울리는 앞니가 보였다.

“그래도 준법 시민으로서 받은 형은 다 살고 나와야지. 그리고 허니가 어찌나 대가리를 잘 쓰던지 좀 시간이 걸리더라? 우리 애기가 참 머리는 참 잘 써. 그치?”

킹은 우리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날 어쩌려는 거지? 여유가 사라진 얼굴은 잔뜩 굳어, 누가 봐도 초조하고 다급해 보일 게 분명했다.

“이미 연극은 다 끝났잖아. 그딴 호칭은 집어치우지그래?”

그러자 킹이 내 손목을 놓고는 등을 뒤로 젖혀, 벽에 기대앉았다. 그리고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연극이라……. 멋대로 네가 열고 날 출연시킨 그 연극? 그래. 네 이름이 유일하게 내게 알려준 진실인데, 자주 불러야겠지. 안 그래, 로터스? 그동안 아담, 에릭, 유진 그리고 다니엘까지. 참 다양하게도 썼더라. 이름도 속이고 싶었을 텐데 못 그래서 참 아쉬웠겠어.”

킹이 이를 물고 그 틈 사이로 말을 씹어 뱉었다. 하. 그동안 행적을 이미 다 좇아 알고 있었나 보다. 씨발. 잔뜩 불안해져 다리를 떨고 싶었지만, 다리를 꼬아 겨우 참았다.

“그래. 그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살면서 나름 잘 숨겼는데 어떻게 찾았어?”

그러자 킹이 활짝 웃었다. 나를 찾은 것이 못내 뿌듯한가 보다.

“아아. ‘로터스 리’ 덕분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날이 선 말투로 되물었다. 조급함을 숨기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킹은 나와 달리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이대로 가면 나는 또다시 킹에게 우위를 뺏긴 채 엎드려야 했다. 아니, 이미 킹과 나의 관계에서 나는 아래였다.

“말 그대로야. 우리의 상품 ‘로터스 리’. 출시한 지 3년이 조금 넘었지만, 아직도 인기가 여전하지. 우리가 파는 그 어떤 약보다 중독성이 강하고 효과가 빠르지. 그런 점에서 참 로터스, 너랑 닮았지? 그렇지만 진짜 너랑 다르게 값은 싸. 진짜 로터스를 찾는 데엔 돈이 존나 많이 들었는데 말이지. 하여튼, 그래서 하이투를 들른 이들이라면 모두들 한 번쯤 하고 간 약이지. 네가 다른 새끼들에게 먹히는 걸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아프던지.

네 머그샷이 너무 이뻐서 그걸 포장지에 박아 넣었어. 어찌나 꼴리던지 처음 본 날엔 그 사진으로 다섯 번 넘게 딸을 쳤다니까? 니 구멍 안이었으면 열 번도 가능했는데. 그게 다른 새끼들 손에 들어가는 걸 볼 때마다 그 인간들 모두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을 정도였어. 그렇지만 꾹 참았어. 그리고 널 찾아냈지. 널 찾아내는데 결정적 증거를 준 놈에게는 평생 쓸 돈을 주겠다고 했거든.”

하. 미친 새끼. 킹의 바지춤이 슬슬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어떤 새끼가 나를 불었는지 짐작이 갔다. 빌. 홍징에 다녀온 후로 내 눈치를 보더니 결국 일을 그만둔 그 새끼. 씨발. 어떤 의미에서 복권 당첨은 맞았다. 킹은 잔뜩 열이 오른 표정으로 내 얼굴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꽃 선물은 잘 받았어? 내 마음을 잘 전할 수 있는 것들로 열심히 골랐는데. 마음에 들었나 몰라.”

에이미가 준 그 꽃들은 역시 저 미친놈의 짓이었다. 씨발. 에이미를 통해 날 감시한 거겠지.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은 아직 붙이지 않았지만 킹의 강렬한 시선을 견뎌내려면 불을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탁-.

담배에 불이 금방 붙었고 나는 담배를 빨아들이며 담뱃갑을 킹에게 내밀었다. 담배 피우고 정신 차리라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킹은 고개를 저었다.

“끊었어.”

“하, 천하의 킹 미나콤이?”

“네가 싫다고 했잖아, 로터스. 나는 다정한 사람이야. 그래서 힘들게 끊었더니 이번엔 네가 피우네. 그래도 긴 막대를 물고 황홀하고 나른한 표정을 짓는 네가 존나 꼴리니까 괜찮아.”

킹은 담배를 피우는 날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또렷한 홍채로 날 응시했지만, 희뿌연 담배 연기가 킹의 시야를 가렸다. 나는 폐에 모인 담배 연기를 일부러 킹의 얼굴 쪽으로 내뱉었다. 그러나 킹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나는 담배 하나를 다 피우고 한 개비 남은 대마를 꺼내 킹에게 보여줬다.

“이거 잠깐 피우고 올게. 이거 끔찍하게 싫어하잖아?”

몸을 일으키자 킹이 내 손을 붙잡아 와, 나는 부드러운 말투를 내려 노력하며 약자처럼 비굴하게 웃었다.

“이미 달리는 기차에서 어떻게 도망쳐. 금방 와. 도망치면 지구 끝까지도 쫓아올 거면서.”

다급히 나가 문을 닫았다. 킹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나오니 그나마 숨을 쉬기 편해졌다. 입에 대마를 문 채 불을 붙였다. 대마 연기가 어른대며 시야를 어지럽히자 손으로 휘저어 가며 앞으로 걸었다. 기차는 어느새 궤도에 올라 빠른 속도로 덜컹대고 있었다. 기차의 문도 마찬가지였다. 연기를 빨며 꽤나 느슨하게 잠긴 걸쇠를 바라보았다.

보기보다는 뻑뻑해서 손에 힘을 주어 걸쇠를 올린 후 문을 발로 밀었다. 그러자 차고 폭력적인 공기가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까만 풍경은 빠른 기차 속도 탓에 분명치 못하게 스쳐 지났다. 후, 연기를 내뱉으니 희뿌연 연기는 풍경에 섞여 사라졌다.

“후우.”

뛰어들면 설마 죽을까? 잠깐 다치고 말지 않을까? 죽으면 어떻게 하지? 어차피 킹도 날 죽일지 모르는데 그럴 바엔 그냥 다치는 게 낫지 않을까? 아픈 건 싫은데. 대마 기운이 고통을 좀 덜어주겠지.

거의 다 피운 대마 꽁초를 문밖으로 던졌다. 종이로 싼 말린 잎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바람에 휩싸이더니 빠른 속도로 뒤를 향해 날아갔다. 저게 내가 되지 않기를 바라야지. 바닥을 구두코로 톡톡 두드리고 몸을 풀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무모했지만 이런 수밖에 없었다. 검지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최대한 덤불이 많은 곳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우거진 관목이 보이자 곧바로 몸을 던지려고 했다. 내 배를 급하게 낚아채는 뜨거운 손만 아니면 말이다.

“하, 씨발. 이게, 여전히 골때리네.”

킹의 손목이 배에 닿아 그의 맥박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두근.

생각보다 빠르고 조급했다. 마치 초조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날 강하게 끌어당겨 기차 안쪽으로 깊이 밀더니, 성큼 앞으로 걸어가 문을 다시 닫았다. 머리를 마구 날리던 바람이 멈춰, 앞머리가 제멋대로 가라앉았다.

킹은 제 큰 손으로 바람 탓에 망가진 머리를 정리했다. 그의 짙은 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오히려 꼬여가고 있었기에 정리라기보단 마구 헝클인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는 꽤나 초조해 보였다. 그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킹은 긴장하고 있었다. 대체, 왜? 폭탄이 날아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내 손목을 붙잡아 오는 킹의 뜨겁고 큰 손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쿵!

쿵!

두 명분의 발걸음 소리가 기차 복도를 울렸지만, 바깥으로 나와 살펴보는 이는 없었다. 덜커덩거리며 달려가는 기차와 쿵쾅대며 앞으로 걸어가는 킹과 나의 발걸음 소리가 섞여 꽤나 폭력적이고 듣기 싫은 음을 만들어 냈다. 문 앞에 도착해서까지도 킹은 내 손목을 놓지 않았고, 거친 손길로 문을 열더니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폭력적인 손길을 생각했으나 꽤나 다정한 몸짓으로 말이다. 그리고 문을 꽉 닫고 날 앉히고는 바로 맞은 편에 주저앉았다.

킹의 무릎 끝과 내 무릎이 닿아 움직이지 않아도 덜컹대는 기차 탓에 서로의 무릎뼈를 두드렸다. 킹이 몸을 앞으로 숙여 그의 정수리가 내게 가까워지자, 나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그런 행동 따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킹이 다시금 손목을 강하게 붙잡더니 날 끌어당겼다. 그리고 코끝이 서로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중얼거렸다.

“하, 미치겠다. 정말. 너 때문에.”

한숨에는 꽤나 깊은 한탄이 담겨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미치긴 누가 미쳐. 내가 미칠 것 같은데. 위법행위를 저지르며 도망쳐야 했던 사람도 나고, 기차에서 뛰어내릴 뻔한 사람도 나다. 미칠 것 같은 사람은 나였다.

당황스러운 킹의 태도 속에서 한 가지 날 안도시키는 점은, 그가 나를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자세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다행히도 날 다치게 할 속셈은 아닌 듯했다. 교도소에 있을 때처럼 자신에게 아양 떨던 나를 기대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기차 칸에 있는 두 사람 중 초조하고 다급해 보이는 것은 외려 킹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나는 킹과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나친 권력을 가진 데다가 나는 그를 다치게 하는 것에 일조했다. 킹과 있으면 나는 어쨌든 납작 엎드려야 하는 처지였고,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야 하는 위치에 있어야만 했다. 그런 것은 피곤했고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킹은 꽤나 근심이 깊은 이처럼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드디어 허리를 꼿꼿하게 펴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퍽 굳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약자들이나 짓는 그런 표정을 말이다.

그리고 내 왼손을 가져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 안쪽과 과거의 상처가 남은 새끼손가락을 부드러이 매만졌다. 어찌나 약한 손길인지 내가 마치 세게 만지면 부서지는 연약한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킹의 행동은 지나치게 예상 밖이었기에 오히려 날 더 긴장시켰다. 목 뒤가 뻐근해질 정도여서 이런 대치를 더 이상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아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복수라도 하려고?”

“복수라…….”

킹이 어이없다는 듯 숨을 터트렸다. 그 웃음의 의미가 짐작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단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일까. 앞머리가 들썩일 정도로 웃던 킹은 이내 웃음을 싹 지우더니 입을 다물고 입술을 달싹였다. 초조하고 긴장된, 누군가의 발밑에 있는 자나 취할 법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킹은 참으로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결혼하자, 로터스.”

“미친 새끼.”

참지 못하고 불쑥 내질렀다. 그동안 내가 홍징을 떠나 있어서 단어를 잘못 이해한 거지? 요즘은 홍징에서 복수 대신에 결혼을 쓰는 거지? 그렇지? 하지만 킹의 얼굴은 원수를 대하는 것보다 연인을 대하는 것에 가까웠다. 정말 어이없게도 말이다. 머리라도 다친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킹은 나 때문에 크게 다쳤던 건 사실이었고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내 봤자 손해 볼 사람은 나였기에 날이 선 투로 되물었다.

“내가 왜?”

로맨틱한 레스토랑에서 반지를 내밀며 프러포즈를 하는 남자인 것처럼, 킹이 제법 근사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그 대상인 나는 감격해 우는 것이 아니라 예민한 자세로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킹이 내 손바닥에 손가락을 대고 움직였다.

“그야, 넌 내 거니까.”

그저 뜻 없는 움직임이라 생각했지만, 손바닥 감각에 집중하니 그가 쓰는 단어가 무엇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king’

어이가 없었다.

“난 네 것이 아니야.”

왼손 새끼손가락을 힘겹게 움직이며 말했다. 난 네 것이 아니야. 여전히 날 발아래에 두고 싶었더라면 약속을 잘 지켜야지. 더욱이 여긴 네가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교도소가 아니야. 말로 내뱉지 않아도 킹은 내 생각을 읽는 듯 날 말없이 바라보더니 강한 힘으로 내 왼손에 깍지를 껴 잡았다. 그리고 멋대로 내 손등에 입을 맞춘 후 꽤나 로맨틱한 얼굴과 말투로 협박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홍징에 살 거라면 나랑 결혼하는 게 좋을 거야. 널 로터스 미나콤으로 만들어 줄 수 있어. 돈도 권력도 함께 얻는 거지.”

킹의 괴이한 행동에 더 이상 어울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힘을 줘 손을 빼내자, 킹은 아쉽다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싫어. 난 다시 네 밑에서 네 눈치나 보며 네가 말하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살기 싫어.”

“그러니 내 것이 되라는 게 아니라 결혼하자는 거야. 네가 내 머리 위에서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아. 내가 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핥아 줄 수도 있지. 네가 원한다면.”

킹은 군림하는 사람이고 제 머리 위로 누군가 올라가려 한다면 가차 없이 끌어내릴 사람이다. 그런 킹이 도대체 나에게 왜?

“왜 그러는 건데?”

경계심을 지우지 못한 채 그를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내 시선에도 킹은 불편함을 표하긴커녕, 내 심기를 더 어지르고 싶지 않다는 듯 비틀게 입꼬리를 올려 대답했다.

“널 사랑하니까. 로터스.”

“미쳤구나?”

사랑이라니. 너무 웃겼다. 킹 미나콤이 사랑한다고? 날? 근래 들은 것 중 가장 웃겼다. 분위기에 맞지 않게 스탠딩 코미디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사랑? 그런 걸 알아?”

킹의 미간을 찌푸리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혼자 피식 웃고는 거친 말투로 답했다.

“널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솟구쳐. 널 죽이고 싶은 동시에 평생 내 곁에 가둬 두고 싶어. 그러다가 불쑥 네가 걱정돼. 네가 다쳤을까 봐, 죽었을까 봐. 네 생각만 하면 맥박이 빨라지고 돌아버릴 것 같은데, 이게 그러면 뭔데? 처음엔 너를 향한 분노라 생각했지, 널 생각하면 할수록 너에 대한 집착은 커져만 갔어. 그 감정을 정의하기엔 그딴 단어는 모자랐다고.

사랑? 나도 우스워. 그딴 걸 지껄이고 있는 내가. 그런데, 하지만 여기서 뛰어내리면서까지 날 떠나려는 네가 화가 나면서도 슬퍼. 이런 건 말이 안 되는 사랑이란 단어 말고 설명할 게 없어. 네 얼굴을 봤다고, 무사한 널 봤다고 지금 내 가슴이 얼마나 아릿한지 알아? 애새끼 때도 못 느끼던 간질대는 감정이 날 마구 방해한다고! 너 때문에 이런 게 화나는데, 그런데 네가 아직 귀엽고 사랑스러워. 넌 내게 거짓말을 일삼았지만 널 보는 것이 그 무엇보다 반가웠지. 이게 사랑이 아닌 거야? 난 도무지 모르겠어, 로터스. 이런 내 감정은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말을 내뱉는 킹의 얼굴은 본 적 없이 절절했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게 사랑을 토로하는 킹이 처음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이내, 어쩌면 내게 다행인 일은 아닌가 생각했다. 정말 우스운 말이지만 킹이 저렇게나 애절하게 날 사랑한다면, 이 관계에 우위를 점하는 것은 나 아닌가. 킹과 나 중 무릎을 꿇을 이도, 애원할 이도 모두 킹이 되는 거였다. 나는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도 없었고 그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의 돈도 권력도 말이다. 그것은 모두 내가 원한 것이 아닌, 킹이 기꺼이 내어준 것이겠지.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킹이라는 맹수를 저렇게 약하게 만들 정도라면 내게는 이로운 것이었다. 킹과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다면 나는 그의 감정을 이용해야만 했다. 교활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다리를 꼬자, 내 발끝에 닿아 있던 킹의 시선이 함께 움직였다. 반질거리는 에나멜 구두에 킹의 눈빛이 반사될 듯했다. 꽤나 열렬했다. 씨발, 이제 나는 무사할 수 있다. 참지 못하고 작게 웃자 킹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으니 킹은 기갈난 사람처럼 뺨을 갖다 댔다. 킹도 사람이어서 볼은 보드랍고 연약했다. 상을 주듯 그 피부를 엄지로 문질렀고 킹은 놓치기 싫다는 듯 더욱 가까이 얼굴을 맞붙였다. 이게 지금, 킹과 나의 관계였다. 베푸는 것은 나였고 갈구하는 것은 킹이다.

아둔하게도, 사랑이란 감정 때문에 제가 가진 위치를 내던지고 자신이 아래를 점한 이 관계를 킹은 자청하고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은 킹이, 가진 것이라고는 내 몸 하나뿐인 나에게 무릎을 꿇고 비는 이 관계. 내가 의도한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킹과 맺은 그 어떤 관계보다 나았다. 나는 여유 있는 미소를 꾸며내려 애썼다. 베푸는 것이 내 쪽인 것을 분명히 해야만 했다.

“아아. 사랑. 그래, 맞아. 킹. 그게 사랑이겠지. 그렇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 없어서 그게 사랑인지 정확히는 몰라. 난 연애도 모르지. 내가 아는 건 섹스뿐이야. 그러니 킹. 그 입으로 내게 봉사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 내가 조금,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킹의 입술을 엄지로 꾹 눌러 문지르자 킹은 찡그린 얼굴로 비틀게 미소 지었다. 이 잘생긴 얼굴로 사랑을 속삭이면, 그것이 거짓이라도 넘어갈 자들이 널려 있을 텐데, 가엾은 킹은 사랑을 내게 낭비하고 있었다. 사실, 가엾지 않다. 킹의 절박함이 내게는 너무 좋은 기회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신의 큰 손바닥으로 내 손등을 감싸, 제 손에 가뒀다. 더웠다. 그리고 내 손에 제 뺨을 아이처럼 비볐다. 부드러운 킹의 뺨 피부가 내 손등을 스쳤다. 킹과 어울리지 않게 참으로 보드랍고 연약한 피부였다. 킹은 제 뺨처럼 부드럽고,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그래, 내 사랑. 뭘 원해?”

킹의 뺨에서 손을 떼어 내자, 엄마를 잃은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킹 미나콤이 말이다! 킹은 안달 난 얼굴로 몸을 일으키더니 내게로 숙여왔다. 킹의 거대한 몸에서 생겨난 그림자가 내 몸을 덮었지만 이제 나는 두렵지 않았다. 저 넓고 검은 걸 아주 작게 접어 입 안으로 꿀꺽 삼킨대도 모난 곳이 없어지게 제 몸을 웅크리겠지.

사랑이란 그렇게 어리석은 것 아닌가. 그래서 애인이 딴 놈과 낳은 아이를 데려다 키우고, 모든 걸 거짓말하고 멋대로 죽어버린 이를 그리워하고, 모든 걸 속이고 기만한 자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되려 털끝 하나라도 다칠까 걱정하는 거겠지. 다행히 나는 그런 미련한 감정 따위 몰랐다. 나는 다리를 벌리고 킹에게 거칠게 말했다.

“내 좆이라도 빨아 보든가.”

저자를 꿇려 그 입에 내 좆을 처박으며 이 관계의 우위는 나라고, 더 이상 날 맘대로 휘두를 생각은 말라고 선언해야만 했다. 킹이 입매를 비틀게 올리며 미소 지었다.

“구멍은 어쩌고? 손가락이나 좆으로 찔러만 줘도 자지러지면서.”

“손이랑 좆 잘 쓰는 건 이미 아니까, 입이 어떤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

그가 전과 같은 태도를 취하려 애쓴다 하더라도 엎드려 배를 드러낸 지금 와서는 늦은 것이었다. 내가 과거 킹 앞에서 끊임없이 눈치를 보았던 것과 비슷한 얼굴을 내 앞에 선 킹이 지었다. 킹은 분명 고급일 슈트가 마구 구겨지고 바닥에 닿는 걸 신경 쓰지 않고 내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 킹의 굵고 긴 다리를 휘감은 바지 천이 팽팽해졌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은 킹은 처음이었다. 반대의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그리고 킹은 내 바지 버클을 푼 후 바지 지퍼를 내렸다.

지이익.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크게 방 안을 채웠다. 킹이 내 속옷을 내리지 않고 천 위로 입을 붙였다. 습한 입이 속옷 천을 적시며 내 좆을 살며시 자극하고 있었다.

“하…….”

오랜만에 받는 자극이었다. 자위는 한 적이 있었지만 다른 이와 섹스를 한 적은 없었다. 탄식과도 같은 내 숨소리에 킹이 작게 웃었고 그 탓에 내 좆에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킹은 내 속옷을 길게 혀로 핥아 올렸다. 천 때문에 자극이 둔감하게 느껴져 감질났다. 나는 킹의 잘 정리된 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그러자 킹이 작게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치 고양이처럼.

“잘 좀 해 봐.”

타박하듯 머리를 잡아당기자, 킹이 작게 웃더니 대답 대신 내 속옷을 내렸다. 그리고 맨살을 혀로 핥아 올렸다. 축축하고 뜨거운 킹의 입에 내 성기가 갇혔다. 아아, 열렬한 구애였다. 나는 킹의 머리카락을 강하게 쥐었다. 아플 게 분명했을 텐데, 킹은 그것이 더욱 흥분되는지 내 좆을 혀로 더욱 열심히 빨았다.

“하아, 그동안 연습했어?”

내 귀두 가운데 구멍을 찌르듯 혀로 문지른 킹이 내 귀두 끝을 넓게 핥더니 대답했다.

“난 뭐든 잘해.”

읍소하는 사람처럼 자기과시를 하는 꼴이, 뭐 꽤나 봐줄 만해서 칭찬하듯 귓바퀴를 넓게 문질러주자 킹은 다시 입을 벌려 내 좆을 머금었다. 그리고 곧바로 내 귀두를 입술로 문 다음 내 여린 살을 열심히 빨고 핥았다. 킹의 잘생긴 볼이 홀쭉해졌고 나는 킹의 귀를 매만졌다. 킹의 왼쪽 귀 뒤를 검지와 중지로 꾹꾹 누르며 접었다. 그런데 귀 뒤에 얼룩이 묻어 있었다. 점인가 싶었지만 킹은 얼굴은 물론 그 근처에도 점이 없었다. 킹의 얼굴을 살짝 옆으로 밀자 내 좆을 물던 킹의 입이 움직였고 그 덕에 좆이 문질러져 나는 약하게 신음을 터트렸다.

“하윽, 하아. 귀 뒤에 뭐야?”

킹은 순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귀 뒤를 내게 보여줬다. 거기엔 문신이 있었다. 내 손목에 있는 글씨와 같은 필체였다.

‘Lotus Lee’

킹은 나보다 키가 컸기에 킹을 내려다보는 일이 없어 몰랐다.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문신이 있기는 했다.

“나는 손목인데 너는 겨우 귀 뒤야?”

그 글씨를 지우듯 문지르자 킹이 날 올려 보았다. 답지 않게 순하고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원하면 이마에 박을게. 볼도 좋아. 둘 다 할까?”

“빨기나 해. 입 구멍을 잘 쓰면 뭐, 허락해줄 수도 있고.”

킹의 머리를 잡아 내 좆 쪽으로 눌렀고 킹도 내 손길을 순순히 따르며 다시 내 성기를 빨기 시작했다. 그리고 킹은 긴 팔을 내 상체로 올리더니 보지도 않고 내 셔츠의 단추를 한 손으로 풀어냈다. 킹은 내 셔츠를 풀면서 내 귀두 아래 옴폭한 부분을 문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아, 하아.”

내 신음 소리와 킹이 내 좆을 빠는 젖은 소리를 배경으로, 킹이 내 단추를 푸는 미약한 소리가 쌓였다. 그러나 킹이 내 단추를 모두 풀어낸 탓에 그 약한 소리는 이내 끊기고 말았다. 배를 문지르는 뜨거운 킹의 손과 예민한 부위를 빨아오는 킹의 혀 때문에 배 안이 홧홧했다.

킹의 손이 내 가슴을 강하게 쥐어 가슴 근육이 잔뜩 찌그러졌다. 그리고 킹은 흥분해 튀어나온 내 유두를 손끝으로 간질이고는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내 좆을 뽑아낼 듯 빨아냈다.

“하윽, 하아. 음…….”

킹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킹의 혀와 손길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냈다. 킹은 내 좆을 입에서 뱉어내더니 몸을 일으켜 이번에는 내 유두를 물었다. 킹의 머리칼이 턱 끝을 간지럽혔다. 킹은 혀 전체로 내 유두를 핥고는 입술을 모아 젖을 빠는 어린아이처럼 내 유두를 빨아올렸다. 그리고 손으론 내 좆을 훑는 걸 잊지 않았다.

“이렇게 좋아 죽을 거면서 왜 도망쳤어, 응? 더 잘 빨아주는 새끼라도 만났나? 어?”

킹은 분명 내가 이제껏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걸 알아냈을 거면서도 저렇게 말했다. 나는 킹의 목 뒤를 가볍게 매만지며 답했다.

“난 도망친 적 없다니까. 합법적 출소이지.”

킹은 듣기 싫다는 듯 키스를 하며 말을 멈추게 했다. 떼어 낼까 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킹의 혀가 내 입술을 핥더니, 틈을 벌려 들어오며 안을 헤집었다. 킹의 어깨로 팔을 올리고 고개를 꺾어 오랜만에 하는 너무나 익숙한 행위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임에도 킹은 생각보다 짧게 키스를 하고는 다시 내 좆으로 입을 붙였다. 그리고 내 불알을 만지며 머리를 위아래로 열심히 움직였다.

“흐윽!”

곧 사정할 것 같았기에 벗어날 수 없이, 킹의 머리를 꽉 눌렀다. 킹이 잔기침을 내뱉는 게 느껴졌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목구멍 깊은 곳에 좆을 처박아 놓고 꽤나 오랫동안 사정했다.

“하아, 윽.”

킹의 정수리를 한참이나 누르며 몸을 잘게 떨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 낸 후에야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큭, 쿨럭…!”

킹이 거친 기침을 쏟으며 성기를 뱉어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나온 액체는 투명한 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 엄지로 입술에 묻은 정액을 훔쳐냈다. 나머지는 이미 삼킨 모양이었다. 킹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씨발, 진하네.”

몸을 일으킨 킹은 다시금 내게 키스했다. 내 정액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이 기껍지는 않았지만 난 꽤나 너그러운 사람이라 달래 주듯 한참 킹의 혀를 빨아주었다. 그리고 그 불쾌한 감각은 킹의 침과 혀에 씻겨 사라졌다.

* * *

킹이 풀어낸 내 시계를 주워 다시 착용했다. 차가운 금속 재질이 손목 안쪽에 닿자, 킹의 이름이 금세 사라졌다. 아쉽다는 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오늘 벌써 몇 개비를 피우는지. 담뱃불을 붙이지 않고 문 채 앞니로 필터를 씹어 무는데 킹이 물어왔다.

“그래서, 합격이야?”

내 좁은 침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킹을 바라보았다. 담배를 입술에서 빼내 그를 말없이 바라보니 킹은 웃음 지었다. 약자나 지을 법한 그런 표정 말이다.

“좆 잘 빤다고 결혼했으면, 남창이랑 결혼했지.”

무심히 대꾸하자 킹은 내 턱을 붙잡아 내 시선과 마주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네 전속 남창이라면 난 상관없어.”

“킹 미나콤을 남창으로 부릴 만큼 돈이 많지 않아. 난.”

손에 있던 담배를 킹의 입에 물렸다. 킹은 내 치아 자국이 난 담배가 나인 것처럼 어금니로 깨물어 뭉개 버리고는 말했다.

“돈도 내가 줄게.”

돈 따위야 넘치게 많다는 뜻 같았다. 아아, 부러워라.

“그럼 내가 남창이잖아.”

담배 한 개비를 다시 꺼내 물어 이번에는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잔뜩 들이마시니 니코틴이 내 몸 안으로 퍼졌다. 정액을 쏟아내고 담배를 피우자 나른했다. 킹은 내 옆 턱을 검지로 약하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유혹하듯 속삭였다. 하와를 꾀어낸 뱀도 이보다 매혹적인 목소리를 낼 리 없었다.

“아니지, 기꺼이 널 위해 봉사할 기회를 내게 주면, 넌 대가로 돈 대신 다른 걸 주면 돼.”

턱밑을 간질이는 킹을 내버려 두며, 되려 더 편하게 만지라고 턱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킹의 손가락이 연약한 턱밑 아래 피부를 간질였다. 턱 끝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뭐를?”

연기를 킹의 얼굴로 뿜자, 킹은 내가 뱉은 희뿌연 연기를 얼굴로 온전히 맞으며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흠, 사랑?”

사랑이라. 참으로 과하게 사랑스러운 어감이다. 킹은 자신이 말을 하고도 웃긴지 웃었다. 질 나쁜 농담을 한 것처럼 말이다. 내 귀에 맞붙은 킹의 입술 때문에, 귀에 진동과 함께 떨리는 숨이 느껴졌다. 귀 안으로 들어오는 숨은 마치 뇌까지 닿을 것 같았으나 독한 니코틴이 이미 뇌를 잠식한 상태였다. 킹은 내게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멋대로 본 내 의료기록 때문인 걸까. 사람들은 공감 능력을 느끼는 것과 감정을 느끼는 것을 잘 구별하지 못했다.

물론 사랑은 이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들 하니, 사랑은 내 것이 아닐지 몰랐다. 아니, 나는 솔직히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는다. 내가 유일하게 애틋한 마음을 가졌던 이는 엄마였다.

엄마는 날 길렀고 내게 헌신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주려 했다. 그런 엄마에게 애틋한 맘을 품는 건 당연했지만, 킹이 말하는 ‘사랑’과 달랐다. 킹이 말하는 ‘사랑’을 난 돌려줄 수 없다. 그럴 생각도 없고. 킹이 내게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 건 다행인 일이나, 킹처럼 욕심 많은 이가 그렇게 갖고 싶은 걸 욕심내지 않을 리 없었다. 지금은 단념한 듯 보여도 어느새 풍선처럼 제 욕심을 금방 부풀리겠지.

선로를 달리는 기차가 덜컹 이는 소리를 냈다. 그것 외엔 이 새벽을 채울 소리가 더 이상 새어 나가지 않았다. 옅은 담배 냄새와 페퍼민트 냄새만이 시끄러운 기차 소리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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