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스 리 3
로터스 리
3
파인애플덤플링
목차
Chapter. 1
Chapter. 2
Chapter. 3
Chapter. 4
Chapter. 5
Chapter. 1
내 이름은 로터스 리. 말 그대로 연꽃이라는 뜻이다. 엄마가 분홍 연꽃이 나온 태몽을 꾸고 지은 이름이지. 자두나무를 뜻하는 내 성, 리李는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에서 온 성인지 중국에서 온 성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홍징 사람이고 엄마의 아들이지. 어디서 온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 사실이면 됐다.
아빠는, 엄마가 날 임신한 사실을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교통사고였다. 엄마와 결혼한 적도 없고, 엄마에게 모든 걸 거짓말했던 사람이라 아빠라는 말도 민망하다. 그저 정자 제공자일 뿐. 그래서 엄마가 혼자 날 키우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돌아가셨다. 암 때문이었다. 엄마가 태어나고 자란 죽은 곳, 그리고 내가 태어나 이제껏 살았던 곳은 하이투다. 홍징의 주요 도시이자 유명관광지인 하이투. 그러나 난 그곳을 떠나온 지 3년이 넘었다.
나는 억울한 일로 교도소를 갔었다. 남의 가방을 들어주는 것도 교도소에 갈 일이라는 건 엄마가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엄마는 되려 그 반대를 가르쳤지. 그러나 그 가방에 마약이 있을 줄 엄마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휴 사토라는 짜증 나는 새끼에게 손가락이 잘렸고 그 때문은 아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출소했다. 그리고 지독한 놈에게 찍혔다. 바로 킹 미나콤에게.
나와 반년 정도 떡 쳤던 사이이자 내 고향 하이투는 물론, 홍징 전체를 주름잡는 사람. 그리고 내게 쓸데없이 집착하던 이. 나는 그 무시무시한 놈의 뒤통수를 때리고 교도소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망은 아니었다. 합법적인 출소였으니.
나는 아직 젊었기에 더 살고 싶었다. 그래서 출소 후 당장 가짜 신분과 여권을 구해, 의료비가 저렴하고 의료시설이 잘 갖춰진 한국으로 날랐다. 그곳에서 1년간, 잘린 손가락을 치료하며 외국어 학원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했다. 외국어 학원은 영어와 중국어도 되는 나를 최저 시급에 부려먹는다는 것에 무척 흡족해했다.
그러나 한국의 더러운 공기와 학원 원장의 도둑놈 심보를 견디지 못한 나는, 새 신분을 구해 대만으로 가 1년을 살았고 그다음은 싱가포르에서 1년, 그리고 지금, 몰타에서 4달 동안 지내는 중이다.
영어권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고 싶지만, 총기가 허용되는 미국은 싫고 유럽에 살아 보고 싶으나 영국의 구린 날씨가 싫은 이들이 몰타로 몰려들었다. 나는 그곳의 어학 연수원에서 일 하는 중이다. 중국 학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기에 그들은 중국어와 영어에 원어민인 나를 고용했다.
몰타는 작은 섬이었고,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심심하긴 해도 나름 지낼 만했고 더욱이 홍징과 멀어 심적으로 안정이 됐다. 같이 일하는 남자, 빌이 끊임없이 홍징 얘기를 꺼내지만 않아도 나는 까맣게 홍징을 잊고 살았을 텐데.
“홍징, 그중에 하이투가 아시아 중 가장 최고의 도시야! 정말 최고였어!”
평생 모은 돈을 털어 하이투로 2주간 여행을 다녀온 빌은, 돌아와서는 잔뜩 신나 하이투에 대한 찬양을 쏟아냈다. 하이투가 좋기는 해도 유럽에서 나고 자란 백인 남자에게 저 정도로 좋지는 않을 텐데, 약이라도 했나 보다. 하이투에서 다위가 파는 약은 질이 좋다고 알려져있어 많이들 약을 하러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마약이 금지되어 있는 국적이라 할지라도, 고국으로 돌아가 처벌받을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됐다. 다위가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안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나 약을 하고 온 게 분명한 빌은 은근슬쩍 나를 힐끔댔다. 아마 내가 여기에 있는 유일한 아시안인 탓인 듯했다.
“그 다니엘은 어디 사람이라고 했죠?”
빌이 눈치를 보며 내게 물었다. 다니엘이 바로 나다. 여기에서 내 이름은 다니엘 왕이다. 한국에서는 아담 장, 대만에서는 에릭 자오, 싱가포르에서는 유진 양이었다. 세 개의 이름을 거쳐 다니엘이 되었다.
“저는 싱가포르요.”
빌에게 살짝 웃으며 답해줬다. 빌이 좋아서는 아니다. 그 미소는 ‘적당히 하자.’의 의미였다. 빌은 좋아할 수 없는 남자였다. 왜냐하면, 일단 못생겼다.
그리고 빌은 전형적인 백인 남자로, 얼굴이 새빨갰고 아시아가 대륙이 아니라 나라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주 틀에 박힌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싱가포르라 답하든 태국이라 답하든 빌은 같은 곳인 줄 알고 매번 “아아 그렇지!”를 외쳐 댈 것이다.
나는 입으로는 웃으며 그를 밀어냈지만 빌은 눈치 없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여행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빌은 오히려 나를 경계했지 저렇게 친근한 척 다가오지 않았다. 내게 뭐 얻을 것이 있나 생각해 봐도 나는 가진 것이 적었다. 빌이 의심스러운 미소를 장착하며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근데, 보면 볼수록 다니엘은 참 잘생겼어요. 혹시, 애인 있어요?”
빌의 진초록 눈알이 내 얼굴 이곳저곳을 스쳤다. 설마 수작을 거는 건가? 몸을 굳히며 뒷걸음질 쳤으나 빌은 전형적인 이성애자였기에 딱히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꿍꿍이가 대체 뭔지 궁금했지만 내가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시아로 여행을 다녀왔더니 갑자기 끓어오르는 오리엔탈리즘을 주체할 수 없어 아시안이랑 친목이라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킹이 말했던 대로, 젖살이 아직 남아있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볼은 푹 꺼져 갸름해 보였다. 23살 때와 좀 다른 얼굴이긴 하지만 난 여전히 잘생겼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더욱이 아시안이 적은 유럽에서는 더. 젊은 아시안이 유럽 구석까지 와 일을 하는 게 의아한지 내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도망치는 것도 참 힘들다. 나는 왼손에 찬 시계를 슬쩍 내려다보며 바쁜 척을 했다. 은색 메탈 시곗줄 사이로 살에 박힌 검정 얼룩이 보였다.
“음, 저 이혼했어요. 4년 됐고요. 그래도 아직 많이 아프네요. 더 이상 묻지는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겉옷을 챙겨 빌이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하게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겉옷의 주머니가 볼록한 걸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이혼했다고 하면 더 꼬치꼬치 캐물을까? 그래도 애인 언제 사귀냐는 말은 안 하겠지.
외진 곳에 도착한 후에야 겉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갑을 여니 담배가 몇 개비 남아 있지 않았다. 흠, 사둔 담배가 더 이상 없는데. 아껴 피우다가 집에 가는 길에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중 하나를 집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하아.”
건조한 담배로 금방 불이 옮겨붙어, 뿌연 흰 연기를 만들어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예전엔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지만 세상 사는 게 너무 힘들다 보니 뭐라도 붙들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은 마시면 맛도 없는 데다가 정신을 잃어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마시지 않았고 대체로 간편한 담배를 피웠다. 가끔 대마를 피울 때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약은 하지 않았다. 삶이 고단할 때마다 니코틴을 찾다 보니 어느새 가장 독한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담배와 대마. 3년 반 전이 생각났다.
마약을 팔면서도 끔찍하게도 대마를 싫어했고, 골초였으나 점차 담배를 줄이던 킹. 킹은 아직도 담배를 피울까? 담배나 피우며 머리를 식혔으면 좋겠다. 아니면 약에 절어서 폐인이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킹은 약을 하지 않았다. 이참에 시작해도 좋으련만. 날 찾아다니려나. 그렇지만 벌써 3년 반이 흘렀다. 킹이 그사이에 출소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러나 킹은 날 찾기에는 너무 공사다망했다. 다양에 카지노가 있는 새 호텔을 짓는다고 들었다. 휴 사토가 이미 큰 카지노 호텔을 운영하고 있고 사토 가의 본거지인 다양에 말이다. 그런 다양에 카지노 호텔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이미 휴 사토가 지역에서 힘과 돈을 깨나 쓰는 자들과 결탁해 꾸린 것이 골든 디거니까.
휴 사토는 3년 전 거액의 비자금을 숨겼다는 의혹을 용케 피해갔다. 그 거액으로 똑똑한 이들을 이용한 덕분이겠지. 그래서 휴 사토는 탈세로만 받은 형을 다 살고(엄연히 말해서 다 살지는 않았다. 좀 더 일찍 나왔지.) 최근 출소해 전처럼 연예인인 양 스포트라이트를 즐겼다. 그래서 홍징의 인터넷 페이지를 들어갈 때마다 사토의 얼굴이 떠서 괴로웠다. 내 손가락을 자른 놈이기도 했고 내 미감에도 맞지 않았다. 차라리 킹이 저러고 다녔으면 보기라도 좋았을 거다.
하여튼, 킹이 설마 휴 사토의 지역인 다양을 공격적으로 파고드는 게 내 탓인가 싶었다. 휴 사토가 내 손가락을 잘라냈고 또 내가 ‘도망’칠 수 있게(휴 사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찔렀으니까. 그렇지만 킹의 행보를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킹은 사업 말고도 여러 일로 바빴다. 교도소에 있던 게 킹에게는 휴가이지 않을까 싶었다.
킹은 완다 미나콤과 함께 대선 주자인 린 오캄포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물론 겉으로 돕지는 않았지만 킹의 행적을 좇다 보면 금세 알 수 있었다. 린 오캄포는 완다 미나콤의 오랜 로비 대상으로, 최근 홍징에서 동성혼 법제화를 이룬 주역이자 검사 출신인, 현 하이투의 시장이다.
지금 홍징은 대선까지 2년이 남은 상황이었고 현 대통령은 연임한 후 날로 지지율이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여당의 힘 또한 약해진 터라 야당에서 다음 대권 주자들이 이야기됐는데 가장 유력한 이가 린 오캄포와 리암 카야노였다. 특히 리암 카야노는 휴 사토의 외삼촌이었고 당연하게도 휴 사토는 그를 지지했다.
“아.”
잠시 킹 생각을 하다 보니 담배 한 개비가 어느새 닳아 있었다. 빨간 불씨가 손가락을 위협하기 직전이었다. 그 담배를 벽에 비벼 끄고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흰 담배 기둥은, 굵기도 색도 달랐지만, 마치 3년 반 전 잘린 내 손가락 같았다. 내 새끼손가락은 다시 내 몸뚱이에 붙어 있지만 때때로 나는 그때의 공포와 상실을 느꼈다.
재활 훈련을 받았으나, 새끼손가락은 전처럼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탓에 음료를 마실 때 귀부인처럼 새끼손가락을 들고 마셨고, 키보드를 쓸 때도 새끼손가락보다 넷째 손가락을 쓰는 걸 익혔다.
아예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전과 같지는 않다. 매번 확실하게 느끼니까. 기분이 더러워져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들려고 했지만 날 부르는 소리에 그럴 수 없었다.
“다니엘! 에이미가 찾아요!”
하. 귀찮은 손님이 왔네. 반쯤 꺼냈던 담배를 담뱃갑 안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담배 냄새를 대강 털어낸 후 그린 듯한 웃음을 얼굴에 장착하고는 안으로 향했다.
* * *
“다니엘! 오랜만이에요.”
에이미는 이곳에 온 지 1주 정도 되는 학생이다. 내 앞에 서 있는, 탈색해 주황을 염색한 단발머리의 중국 소녀가 바로 에이미다. 에이미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소녀로, 수업을 가는 것보다 여기 들르는 걸 더 즐긴다. 그 에이미가 날 보며 웃었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우리는 바로 어제 봤다. 에이미, 영어 공부를 더 해야겠어.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에이미에게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러네요, 에이미. 이번엔 무슨 일이에요?”
에이미가 품에 안고 있는 꽃다발을 못 본 척하며 물었다. 설마, 내 거인가? 그럼 조금 피곤해질 것 같은데. 그러나, 설마가 맞는지 에이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저……. 별거는 아니고요,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다고 선물 가져왔어요.”
에이미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꽃 선물은 처음 받아 본다. 졸업식 때도 엄마는 꽃을 가져오지 않았다. 차라리 그 돈으로 먹을 걸 사줬다. 나도 그게 나았다.
“에이미,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고마워요.”
거절하면 더 귀찮아질까 봐 웃는 낯으로 에이미에게서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채도 높은 노란색과 주황색이 섞여 있는 그것은, 처음 보는 꽃이었는데 국화처럼 가느다란 꽃잎이 가득 나 풍성했다. 치어리더가 흔드는 폼폼 같았다. 에이미는 꽃을 전해주는 게 목적이었는지 내가 꽃을 받아 들자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소리치며 뛰쳐나갔다.
“안녕히 계세요!”
문에 달린 벨이 경쾌하게 딸랑! 소리를 내며 에이미의 퇴장을 알려 왔다. 동료인 라나는 내게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인기 많아서 좋겠어요? 저 친구가 중국에서 한가락 하는 곳 딸이라고 하던데? 쓰는 돈이랑 걸치고 다니는 옷가지들 가격이 장난 아니래.”
라나는 나와 또래인 여성으로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연애 관련된 일에. 특히 나 같이 생겨 놓고 만나는 이가 없는 게 이상하다며,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이혼을 했다고 말해도 새로운 사람으로 잊으라고 했다. 그렇지만 정작 본인의 연애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사람만 봐도 치를 떨 정도였다.
에이미네 집안이 한가락 하든 말든. 나는 이곳에서 1년을 채우면 떠날 예정이었고, 그때까지는 약 8개월 정도가 남아 있었다. 사무실에 꽃병이 없어 적당한 빈 병을 골라 씻고 물을 채운 다음 꽃을 꽂았다. 그리고 자리에 두자 칙칙한 모노 톤에 생뚱맞은 고채도가 끼어들었다. 흠,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저 꽃은 금방 죽을 거니까. 걸맞지 않은 잠깐의 화려함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오늘도 일은 지루하게 흘러갔고 퇴근 시간이 되자 라나와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는 라나가 먼저 나갔지만, 오늘은 내가 먼저였다. 얼른 돌아가 씻고 싶다고 생각하다 담배 사는 걸 깜빡할 뻔했다. 몇 걸음 돌아가, 담배를 사고 얼른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몇 개월 동안 살던 집에 도착했다. 집. 집이라는 의미보다 임시거처라는 말이 적당하겠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당장 욕실로 향해 몸을 깨끗하게 씻기 시작했다. 적당히 따스한 물은 몸을 기분 좋게 데워줬고 인공 과일 향(믹스베리 향이었는데 사탕처럼 과하게 단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향기 자체는 괜찮았다.)이 나는 목욕제품도 나쁘지 않았다. 뜨거운 물 아래 한참 서 있다가 볼이 달아올랐을 때쯤 허리에 대강 수건을 둘러 나왔다.
그리고 물을 대강 닦으며 옷을 다 입기도 전에, 대마를 집었다. 대마는 종이에 잘 말린 채, 담배와 섞여 놓여 있었으나 어느 것이 대마이고 어느 것이 담배인지, 눈 감고도 구별할 수 있다. 잘 말리지 않은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진 물에 건조한 풀잎이 젖어 조금 축축해졌다. 그러나 끝은 아직도 건조해 다행히 불이 잘 옮겨붙었다. 그러자 킹이 진저리치게 싫어하던 그 냄새가 방을 채웠다. 몽롱한 감각이 몸 안에 파고들어 날 지배했다. 그러나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주 잠깐 근심을 잊을 수 있는 정도였다. 딱 그 정도.
샤워를 하느라 왼쪽 손목이 드러나, 잊고 싶은 이름을 잊을 수 없음에 불쾌해하며 피부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King’
킹은 왜 하필 이름도 킹이어서. 문신을 내놓고 다니면 마치 내가 왕이라고 외치는 허세 가득한 사람 같았다. 다른 문신으로 덮는 것이나 문신 제거 수술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픈 게 너무 싫었기에 가장 아프지 않은 방법을 택했다. 문신을 가리는 것 말이다. 평소에 일할 때는 시계를 착용했고, 캐주얼한 상황에선 편하게 손목 밴드나 우레탄 소재 손목시계를 꼈다. 그전까지 시계엔 관심을 가져본 적 없었는데 상황과 때에 맞는 시계를 하나하나 구비하다 보니 여럿이 되었다. 모두 비싼 건 아니었고 적당히 구색만 맞출 정도였다.
대마를 피우는 동안에도 왼손의 새끼손가락은 주인의 의지를 잊고 부끄러움도 모른 채, 위를 향하고 있었다. 제대로 관리를 못 했기에 흉터가 남아 있었지만, 다행히 어지러운 손 주름 사이에 반절은 섞여들었다. 그러나 손등뼈 위쪽과 네 번째 손가락의, 잘리다가 만 부분에는 흉터가 분명히 보였고 그래서 가끔 밴드를 붙이고 다녔다. 유난히 내게 관심을 쏟는 사람이 있을 때. 내가 일하는 공간에는 라나가 있었고 에이미가 찾아왔기에 오늘도 밴드를 붙여야만 했다. 샤워를 했음에도 손가락에는 끈적한 접착제가 남아 있었다.
대마를 입술로 물어 고정하고 왼손의 새끼손가락과 약지에 묻은 접착제를 떼어 냈다. 살과 함께 딸려 올라오다가 이내 자신의 몸만 털어낸 접착제는 손톱에 고집스럽게 옮겨 묻어 있었다. 휴지로 그것을 닦아 내며 대마를 깊게 빨아들였다. 몸통과 폐가 부풀었고 몸 안에 담긴 대마 연기가 내 뇌와 혈관 곳곳을 스치며 나른한 자극을 전해왔다.
아아. 오늘도 무사했고 오늘도 들키지 않았으며 오늘도 살아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봤던, 미친 듯이 흉포한 킹의 웃음을 잠시 기억해 낸 후 몸을 떨었다.
* * *
“하윽…….”
이불 밖으로 손을 어렵사리 꺼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6시 3분. 출근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피곤했지만 더 잤다가는 점심때나 일어날 게 분명했다. 겨우 힘을 줘 몸을 일으켰다. 으으. 몸이 뻐근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대마를 피우고 잤더니 머리가 은은하게 아프고 지끈거렸다. 한 개비만 피운 게 아니라 연달아 세 개비는 피웠다. 담배도 한 번에 세 개비는 잘 피우지 않았는데. 몸에 받지 않는 대마를 그렇게 피워 대니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그렇지만 술은 숙취가 더 심한 데다가 맛대가리도 없어서 가끔 대마를 피우는 편이 나았다. 연기에는 맛이 없으니까. 그래도 그나마 잡념들이 휘발되어 편했다.
겨우겨우 화장실로 가 대강 세수를 한 뒤 칫솔을 물었다. 칫솔은 제법 비싼 것을 샀다. 교도소에서 질 나쁜 걸 잠깐 써보니 칫솔에 돈을 들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다. 아, 그리고 치약도.
느릿하게 이를 닦으며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신선하고 미지근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와 얇은 홑이불과 커튼을 건드렸다. 공기가 완전히 통할 수 있게 팔락거리는 커튼을 잡아 고정했다. 양칫물을 뱉고 다시 방으로 나오니, 퀴퀴하던 냄새가 꽤 사라져있었다. 아침이네. 오늘도 무사히 혼자서 아침을 맞았다.
옷을 챙겨 입고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확실히 전보다 살이 빠졌고 그래서 전보다 날카로워 보였으며 전보다는 어른 같았다. 전보다 어른이긴 하지. 하여튼, 그래서 20대 초에 나이가 들며 생겼던 쌍꺼풀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골격이 드러나 전보다 코가 높고 단단해 보였다. 아직도 킹이 말한 보조개는 모르겠다. 뭔가 파인 듯했지만 킹이 말한 것처럼 유의미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주름으로만 보였다. 살이 빠지며 사라진 걸 수도 있지. 아니면 내가 웃을 일이 너무 없었을지 모른다.
살짝 색을 밝혀 염색한 머리와 바뀐 눈썹 모양 탓에 전과 인상이 전체적으로 달라 보였다. 얼굴이 달라진 건 아니지만, 전에 알던 사람들은 내가 로터스 리인지 아니면 그저 닮은 사람인지 고민할 정도는 됐다. 만약 내게 로터스 리이냐 물으면, 나는 미소 지으며 사람 잘못 봤다고 하겠지.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내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한 병 꺼내 곧바로 모두 들이마셔 삼켰다. 텁텁한 목에 물이 들어가자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양치를 하고 환기를 한 보람없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어제 오랜만에 킹이 생각난 이후로 부쩍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킹 때문에 불안해 온 탓에 아침부터 니코틴의 힘이 필요했다.
식탁과 책상을 겸해 쓰는 곳 의자에 앉아 밥 대신 담배를 피웠다. 배가 헛헛했다. 적당히 출근길에 빵을 사다 요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 밖으로 나섰다.
* * *
직장 근처에 작은 빵집이 있다. 작지만 깨끗했고,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빵을 굽는 부지런한 곳이다. 지날 때마다 유혹적으로 풍겨오는 빵 냄새에 져 번번이 들어가고 말았는데, 오늘도 빵집의 문을 열자 빵집의 주인 미야가 늘 그렇듯 웃으며 날 반겼다.
“안녕, 댄. 커피 만들어 뒀어.”
댄은 내 애칭이다. 다니엘을 댄이라 줄여 부르는 이는 이 섬에서 미야가 유일했다. 미야와 그 정도로 친하냐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미야가 멋대로 불렀고 나도 제재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세 음절이고 댄은 한 음절이니, 댄 쪽이 더 합리적이고 경제적이었다.
미야가 테이크아웃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내밀었다. 주로 설탕도 시럽도 없는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셨지만, 아침엔 아몬드 밀크나 두유를 살짝 섞어 마셨다.
미야가 내미는 커피도 아몬드 밀크가 살짝 섞인, 라테로 치기도 그렇다고 해서 아메리카노라 부르기도 애매한 것이었다. 미야는 직접 커피를 내렸고 그 솜씨가 훌륭했다. 그래서 커피 맛을 잘 모르는 나도 미야의 커피가 맛있다는 건 알았다.
“미야. 고마워. 지금 적당히 식은 빵 뭐 있어?”
가게를 열자마자 온 것이라, 아직 뜨거운 빵들은 식힘망 위에 올라가 있어 진열되기 전이었고 오븐은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었다. 미야가 만든 번이 맛있는데 아직 굽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쉬웠지만 미야의 빵은 모두 맛있는 터라 다른 걸 먹어도 상관없었다.
“음, 판매용은 아닌데 내가 어제 먹고 싶어 구워 둔 스콘은 있어. 그거라도 몇 개 줄까?”
미야는 턱을 매만지며 짧게 생각하더니 주방 안쪽을 가리켰고 나는 밝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야 좋지. 고마워.
미야가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옅은 갈색 종이봉투를 들고 나왔다. 불룩하게 구겨진 모양새를 보아, 꽤나 큰 것인 게 분명했다. 미야가 건네준 종이봉투를 옆구리에 끼며 지갑을 열자, 그녀가 고개를 강하게 저어 왔다.
“아니야. 선물. 판매용이 아니라 돈 받고는 못 팔아.”
“그럼 커피는?”
지갑과 함께 든 커피잔을 들어 보여줬다. 그러자 미야가 “아!”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왕 공짜로 주는 거 그것도 돈 안 받을래. 그럼 난 마저 구워야 하니까 얼른 가 봐!”
미야가 내게 등을 돌리고는 주방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사라진 그녀의 모습에 손바닥 안쪽을 지갑으로 톡톡 두드리다, 결국 커피값보다 더 많은 돈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 둔 후 조용히 문을 열고 빵집을 나왔다.
딸랑딸랑.
등 뒤로 종소리가 인사를 대신하며 울렸다가 사라졌다.
* * *
“다니엘! 안녕. 오늘도 잘생겼네요.”
안으로 들어서자 라나가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오늘 괜찮나 보네. 라나는 말이 많았지만, 빈말은 못 하는 타입이었다(빌을 볼 때마다 “왔어요?”, “가요.”의 말만 하는 사람이었다. 잘 왔다느니, 안녕히 가라느니 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 못했다). 라나를 향해 습관적으로 웃으며 나 역시 인사를 마주 건넸다.
“네, 라나도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요.”
오렌지 색 티셔츠를 입은 라나는 누가 봐도 상당히 고양되어 보였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자연스레 웃는 모습이 실제로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라나와 나는 마땅한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다가 그 시간이 좀 지나치게 길어졌을 때쯤, 라나가 몸을 돌리는 것으로 그 어색한 순간을 드디어 끝낼 수 있었다.
스콘이 담긴 종이봉투는 책상에 내려놓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어제 꽂아 둔 채도 높은 꽃이 희미한 풋내를 풍겨왔다. 짙은 노랑과 주황은 바랜 부분 없이 주스 병에 꽂혀 아직도 싱싱했다. 자리에 선 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화병을 들어 물을 한 번 갈아주었다. 꽃을 관리하는 방법 따위 몰랐지만 이러면 뭔가 꽃이 오래 살 것 같았다.
겸사겸사 씻고 온 손의 물기를 대강 털어내고 봉지를 집자 황토색 종이 곳곳이 물에 젖어 갈색으로 짙게 변해 너덜너덜해졌다. 빵을 남길 일 없이 모두 먹어 치울 생각이니 상관없었다. 봉투의 입구를 여니 벌써부터 고소한 버터 냄새가 풍겼다.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살짝 차가웠지만 그래도 맛있어 보였다. 계란물이 발려 윤기 나는 표면이 귀여웠다. 미야는 베이킹에 있어 욕심이 많은 터라 이 스콘도 아낌없이 버터를 써 무척이나 맛있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하나를 다 먹어 치운 후 손을 털어내고 인터넷 창을 켜 홍징의 뉴스 사이트로 들어갔다. 라나나 다른 직원들이 무슨 사이트인지 종종 궁금해했지만 답해주지 않았다. 보수성향이 강한 그 사이트 메인에는 현 다양시의 시장이자 휴 사토의 외숙부인 리암 카야노의 얼굴이 화면의 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양시 시장, 리암 카야노, 마약과의 전쟁 선포하다!]
-현 다양시 시장인 리암 카야노(57)가 홍징 내 해이한 마약 규제 실태에 개탄하며 새로운 마약 규제법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다.
리암 카야노는 앞서 얘기했듯 휴 사토의 외삼촌이다. 리암 카야노는 의사 출신으로 과거 다양 보훈병원의 원장이었다. 카야노 같은 사람이 국가에서 지원금을 받는 보훈병원의 원장이었다니, 참. 하여튼 그는 그렇게 다양시에 영향력을 키우고는 결국 시장 선거에 출마해 덜컥 당선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시장도 모자라 차기 대통령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사토의 어머니 쪽 집안인 카야노는 일본의 정통 있는 야쿠자 집안이었다. (범죄 조직이 정통 있다는 말이 웃겼지만, 하여튼 그랬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 사토 가가 홍징에 넘어오던 비슷한 시기에 홍징으로 넘어와 사토 가와 결탁하여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세를 불렸다.
그런 집안의 아들인 리암 카야노의 정의감이 어떻게 될지는 눈에 보이듯 뻔했지만 그런 자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유는, 미나콤이 몸집을 키웠던 방법이 바로 마약 관광이기 때문이었다.
다양시는 시장이 리암 카야노였고 상권의 주축이 휴 사토의 골든 디거 쪽이었다. 즉, 다양은 고담시보다도 황폐하고 막돼먹은 곳이란 소리였다. 고담은 최소한 배트맨이라도 있었지. 다양은 펭귄맨과 조커의 대잔치였다.
그렇지만 다양이 어떻게 되든 내가 알 게 뭔가. 하이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지금 내게는 상관이 없는데. 뒤로 가기를 눌러 다른 뉴스 헤드라인을 살펴보다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해 기사를 누르니 킹이 짓고 있는 호텔에 관련된 글이었다. 그 건물이 알고 보니 해외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그 건축가의 이력은 화려해서 유럽 각 도시와 미국, 캐나다,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에 유명 건축물들을 세웠다고 한다. 저 정도 건축가를 섭외하는 데에 돈이 엄청 들 텐데. 아직까지 돈은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많나 보다.
건물은 지었다가 옮길 수도 없는데, 사토와 카야노가 차지한 다양에서 그 호텔이 망하기라도 하면 어쩔 작정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건물이 거의 다 지어진 것 같다. 그렇지만 큰돈이 오가는 호텔 건축, 더욱이 킹이 짓는 건물에 내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행인 점은 킹은 여전히 바빠 나 같은 건 신경 쓸 틈도 안 나 보였다. 다행이다.
대충 해외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살펴본 후 인터넷 창을 껐다. 원장이 왔기 때문이다. 상사에게 들키지 않게 무심한 얼굴로 인터넷 창을 끄며 동시에 업무 창을 켠 덕에 원장이 딱 내 등 뒤를 지나갈 때 적당히 업무를 보는 척을 할 수 있었다. 원장이 가고도 일에 집중한 척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날 부르는 명랑한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에요. 다니엘!”
얼굴을 본 지 24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에이미는 또다시 같은 인사를 건넸다. 에이미는 어학연수까지 와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귈 생각이 없나 보다, 그녀는 이번에도 이상하게 생긴 꽃다발을 들고 와서는 날 발견하자마자 환히 웃었다. 그녀의 치아에 붙어 있는 은색 교정기가 보였다.
에이미의 주황 단발머리에 꽂혀 있는 알록달록한 똑딱 핀은 딱 에이미 같았다. 어제 그녀가 건넨 꽂다발과도 흡사했다. 그녀는 머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색이 과했지만 옷도 알록달록했다. 절대로 은신술 같은 건 못할 친구였다.
“그래, 안녕. 에이미. 오늘은 또 무슨 일이에요?”
부러 ‘또’를 강조해 발음했지만, 에이미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여전히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리고 갈색이 섞인, 채도 낮은 주황색 포장지에 포장된 이상한 꽃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주러 왔어요.”
에이미가 내민 꽃은 말라 비틀어진 것 같았다. 짙은 주황색이었고 겉은 쪼글쪼글 주름이 잔뜩 가 있었으며, 꽃이라 보기에도 애매했다. 겉이 다 말라비틀어진 작은 감이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나는 에이미의 말이 더 길어질까 봐 그냥 에이미를 향해 고맙다는 듯 웃었다.
“에이미! 이렇게 받기만 해서야. 다음엔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아도 돼.”
“아니에요. 제가 다니엘 주고파서 들고 오는걸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에이미가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오로지 내게 꽃을 주기 위해 온 것인지 후다닥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내가 들고 있는 꽃다발을 발견한 라나가 또 입을 열려고 할 때 나는 라나를 못 본 척하며 담배를 챙겨 바깥으로 나갔다.
사람들을 피해 구석진 곳에 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말없이 한 개비를 피워내다 부족해 두 번째를 입에 물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털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이 작고 가는 흰 막대는 그 무엇보다 빠르고 강한 안정과 그 무엇보다 강한 중독을 제공했다. 킹이 왜 그리도 담배를 피우고, 왜 그리도 교도소 안의 인간들이 이거 하나에 미쳤는지 이제는 알았다. 내가 담배가 없는 곳에 갇힌다면 나도 이제는 담배 한 개비에 200달러를 주고 살지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담배로는 부족했다. 대마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전부였지 아예 놓을 수는 없었다.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이 없어 즐기지는 않았지만, 마시면 머리가 아픈 동시에 웃음이 나오며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편이라 가끔 멈춰 주기 위해 화학 물질을 몸에 집어넣고는 했다. 그런 게 없다면 견디기 힘들었으니까. 아니면 수면제를 먹고 자도 좋겠지. 그래, 둘 다 먹자.
몸을 망치는 위험한 생각을 하며 다 탄 담배를 던지고 한 개비를 더 꺼내는데, 왠지 시선이 느껴졌다. 몸을 굳히며 주변을 둘러보자 회색 벽과 초록색 나무들 틈 사이로 이질적인 주황이 보였다. 익숙한 색이었다. 아까도 본.
“에이미, 거기서 뭐 해요?”
담배를 도로 집어넣으며 물었다. 에이미는 몸을 움찔대다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볼 안쪽을 혀로 훑으며 말없이 바라보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들켰다. 담배 피우는 거 섹시해서 좀 봤어요. 그런 요기 거리라도 있어야 공부를 하죠!”
“내가 요기라는 거예요?”
재밌다는 듯 묻자 에이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다니엘, 인기 많죠? 여기는 좁아서 사람 만나지 않는 거고 밖에 나가면 애인이 줄을 서죠? 막 다니엘 잡으려고 쫓아오는 애인들도 있고 그러죠?”
애인은 아니나 날 잡으려고 쫓는 이는 있었지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내게 다가온 에이미의 머리를 한번 토닥여주려다, 담배 냄새가 짙게 묻은 손을 도로 내렸다. 에이미의 짙은 주황 머리에 담배 냄새가 배는 건 썩 달갑지 않았다. 내 손도 그렇고. 두 발자국 뒷걸음질 치며 손을 바지 주머니로 넣었다.
“그만 들어가 봐요. 공부 열심히 하고.”
에이미는 점차 멀어지는 날 굳이 붙잡지 않았다. 들어가서 손을 씻어 냄새를 없앤 뒤 핸드크림을 두텁게 발라야겠다. 거스러미가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른다.
* * *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던 대로, 집에 가며 술을 한 병 샀다. 투명하고 알코올 냄새만 나는 술이었다. 보드카인지 진인지는 모른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잘 알 생각도 없으니까. 그냥 적당한 병을 들고 나왔을 뿐이다. 오늘 확실히 뇌의 퓨즈를 끊고 싶었다. 투명한 술은 대체로 쓰고 맛없는 대신 도수가 높았다.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문을 열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술을 침대 근처에 둔 채 대강 샤워를 했다.
뚝.
뚝.
제대로 닦지 않은 머리에 맺힌 물이 아래로 떨어져 바닥은 어느새 물로 흥건해졌다. 그러나 물이니 증발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닦아 내지는 않았다. 이걸 닦을 기운도 힘도 없었다. 비척거리며 컵에 물을 잔뜩 담아 침대로 가져가 서랍 위에 올려 두고 첫 번째 칸에서 수면제를 꺼냈다. 몇 알 남지 않은 흰 알약은 먹으면 놀랍도록 금방 잠에 드는, 무척이나 강한 것이었다. 손에 얻기 위해선 의학 면허가 있는 사람의 허가가 필요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불면증이 없었기에 의사에게서 처방받지 않았다. 얻기까지 좀 복잡하긴 했지만 위조 여권도 들고 다니는 마당에 수면제가 대수겠어.
정신을 못 차리게 할 만큼 강한 약이라,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몸을 부풀리고 위협적으로 변할 때에나 먹고는 했다. 오늘은 확실히 정신을 놓고 싶었기에 이것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술을 사 왔다. 몸을 망치기 딱 좋은 방법이란 건 알았지만 그냥 잠을 잔다고 해서 해소되지 못하는걸.
흰 알약 하나를 혀에 올리자, 침에 금세 녹아 쓴맛을 냈다. 물을 들이켜 약을 삼키니, 납작하고 둥근 약은 아무런 이물감도 남기지 못한 채 목구멍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술병을 집었다. 용량이 적은 것을 샀지만 담긴 유리병이 워낙 두꺼워 손목이 아릿할 만큼 무거웠다. 뚜껑은 코르크가 아니라 돌려 여는 식이었다. 술을 잘 마시지 않아 집에는 코르크 오프너가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병을 열자 코를 아프게 할 정도로 강한 알코올 냄새가 풍겨왔다. 으, 벌써 머리가 아팠다. 눈을 딱 감은 후 곧바로 병 입구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곧바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으, 존나 맛없다.”
액체로 된 불이 내 입에서부터 위까지 달려 내려가는 듯했다. 홧홧하고 불쾌한 알코올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끔찍했다. 입에 소독약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이런 걸 어떻게 맛있다고 마시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른 물컵을 집어 입을 헹궈 내니, 알코올 향은 물에 씻겨 내 위로 내려갔다. 하.
술과 약 기운이 오르기 전에 잔뜩 마셨던 물을 화장실에 가 억지로 비워냈다. 그리고 아직도 축축한 머리를 베개에 대고 누웠다. 팔로 눈을 가려 누운 지 몇 초나 지났을까 나는 내가 잠들었다는 자각도 없이 금방 저 아래 검고 진득한 곳으로 떨어졌다.
* * *
꿈을 꿨다. 정체 모를 뜨겁고 큰 손이 날 만졌고 코끝으론 매운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꿈에서 후각을 느낄 수 있던가? 아아, 이건 묻혀 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지금 느끼는 것이 아니다. 기억해 낸 것이지. 그때의 냄새다. 매운 냄새는 짙은 페퍼민트 향과 독한 담배 냄새가 섞여 만들어 낸 것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 냄새와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킹…….’
작게 중얼거리자, 까맣기만 하여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 얼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허니.’
킹은 내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내 이름을 알면서도 날 놀리며 온갖 꽃 이름으로 날 불러 댔고 그 후엔 ‘허니’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날 불렀다.
허니.
반년 정도 내 이름처럼 불리던 것이다. 너무 달콤하고 낯간지럽지만 킹과 나의 사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제 내 인생에 킹은 없어.’
나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아니, 생각이라고 해야 맞을까?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니. 그 검은 몸은 갑자기 몸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공포와 긴장으로 인한 떨림은 아니었다. 그저,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몸을 진동하는 것이었다.
‘크, 크크큭!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넌 내 거잖아.’
마지막에 들었던 그 흉포한 웃음과 함께 그림자가 쏟아냈다.
나는 네 것이 아니야. 너는 우리의 계약을 지키지 못했어. 나는 아팠고 넌 날 지키지 못했지.
새끼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꿈속이라 그런지, 아니면 내가 고장 난 탓인지 꼼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 생각을 끝으로 그림자는 연기처럼 흩어졌고 나는 다시 검은 공간에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 * *
“악!”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수면제와 술을 들이켠 탓이리라. 무슨 꿈을 꿨던 것 같기도 했는데 머리가 아파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일어나자 어지러운 감각에, 침대에 다시 엎드려 한참을 끙끙대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할 수 있었다.
비척대며 욕실로 들어갔다 한 번 넘어질 뻔한 후에야 다리에 힘을 주고 섰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니 그나마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거울에 비친 낯은 참으로 피곤해 보였다. 푹 패인 눈 밑 아래를 꾹꾹 눌렀다. 이제 잘생긴 것도 끝났나 보다. 아쉬웠지만 그러면 내 얼굴을 본 킹이 날 미련 없이 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오히려 화나서 찌를 수도 있다. 킹은 미친 새끼니까.
속이 쓰리고 배가 고파 냉장고를 열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이럴 거면 냉장고 전원을 뽑아 두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귀찮아 그냥 문을 닫기만 했다. 오늘도 미야의 빵집에 가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젖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헤어드라이어를 집어 올렸다.
계획대로 미야의 빵집에 들르고 빵과 커피를 산 뒤 출근했다. 오늘 산 빵은 크루아상 두 개였다. 커피는 늘 마시던 것과 같다. 빵을 오래 고르느라(미야의 빵은 늘 먹음직스러웠고 실제로도 맛있었으니까 고르는 게 쉽지 않았다.) 출근 시간 직전에야 직장에 도착했다. 나보다 늦으면 지각이 분명한데, 안에는 있어야 할 한 명이 보이지 않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라나를 향해 물었다.
“빌은 어디 갔어요?”
그러자 라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 난다는 뜻이었다.
“바빠 죽겠는데 갑자기 사표 냈어요.”
“아니, 왜요? 휴가 가느라 돈 다 썼다고 이제 미친 듯이 일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몰타와 하이투는 멀어 항공편도 비싼 데다가 하이투는 물가가 제법 비싼 편이었다. 더욱이 빌이 마약 관광을 했다면 들어간 돈은 다른 여행지에 비해 몇 배는 됐을 것이다. 빌은 부유한 편이 아니었고 그렇다면 이제부터 열심히 달려야 했다. 라나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농처럼 던졌다.
“복권이라도 당첨됐나 보죠.”
진짜면 너무 부럽네……. 진짜이려나? 그게 아니면 일을 이렇게 갑자기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억만금에 당첨된 빌을 상상하다 배가 아파와 그냥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유가 뭐든 갑작스러운 빌의 퇴사로 라나와 내 일이 늘었다는 것만은 자명했고 그것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빌의 일을 넘겨받은 탓에 평소처럼 농땡이도 피우지 못하고, 점심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일만 해댔다. 중간에 놀 시간도, 담배를 피울 짬도 나지 않았다. 식사를 하고 오라며 어깨를 흔드는 라나의 말에 겨우 고개를 들어 정신을 차렸을 뿐이었다.
허기도 느끼지 못한 채 식사를 하고 딸기 맛 캔디를 입 안에서 굴리며 다시 직장으로 들어오는데 라나가 날 불렀다.
“다니엘! 이거 에이미가 놓고 갔어요.”
라나가 나를 보며 잔뜩 재밌다는 듯 실실대고 있었다. 아아. 에이미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몰라도, 미성년자가 아니긴 하데요? 성인이래도 관심은 없지만.
라나는 빨리 오라는 듯 내 책상을 가리키며 손짓했지만 나는 부러 천천히 걸었다. 대체 뭘 놓고 갔길래 저러지. 보고 싶어도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하며 자리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놓인 낯선 것이 보였다. 페퍼민트 화분이었다.
“갑자기? 이걸?”
오랜만에 보는 생 페퍼민트였다. 얇은 플라스틱 화분에 담겨 쭈글쭈글하고 푸릇푸릇한 잎을 자랑하고 있는 페퍼민트 화분은 앙증맞았고 화분에 리본이 둘려 있어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꽃다발을 주다가 왜 갑자기 화분을? 굳이 내게 꼭, 페퍼민트를 줘야 했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내게 왜 페퍼민트를? 당황해서 중얼거리자 아직 떠나지 않고 내 옆에 있던 라나가 덧붙였다.
“너무 귀엽지 않아요? 꽃이랑 허브 화분으로 마음을 전하는 여자아이의 마음! 크! 아, 맞다. 에이미가 곧 오랜만에 볼 거라고 전해 달래요. 이따가 오냐고 물어보니까 그건 아니래요. 그래서 뭔 말인지는 모르겠어요.”
사탕을 굴리던 혀를 멈췄다. 혀에 느껴지는 과한 달콤함이 내 몸과 뇌 전체를 스치는 것 같았다. 손이 떨려왔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가오는지 머리는 몰랐지만 내 몸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책상에 손을 댄 뒤 몸을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라나가 아프냐고 물어왔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꾹 눌렀다. 그 와중에 왼손 새끼손가락은 여전히 멈춰 굳어 있었다. 인터넷 창을 켜 잠시 머뭇대다가 주스 병에 꽂힌 화려한 꽃을 바라보았다. 아직 너무나 싱싱했다.
그 꽃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에이미가 의아한 듯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다니엘, 왜 그래요? 무슨 문제 있어요?”
“…라나, 이거 무슨 꽃인지 알아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올 것 같았다. 침을 삼키고 작게 한숨을 내쉰 후에야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이상한 내 반응에 라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음…….” 하는 소릴 내더니 뭔가 깨달은 듯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거 메리 골드 같은데. 검색해봐요. 딱 메리 골드야. 이 꽃이랑 같은 사진 나올 거예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양손을 한번 쥐었다가 풀었다. 허무맹랑한 생각인 건 알았지만 긴장이 됐다. 하지만 결국 내 괴이한 예감이 들어맞을 것 같았다.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한참 머뭇대다, 떨림이 조금 잦아들 때쯤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메리 골드]
라나의 답을 검색창에 그대로 타이핑하고 검색 버튼을 누르니 책상에 꽂혀 있는 것과 같은 꽃들이 주르륵 화면을 가득 채웠다. 꽃밭 같은 화면에도 얼굴을 찡그린 채 스크롤을 내리던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몸을 굳혔다. 내 옆에 있던 라나는 자신이 답을 맞혔다고 옆에서 고음으로 기뻐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메리 골드의 사진과 함께 떠 있는 꽃말을 보았기 때문이다.
[메리 골드의 꽃말: 이별의 슬픔, 헤어진 사람에게 보내는 마음.]
“씹…….”
욕이 나오려는 걸 겨우 삼켰다. 라나가 나오다 만 내 음성을 듣고 “뭐라구요?”라며 내 귀 옆에서 얘기했지만 그녀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았다. 떨려오는 손가락이 톡, 톡, 톡 책상을 두드렸다. 그리고 겨우 손가락을 들어 메리 골드 꽃병 옆에 놓인, 에이미의 두 번째 선물을 가리켰다. 짙은 주황색에 쪼그라든 감 같이 생긴 꽃다발을 말이다. 그러자 라나는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길게 “음…….”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묻지 않았음에도 제멋대로 신나게 답했다.
“아, 이거는 꽈리! 이거는 진짜 확신해요. 특이하게 생겨서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름도 괴상했다. 맘이 급해져 오타를 여러 번 낸 후에, 겨우 올바르게 검색하자 모니터 가득 꽈리의 사진이 떴고 드르륵, 화면을 내리자 그 꽃말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실망]
“하.”
이게 내게 꽃을 보낸 자가 하고 싶은 말이겠지. 그렇지, 킹?
‘나는 너와 이별해서 몹시 슬프고 너에게 실망했다.’
언제 이렇게 낭만적이게 됐나? 하, 쓸데없이 로맨틱하게 변했네, 킹. 아니, 킹은 쓸데없이 유치한 구석이 있었다. 잘생긴 킹의 얼굴을 떠올렸다. 웃는 표정이었던 그 낯은 점차 마지막으로 보았던 흉포한 얼굴로 변했다. 킹은 내가 여기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에이미가 온 지 1주가 넘었으니 최소 그때부터는 알고 있던 것이다.
3년 넘게 아무 짓도 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야. 킹이 날 잊은 줄 알았다. 아니면 너무 바빠서 나같이 하찮은 사람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씨발. 그냥 나타나든가, 이렇게 음흉하게. 혼자 낄낄대며 좋아했겠지? 유치하고 치졸했다.
마지막으로 받은 페퍼민트 화분을 바라보았다. 페퍼민트의 작고 앙증맞은 진초록색 잎이 원망스러웠다. 코 밑으로 풍기는 풋내 섞인 상쾌한 향이 내 몸에서 풍기는 담배 냄새와 섞여 익숙한 냄새를 만들어 냈다.
씨발. 킹. 킹 미나콤. 날 어쩔 셈이지? 도서관에서 내 손바닥을 핥아 올리던 킹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때 킹이 내뱉은 경고가 녹음테이프를 틀 듯 들려왔다.
‘난 말야, 한 번 내 것이 된 거는 망가질 때까지도 내 거거든. 난 집착이 심해. 사람도 예외 없이.’
인터넷 창을 끄고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킹은 이제 와 내가 자신의 것이라는 증명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자신을 찔리게 했던 것처럼 날 찌르려는 것일까? 왠지 후자일 것 같았다. 킹과 나는 언뜻 연인 관계처럼 보였지만 킹은 반년 넘게 내 위에서 날 갖고 놀았고 나는 킹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우리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었고, 다시 누군가의 아래인 위치로 가고 싶지 않았다.
“라나, 나 잠시 나갔다 올게요.”
지갑과 핸드폰, 가방을 챙겼다. 라나가 등 뒤에서 날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대답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건물 밖으로 나가 문 앞에 잠시 멈춰서 생각했다. 그리고 금방 결정을 내린 뒤 택시를 잡았다. 백인 중년 남자가 내게 인사를 건넸지만 답할 수 없었다. 내가 눈에 띄게 굳은 표정이자 백인 남자는 넉살 좋게 걸었던 인사를 물리고 이내 자신의 앞만 바라봤다. 택시에서 휴대폰으로 아까 미처 검색하지 못한 페퍼민트의 꽃말을 검색해봤다.
[다시 사랑하고 싶습니다.]
씨발, 미친놈. 입 밖으로 웃음이 주체할 수 없이 나왔고 백인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날 힐끔대며 이상하게 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웃음이 멎은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에게 말했다.
“공항으로 가 주세요.”